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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큰 일(요약) / 헤르만 바빙크

이창무 2015. 5. 1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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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바빙크 "하나님의 큰일"



제1장 최고선(最高善)


1. 하나님은 인간의 최고선


인간의 최고선은 하나님이시요, 하나님뿐이시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들의 최고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보존자이시며, 모든 존재와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고, 모든 선한 것들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들은 매 순간마다 영원하고 유일하시며 어디에나 계시는 존재이신 하나님에게만 의존하고 있다.


2. 하나님을 떠난 인간


1)타락한 인간, 인간의 비참함과 잔존하는 하나님의 선물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고, 그의 신적 기원과 신적 유사관계를 지워버리고 파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그런 하나님의 형상 속에 창조되었지만 죄 때문에 지식과 의와 거룩의 고상한 속성들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에게 주신 선물 중 “작은 잔여물들”이 현재 그에게 남아있다. 이것들은 그의 모든 죄책을 느끼기에 충분한 뿐만 아니라, 그가 이전에는 고귀했음을 증거하고 그의 신적 소명(신적 부르심)과 하늘의 운명을 계속 상기시킨다.


2)인간, 육신적인 질서에 속한 시민이지만 영원한 것을 지각한다.


인간의 사색과 아는 것은 비록 그것이 두뇌에 제한될지라도, 그들의 본질에 있어서 전적으로 영적인 활동이며, 그의 눈으로 보고 그의 손으로 만지는 사물들의 훨씬 넘어 올라가는 것이다. 그는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으나 실제적으로 실존해 있고 땅의 물질보다 더 본질적인 실재를 소유한 세계와 그런 사색을 통하여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요. 영원하고 불멸의 진리인 영적 진리인 것이다. 그의 이성은 그런 절대적인 유일한 전적 진리 안에서만이 안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3)인간, 땅에 의존하면서 이성과 양심을 가진 자로 선을 찾고 있는 존재이다.


그의 육체가 존재하기 위해서 의존하는 것은 땅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욕구의 세계를 넘어 이성과 양심에 의해서 높고 다른 선한 것에 이르고자 하는 의지를 받았다. 즐겁고 유효한 것들이란 장소와 때에 따라서 그들의 가치를 가질지라도 결코 그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즉, 그가 찾고 있는 선한 것이란 환경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선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영원하고 불멸의 영적 선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의지는 계속해서 그런 고귀하고 절대적인 신적 선 안에서만 안식을 누린다.


3. 인간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가치


1)인간의 마음, 감각적 쾌락과 이상적인 가치들까지도 만족이 없다.


성경의 표현에 따르면 이성과 의지 모두가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잠4:23) 감각적인 쾌락과 땅의 보화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을 때 이런 모든 것에 만족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이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것들이 인간을 만족시키기에는 아무런 힘이 없고 그의 높은 운명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곧 바로 알게 된다. 그러나 소위 이상적인 가치들, 즉 과학, 예술, 문화, 진실한 봉사,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 이웃에 대한 사랑, 휴머니즘에 대한 갈망 등 이런 가치들이 사려(思慮)되었을 때 그 판단이 달라진다. 그러나 이들이 역시 모두 세상에 속해 있어 성경 말씀대로 세상도, 그에 대한 정욕도 다 지나가는 것이다(요일2:17).


2)인간들이 찾아가는 과학과 철학의 한계


먼저 과학과 철학에 대하여 살펴보자. 성경이 요구하는 그런 지식은 그 근본이 여호와를 경외함에 둔 지식이다(잠1:7). 지식이 이로부터 멀어져 그것과 관련이 없다면 비록 그것이 지식의 이름을 가졌을지라도 하나님께는 어리석은 세상 지혜로 점점 더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지식(과학이든 철학이든)은 언제나 특별한 성격을 띠고 있고 소수 사람들의 것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에게 현존하는 보편적이고 깊은 욕구를 충족시킬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둘째로 여러 과학은 몰락의 시기를 지난 후 다시 재생의 시기에 이를 때는 언제든지 특이하고 과장된 기대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자명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새로운 신비 속에 머물고 그때 그 과학의 목적은 우울해지고 인간은 땅에서 수수께끼 속에서 방황하고 생명과 운명은 모두 신비적인 것이라는 절망적인 고백에 이르는 것이다.


셋째로 과학이 사실 지금 성취한 것보다 훨씬 더 확실하게 알게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인간의 마음속에는 항상 불만이 남아 있을 수는 있다는 것을 기억함이 좋겠다. 이는 덕과 도덕적 기초가 없는 지식은 좀 더 큰 악을 알고 실천하는데 쓰는 죄인의 손에 있는 기구와 같고 지식으로 가득 채운 머리란 부패한 마음의 종이 되기 때문이다.


3)인간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 예술의 한계


예술의 경우에도 다를 것이 없다. 예술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할 수 있을지라도, 그의 미는 그들의 상상력 안에서만 제공되고 있다. 예술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증을 충족시킬 수 없다. 예술은 “저편의”것을 “이편의”것으로 만들 수 없다. 예술은 결코 가장 거룩하고 가장 고상한 것이 아니며, 인간의 유일한 종교나 유일한 구원도 아니다.


4)인간들이 추종하는 문화와 문명 그리고 인도주의의 한계


기타 인도주의, 문화, 인간의 봉사, 사회를 위한 생활, 혹은 그것이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궁극적으로 이들 역시 인간의 최고선이라 명명할 수 없다. 사회를 위한 생활이나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의 명령에 그 기초를 두지 않으면, 이것은 그의 힘과 확신을 잃어버린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항상 무언중에 아주 자발적으로 자연스럽게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위가 아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무한한 의지의 힘을 요구하고 자기관심과 이기적인 만만치 않은 힘과 계속해서 싸워야할 감정이요 행위요 행동이다. 인류는 지금 발전하고 있는가? 아니면 퇴보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우리는 당혹스럽다. 낙관적이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비관적이다. 결국 이웃을 사랑하든 인류를 위한 섬김의 삶을 살아가든 하나님의 법에 뿌리를 박고 있지 않으면 그 힘과 그 성격을 잃어버리고 만다.


3. 결론, 인간은 하나님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이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을 위해서 창조되었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안식을 찾을 때까지는 인간은 안식하지 못한다는 어거스틴의 말이 역시 결론이다. 어거스틴이 선포한 대로 엄밀히 말해서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을 찾고 있지만, 바른 방법과 바른 길에서 찾지 않고 있으며, 참된 장소에서 그분을 찾지 못하고 있다.


파스칼(1623-1662)이 지적했던 것처럼 인간은 위대함과 비참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존재다. 인간은 진리를 갈구하나 본성이 잘못되었다. 그는 영원한 행복에 헐떡이지만 일순간의 쾌락을 잡는다. 하나님을 찾지만 피조물 속에서 스스로 잃어버린다. 집안에서 태어난 자식이지만 낯선 땅에서 돼지의 건초를 먹고 자란다.(눅15)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물이 고이지 않을 터진 웅덩이를 파고 있는 것이다.(렘2:13) 그는 주린 사람처럼 먹고 있는 꿈을 꾸나, 깨면 그의 영혼이 비어있음을 느끼고, 목마른 자와 같이 마시고 있는 꿈을 꾸나, 깨면 곤비하여 영혼에 갈증이 있음을 느낀다(사29:8) 인간은 그 해결책을 하나님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이다.


<함께 생각해보기>


1. 인간이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은 최고선을 논함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2. 인간이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다음의 것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한 계를 갖습니까?


①과학 ②예술 ③기타


3.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찾을 때까지 안식하지 못한다는 어거스틴의 말에 대해 동의하십니까?


