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조직신학

이단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이창무 2015. 5. 1.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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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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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이단의 범위를 너무 넓게 잡게 되면 억울하게 이단이 되는 경우가 발생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교회 안에 다양성이 사라지고 획일화된 문화가 자리잡고 잦은 분쟁과 갈등으로 교회는 중병을 않게 될 것이다. 반면에 이단의 범위를 너무 좁게 잡으면 어떻게 될까? 진리가 약화되고 신앙 안에 불순한 요소가 침투하여 그런 기독교는 결함 있는 기독교가 되고 말 것이다. 만약 이단과 정통이 디지털 0과 1처럼 이산되어 있다면 이런 구분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단과 정통 사이는 수많은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는 아날로그의 세계이다. 그 사이에 어느 한 지점을 이단의 영역을 가르는 분기점으로 표시하는 일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나름대로 이단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자 할 때 먼저 조심스러움이 앞선다. 하지만 앞으로 목회 현장에서 이단의 문제는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기준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학기 이단 사항 비판 강의를 통해서 다양한 이단들을 접하면서 얻은 것들을 기초로 이 위험한 시도에 도전해 보려고 한다.



이단은 기독교 내부에서 발생한다

어떤 용어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자 할 때 가장 손쉬운 접근은 단어의 어원을 추적해 들어가는 방법이다. 우리 말 이단(異端)이라는 말은 한자어로 끝이 다르다는 뜻이다. 이 말 안에는 시작은 같았다는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한국어 이단의 어원적 의미가 과연 실제 현상으로서 이단을 정의하기에 적합한 것일까? 충분히 적합성이 있다. 기독교에서 이단은 기독교 공동체 밖에 있는 현상을 가리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슬람교는 기독교와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겹치는 부분을 가지고 있지만 이단으로 부르지 않는다. 이슬람교는 타 종교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슬람교는 기독교 공동체 내부로부터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이단들은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시작되었다. 그 이단들이 설령 기독교 외부에 있는 다른 종교나 사상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이다. 이단의 창시자들은 기독교 공동체 내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약에 처음부터 기독교와 다른 이질적인 세력으로 침투하려고 했다면 이단으로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단은 우리와 한 형제로 여겨지던 사람에게서 시작된다. 기독교 공동체 내부에서 이단이 발생한다는 말이 곧 이단은 시작이 같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단은 끝이 다르다. 끝이 다르다는 말은 정통 신앙과 다른 결론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이단은 정통 기독교와 상당히 많은 부분들을 공유한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기독교 외부에서 볼 때는 정통과 이단을 분간하기가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외부인의 관점에서 보면 정통과 이단의 차이점이 정통 교파 간의 차이점보다도 미미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이단에게도 신앙이 있고 열심이 있다. 심지어 정통 교회보다도 신앙과 열심이 더 뜨겁고 견고하다고 느껴질 때도 많다. 그러므로 이단을 종교적인 외양으로 판단하면 분별이 쉽지 않다. 이단은 끝이 다른 지점을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 그렇다면 끝이 다르다는 말은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이단의 판별 기준은 교리이다

