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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신학의 몇 가지 주제들

이창무 2015. 5. 1.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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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신학의 몇 가지 주제들



신학 사조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성경관에 따라 신학 사조는 크게 넷으로 분류된다.

1) 자유주의 : 자유주의는 성경을 역사에 종속된 것으로 본다. 성경의 기원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다. 낭만주의나 칸트의 인식론의 영향을 받았다.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을 비평적(혹은 파괴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대표적인 학자로 슐라이에마허가 있다.

2) 신정통주의 : 신정통주의는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인정하나 계시 그 자체는 아니라고 본다. 성경은 계시를 담고 있는 증거의 책으로 본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대표적인 학자로 칼 바르트가 있다.

3) 복음주의 : 성경을 영감된 계시이며 오류가 없는 유일한 절대적 표준으로 본다. 그러나 성경의 여러 메시지 중에서 이신칭의의 복음을 가장 중요시한다는 특징이 있다. 대표적인 학자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있다.

4) 개혁주의 : 개혁주의는 복음주의 성경관에 동의한다. 그러나 복음주의가 멈춘 곳에서 개혁주의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제도, 예배, 시민으로서의 삶 등 모든 것이 성경대로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가장 철두철미한 성경관을 가진 것이 개혁주의이다. 대표적인 학자로 존 칼빈이 있다.

자유주의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자유주의에 영향을 준 낭만주의는 지독한 인본주의이다. 헤르더 같은 낭만주의자는 인간이 우주의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주장한다. 다음으로 자유주의에 영향을 준 것은 칸트의 철학적 인식론이다. 영국의 경험주의와 대륙의 합리주의가 인식론 문제에 있어서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이 두 사조를 통합한 것이 칸트의 인식론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초월을 앎의 영역에서 제거시키고 오직 현상만을 앎의 영역으로 제한하였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을 통해서는 도덕적 신존재 증명을 시도하여 가장 도덕적인 존재가 인간에게 도덕적인 명령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칸트의 인식론은 이후 합리적 실증적 학문관의 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합리적 실증적 학문관에 따른 신학이 바로 자유주의이다.

자유주의자는 성경을 역사적 사실로 보지 않는다. 역사적 예수와 성경의 예수 즉 케리그마의 예수와는 서로 다르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결국 불트만의 비신화화 또는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흐름으로 이어지게 된다. 자유주의자들의 성경 접근 방식은 흔히 양식 비평, 편집 비평이란 방식을 취하게 된다. 자유주의는 한 마디로 매우 교만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사람의 책이 아니다. 또한 신학의 존재 원리도 주체도 모두 하나님이시지 사람이 아니다.

신학이란 무엇인가?

신학이란 인간이 이성과 경험으로 성경을 탐구하여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고 얻게 된 지식을 체계적으로 학문적으로 진술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신학 이해는 자유주의적 혹은 인본주의적 신학 이해이다. 신학이란 본래 신들에 관한 언설이라는 의미를 어원적으로 갖고 있다. 이 신학을 바라보는 관점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체는 인간은 방법은 이성과 경험이며 하나님의 객체가 된다. 이를 밑으로부터 신학이라고 부르며 펠라기우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자유주의가 걸어 간 방법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방법은 성령과 믿음이 된다. 이를 위로부터 신학이라고 하며 어거스틴, 둔스 스코투스, 개혁주의가 걸어 간 방법이다. 신학의 두 축은 하나님과 인간인데 신학의 출발점은 하나님이지 인간이 아니다. 신학이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를 적용하는 것이다.

계시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다 알 수 없는 분이시며 감추어진 분이시며 도달할 수 없는 초월에 영역에 계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 간격을 좁힐 수 없다. 이 간격을 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적응, 즉 하나님께서 자기를 낮추셔서 인간 편에 맞추어 주셔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적응하신 결과가 바로 계시이다. 신학은 이 계시를 중심으로 한다. 계시는 믿음과 성령으로만 알게 된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인식론이다. 이는 신학이 합리적 실증적 학문이라는 주장에 반대한다.