제2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


하나님께서 인간의 최고선이라는 것은 성경이 증언하는 진실이다. 인간을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으로 창조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식하고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도록 하시어서 영생을 누리도록 하신다.


1. 하나님의 계시와 백성들의 경험


1)계시의 정점은 성육신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와 새 예루살렘에 이르는 완전한 회복을 증언한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는 위대하고 포괄적인 은혜언약(“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을 그 내용으로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에서 그 계시의 중심점과 그 계시의 정점에 이른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그 약속을 성취하신 것이다.


2)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언약을 성취하시는 행위의 원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약의 씨요. 하나님의 말씀은 언약의 배아이다. 하나님께서는 행하심으로 그 말씀을 실현하신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을 통하여 사물들을 무로부터 창조의 역사를 이루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요1:14) 말씀하시는 것이다.


3)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


그분은 태초에 하나님과 더불어 있었고,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하나님이신 말씀이시다. 그리스도는 동시에 인간의 생명과 빛이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그리스도께 맡기시고, 하나님의 생각을 그리스도 안에서 표현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충만한 것이 그 안에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우리에게 선포하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셨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 안에서 아버지를 보이시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표현된 하나님이요.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이요. 스스로를 나누어 주시는 하나님이요. 따라서 진리와 은혜가 충만하신 것이다.


4)하나님을 경험한 실제적인 역사


“당신은 우리 하나님이요 우리는 당신의 백성입니다.”라는 끝없이 다양한 신앙의 말로 모든 시대에 걸쳐서 교회는 대답하고 있다. 그런 신앙고백은 과학적이거나 교리가 반복되고 있는 메마른 형식이 아니라, 신자들이 깊이 느끼고 생의 경험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현실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구약과 신약에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선지자들과 사도들, 그 후 그리스도 교회에서 나타나는 일반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추상적 개념’이나 ‘철학화’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고, 삶의 모든 환경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입고 있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신자들은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있어서 합리적으로 분석해서 나오는 차가운 개념이 아니라, 살아 계시며 인격적인 힘이었고, 신자들 주위의 세계보다 무한히 더 본질적인 현실이었으며, 영원하신 경배의 존재로서 유일하셨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생애에서 하나님과 함께 생각했고 하나님의 장막 안에 거하고, 마치 그분의 눈앞에 있는 것처럼 행했다. 하나님의 전 뜰에서 봉사했고 그분의 성소에서 그분을 경배했다.


2. 하나님을 아는 지식


1)백성들이 경험한 하나님과 구원의 은총


그들의 경험의 순수함과 깊이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를 가졌는지를 그들이 사용한 증언 속에서 나타났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왕이시며 주님이시요. 지도자이시며 목자이시요, 구주시요, 의사요, 보혜사요, 사람이요, 아버지이시다.


그들의 구원과 축복, 진리와 의와 생명과 긍휼, 능력과 힘, 평화와 안식 등, 모든 것이 그분 안에 발견된다. 그분은 그들에게 태양이고, 방패시며, 빛이시고, 불이시며, 근원이시고, 원천이시며, 반석이시고, 피난처시며, 높은 산성이시요, 장이시고, 그늘이시며, 성이시고, 성전이시다. 세세하게 세분된 물건으로 제공해야 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안에서 그의 백성에게 유용한 구원의 풍성한 형상이요 모양이었다.


2)이 지식은 기원부터 다른 지식과 다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만 얻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모든 소유물을 초월한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느꼈던 경험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백성들의 기쁨을 위해서 선물하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인간을 위한 영생, 곧 구원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데 있다고 하셨다. 그 지식은 특별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다른 모든 지식과는 다르다. 그 차이는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원리와 본질의 차이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 근본과 대상이나, 그리고 그 본질과 효과 면에서 피조물들에 대한 지식과 다르다. 그 근원에 있어서 무엇보다 다른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있다. 확실히 다른 우리의 모든 지식은 이성에 의한 통찰과 판단으로, 그리고 우리의 자신의 노력과 연구로 얻을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그리스도께서 자녀인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것은 그분 밖에서는 발견할 수 없고, 학문의 전당에서도 유명한 철학자들 가운데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리스도만이 아버지를 아셨다.(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안다.)


3)이 지식은 그 대상이 다른 지식과 다르기 때문에 그리스도만 바라보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의 대상에 있어서 다른 모든 지식과는 구별된다. 다른 모든 지식에 있어서 그것이 우리 시대에 무엇보다도 그 영역이 아주 넓어졌더라도 피조물들 둘레에 빙빙 돌고 있고, 유한한 것에 제한되어 무한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 대제사장(요17장)의 기도에서는 우리와 함께 사신 분이 다른 지식을 물리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대신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인간 알아가는 지식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을 어떻게 측량할 수 있겠는가? 무한하시고 불가해하시며, 시간과 영원히 측정할 수 없으며, 천사들도 목전에서 그들이 얼굴을 날개로 가리게 하는, 접근할 수 없는 빛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한 분이 코로 숨을 쉬고,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인간에게 어떻게 알려질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의 이해를 넘는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만이 아버지로 우리에게 보이셨고, 그리스도께서만이 그분을 우리에게 증거하셨다. 오! 인간들이여,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기를 원한다면 지혜자나, 서기관들이나, 이 시대의 변사에게 묻지 말고 그리스도만 바라보아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귀 기울여 그분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4)이 지식의 기원과 내용(대상)은 이 지식의 본질을 결정한다. 이 지식은 인격적인 앎이며 마음의 활동을 내포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근본과 내용이 특유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본질을 결정한다. 대제사장의 기도(요17장) 속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정보로서의 지식’이 아니고 실제를 대신하는 ‘하나님 자신의 지식’인 것이다. 이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피조물 즉 식물, 동물, 인간, 나라, 백성에 대해서 책으로부터 아는 것은 직접적이고 인격적 지식이 아니다. 지식인데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정보로서의 지식’은 어떤 다른 사람으로부터 주어진 묘사에 해당되지만, 진정한 앎이란 인격적인 관심의 요소와 인격적인 개입과 마음의 활동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격적으로 직접 보고 통찰한 것이다. 그분은 자연 가운데, 말씀 가운데, 섬김 가운데 처처에서 곳곳마다 보았다. 누구보다 더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셨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무엇에든지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셨다. 진리를 아는 그리스도의 지식은 진리를 행하신 그리스도의 실천과 항상 함께 하는 것이었다. 지식과 사랑이 그리스도께서 병행했다.


실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 우리가 그분 자신을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서 아느냐, 그리고 우리 생애의 길에서 구체적으로 그분을 대면했느냐, 또한 우리의 영혼의 체험 속에서 그리스도의 덕과 그리스도의 의와 그리스도의 거룩과 그리스도의 긍휼과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았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래서 이 지식은 믿음의 지식이라고 한다. 확신된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 은총으로만이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지식이다. 죄의 용서요. 영원한 의요. 하나님의 구원인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보잘 것 없고, 연약하며 오류가 많고, 어리석은 사람이, 높으시고 거룩하며 홀로 지혜로우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체 어찌 알겠느냐는 말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5)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이렇게 주어진다면 그 열매는 필연 영생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그렇게 얻게 되는 한, 그 행사와 열매가 필연 영생이다. 이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참으로 지식과 생명(삶)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인다. 인간들에 있어서 가장 부요한 인생은 최대의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 지식이 삶이 되어야한다. 그것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이 지식은 피조물을 아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이 지식은 우리의 삶을 얼마나 소생케 하는가! 하나님은 죽음과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생명과 산자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이 지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 하시고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케 하신 모든 자들을 죽음과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일으키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26)라고 하셨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영생과 한없는 기쁨과 하늘의 축복을 가져온다. 이것들은 단지 효과만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 자체가 곧바로 새롭고 영원한 축복의 삶인 것이다.