끝이 다르다는 말은 이단의 교리가 정통 교리와 다르다는 말이다. 이단을 판단하는 기준은 교리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깟 교리가 무엇이길래 정통이니 이단이니 이렇게 골치 아프게 따지느냐고 묻는다. 교리라는 말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도 있다. 교리가 마치 신앙의 활력을 죽이고 화석화하는 괴물이라도 되는 양 여기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교리에 근거한 이단 구분은 의미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견해들은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심각한 오해를 안고 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설교 중에 죽은 정통에 대한 질책과 경고를 여러 번 했었다. 정통 교리는 선한 것이지만 죽은 정통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었다. 죽은 정통이란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신비의 경험이 없는 정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경험이 배제되고 경험의 기술 체계만 남은 것이 죽은 정통이다. 그러나 본래 교리는 경험을 배제하지 않는다. 아니 경험 없이는 교리도 없다. 교리는 경험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기독교 교리는 삼위 하나님과의 만남, 성자 그리스도를 체험한 사람들이 그 신비를 보존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만남의 사건이 먼저 있었고 그 사건으로부터 사건의 경험과 신비를 설명하는 교리가 나왔다. 그 신비한 사건과 경험은 한 두 사람이 사적으로 경험한 일들이 아니었다. 교회라는 공동체가 공유한 경험이고 신비였다. 교회는 이 공동체의 경험을 녹여서 교리라는 작품을 만들어 내었다. 그런데 여기서 교회 공동체가 경험한 일들을 다르게 설명하는 교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와 같은 다른 교리들은 교회 공동체의 경험을 심하게 왜곡시키거나 변질시킬 수 있었다. 교회는 그래서 이 다른 교리들을 이단이라고 정의하였다. 기독교에서 이단의 문제는 단지 특정 명제 집합과 일치 여부를 가리는 기계적인 문제가 아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경험한 하나님의 신비를 지켜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좌우할 수 있는 중차대한 문제였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단의 문제에 대해 심각하고도 진지한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단은 추종자들의 삶으로 판단할 수 없다

이단의 문제는 교리의 문제이고 결국에는 그 교리를 이끌어내 하나님 경험의 진실성 문제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실해 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단을 교리가 아닌 다른 기준으로 식별하려고 할 때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른 기준 중 대표적인 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이단들의 삶의 모습이다. 신자들 중에는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부도덕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고 있거나 그들의 인성에 심각한 장애가 생겨 있을 것이라도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큰 착각이다. 실제로 이단을 만나보면 부도덕하지도 않고 이상한 사람도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이단들 중에서는 반사회적 반인륜적인 삶의 행태를 가진 집단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런 이단 집단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단의 어떤 독특한 모습들이 선정적으로 소비되다 보니 이단이라면 의례 그러려니 하는 오해를 사기 쉽다. 분명히 이단이지만 오히려 평균 이상의 도덕적인 삶을 사는 집단도 있다. 내가 신대원 입학 전 한 회사에서 팀장을 할 때 팀원 중에 군생활을 안양교도소 교도관으로 근무하고 온 사람이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교도관들이 서로 데려가려고 하는 죄수가 있다고 한다. 바로 집총을 거부하고 교도소에 들어 온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은 교도소 안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순종적이어서 교도관이 안심하고 이런 저런 일들을 맡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은 삶에 있어서는 창세기 요셉에 비견될 만 하다. 신천지에게 미혹된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자기는 다른 것은 잘 모르겠지만 신천지 사람들이 얼마나 사랑이 많은가는 안다'고 말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신천지의 전도 전략의 일원이겠지만 신천지 신도들은 일단 자신의 전도 대상이 된 사람에게 눈알이라도 빼줄 정도로 섬겨 주고 사랑을 베풀어 준다. 신천지는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알고 있었던 기성 교회 신자들에게 이런 신천지의 모습에 역으로 감동을 받는 경우가 많다. 겉으로 보이는 삶의 모습을 기준으로 이단을 판단하려고 하면 이런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단들의 삶에 문제가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이단들이 가진 잘못된 교리는 결국 이단에 속한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참된 경험을 하는 일을 방해한다. 그 양상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이단이 그리스도에 대한 부족한 이해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신자에게 주는 유익과 영광을 누리지 못할 수 있다. 또는 실질적으로 우상 숭배의 형태로 전락하여 참되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이단은 겉으로 드러난 삶의 모습에서는 별 문제가 없을지라도 그 안에서 발생하는 종교 경험은 바르게 선포된 복음에 의해 형성되는 신자의 경험에는 도저히 미칠 수 없다. 만약 이단적 가르침이 공동체 내에서 주류가 되어 버린다면 그 공동체는 기독교가 가진 고결함과 가치를 계속 유지해 나갈 수 없을 것이다.



