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에 대한 두 가지 대처 방향
이단에 대처하는 방안은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이단을 향한 대응이다. 공격적인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한 대응이다. 수비적인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한 가지가 다른 쪽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 모두가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대응 전략을 실행에 옮기는 주체는 다를 수 있다. 이단 자체를 향한 대응 전략은 아무래도 개교회 차원에서 수행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만약 대형 교회라면 혹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도 그리 좋은 모양새는 되지 못할 것 같다. 이단을 향한 대응은 개교회 밖에 있는 기관들 예를 들면 현대종교와 같은 전문 연구소 혹은 각 신학대학원이 그 역할을 맡을 수 있다. 또한 교단 총회라든지 한기총 혹은 한교연과 같은 연합 기관들이 이단 판정을 내리고 공표하는 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여기서는 개교회 차원에서 이단의 침투로부터 공동체를 방어할 수 있는 길에 대해서 고찰해 보기로 하였다.
이단에 개교회 차원의 대처 전략
개교회 차원의 이단 대처 전략도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단을 일종의 질병이나 바이러스처럼 비유하자면 예방 전략과 치료 전략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예방 전략이라고 하면 이단이 아예 교회 내에 발 붙이지 못하도록 사전에 예방하고 준비하는 길이다. 치료 전략은 이미 이단이 교회 내에 침투해 왔을 경우 이를 물리칠 수 있는 길이다.
1. 교리 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한국 교회의 취약점 중 하나가 교리 교육이다. 본래 개혁 교회에서는 세례를 하기 전에 혹은 입교를 하기 전에 신자에게 반드시 교리 교육을 받도록 한다고 알고 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총 52 주 분량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세례 받을 사람이 매주마다 문답식 교리 교육을 받은 후 세례를 받도록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 이렇게 세례 주는 교회가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세례 받을 때 뿐 아니라 세례를 받은 이후에도 지속적인 교리 교육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야만 신자들이 믿는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해한 내용을 바탕으로 분별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교인들이 교리 교육에 대해서 어려워하고 냉담할 것이라고 목회자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선입관일 수 있다. 의외로 많은 교인들이 교리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금요일마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을 강의한 적이 있다. 처음에 요리 문답을 가르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말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려워할 것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파워포인트로 강의 자료를 만들고 여기에 그림이나 스토리를 최대한 많이 담아서 전달하였다. 그 결과 반응이 괜찮았다. 어렵다거나 딱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평소 궁금하던 내용들이 풀려서 좋았고 경건 생활에도 도움이 된다는 반응이 많았다. 물론 교리 교육이 만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교리 교육을 착실하게 받은 교인들은 적어도 이단적인 사설이 접근해 왔을 때 정확하게 짚어내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할 정도의 감각을 충분히 형성시켜 줄 수 있으리라고 본다.
2. 설교에 있어서 전체 성경을 설교해야 한다.
한국 교회의 대다수의 설교가 성경 66권 중에 특정 본문에 치우쳐져 있다. 대체로 구약보다는 신약을 선호한다. 그러나 신약 중에서 바울 서신이 아닌 공동 서신이라든지 계시록은 예외이다. 구약 본문 중에서도 특별히 기피되는 본문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레위기나 소선지서 등이다. 이렇게 성도들이 편식을 하다 보니 전체 성경에 대한 안목을 갖기 어렵다. 이단들은 바로 이렇게 해서 생겨난 사각 지대를 노리고 들어온다. 그런 대표적인 이단이 바로 이만희가 이끄는 신천지일 것이다. 신천지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주무기로 삼는다. 그런데 기존 교인들에 계시록에 대한 설교를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보니 신천지의 해석에 무비판적으로 끌려가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만약 계시록을 설교자가 체계적으로 설교하고 가르쳤다면 신천지의 현재와 같은 성장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구약에서는 창세기를 정확하게 설교하지 못하게 되면 이 역시 통일교와 같은 이단들에게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설교자 자신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특정한 본문에 매달리는 현상을 피할 수 없다. 설교자가 모든 성경을 다 소화할 수 있도록 끊임 없이 연구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성도의 삶 전체에 균형 잡힌 식단을 먹이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세울 필요가 있다.
3. 교회 내에서 소외되는 그룹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신천지가 주요한 목표로 삼는 그룹은 대체로 가난하고 삶이 팍팍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작은 친절과 사랑에도 쉽게 마음의 문을 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기존 교회에서 차별이나 소외를 당하고 있다고 느낄 때 언제든지 이단으로 튕겨져 나갈 수 있는 잠재적 위험 요소가 발생한다. 교회는 본래 남녀노소, 인종과 지역, 경제적 수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된 공동체이다. 그런데 이런 교회 공동체 안에 세속 사회의 가치관이 스며들어 암암리에 교회 안에서 소외되는 계층과 그룹이 생길 수 있다. 이런 소외 계층과 그룹은 언제든지 이단의 목표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유기적 관계성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교회는 언제는 이단의 마수에 노출될 수 있다. 공동체 안에서 소그룹의 활동이 이런 점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신자 상호 간에 서로의 삶을 돌보고 살필 수 있는 소그룹이 활성화되어 있다면 이런 이단의 잠재적 위험을 상당 부분 감소시킬 수 있다.