이런 정신에서 존 칼빈은 ‘제네바 요리문답’에서 “사람의 중요한 목적은 무엇이뇨?”라는 질문으로 시작했으며, 분명하고 힘 있게 그것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웨스터민스터 요리문답’에서도 이와 같이 ”사람의 최고 중요한 목적이 무엇이뇨?”라는 질문으로 그 교훈을 시작한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짧고 의미심장하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제3장 일반계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한계


실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면 그때 이해할 것은 하나님은 그분 편에서 자의적으로 자신을 알게 하신다. 그러나 피조물에 대한 지식에 관한 것에 있어서는 그 상황이 상당히 다르다. 인간은 자연으로 하여금 그 자신을 나타내고 그의 비밀을 드러내도록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능력, 역시 모든 방식에 있어서 손이 닿는 면에서만 적용되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하나님을 아는 지식


1)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한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완전히 독립적인 분이시다. 그분은 어떠한 점에서든지 우리에게 의존하시지 않지만, 인간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본성적으로는 물론 이성적이고 도덕적으로 그분에게 의존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을 조정할 아무런 힘이 없다. 동시에 그 분을 우리의 탐구와 반성의 대상으로 만들 길이 없다. 스스로 나타내시지 않고는 찾을 수 없고 스스로 주시지 않으시면 받을 수도 없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으신다. 그분은 도저히 가까이 갈 수 없는 빛에 거하셔서 사람들은 그분을 한 번도 보지 못했고 볼 수도 없다. 스스로 감추시면 우리의 영적이나 육적인 지각으로는 그분을 알 수 없다. 지각없이는 물론 어떤 지식도 가능하지 않다.


2)하나님께서 의지적으로 계시 하실 때에만 우리가 그 지식을 얻는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한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모든 피조물뿐만 아니라 자신도 완전하게 조정하신다. 우리 인간들은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항상 자신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만은 우리의 뜻에나 우리의 뜻 없이도 자신이 하시고자 하는 것만큼, 그리고 자신이 하시고자 하시기 때문에만 자신을 계시하신다. 자신의 의식과 자유 밖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은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완전히 지배하시고 그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만 자신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렇게 하나님 편으로부터 온 계시의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자의로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고자 하실 때에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인간이 얻을 수 있다.


3)하나님의 다양한 자기계시


이런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보통 계시라는 명칭과 더불어 생각하여 왔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나타나신다.’ ‘말씀하신다.’ ‘명하신다.’ ‘일하신다.’ ‘계시하신다.’ 등 다양한 명칭을 사용한다. 이것은 계시란 항상 같은 방법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다양한 형식 속에서 일어남을 가리킨다. 실로 말씀이든 행위든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포괄적이다. 말씀은 항상 계속하시는 하나의 큰 자기계시의 구성품이다.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요소이다. 창조와 보존, 만물을 다스리심, 이스라엘의 부르심과 인도하심, 그리스도를 보내심과 성령을 부어주심, 하나님의 말씀의 영감, 교회의 보존과 확장 등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주시는 방편이요 형식이다. 그런 모든 것들이 각각 하나님에 대해서 무언가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2.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성격


1)첫째로 이 계시는 항상 자유로이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다른 모든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하나님은 주권적이시고, 이것에 완전한 의식을 가지시고 자유로이 행하신다. 인간이 갖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 기초와 근원점이 자신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 안에 자의식과 자기 지식이 없다면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불가능하다.


2)둘째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계시는 자기계시이다.


자연과 은총, 창조와, 재창조, 세계와 역사 속의 하나님의 모든 사역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경배의 대상이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도 물론 하나님의 계시는 그 내용이 아무리 풍부하여도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자기지식과는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계시는 항상 하나님이 소유하신 자신에 대한 무한한 지식 중 적은 부분에 불과하다.


3)셋째로 그분으로부터 나오고, 그분 안에 있고. 계시의 목적도 하나님 자신이시다.


계시는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요 하나님은 온갖 것을 자신을 위해서 지으셨다(롬11:36, 잠16:4).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시에 깊이 더 사색해 들어갈수록 더욱 바울과 같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외치지 않을 수 없다(롬11:33). 하지만 계시에 있어서 인간이 차지하는 자리는 실로 중요하다. 계시는 인간을 향하여 있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을 수 있도록 하셨다.(행17:27). 복음이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됨은 믿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다(막16:15,16,요3:16,36). 그것이 인간을 통과하든 멀리 지나가든 하나님은 그의 계시 속에서 자신의 찬양을 준비하시고,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고, 그의 피조물 속에서 자신의 뛰어남과 완전성을 눈앞에 펼치신다.


3. 계시의 기능


1)계시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인격이다.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이런 전 계시의 중심이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있고, 동시에 그 안에서 절정에 이르고 있다. 그리스도는 육신이 되신 말씀이요. 태초에 하나님과 더불어 있었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독생자요,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의 인격의 형체시요 그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는 자다.(요14:9) 그리스도인은 그 신앙 안에 서 있다. 즉,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다(고후4:6).


2)믿음으로 피조세계를 바라볼 때 유익을 얻는다.


이런 높은 견지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앞, 뒤, 자신의 주위의 모든 면을 바라본다. 그때 그가 그리스도로 인한 하나님의 지식으로 그의 눈길을 자연과 역사 위에 하늘과 땅위에 돌릴 때, 그는 어느 곳에서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로 알고 경배했던 같은 하나님에 대한 흔적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모든 것을 보는 그리스도인은 보는 것이 결코 좁지 않다. 그는 마음과 포부가 넓다. 그는 전 땅을 훑어보고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간주한다. 이는 그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고전3:1·23). 그는 그의 생명과 구원을 근거로 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는 특별한 성격을 띠었다는 신앙을 버릴 수 없다. 그렇다고 이 신앙이 그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자연과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흔적을 찾으려는 태도를 취하게 하고 그의 손에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깨닫게 하고 인간의 잘못과 죄의 혼합과 구별할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을 준다.


3)하나님은 일반계시로 인류를 보존하시고, 특별계시로 인류를 구원하신다.


그렇게 해서 그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구별하게 된 것이다. 일반계시에서는 하나님은 현상과 사건의 평상적인 과정을 사용하시고, 반면에 특별계시에서 인간이 자신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비상한 수단과 현상, 예언이나 기적을 쓰시곤 한다. 첫 번째 것의 내용은 특히 능력과 지혜와 선의 속성이지만, 두 번째 계시는 복음 아래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만 미치고 특별은총에 의해서 죄를 용서해 주시고 중생으로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로 구별될지라도 역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둘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과 기뻐하심 안에 그 근원을 갖는다. 일반계시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을 지으시고 어두움에 빛을 비추시며 오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비추시는 그 말씀에 은혜를 입고 있지만(요1:1~9), 특별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되어 진리로 충만한 같은 말씀에 은혜를 입고 있다(요1:14). 전자는 일반적이고 후자는 특별할 뿐 두 계시의 내용은 은총이지만, 또한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절대 필요한 것이다. 특별계시를 가능케 하고 그의 길을 예비하여 후에 그것을 지탱케 하는 것은 일반은총이다. 반면 특별은총은 자기 차례가 되어 일반은총을 자신의 것에 이르게 하고, 요긴한 것이 되게 한다. 두 계시의 결국은 인류의 보존에 있으며, 처음의 것으로 인류를 존속시키고 두 번째의 것으로 구원하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모든 덕에 영광을 돌리고 목적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4.계시의 내용


1)일반계시든 특별계시든 모든 계시의 내용은 성경 속에 내포되어 있다.