기성 교회로부터 축출되었다고 무조건 이단은 아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지점은 기존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축출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이단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단은 축출되어야 마땅하나 축출된다고 다 이단은 아니라는 말이다. 개신교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를 받은 적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개신교가 이단은 아니라는 점은 자명하다. 이미 로마 카톨릭 교회는 종교 개혁 이전부터 이단 판정이라는 무기를 빌미로 삼아 개혁 움직임을 차단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억울하게 이단으로 몰려 화형장의 재가 되어 사라진 사람들이 많다. 이런 오류가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서만의 문제는 아니다. 개신교 안에서도 교권 투쟁과 맞물린 정치적 이유 때문에 이단 판정이 남발되었던 숱한 사례들이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이단 판정을 내릴 때 정치적 이유 때문에 이단이라는 말을 결코 하지 않는다. 표면 상 내세우는 이유는 교리적인 오류 때문에 이단이라고 판정한다는 선언을 한다. 하지만 실상은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바로 이와 같은 현상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단 판정에 관해 시비가 끝이지 않는 것이다. 교회에는 이단이기 때문에 정말로 이단 판정을 받는 경우와 이단이 아니지만 다른 이유 때문에 이단 판정을 받는 경우가 혼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단 판정에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 좀 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하지만 단 시간 내에는 혼란스러운 경우가 많겠지만 좀 더 긴 시간이 흐르고 나면 정리가 되는 경우가 더 일반적인 듯하다. 그 과정에서 한 때 이단 취급을 받았으나 정통 교회로 인정 받는 경우도 있고 한 때 대세를 이루는 듯 했으나 이단으로 판정을 받아 주류에서 밀려나는 일도 발생한다.



이단은 사회적 현상이다

앞에서 이단의 문제는 결국 교리의 잣대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고 무조건 이단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단은 영어로 heresy라고 하는데 이 말은 종파를 뜻하는 헬라어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우리는 어떤 개인이 좀 특이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해서 이단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생각을 추종하는 일련의 무리들이 존재할 때 이를 가리켜 이단이라고 부른다. 이단은 지도자가 있고 추종자들이 있으며 자신들을 조직화 세력화한다. 이런 이단 세력의 특징은 폐쇄적이고 독단적이라는 점이다. 누구나 잘못된 교리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단은 잘못된 교리를 결코 고치려 하지 않는다. 이단은 상식적으로 보아도 명백하게 잘못된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고치지 않고 오히려 이를 합리화하기 위한 방어 기제를 계속 만들어낼 뿐이다. 외부에 의해 자신들의 교리가 검증되어 허점이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 폐쇄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 기독교 안에서 종파 현상은 한편으로 불가피한 현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 종파가 성경과 건전한 교리에 의해 검증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얼마나 개방하고 있느냐 여부이다. 이단의 특징은 그런 개방된 틈을 전혀 보이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이다.



성경 이외의 경전이 있다면 이단이다

모든 이단의 공통된 특징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단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계시된 말씀으로서 성경 이외에 성경에 준하는 혹은 성경을 능가하는 권위를 가진 또 다른 경전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통일교의 원리 강론이나 몰몬교의 몰몬경이 여기에 해당한다. 자신들만의 경전을 갖는 것은 이단의 잘못된 교리를 합리화하고 설명하는데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된다. 사실 성경은 어려운 책이다. 성경을 개혁신학적 원리에 따라 역사적, 문예적, 신학적으로 풀어내는 일은 훈련을 받지 못한 신자들에게는 매우 버거운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목회자 혹은 설교자가 성경을 바르게 풀어내지 않고 자기 생각을 성경에 주입시켜 풀어내게 되면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이런 주관적 성경 읽기에 익숙해진 신자들은 이단들의 아전인수격 성경 해석에 대한 분별력을 갖기 어렵다. 여기에 나름대로 체계를 갖춘 이단의 경전이 있다면 이단이 가진 자신만의 논리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성경 이외에 다른 계시를 가지고 있는지는 이단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가 될 수 있다.