성경은 인간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다만 성경은 믿음으로 성경을 받아 들이는 자에게 계시가 된다. 여기서부터 신학은 출발한다. 성경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은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어 오류가 없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영감되었다는 말은 유기적 방법으로 완전하게(혹은 축자적으로) 영감되었음을 믿는다는 말이다. 개혁주의는 성경의 기계적 영감이나 부분 영감(사상 영감)을 배격한다. 또한 성경은 오류가 없으며 충분하고 완전하고 명료하고 최종적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1권은 창조주로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 2권은 구속주로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다루고 있다. 이를 가리켜 하나님에 대한 이중적 지식이라고 했다. 에드워드 다우니는 칼빈주의의 핵심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겸손과 경건이다. 교만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자유주의나 인본주의는 교만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이를 수 없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은 그래서 긴밀하게 연결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피조물이며 타락하였으며 무능력한 상태 가운데 있으며 심판과 정죄 아래에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한계와 비참 가운데 있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에 대해 이런 인식을 갖게 될 때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고 감사와 헌신, 사랑으로 이끌려 가게 된다. 여기서 인간의 경건이 형성된다. 그런데 인간이 이런 인식에 도달하려면 그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현대 성경 신학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현대 성경 신학은 가블러나 바우어 같은 신학자들에 의해 정립되었다. 그들은 성경을 역사적 배경 속에서 저자가 어떻게 성경을 이해했는가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들에게 성경은 역사의 산물이며 인간의 저작물이다. 이를 역사 비평적 방법이라 한다. 그들은 신약과 구약의 통일성에 반대하며 신구약의 통일성을 신학적 편견으로 간주한다. 이들의 주장은 결국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보는 관점을 현저하게 약화시킬 수 밖에 없다. 이는 그들이 성경의 기원을 인간으로 보고 성경의 권위를 인간의 이성 아래 종속시키기 때문이다.

성경은 무엇인가?

성경은 영감된 계시이다. 성경은 역사 속에 기록되었으나 역사에 종속되지 않는 무시간적 진리이다. 성경은 인간이 기록했지만 인간이 저자가 아니라 신적 기원을 갖는다. 성경의 권위는 이성 위에 있다. 성경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뜻 즉 계시이다. 신학은 성경 밖에 사색과 추론에 반대한다. 성경을 참되게 믿으면 표적이 따른다. 그러나 성경 없이 표적만 따른다면 미신이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과 교회들에게 표적을 주셨다. 성경은 위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신령하며 그 안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풍성함을 믿는다.

올바른 신학 방법론은 무엇인가?

개혁주의는 이성과 경험뿐 아니라 성령과 믿음, 일반 계시뿐 아니라 특별 계시를 신학함의 방법론으로 삼는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오직 이성과 경험, 일반 계시의 영역만을 받아들이려 한다. 그들은 이 세상을 인과율의 법칙에 지배되는 세상으로 보며 보편적 실증적 의미를 중요시한다. 개혁주의와 복음주의도 신학 방법론이 약간은 상이하다. 루터는 인간론에서 출발하여 칭의와 구원에 이르렀다면 칼빈은 신론에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에 이르렀다.

성경의 주제는 무엇인가?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나타내신 뜻이 담겨 있는데 이를 계시라고 한다. 그 계시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다만 그 조건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이심을 믿는 것을 요구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성부께서 성자에게 주신 생명이며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은 충만한 생명의 교제 가운데 계시다. 반면 이런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신학 사조도 있다. 현대의 열린 신학 , 과정 신학이 그런 것들이다. 이런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의 시간을 같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큰 잘못을 범하고 있다.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 가운데 계시는 분이시지 인간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전하는 존재가 아니시다.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성부는 낳으시고 성자는 낳아지시고 성령은 나오시는 분이시다. 이렇게 한 분 하나님 안에서 구별되는 삼위의 존재 방식을 내재적 삼위일체라고 부른다. 내재적 삼위일체의 관계를 상관적 통일성 페리코레시스라고 부른다. 이 삼위가 나타나서 일하심을 경륜적 삼위일체라고 부른다. 성부는 숨겨진 보이지 않는 분으로서 의지를 갖고 계시며 모든 것의 기원, 시작, 원천이 되신다. 성자는 성부를 드러내시며 계획하시고 지혜와 말씀이 되신다. 성령은 성자의 사역을 효과 있게 하시며 보존하고 생명을 주며 활력 있게 하시며 능력이시다. 삼위는 섞이지 않고 나뉘어지지 않고 분리되지 않으시나 구별되신다. 삼위 하나님은 성부의 뜻 안에서 성자의 지혜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온 세상에는 삼위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찬송이 가득 차 있다.