일반계시는 그것이 자연으로부터 나올지라도 성경 안으로 흡수되어 있다. 이는 우리 어두운 이성 때문에 우리 인간이 그것을 완전히 그 자연으로부터 이끌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증명하고 있다. 이는 창조 자체가 계시의 행위이요. 따르는 모든 계시의 시작이요 원리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창조를 가르치면서 그와 더불어 동시에 하나님의 계시를 보존하고 하나님도 하나요. 세계도 하나임을 나타낸다.(창조자와 피조물의 연속성) 세계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계시는 오래 전에 성취하셨던 하나님의 사역을 상기시키는 자요, 우리의 이 세대에서 하나님이 지금 하시고자 하시는 뜻이 무엇이고,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증거 하는 증거자다. 더구나 자연과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행하시고, 그분의 사업을 이루신다. 이런 일반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은 때가 찬 경륜의 시대까지 백성들을 보존하고 인도하셨으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다(롬11:25, 엡1:14, 계7:9). 구원받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성의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모든 왕들과 백성들이 자기들의 모든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 올 세상 그 끝 날을 준비하고 계신다(계21:24, 26).


2)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여섯 가지 증명에 대해서 말해왔다.(인간의 한계)


첫째, 만물은 최종적인 원인인 영원하고 본질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를 요구한다(우주론적 증명) 둘째, 세계는 우연으로써는 설명될 수 없는 어떤 목적이 있음을 나타낸다(목적론적 증명). 셋째, 모든 인간 의식 속에 그 이상 더 높은 자는 인식할 수 없고, 누구나 자존하다고 생각하는 초월자에 대한 의식이 있다는 점이다. 넷째, 인간은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존재인데, 그것은 거룩하고 의로운 입법자가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도덕적 증명). 다섯째, 종교 없는 사람들은 없다는 사실이다. 이 현상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런 종교적 감정에 절대적인 보편성이 있음을 증명하고 여기에서 인간은 일반적으로 미련한 미신으로 앓고 있거나 모든 사람들 앞에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숭배는 하나님의 실존에 그 기초를 두고 있음을 깨닫는 그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같은 식으로 성경의 빛으로 인간역사를 볼 때 어떤 절대자가 만물의 다스림을 가르쳐주는 계획과 그 진행을 보게 된다. 그러나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은연중에 역사란 이념과 계획에 입각한 것이고 그의 과업은 이 이념을 드러내는 것임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모든 증거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시14:1). 또한 이방인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았다(롬1:21). 자연과 역사를 통하여 인간에게 온 하나님의 계시일지라도 인간 스스로 그것에 응답하는 한도 내에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3)인간 내면에 심으신 외적계시와 내적계시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의한 모든 사역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영혼 속에(하나님께서 그의 근절할 수 없는) 실존과 존재를 심어놓지 않았던들, 알려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명백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연의 외적 계시에다가 내적 계시를 덧붙였다는 것이다. 종교에 대한 심리학적이고 역사적인 탐구는 때때로 종교란 그런 생득적인 개념 없이는 설명될 수 없음을 돋보이게 한다. 성경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지으신 후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직접 그분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서 창조하셨다(창1:26) 인간은 하나님의 소생이다(행17:28). 하나님은 자신을 인간 밖에서도 계시하시고 인간 안에서도 계시하신다. 즉,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되 인간의 마음과 양심 속에서 증거 하도록 하신다. 그것은 그분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계시를 이해하고자 하는 능력이요, 감수성이며 충동이다. 그것은 눈이 빛과 색깔을 탐지할 수 있고 귀가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갖추어져 있는 것처럼 우리 자신 밖에 있는 신적인 것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우리 속의 신적인 의식이다.


칼빈이 말하는 대로 그것은 신적 감정이며, 바울의 정의대로 그것은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한 것을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피조물로부터 생각하여 알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의 가장 깊숙한 내면에서(모든 추론에 앞서) 직접적으로, 우리는 피조되고 제한적이고 의존적인 존재임을 의식한다. 이런 의존 감정은 낙담과 절망 속에 흔들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종교에 귀의케 하고 신성을 영화롭게 하고 경배하게 한다. 그것은 자유를 내포하고 행동의 자유로 몰고 간다. 그것은 노예로서의 의지가 아니라 자식으로서, 즉 잃어버린 자식이 갖는 의지이다. 그래서 칼빈이 기록한대로 “신적 감정”을 동시에 “종교의 씨”라고 했다.


<함께 생각해보기>


1.계시의 성격을 정리하여 봅시다.


2.일반계시와 특별계시는 어떻게 구별됩니까?


3.사람들의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 왔던 방법들을 정리하여 봅시다.


제4장 일반계시의 가치


1. 성경의 빛으로 인간사를 보고 인간이 일반계시로 얻은 유익을 가르치자.


일반계시에 대한 가치에 대해서 과대평가 하거나 과소평가하는 큰 위험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특별계시 속에서 주신 부유한 은총에 관심할 때 가끔 그것에 몰두하면 일반계시가 우리에게 주는 전체 의미와 가치를 잃어버린다. 다른 한편 인간세계와 자연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반계시를 힘입어 만날 수 있는 모든 진리와 선과 미의 지식을 가질 때,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나타난 특별은총이 우리의 영혼 앞에서 영광과 광채를 잃게 되는 수가 있다. 그러나 모든 시대에 걸쳐서 우리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특별계시를 가능한 한 많이 제한하려 했다. 성경의 빛으로 인간사를 보고 성경의 빛으로 인간이 얼마나 일반계시에 빚을 지고 있는가를 가르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 될 것이다.(특별계시의 빛으로 일반계시를 보자)


2. 두 계시는 인류사에 같은 구원과 공통된 기초위에 세워진 것이다.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유의해야할 것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는 비록 구별될지라도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시종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같은 백성 곧 그때 현존했던 같은 인간들을 향하여 계시하신다. 특별계시가 그때 몇몇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도 아니고 유일한 한 백성에게 제한된 것이 아니라 그때 살았던 모든 사람에게 확장되었다. 세계창조, 인간형성, 낙원 및 타락사, 죄의 형벌, 하나님의 은총의 선포(창3:15), 종교 예배식(창4:26), 문화의 시초(창4:17 이하), 홍수, 바벨탑 건축 등 모든 것들은 인간이 세계여행 중에 가져왔던 보화들 가둔데 속한 것들이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란 같은 근원과 공통된 시초를 같고 공동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3. 두 계시의 공통기초 위에 세워진 것, 하지만 인간들 사이에서 분리현상이 일어났다. 그 원인은 종교(신앙)의 분리이다.


그런데 이런 획일적인 공통기초에도 불구하고 인간들 사이에 곧장 단순한 분리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분리현상은 인간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는 곳, 즉 종교에 근본원인이 있었다. 성경은 인간이 어떻게 그런 제사를 드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아무 말이 없다. 그리고 제사의 기원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오늘날 아주 다양하다. 중요한 것은 제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물 가운데 나타난 그 마음에 있었다. 아벨은 그 마음과 제물에 있어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히11:4). 그래서 주님께서 열납하신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아담의 자손들 사이에 분리현상, 즉 의인과 불신앙의 사람, 순교자와 살인자, 교회와 세상 사이의 분리현상이 이미 있었다. 가인의 살인 후일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돌보시고 그를 찾아내 회개할 것을 권고하시고 심판 대신 은총이 임하도록 하셨다(창4:9~16). 그럼에도 그 파열은 아물지 않았다. 즉, 분리현상은 서서히 진행해 나갔고 가인 족과 셋 족의 분리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가인 자손에게서는 그때 불신앙과 배교가 이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자꾸 증가해갔다.


