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조직신학

루터와 칼빈의 차이

이창무 2015. 5. 1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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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개요>(크리스챤다이제스트) p.144-145에서 인용.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이러한 죄 용서의 체험만으로 충분했다. 그로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물론, 루터는 이런 새로운 시각을 얻고서, 자연적인 것이 언제나 속된 것으로 보았던 로마교인보다 온 세상을 더욱더 자유롭게, 또한 더욱 폭넓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얻은 칭의에 완전히 안주하였고, 속된 모든 것들-예술과 과학, 국가와 사회-은 그것들 스스로 나아가도록 내버려두었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설교의 직분을 회복시키는 것으로 제한하였다. 일단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성경에서 답변을 찾은 다음에는, 거기서 노력을 중단시켜버린 것이다."


"그러나, 스위스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와 칼빈(John Calvin: 1509-1564)에게는 루터가 중단해버린 부분이 그들의 사역의 시작일 뿐이었다. 그들 역시 합리적인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죄와 은혜, 죄책과 화목의 체험을 통해서 종교개혁에 이르렀다. 이러한 체험은 그들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안주하지도 않았고 길을 멈추지도 않았다. 그들은 앞으로 뒤로 더 파고 들어갔다. 죄 용서에서 표현되는 하나님의 은혜 이면에 하나님의 주권이 자리잡고 있다. 그의 모든 탁월하심과 완전하심 중에 계시는 무한하시고 예배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그 하나님의 주권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만일 하나님이 구원 사역에서 주권자이시라면, 그는 언제나 어디서나-재창조에서나 창조에서나-주권자이시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에 왕이 되셨다면, 사람의 머리와 손에서도, 집과 사무실과 들판에서도, 국가와 사회에서도, 예술과 과학에서도 왕이 되신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 하는 질문만으로는 부족했고, 그보다 더 높고 더 깊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또 하나의 질문에까지 나아가야 했으니, 곧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그에게 합당한 영광을 받으시는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츠빙글리에게 있어서는, 그리고 칼빈의 경우는 그보다 훨씬 더, 십자가의 피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았으면 이제 비로소 종교개혁의 일이 시작된 것뿐이었다. 말하자면, 온 세계가 그들 앞에 활짝 열려 있었다. 그 나름대로 그냥 굴러가도록 내버려둠을 당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말미암아 침입을 당하고 거룩해지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교회와 도시를 향해 나아갔고 가장 인접한 곳에서부터 그 일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설교의 직분을 회복시킴은 물론, 예배와 교회의 권징까지도 회복시켰다. 그들은 일요일의 종교적 생활만이 아니라, 일주일 동안의 시민 생활과 사회 생활까지도 개혁시켰다. 거기서부터 그들의 종교개혁은 다른 땅과 다른 곳에로 퍼져나갔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주로 독일과 덴마크, 스웨덴, 그리고 노르웨이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칼빈의 종교개혁은 이탈리아와 스페인, 헝가리, 폴란드, 스위스, 프랑스, 벨기에, 그리고 네덜란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미국과 캐나다에서까지 받아들여졌다. 예수회 사람들(Jesuits)의 반동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에 의해서 여러 나라에서 도전받고, 공격을 당하고, 파괴되는 일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이 영원토록 로마 교회의 세계 지배권에 종지부를 찍었을 것이다."



2015/05/18 - [신학] - 하나님의 큰 일(요약) / 헤르만 바빙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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