예정이란 무엇인가?

예정이란 내재적 삼위일체 영역 안에서 우리 구원에 관해 삼위 사이에서 맺어진 영원한 협약을 말한다. 성부의 뜻은 영원하고 불변하고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뜻이다. 성자는 선택한 자들의 머리가 되신다. 성령은 선택의 보증이 되신다. 개혁주의에서는 이 예정을 선택과 유기의 이중 예정으로 본다.

일반 계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피조 세계 속에서는 삼위 하나님의 관계와 질서가 나타나 있다. 피조 세계 속에서는 성자가 보이시며 이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관계와 질서는 다른 말로 하면 곧 법이며 계명이며 하나님의 의이다. 성부의 뜻은 의는 영생으로, 불의는 죽음으로 정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행위언약이다. 일반 계시 가운데 창조주,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과 뜻이 나타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실체이며 피조된 세계는 그 모형이다. 에덴 동산에 있었던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준 일종의 성례였던 것이다.

인과론적 모델이란 무엇인가?

초월 영역에 있는 절대주권이 인간의 책임 영역에 있는 역사를 지배하고 결정한다는 모델이다. 세상 창조, 인간 창조, 인간 타락, 구주의 오심, 부르심, 견인이 이미 예정되어 있고 그 예정에 따라 창조, 타락, 구속의 역사가 실제로 일어나게 된다. 이 모델 안에는 타락전 예정설과 타락후 예정설 두 가지가 있다. 타락전 예정설은 인간의 타락 이전에 이미 예정이 이뤄져 있다는 견해로 하이퍼(초) 캘빈주의의 입장이기도 한다. 타락후 예정설은 인간의 타락 이후 예정이 있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어느 견해를 취하든 오직 택자만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점에서 구원에 있어서는 아무 차이가 없다. 이 모델에서 구원의 확신은 오직 선택에서만 찾을 수 있다. 칼빈의 제자 베자가 기초한 신학이며 16,17 세기 화란 개혁 교회를 지배한 신학이다. 이 모델의 특징은 이원론적 경향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복음이 복음이 되지 않고 역사가 무화된다는 문제가 있다.

인격적 모델이란 무엇인가?

인격적 모델은 아르미안주의라고 불린다. 인간의 책임 영역 속에 있는 역사가 초월 영역에 속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결정한다는 주장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다만 미리 아심일 뿐이고 결정은 인간이 한다고 본다. 이들은 인간의 원죄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타락과 동시에 선행 은총이 임했다고 주장한다. 선행 은총 덕분에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게 되어 거부나 수락의 선택아 가능하다고 본다. 신인 협력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르미안주의에서는 보편 구속을 믿는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다고 본다. 인간의 전적 타락을 부정하고 부분 타락을 인정한다. 선택은 조건적이며 은혜는 거부할 수 있다. 이 모델에서는 인간의 책임이 잘 살아났다. 그러나 이 견해는 하나님의 주권을 심각하게 손상시키는 문제점이 있다. 도르트 종교회의에서 아르미안 주의는 거부되었고 그 결과 도르트 신경이 탄생하였다.

예정과 복음은 어떻게 병립할 수 있는가?