이단은 역사적 신앙 고백을 부인한다

이단의 또 다른 특징은 역사적 신앙 고백을 부인하느냐 인정하느냐 여부이다. 신앙 고백이란 결국 교리의 집약체이다. 교회사에는 사도신경을 비롯하여 칼케돈 신경, 니케아 신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등등 많은 신앙 고백들이 있다. 이런 모든 신앙 고백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정통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역사적 신앙 고백들 중에는 특정 교파에서만 인정하는 신앙 고백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개혁파 교회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벨직 신앙 고백, 도르트 신경을 자신들의 신앙 고백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루터파 교회나 성공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이단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로서 신앙 고백은 교회가 분열되기 이전에 고백되었던 초기 교회의 신앙 고백이 되어야 한다. 이 초기 교회의 신앙 고백은 주로 신론과 그리스도론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완전한 하나님이시자 완전한 인간으로서 유일한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주 관심사이다. 만약 어떤 종파가 삼위 하나님 외에 다른 예배의 대상을 상정한다면 이는 이단이다. 또한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통 신앙 고백과 다르게 이해하고 기술한다면 이 또한 이단이다. 만약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중 어느 한 쪽을 부인하거나 혹은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잘못 말하면 이 또한 이단이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충족성이나 완전성을 부인해도 이단이 된다. 삼위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고백은 모든 교리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교리이다. 이 교리는 모두 사도적 전승으로부터 출발한 교리들이다. 이 땅에 오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경험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나누었던 사도들이 경험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 신약 성경이다. 그리고 사도들은 자신들의 이 경험에 구약 성경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핵심이 되는 교리들은 모두 구약과 신약 성경들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특정한 한 두 구절이나 본문에 의해 결정된 교리가 아니라 신구약 성경 전체 계시로부터 나온 교리들이다. 그러므로 이런 핵심 교리를 부인한다는 것은 신구약 성경을 부인한다는 것이요, 신구약 성경을 부인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다.



다양성을 인정해야 할 부분도 있다

신론과 그리스도론의 문제는 사실 교회의 역사 초기에 이미 정리가 다 되었다. 그러나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에 있어서는 교파별 다양성이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신론과 그리스도론에 관련된 이단은 이미 정리된 사항들이기 때문에 이단을 판단하기가 쉬운 편이다. 그러나 구원론과 교회론, 종말론에 관련해서 이단 여부를 판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보편 교회가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받아 들이는 공통 기반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관, 교회관, 종말관이 자신이 속한 교파의 고백과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이단으로 배척해서는 안 된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좀 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이번 학기 이단 사상 비판 수업을 들으면서 가장 놀란 부분이 이 부분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이단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 실은 이단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구원파가 대표적이다. 구원파는 말 그대로 구원론이 문제다. 구원파의 구원관은 문제가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구원파를 이단이라고 손쉽게 정죄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내가 무천년주의자라고 해서 역사적 전천년주의자를 이단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가정 교회 운동을 한다고 해서 이단은 아니다. 지금까지 교회가 너무 손쉽게 이단 판정을 하는 경향이 많았다.



나가는 말

지금까지 이단의 정의를 어떻게 내릴 수 있을까 대해 살펴 보았다.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이단을 판단하는 일은 매우 조심스러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할 수도 없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언급을 할 필요가 있는 부분은 교회사는 이단에 대한 풍부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전도서의 말씀은 이단 현상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새로운 이단이 등장한다고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미 과거에 등장했던 어떤 이단의 모습을 닮아있는 경우가 많다. 교회사 특히 교리의 역사에 대해서 안목과 이해를 갖추고 있다면 이단을 분별하는 일에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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