4. 가인의 족속은 세계경배에 탐닉했고, 셋 족속은 하나님을 경배했다.


그들은 미신이나 우상숭배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가인족속은 미신에 빠진 것이 아니라 불신앙에 빠졌다. 즉, 이론적으로는 거절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의 존재와 계시에 대해서 실천적인 거절에 이르렀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셋 자손의 계보 가운데 하나님의 지식과 경배가 오랫동안 순수하게 잘 보존되었다. 그의 아들 에노스의 때에 여호와의 이름이 불리어지게 되었음(창4: 6)을 보는데, 그때 처음 주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가장 가능한 이해는 셋 족속이 이때에 스스로는 가인족속으로부터 한 그룹으로 구별시켰고, 주님의 이름의 고백을 위한 공적인 모임을 개최했고, 그래서 가인 족속과 구분하여 그들의 공적으로, 그리고 공통으로 하나님께 경배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증거 했다. 가인 족속들이 세계경배에 탐닉하여 거기에서 그들의 구원을 찾았음과 발맞추어, 셋 족속들은 자신들의 하나님께 맡기고 그의 이름을 기도와 감사, 설교와 고백으로 악한 세대 가운데에 선포하였다. 이런 공적 설교에 의해서 회개에의 촉구가 가인의 후손들에게 계속되었다.


5. 셋 족속과 가인 족속이 서로 섞여 죄악이 관영함, 노아의 설교와 홍수의 파멸


에노스의 증손은 하나님의 찬양의 뜻인 ‘마할랄렐’(창5:5)이라 불리웠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다(창5:22). 라멕은 그의 아들 노아를 낳았을 때 소원을 표현하기를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그 아들이 그들의 손의 수고와 노동으로부터 그들을 안위하리라 하였다(창5:29). 그리고 노아 자신이 마지막에 의의 설교자로서 활동했다(벧후2:5). 그러나 이런 성도들은 아주 예외적인 것이다. 셋 족속과 가인 족속이 서로 살을 섞어 아들들을 낳으니 이전 세대사람들보다 더 용맹했다(창6:4). 인간의 죄악이 관영하였고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할 뿐이며, 그들로 땅이 패괴함으로 충만하였다(창6:5, 12, 13; 8:21). 비록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신 중에 120년 동안의 연장을 주셨고(창6:3, 벧전3:20), 노아의 설교 속에서 몰락에 이르는 길을 증거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옛날 사람은 그의 운명의 길로 달려가 결국 홍수 속에 사라졌다. 노아와 그의 가족 8명의 영혼만이 구원받았던 이 무서운 심판 후에 여러 가지 점에서 홍수전보다 다른 경륜이 시작되었다.


6. 노아 이 후의 경륜, 인간은 더욱 죄악으로 질주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길이 참으심으로 세계의 존재와 생명을 확고하게 하신다.


새 경륜이 계약 마지막에 소개되었다. 노아가 홍수 후에 제단을 쌓고 그 제단 앞에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심중의 감사와 기도를 아뢸 때 주님께서 자신에게 이르기를 땅 위에 다시는 심판을 행하지 않고 고정된 자연의 질서를 도입하리라 하셨다. 이렇게 생각 하신 바는 인간의 마음의 계획이 어려서부터 악함이다(창8:21). 이 말씀들은 놀랍게도 창세기6장5절의 말씀과 유사하지만 놀랍게도 그것과는 다르다. 창세기6장5절에서 사용된 말들은 멸절에 대한 사려에 쓰이고 여기 창세기 8장 21절에서 사용된 것들은 땅의 보존에 대한 사려에 쓰여졌다.


인간은 그 마음은 항상 동일하게 남아 다시 놀라우리만큼 다양한 죄들이 쏟아질 것이고 줄곧 주님의 진노가 연기될 것이고 다른 때에 온 땅을 멸할 마음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주님은 원치 않으신다. 따라서 지금 주님은 인간과 자연에 대해서 일정한 법칙을 두고 안에서 운행하게 하는 코스를 정하여 그들을 제한하고 억제하시려는 것이다. 이러므로 인간과 세계의 존재와 생명은 좀 더 확고하고 다른 기초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창조행위와 창조법칙에 있어 고착에 있지 않고 차라리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롭고 길이 참으심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7. 홍수 이후에 이루려는 인간역사의 좌절, 바벨탑과 언어를 혼잡케 하심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존재와 생명으로 선물하심을 허용하심은 인간이 항상 어기는 창조질서 덕택이 아니라, 그것의 타락과 반역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을 보존하는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시는 이런 계약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 계약은 홍수전에 존재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태의 질서를 소개한다. 홍수 이전과 그 자체에도 역시 작용했던 거대한 자연의 힘이 억제되었다. 생물 중에 이전에 살았던 기괴한 괴물들은 이제 없어졌다.


이전에 전 우주를 흔들었던 엄청난 지각운동의 격변은 규칙적인 현상과 사건의 노선으로 바꾸어졌다. 인간의 생존기간은 짧아지고 그 힘도 약해지고 그의 본성이 부드러워지고 한 사회로 질서가 잡히고 한 통치의 기강이 잡혔다. 하나님은 인간 가운데 야생동물에게 말굴레를 씌우시고 예술과 과학, 국가와 사회, 직업과 산업 속에서 그의 재능과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그에게 주었고, 그렇게 하심으로 역사를 가능케 하는 조건들을 충만케 하셨다. 그러나 이런 역사는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좌절되었다.


8. 바벨탑은 인간의 영광을 세계왕국에서 찾은 죄악이다.


모든 땅을 충만케하고 지배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그들은 외적 중심적으로 하나만 보존하고 전 인간을 전적으로, 그의 힘을 권력에서 찾고 그 노력의 목적을 인간의 영광에서 찾는 세계왕국에서 찾으려는 이상을 설정했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인류를 그의 모든 능력과 지혜, 기술과 과학 전 문화를 가지고 중앙화해서 체제화하려는 생각이 하나님과 그의 왕국에 반대해서 역사 속에 들어 왔다. 이 생각은 후에 계속해서 일어났고 그것의 실현이 내로라하는 모든 위대한 사람들이 시대과정을 통해 갖는 목표가 되어 왔다. 따라서 하나님은 선한 멋과 기타 모든 것을 위해서 세계왕국 설립의 기도를 간섭하고 불가능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때까지는 한 언어 밖에 없었던 것이, 언어를 혼란시킴으로 이 일을 행하셨다. 그 속에 내포한 의미는, 사람들이 생리학적으로, 그리고 심리학적으로 서로 구별되고 사물들을 서로 다르게 보고 다르게 명칭을 붙이기 시작했으며, 결국 국가와 민족들로 나위어지고 그들 스스로 각기 자기 방향으로 모든 땅에 흩어졌다는 것이다.


9. 이스라엘의 선택, 하나님의 계시를 맡은 자로 삼아서 두 계시를 십자가 아래서 들어나도 록 하신 것이다.


이 모든 민족으로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맡을 자로 삼기 위해서 선택된 것이다. 지금까지 함께 결합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서로 각각 십자가 밑바닥에서 다시 드러나기 위해서 잠시 동안 분리되고 나눠진다. 이스라엘은 구별되어 하나님의 길과 정하심에 따라 행하게 하시고, 동시에 주님은 다른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길을 다니게 하셨다(행14:16).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들 백성들에게 전혀 관심하지 않고 그들로 자기 운명대로 가도록 내버려 두셨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모든 인류의 생애와 거주지는 그의 경륜으로 정해져서 섭리로 그대로 배정하셨다(행17:26).