칼빈주의에서는 선택의 증거를 이중적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찾는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이지만 숨겨진 뜻과 나타난 뜻으로 구별되어 나타나며 이 둘은 다르지만 서로 충돌하지는 않는다. 이는 내재적 삼위 일체 관계에서 살펴 본 페리코레시스와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즉 하나님의 뜻은 혼동되거나 나뉘거나 섞이거나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구별될 뿐이다. 여기서 숨겨진 뜻이 선택과 유기의 예정이다. 인간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작정을 적용한 것이 예정이다. 창세 전에 이미 어떤 사람은 구원으로 어떤 사람으로 버림 받음으로 정해져 있다. 이 예정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근거하고 있다. 이 숨겨진 뜻은 영원하고 불변하고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우연은 없다. 반면 나타난 뜻은 복음이다. 복음은 가변적이고 조건적이며 점진적이며 상대적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맞추어서(적응하여서) 나타난 뜻이다.

선택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감리교에서는 신자의 완전 성화를 선택의 증거로 본다. 감리교에서는 칭의와 성화 사이에 긴장이 존재한다. 감리교를 칭하여 씨름하는 야곱같다는 말은 여기서 온 것이다. 반면 오순절 교단에서는 방언을 선택의 증거로 본다. 오순절에서는 방언이 성화의 증거이며, 2차적 성령 세례이며, 능력의 덧입혀짐이며 성령의 늦은 비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오순절주의자들은 구원의 확신을 성령 체험에 두고 있기 때문에 열광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의 확신이 떨어지고 만다. 개혁주의에서는 하나님의 선택이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이로부터 도덕적 방임주의 혹은 율법주의로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이 발생한다. 장로교 신자가 실질적으로 감리교 신자가 된다는 주장도 있다. 왜냐하면 결국 자신의 성화에서 구원의 증거를 얻으려고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초월 영역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과 현상 영역에 있는 인간의 책임을 하나의 논리적 영역 체계 안에 놓고 이성적으로 추론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있기 때문이다. 중세 철학에서는 초월이 실재로 존재하느냐 아니냐를 놓고 유명론과 실재론으로 나뉘었다. 실재론은 다시 초월이 현상보다 우월하다는 둔스 스코투스의 스코티즘과 현상이 초월보다 우월하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토미즘으로 나뉘어졌다. 존 칼빈은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존 칼빈은 이러한 딜레마를 페리코레시스로 해결하고 이를 위해 언약 사상을 활용하였다. 칼빈은 어느 한 쪽을 말하지 않고 양 쪽 모두를 말했다. 하나님과 인간의 영역을 구별해야 한다. 이 관계는 이성적으로 조화시킬 수 없다. 다만 페리코레시스의 원리에 따라 오직 신앙과 성령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

첫째로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얻는다고 견해가 있는데 어거스틴과 개혁주의와 장로교의 견해이다. 인간의 전적 타락과 무능과 부패과 원죄를 인정한다. 둘째로 인간의 노력에 의해 구원 얻는다는 견해가 있는데 펠라기우스주의가 대표적이다. 여기서는 죄가 본성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본다. 즉 윈죄를 부정한다. 죄의 보편성에 대해서는 모방설을 제시하며 은혜의 필요성도 부정한다. 셋째로 신인협력에 의해 구원을 얻는다는 견해로서 반펠라기우스주의, 감리교, 카톨릭의 견해가 여기에 속한다.

반펠라기우스주의에 속하는 아퀴나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의지는 중립적이며 육체에 굴복할 수도 지성을 따라 순종할 수 있다고 본다. 의지가 어디로 기울어지느냐에 따라 선과 악이 결정된다. 그 결과 선이 쌓이면 의가 되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주장이다. 그는 타락의 결과 인간은 모양은 상실했지만 형상은 유지하고 있다고 본다. 의지가 감성과 육체를 따르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주의가 여기에서 나오게 되었다. 또한 타락한 이후에도 인간은 자신의 지성과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자연신학도 나오게 되었다. 선을 쌓아 구원의 공로를 이루다는 공적 축적설, 남에게 나눌 정도로 공로를 쌓은 성인을 숭배하는 성인 숭배설, 은총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교황에 있다는 교황주의 등이 모두 반펠라기우스적인 견해(혹은 신인협력설)로부터 파생하게 된 것들이다. 감리교는 타락으로 인한 전적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카톨릭과 다르다. 그러나 타락 즉시 주어진 선행 은총으로 말미암아 자유의지가 주어졌고 자유의지에 따라 은총에 거부 혹은 협력이 가능하다고 본다. 은총에 협력하여 칭의에 이르고 완전 성화에까지 다다르게 된다는 감리교의 구원관을 복음적 신인협력설이라고 부른다.