4. 목회자의 타락과 부패를 경계해야 한다
이단이 노리는 교회는 목회자의 타락과 부패가 심한 교회이다. 대개 이런 교회에서는 목회자에 대한 염증과 분노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목회자에 대한 염증과 분노는 자연스럽게 그 목회자가 강조하고 역설했던 정통 신앙에 대한 회의와 불신으로 이어지기 쉽다. 이런 틈을 비집고 이단이 들어올 수 있다. 그리고 이단은 개혁의 기치를 높이 세울 수도 있다. 이런 모습에 호응하는 교인들이 이단에게 포섭될 가능성이 크다. 반드시 이단의 교리에 적극 동의해서가 아니라 함께 핍박 받는 소수자라는 연대의식이 생겨날 여지가 있다. 또한 이런 상태에서는 이단에 대한 대처가 그 순수성을 의심 받아 제대로 교인들에게 먹혀 들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한 예로 한 교회에서 목회자의 전횡과 타락을 비판하자 혹시 너희들이 신천지가 아니냐며 몰아세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렇게 되면 이단 대응은 정치 논리에 휘말려 들어가게 되고 진짜 이단이 문제가 되었을 경우에서조차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게 된다.
5. 이단의 정체에 대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이단에 대해서는 여기 저기서 주워들은 지식들을 교인들은 대부분 몇 가지씩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지식들이 부정확한 경우가 상당히 많다. 혹은 너무 막연하여 실체에 못 미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태에서 이단이 접근해 올 때 이단의 실체를 접하고 자신의 오해를 반성하면서 이단에게 끌리는 경험을 하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이단의 실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 특히 이단의 문제는 결국 교리의 문제이므로 교리적 결점을 제대로 알려 주어야 한다. 만약 자체 역량으로 이런 교육을 소화해 낼 수 없다면 외부에서 강사를 초빙하여 특강 형태로 소개하는 것도 한 방편이 될 것이다.
6. 이단을 교회 내에서 축출해야 한다
앞에까지가 예방 전략이라면 이제는 치료 전략이다. 구약에서 제사장의 역할은 공동체 내에 들어온 부정한 것들을 제거하고 공동체의 거룩을 지켜내는 일이었다. 이처럼 이단은 신앙 공동체 내에서 부정한 누룩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런 누룩은 더 커지고 영향력을 발휘하기 전에 공동체 내에서 축출해야 한다. 교회의 표지 중 하나는 권징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32주차에 보면 교리 면에서 그리스도인 답지 못한 교인은 권징의 대상이라고 하였다. 이단적 가르침을 따르는 교인이 있다면 권징의 절차와 순서에 따라 일단 회개하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계속 끝까지 이단적 가르침을 고수한다면 교회의 일체 교제로부터 금지시키는 징계가 불가피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공동체 전체가 큰 해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단 혹은 몇몇 불건전한 가르침 때문에 공동체에 타격을 입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때마다 개인이 혼자서 일을 벌이는 경우는 없었다. 이단적 가르침에 물든 사람은 항상 주변에서 동조자를 찾으려고 했고 실제로 몇몇 동조자를 얻어내기도 했다. 이런 상태에 이르기 전에 먼저 조치를 취해야 한다.
진짜 기독교를 경험하기
한국은행에는 위조 지폐를 감별하는 감별사가 있다고 한다. 위폐 감별사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의 훈련과정을 거쳐야 한다. 위폐 감별사는 어떤 훈련을 받을까? 놀랍게도 위폐 감별사는 위폐를 감별하는 훈련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오직 진짜 화폐를 만지고 느끼는 훈련만을 집중적으로 받는다고 한다. 진짜를 충분하게 경험하게 되면 가짜를 감별하는 일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이단이란 결함 있는 기독교, 부족한 기독교이다. 진정한 기독교를 맛 본 사람은 이런 부족한 기독교, 결함 있는 기독교에 끌리는 법이 없다. 본능적으로 부족하고 결함이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단의 문제는 결국 정통 기독교가 진짜 기독교를 경험하고 있느냐는 문제와 직결된다. 진짜를 경험할 수 있게 한다면 이단은 발 붙일 곳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가 경험되지 못하는 곳에서는 어느 때라든지 이단의 공격 앞에서 취약한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다. 진정한 기독교를 경험했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또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는 매우 섬세한 관심이 필요하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보아서는 판단이 쉽지 않다. 목자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참된 기독교의 신비를 경험하도록 돕는 사람이 목자가 아닐까? 이를 위해서는 목자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한 체험이 있어야 한다. 이단에 대한 가장 대응 방법은 하나님의 신비를 향해 부단히 내 자신을 개방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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