10. 모든 사람들에게 양심이나 이성이나 오성을 통하여 빛을 비추셨다(요1:3~10)


과거에 주님은 모든 이방인들로 하여금 각기 저희 길로 내버려 두셨을 지라도, 자신을 증거 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라 비와 결실기를 주시고 저희 마음을 음식과 기쁨으로 만족케 하는, 하늘로부터 선한 일을 하셨다. 그분은 자연과 역사의 계시를 통하여 모든 마음과 양심에 그의 소리를 발하게 하셨다(시19:1).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백성과 같은 법을 받지 않았으므로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없을지라도 구체적으로 율법에 명했던 것을 행함으로 그들은 도덕적 본성 가운데 스스로가 율법이 되고 율법이 명한 행위가 그들 마음에 새겨 있음을 보인다. 그리고 행위가 따르는 양심의 소리나 서로 아래 형성하는 생각들이 송사하거나 변명함으로 이것이 확증된다(롬2:14~15). 그러므로 이방인들의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감정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아 왔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와 같이 그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었고 세상에 출생되어 왔던 모든 사람들에게 양심이나 이성이나 오성을 통하여 빛을 비추셨다(요1:3~10).


인류의 역사가 이런 성경 증거에 대한 징표다. 타락 후 곧 가인 족속들 가운데 다양한 발명들과 산업들이 들어왔다(창4:17이하). 성경에 따르면 시날의 최초의 거주자들은 셈족이 아니라 함 족속이었다. 우리가 시날 땅에서 보는 문명은 과학과 예술, 도덕성과 준법, 상업과 산업에 있어서 유적의 발굴로부터 더 잘 알게 됨에 따라서 좀 더 기쁨으로 충만케 하는 고도의 문명에 도달했다. 그리고 이런 문명이 시날 땅에 제한된 것은 아니다. 인간들이 팽창되어 감에 따라서 언어혼란 후에는 그들의 거주들도 땅의 여러 지역에 분포되었다. 그들 모두가 의식과 의지, 오성과 이성, 마음과 양심, 언어와 종교, 법과 관습, 가족과 사회, 도구들과 장식품들을 소유하는데 있어서의 차이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화의 전 역사를 종교적 도덕적 견지에서 우리가 다시 바라볼 때, 그로부터 깊은 불안과 실망의 인상을 느낀다. 사도 바울은 그것에 대해서 이르기를 이방인들이 자연이 주는 일반계시로부터 하나님을 알고 있음에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들의 생각들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 졌다. 인간들은 그의 문화의 긴 여정 속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았다. 가장 오래된 시날 평야의 거주자들 가운데에서 창조자 대신에 피조물을 섬기는 이런 숭배가 발견된다.


11. 그러므로 여호와의 유일신 종교는 발전된 산물이 아니다.


종교가 정령숭배(여러 혼과 정령숭배-주물숭배, 애니미즘, 토테이즘)로부터 다신론(여러 신 숭배)를 거쳐 유일신으로 발전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추측이요 가정이다. 역사가 반복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인간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에서 다신숭배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우리 자신들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에서, 기독교회사에서 증거했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기에서도 증거하고 있다.


12. 유일신 신앙을 포기 할 때 다신론적 관념과 미신이 들어온다.


왜냐하면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포기될 때, 여러 다신론적 관념과 미신적인 관습들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첫째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여러 민족들의 우상과 형상숭배이다.(우상이란 유일하신 참 하나님 대신 혹은 나란히 다른 것을 올려놓고 사람들이 거기에 그들의 신앙의 자리를 두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이런 우상과 더불어 그 자체에 역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여러 가지 잘못된 관념들이 동반하고 있다. 이런 모든 관념이 갖는 공통적인 것은 그들은 진리라는 구성요소에 여러 오류와 어리석은 것이 혼합되었다는 것이다. 창조자와 피조물사이에 한계가 지어져 버렸다. 셋째로 모든 민족들의 각 종교들은 인간적인 최대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 특징지어질 수 있다. 우상은 본래적으로 자기 노력의 종교로 인도한다. 구원과 은총의 실제적 본질은 어디에서나 이해되지 않고 있다. 민족적 종교가 한편으로는 미신과 주술의 여러 조잡하고 비 성숙된 형태 속에서 몰락하고 다른 한편으로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서 그들 세대에 있어서 여러 모양으로 충돌이 일어났다.


종교의 깊은 몰락으로부터 구하고자 하는 인물들이 태어나게 되었다. 그런 인물들이 대략 그리스도보다 7세기 앞서서 페르시아에 살았던 짜라투스라였고 그리스도보다 6세기 먼저 중국에 살았던 공자였고, 그리스도보다 4세기 먼저 인도에 살았던 부처였고, 그리스도보다 7세기 후에 아라비아에 살았던 모하메트 이었으며 기타 유명 무명한 더 많은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깨달음을 얻었음에 틀림없다 할지라도 이들 모든 종교들은 다른 대중의 미신과는 본질에 있어서 차이는 없고 정도의 문제일 뿐이다.


13. 일반계시의 전 영역에서, 한편으로는 풍부한 열매,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발견하거 나 하나님을 발견 할 수 없음을 보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반계시의 전 영역을 돌아볼 때 우리는 그들을 한편으로 큰 가치가 있었고 풍부한 열매를 얻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또 한편으로는 인간은 그의 빛으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고 또 한편으로는 인간은 그의 빛으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 아직도 종교적이고 윤리적 개념들이 인류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일반계시 때문이다. 즉, 이것 때문에 그들은 진리와 거짓,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에 대한 약간의 의식을 아직도 갖는 것이고, 그들이 결혼과 가족, 사회와 국가의 관계 안에서 사는 것이며 이런 모든 내적, 외적 조정으로 말미암아 억제해서 짐승으로 몰락되는 것을 방지하며, 이런 한계 내에서 그들 스스로 바쁘게 여러 가지 영적, 물적인 것들을 생산하고 분배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14. 결국 일반계시가 인류의 선물 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오성, 즉 총명이 어두워지고 마 음이 굳어졌기 때문에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의 말처럼 모든 지혜를 가진 세상은 그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고전1:21)은 진리다. 일반계시의 빛으로 세상은 지혜, 곧 이 땅의 생명의 것들에 관한 지혜의 보화를 함께 모았다. 그러나 이런 세상지혜는 세상을 더욱 더 변명할 수 없도록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은 하나님의 선물, 즉 오성과 이성, 합리적이고 도덕적 능력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오성, 즉 총명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굳어졌기 때문에 그에게 준 선물들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 했음을 보여준다.


<함께 생각해보기>


1. 일반계시에 대한 가치를 결정함에 있어서 그것을 과대평가 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경우는 어떤 것입니까?


2.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는 공통기초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 사이에서 어떻게 분리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까?


3. 하나님의 심판 후에 노아와 그의 가족 8명의 영혼만이 구원받았고 홍수 전보다 다른 경 륜이 시작되었다. 이 새로운 경륜의 이전의 것과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까?


4. 종교가 정령숭배로부터 다신론(여러 신 숭배)를 거쳐 유일신으로 발전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이 틀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5. 일반계시의 빛 아래에서 갖게 된 세상 지혜는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더욱 변명 할 수 없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5장 특별계시의 방식


일반계시가 불충분하다는 사실은 특별계시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함을 드러내주며 이 특별계시의 필연성은 하나님께서 억지로 어떠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특별한 방식으로 계시하셔야만 하는 의무를 지니게 되셨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요, 값없이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뜻의 경륜이다. 또한 계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들에게 베풀어지는 그의 사랑의 증표이다. 그러므로 특별계시는 필연적이다 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피조 세계를 위하여 정해 놓으신 그 목적과 불가분리의 관계로 연결되었다는 의미일 뿐이다.