반면 개혁교회는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 원의가 있었으며 더 높은 차원의 완전함 즉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에까지 도달할 수 있었으나 타락 이후 이 원의를 상실했다고 본다. 그 결과 영혼의 건전함과 존재의 거룩함을 잃어 버렸다. 예수 그리스도는 재창조 역사를 통해 영혼의 건전함을 회복하시며 칭의와 성화를 통해 존재의 거룩함을 회복시키시는 분이시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과 육체의 생명과 모두 관계하는 존재이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있을 때 생령이 된다. 생명은 관계이다. 죽음은 분리이다. 그런데 분리를 일으키는 것이 죄다. 하나님과 영혼이 분리되면 영적 죽음이다. 영과 육이 분리되면 육적 죽음이다. 개혁 교회는 영혼수면설이나 영혼멸절설은 반대한다. 구원 받은 신자의 영혼은 죽음 이후 낙원에 머무르는 중간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개혁교회는 또한 영, 혼, 육의 삼분설을 부정한다. 이 세 가지는 상호 교차적으로 쓰이는 동일한 실체이다. 다만 영혼이 하나님과 관계할 때는 영으로 육체와 관계할 때는 혼으로 쓰이기도 하나 이는 별개의 실체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타락의 결과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중에서 형식적 형상은 그대로 남아 있으나 실질적 형상은 잃어 버렸다. 성령으로 거듭난 인간에게는 새창조의 역사가 종말론적으로 실현된다.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의의 통치, 영생은 이미 거듭난 신자 안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세상을 어떻게 통치하시는가?

성부는 성자를 통해서 성령으로 통치하신다. 통치의 원리는 사랑과 의이다. 용서와 인내로 사랑을, 심판과 정죄로 의를 드러내신다. 하나님은 세상에 자신을 알리시고 부르시고 계시다. 그러나 인간은 교만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인간은 핑계할 수 없다. 하나님은 죄성을 억제하도록 양심을 인간에게 두셨다. 인간이 죄를 피하는 이유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과 선을 행하는 이유는 보상을 바라는 이기심 때문이다. 여기서는 교정이 아니라 억제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거듭난 신자는 감사와 사랑으로 의를 사모함으로 죄를 멀리하고 의를 행하게 된다. 신자는 새사람을 입기 때문에 죄에 민감해 지고 의를 사모하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그리스도는 삼위 일체 하나님 중에 제 2 위의 성자 하나님이시다. 성자는 성부에게서 낳아지심으로 성부의 성자로서 존재하신다. 여기서 낳아지심이란 시간적 의미가 아니다. 성부와 성자의 신성은 동등하다. 그리스도는 계시의 중심이다. 성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계시가 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이시다. 성부의 뜻에 따라 창조의 관계를 질서있게 배열하신 분이 그리스도시다. 모든 피조물들은 성자 안에 서 있다. 창조 세계 안에 성자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있다. 성자 안에 생명이 사람들에게 빛으로 보여진다. 또한 율법 안에는 성자가 보인다. 성자는 율법의 시여자이시다. 율법은 죄를 꺠닫도록 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불러 일으키며 성화를 이룬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논란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리스도는 피조물들이 심판의 무게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이셔야 하며, 사람의 죄를 속해야 하기 때문에 인간이어야만 한다. 유대교적 단일신론에서는 성자의 신성을 부정한다. 인간이나 하나님께 입양되었다고 주장한다. 동력적 단일신론이라고 부르며 에비온파가 대표적이다.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한다. 가현설론자나 영지주의와 유사하다. 육체를 악하다고 보며 신구약의 통일성을 부정한다. 성부수난설로 불리기도 한다. 이레니우스가 이에 대항하여 신구약 동일성을 주창하며 언약 사상으로 방어하였다.

속사도 시대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말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인간성에서 출발해 신성으로 향해가는 밑으로부터 기독론이 성령 기독론과 위로부터의 기독론인 말씀 기독론으로 갈라진다. 밑으로부터 기독론은 결과적으로 자유주의나 불트만의 비신화화 같은 사조와 연결되었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약화시켰다. 성자가 시간 안에서 성부에게 낳아지셨다고 본 것이다. 성자는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으며 첫번째 피조물이며 피조된 신성이며 유사 신적 본성을 가지신 분으로서 성부에 비해 열등하다고 보았다. 이에 대항하여 교회는 니케아 신경으로 아리우스 이단을 정죄하였다. 아폴리나리우스는 반대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약화시켰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은 하나님이며 혼과 육은 인간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인간의 영이 없는 인간은 진정한 인간이 아니라는 비판을 받았다.

네스토리우스는 양성의 분리를 주장했다. 그리스도는 두 본성과 두 인격을 가지신 분이 된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의 통일성이 파괴된다는 비판을 받아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유티케스는 두 본성의 혼합을 주장하였다. 한 인격 한 본성을 말했는데 그에 대한 비판으로 칼케돈 신조가 탄생하였다 칼케돈 신조에 따르면 두 본성은 섞이지도 혼동되지도 나뉘지도 분리되지도 않으나 구별될 뿐이다. 이 역시 상관적 통일성 즉 페리코레시스에 의해서 설명될 수 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 케노시스 교리는 결코 신성의 포기가 아니라 다만 신성의 제한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신성을 제한하신 까닭은 다만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

대표 원리란 무엇인가?

아담은 행위 언약 안에서 모든 인류를 대표한다. 그리스도는 은혜 언약 안에서 모든 믿는 자를 대표한다. 그래서 아담의 죄는 온 인류에게 전가되었다.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고 그리스도의 의는 모든 믿는 자에게 전가되었다. 의의 전가가 일어날 때 실제적으로 의가 주입되는가 혹은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되는 것 뿐인가에 따라 실제론과 의지론이 나뉜다. 정통적인 견해는 의지론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사람이시기 때문에 사람을 대표하여 대속 사역을 감당하실 수 있었다. 대속 사역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만족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행위언약과 자연법 하에 있는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있다. 은혜 언약과 율법과 복음 하에 있는 교회 안에 사랑과 공의가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 있다. 구속 언약과 예정 아래 있는 하나님 나라에도 역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선택 받은 자들에게 나타나 있다.

언약이란 무엇인가?

언약이란 개혁주의가 개혁주의가 되게 하는 요체이다. 개혁주의는 곧 언약신학이다. 언약은 매우 성경적인 단어이다. 성경은 언약의 책이다. 언약 사상이 신구약 성경의 통일성을 부여하며 성경 해석의 열쇠가 된다. 언약이란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과 맺으시는 관계이다. 하나님은 철학적, 사색적, 초월적 존재로 남아 계신 분이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내재적이시며 인격적인 분이시다. 언약 관계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사람에게 오심으로 시작된다. 하나님의 적응의 결과가 계시이듯이 언약도 마찬가지이다. 언약은 계시의 통로이자 수단이다. 또한 언약은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지혜와 능력인 섭리의 수단이기도 하다. 언약 사상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숨겨진 뜻과 세상 속에서 나타난 뜻이 조화를 이룬다. 이 언약 관계 속에서 두 당사자는 대등한 관계가 되며 서로 매이는 법적 관계가 된다.

행위언약과 은혜 언약이란 무엇인가?

행위 언약이란 순종하면 영생을 불순종하면 죽음의 벌을 내리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말한다. 아담은 온 인류의 대표로 하나님과 행위 언약을 맺었다. 하나님은 이 행위 언약 하에서 인간을 기다리고 계시고 동시에 심판 아래 가두어 두고 계시다. 반면 은혜 언약인 복음은 믿으면 영생과 죄용서와 칭의를 얻을 것을 약속하며 불신앙은 죽음으로 향하게 될 것을 경고한다. 믿음은 인간의 의지적 결정이면서 또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이란 나타난 뜻 가운데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보는 것이다. 행위 언약은 아담이 모든 인류의 대표로서 원죄라는 결과를 낳았다. 은혜 언약는 그리스도가 모든 믿는 자의 대표로 나타나며 칭의의 결과를 낳았다.