사실, 특별 계시가 필연적이 되는 것이 우선적으로 이 목적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세상과 사람이 그렇게 되는 일에 일반 계시가 불충분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때에, 우리는 또한 이런 인식조차도 특별 계시에 기인하는 것임을 보게 된다. 본성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들과 능력들과 세상과 그 보화들로써 우리의 구원에 충족하다고 생각한다. 이교들도 이 원칙의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사실 자체가 일반계시로는 부족하며 좀 더 친밀한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다는 것을 각 사람이 마음으로 느낀다는 논지를 입증해 준다. 그러나 이교도들이 호소하는 이 특별한 계시들은 동시에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실한 사람은 자연 속에서 그의 계시를 깨달을 수 없으며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더듬어 찾게 된다는 사실도 분명히 밝혀 준다. 그리하여 그 사람은 진리의 지식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되고 우상숭배와 불의를 섬기는 일에 더욱 사로잡힌다.(롬1:20~32)


결과적으로 자연과 역사. 마음과 양심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일반 계시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특별계시가 필요하다. 우리가 성경의 인도함을 받아 나아갈 때에 비로소 일반 계시가 인간의 삶 전체를 위하여 풍성한 의의가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합당한 목적을 이루는 데에서 불충분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일반 계시를 논의할 때부터 특별 계시가 우리를 인도해 주며 또한 문제의 접근에 빛을 비추어 주는 것이다.


사실, 일반계시 자체도 특별 계시의 필요성과 필연성을 어느 정도까지는 드러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창조다. 창조는 아주 특별하며 절대적으로 초자연적인 놀라운 계시다. 따라서 창조의 관념을 수용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이후의 모든 계시의 가능성을, 심지어 성육신의 계시까지도 포함하여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계시가 특별 계시의 필연성과 가능성에 대하는 근거를 제시하는 공헌하지만 그 계시의 실재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특별 계시의 실재성은 오직 그 자신의 존재에 의해서만 입증될 수가 있다.


먼저는 선지자를 통해서, 후에는 그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고(히1:1) 또한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이 특별 계시는 일반 계시와 계속적인 관계 속에 서 있으면서도 본질적으로 그것과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한 구별과 차이는 그것이 일어나는 방식과 포괄하는 내용, 그것이 지향하는 목적에서 드러난다.


특별 계시가 발생하는 방식과 항상 동일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수단에 따라 달라진다. 그 묘사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드러난다: 나타내심, 드러내심, 보여 주심, 알게 하심, 선포하심, 가르치심 등. 특히 말씀하심이라는 묘사는 성경에서 창조와 섭리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묘사하는 데 이 단어를 사용한다. (창1:3, 시33:6, 시33:9) 하나님께서 인격적이며 의식이 있으며 생각하는 존재로서 권능의 말씀으로 만물을 존재하게 하시고 사람의 정신에 생각을 불어 넣으셔서 그의 형상과 모양을 읽고 이해할 수 있게 하신 것을 볼 때에 창조와 섭리에 나타나는 이 모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말씀하심이라 올바로 부를 수 있다. 그런 하나님께서는 지으신 만물 중에서도 특별히 사람에게 말씀하실 것이 있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지으신 만물 속에서 역사하는 이,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서는 거의 이견이 없으며 특별계시를 부인하는 사람 중에서도 자연, 역사, 유명한 위인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계시를 찾으려 한다. 오늘날은 종교와 계시가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계시는 신적인 요소, 종교는 인간적인 요소라고 간주한다. 곧, 하나님은 사람의 종교의 모든 범위를 친히 사람에게 계시하시며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만큼만 종교를 소유한다는 사고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하나님과 사람을 동일시하며 결국 계시와 종교를 동일시하는 범신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사고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진정한 계시를 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계시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계시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의식하신다는 것을, 그가 자기 자신을 아신다는 것을, 그러므로 그가 자신의 선한 뜻에 따라서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을 그의 피조물들과 함께 나누실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범신론의 견지에서 보면, 하나님의 인격성, 자기 인식, 자기 지식 그리고 그의 합리적인 뜻이 모두 부인되어 버린다. 곧 하나님은 만물 속에 있는 본질과 에너지 이상 그 아무것도 아니다.


성경은 일반 계시 조차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부른다. 곧, 하나님께서 그 계시 속에서 말씀하실 것이 있으시며 또한 그것을 말씀하신다는 사고에서 그런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근본적으로 다르며 또한 종교와 계시 역시 서로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상을 견지한다. 만일 하나님이 자기의 생각을 갖고 계시며 자기 자신을 아시며 자신의 생각을 만물 속에 각기 정도가 다르게 표현하셨다면 사람의 어둔 정신으로 그런 하나님의 생각들을 오해하며 빠질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계시를 그릇 이해하는 죄악된 오류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일반 계시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 또는 음성이라 부름으로써 하나님의 특별 계시에서 주어질 좀 더 본질적인 말씀을 위하여 길을 열어 놓고 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 자신을 완전히 의식하시는 분이며 생각하실 수 있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반대로, 일반계시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음성 혹은 말씀을 깨닫는 자는 누구든지 특별 계시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반대할 기본적인 권리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에 나타나는 말씀하심은 서로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일반 계시의 경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만물 속에서 그의 생각들을 찾도록 하시는데 특별 계시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런 생각들을 직접 표현하시며 그런 방식으로 사람의 정신에게 제시하시는 것이다.


일반 계시에서는 객관적인 가르침이 그 목적에 잘 부합된다. 하나님께서 그 계시로써 의도하시는 것은 사람을 이끄사 그를 더듬어 찾아 발견하도록 하기 위함이며(행1:27) 그를 발견하지 못할 경우 핑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롬1:20) 그러나 특별 계시의 경우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을 향하여 측은함을 가지시며,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을 찾으시며 자기가 누구이신지를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특별 계시의 중심내용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다. 이 그리스도께서 오시자 수세기 전부터 구약 성경을 통해 선포되고 묘사되며 그가 나타나셔서 그의 사역을 이루시자 신약 성경의 기록들 속에서 그가 해석되고 설명되는 것이다. 결국 특별 계시는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선을 따라가면서 그 선과 병행을 이루고 또한 연결을 맺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이끄는 것이다.


물론 일반 계시도 말씀이라 부를 수 있으나, 이런 이유 때문에 특별 계시가 일반 계시보다 훨씬 더 정당한 의미에서 말씀하심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의 첫 절은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의 계시 전체와 선지자들과 아들의 계시 전체를 말씀하심이라는 말로 포괄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시대에’라는 표현을 통해 계시가 한순간에 완전하게 임한 것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 모양으로’라는 표현을 통해 계시가 동일한 방식으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계시의 목적으로 사용 하신 수단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로, 외부적이며 객관적인 성격을 띠는 수단들이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아브라함, 모세에게 나타나셨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시내산 위에서, 장막 위에서, 지성소 안에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 속에서 그렇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임재를 드러내셨다.(창15:17, 출3:2,13:21,19:9,레16:2 등) 또한 이적들도 계시의 수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적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어떤 독립적이고 인격적인 존재를 지니고 있지 않다거나(범신론) 창조 이후 그가 세상에서 물러나시고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도록 버려두셨다면(이신론) 이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자명해진다. 그리고 애초부터 이적의 불가능성이 분명하다면 이적의 실재성에 대한 논지가 필요 없게 되고 만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과 세상과 또 이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전혀 다른 사상을 갖고 있다. 우선, 성경은 하나님이 의식적이요 의지를 지니고 계신 전능하신 존재로서 온 세상을 그 에너지와 법칙들과 더불어 존재케 하셨고 또한 그 과정에서 그의 권능을 결코 완전히 소진하지 않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가르친다. 그에게는 어려운 일이 없으며 모든 일이 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성경은 세상을 그 각 지체들이 전체에 속해 있으면서도 모두 각기 다른 속성들을 지나고 있고 각기 다른 기능들을 부여받은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과 세상이 물론 서로 다르지만,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친다.(행17:28)