세상과 교회와 하나님 나라는 어떤 관계 가운데 있는가?

하나님 나라는 내재적 삼위 일체의 영역이다. 초월의 영역이며 여기에는 예정된 하나님의 뜻이 감추어져 있다. 세상은 경륜적 삼위 일체의 영역이다. 역사와 현상의 영역이며 여기에는 나타난 복음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다. 교회는 이 중간에 위치하면서 하나님 나라와 세상을 잇고 있다. 교회는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안 된다. 교회는 외적으로 보일 뿐이다. 교회 안에서 누가 택자인지는 알 수 없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제도적, 지상적, 전투적 교회로 존재한다. 복음은 하늘에서 내려 오신 분이 직접 전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진실된 택자는 자기 책임을 다하면서도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는다. 언약을 믿는 언약 백성들이 권리 주장하는 것이 바로 기도이다. 선택과 예정은 결과로서 언급되어져야 하며 복음 전파할 때는 오직 나타난 뜻, 보이는 뜻으로 전해야 한다.

일반 은총이란 무엇인가?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등의 화란 개혁주의자들은 유지되는 행위 언약으로서 일반 은총에 대한 강조하였다. 불신자들의 문화 행위도 일반 은총의 결과이다. 모든 선은 하나님 은총의 결과이며 모든 악은 타락의 결과이다. 유지되는 행위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은 불의를 심판하시고 오래 참으시며 기다리시고 자비와 긍휼을 베풀고 계시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핑계할 수 없다. 하나님은 세상 만민을 부르셨지만 인간들은 교만 때문에 거역하였다. 만약 복음을 듣고서도 또다시 거절한다면 이중적 죄책을 지게 되는 것이다. 도덕과 법, 양심과 같이 자연법에 속한 모든 것들도 일반 은총의 결과이다. 또한 종교도 일반 은총의 산물이다. 종교는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는 보편성과 인간만이 종교 행위를 한다는 특수성이 있다. 종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고 인간이 그 하나님을 인식할 때 비로서 성립할 수 있다. 모든 종교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과 모든 종교가 다 참된 종교는 아니라는 부정적인 측면을 모두 갖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는 타 종교에 대해 무조건 배타적 자세로 나올 것이 아니라 종이 되어 섬김이 마땅하다.

공의와 사랑은 함께 할 수 없는가?

은혜 언약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언약으로 주어진 것이다.  로빈슨 같은 이는 공의와 사랑은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다고 보면서 심판과 지옥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는 그 근거로 사랑이 공의보다 더 크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존 스토트는 영혼 조건소멸설을 주장했으나 제임스 패커는 이를 비판하였다. 은혜 언약의 핵심은 형벌 대속 교리이다. 이 교리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만족하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 있다. 사랑의 감동을 주시려 했다는 도덕 감화설이나 죄의 형벌을 보이시려 했다는 통치설에 비해 탁월한 교리이다.

자연법과 복음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나님의 뜻은 세상에 자연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공의와 사랑을 나타내시고 부르신다. 그러나 오직 복음만이 믿음과 회개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하나님이 교회를 부르신 것은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을 부르시기 위함이다. 복음을 전하지 않는 교회는 존재 이유가 없다. 모세의 율법은 자연법 하의 정죄와 심판을 더욱 분명히 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타락 전에는 의를 지키고 머무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타락 후에는 의를 지켜 성취해야만 하는 더 큰 부담이 주어졌다. 복음은 은혜 언약으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죄 제 해결에 대한약속이다. 죄의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죽음이 오며 영생의 약속에서 끊어지며 본성이 죄로 부패하고 오염되며, 정죄와 심판을 받게 되며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 비참과 수고, 슬픔과 눈물, 고통 가운데 처하게 되었다. 은혜 언약은 아담의 타락 직후부터 주어졌다. 이 언약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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