우리가 이런 기본 개념들에서 성경에 동의하여 유신론에 근거 위에 든든히 서있게 되면, 이적의 가능성에 대해서 의심하거나 공격할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유신론에 근거하면 자연과 역사의 모든 현상이 모두 하나님의 행위요 그의 역사하심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이 모두 이적이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심판과 구속이 동시에 이적들의 목적으로 나타난다. 노아의 홍수가 그 당시의 불경건한 세대를 멸하는 수단인 동시에 노아와 그의 가족을 방주 속에 보존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이런 이적들은 소극적으로는 불경건한 민족들에게 심판을 가하며, 적극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계속적인 계시를 위하여 자리를 만들고 보존한다. 이로써 그 이적은 목적을 이루었다. 그리고 목적이 이루어지자, 곧바로 충만한 계시가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뒤따라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인격은 그 기원이나 본질, 말씀과 역사에 있어서나 그 자체가 하나의 이적이다. 그는 지상 생애 동안 수많은 이적들을 행하시고 그분의 안에서 또한 그에게 행하여진 모든 이적을 통해 그분의 인격이 선명히 드러난다.


이적이란, 계시에 속한 이상스런 요소도 아니요 계시에 임의적으로 덧붙여진 요소도 아니다. 오히려 이적은 계시의 필수적이며 불가결한 요소이다. 이적 자체가 계시다.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를 수단으로 하여 자신의 모든 탁월하심과 완전하심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시는 것이다.


두 번째 종류의 수단은 사람들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주관적인 수단들이 이에 속한다. 그 중 가장 첫째가는 것은 구약 성경의 중보자인 모세에게 임한 계시일 것이다.(출3:11) 하나님은 환상이 아니라 직접적인 대화로써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런 종류의 수단에는 꿈도 있고(민12:6, 신13:1~6), 환상, 특히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마음이 감동을 받는 일도 이에 속한다.(민11:25~29, 삼하23:2, 마16:17, 행8:29, 고전2:12, 벧후1:21). 신약 성경에서는 성령이 부어지신 후부터 그런 감동이 계시의 수단으로 더 빈번하게 일어나며 더 유기적이고 영구적이다.


이 두 종류의 계시 수단은 현현과 감동으로 각기 분류할 수 있다. 이때 주의할 점은 현현이 단지 그저 행위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말씀이 함께 포함되는 것이다. 또한 감동이란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계시를 글의 형태로 기록할 때에 누린 그런 성령의 활동(성경의 영감)과는 다른 것이며, 모든 신자들에게 있는 내적인 조명하심과도 다른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제6장 특별 계시의 내용


특별계시가 사람들에게 임하는 여러 가지 방식에 대해 살펴보았으니, 이제는 특별계시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일반 계시를 공부할 때처럼, 여기서도 특별계시의 역사를 간단하게 조감해 보겠다.


1. 구약에 나타난 특별계시


1) 특별계시는 인류의 타락이후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 계시를 이어가셨다.(홍수 이전에는 셋의 가문으로, 홍수 이후에는 셈의 가문으로)


특별 계시는 인간의 타락 이후부터 곧바로 주어졌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셈의 8대 손인 데라의 아들이라는 점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셈에 대해서는 여호와께서 그의 하나님이셨고 계속해서 그러하셨다는 것이 보도되고 있다


홍수 이전 시대의 셋의 가문의 경우처럼, 홍수 이후에는 셈의 가문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길게 또한 가정 순결한 상태로 보존되었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에 그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이 알고 고백하고 있는 그 동일한 하나님으로서 나타내신 것이다. 성경의 다른 구절들을 통해서도 보고되고 있다. 즉 멜기세덱에 대해 말씀하는 구절들에서(창14:18-20) 보고되고 있는 것처럼 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완전히 잃어버려진 상태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나, 헤브론의 자손들이나, 또한 애굽의 바로 등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인지하였고 존귀하게 여겼다는 사실도 보고된다.


2) 바벨탑 사건 후에는 미신과 우상이 일어났다. 셈의 자손에도 확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불의에서 구하시려고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자손을 택하여 세우셨다. 노아언약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성취하시려고 약속을 추구하시고 약속을 이루어가셨다.


언어가 혼잡케 되어 인류가 갈라진 이후, 사람들 사이에 자라난 것은 불신앙이 아니고 미신이나 우상숭배였다. 애굽이나 가나안, 그리고 바벨론에서도 그랬다. 심지어 셈의 자손들 가운데서도 참된 신앙이 사라지고 우상 숭배가 생겨났다. 여호수아24:2과 24:14-15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의 아버지 데라가 강 건너편에 살면서 다른 신들을 섬겼고, 창세기 31:19,24과 35:2-4에 의하면 라반이 자기 가족의 특별한 신상을 지녔고 또한 그것들을 매우 소중히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류가 미신과 불의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고, 노아와 맺은 자연 언약이 깨지는 것을 막으며,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좌절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더불어 전혀 다른 조처를 취하신다. 다시 전면적인 홍수로 사람들을 멸하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다른 백성들은 자기들의 방식대로 행하도록 내버려두고, 한 사람과 또한 그 사람 속에서 한 민족과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을 통하여 그의 약속을 추구하시고 그것을 이루어 가시며, 또한 그 목적이 성취될 때에 다시금 온 인류를 그 축복 속에 포함시키실 수 는 있는 일이었다. 일시적으로 한 민족을 구별하시는 일이 모든 인류의 영구적인 통일을 우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3)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의 자손을 선택하신 것은 특별계시의 새로운 시대를 보인 것이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계시의 골격이다. 신앙의 골자였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에게서 계시사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 계시 가운데 족장들에게 주어진 부분은 사실 그 이전에 주어진 것에 맞추어진 것이요 또한 그 이전의 계시를 그 자체 속으로 흡수시킨 것이며, 동시에 거기서 더 전진하는 것이요 더 발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계시를 그 자체의 특징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계시와 아브라함의 신앙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계시를 위하여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따라서 이스라엘의 신앙의 골자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4) 구약의 특별계시에 대한 현대신학 사조에 대한 반론 :


여호와의 유일신 신앙을 아주 조잡한 이교도적 형태의 종교에서 기원된 것으로 생각하는 현대신학의 주장이 있었지만 그릇된 주장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신앙의 골자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길을 가로막아왔다 우선 그들은 족장 시대의 역사적인 가치를 전면 부인하면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을 그리스의 작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서 칭송하는 그런 반신적인 존재들이나 영웅들처럼 취급한다. 그 다음 그들은 이스라엘의 신앙이 물활론, 물신론, 조상숭배, 다영론 혹은 다신론등 아주 조잡한 이교도적 형태의 종교에서 기원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세 번째로, 그들은 이스라엘의 신앙의 골자가, 후대에 특히 기원전 8세기의 선지자 시대에 있었던 것처럼, 윤리적 유일신론으로 즉, 전능하시면서도 정의롭고 선한 존재이신 한 분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애쓰고 있지만 그릇된 것이다.


구약성경에 대한 이러한 현대신학의 사고는 이스라엘의 신앙 전체를, 그리고 다른 민족들의 신앙도 함께, 특별계시의 혜택이 그저 순전히 자연적인 기초 위에서 서서히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가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은 그런 견해를 반대하며, 현대의 사고를 이스라엘의 신앙의 기원도 그 본질도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실패한 것으로 철저히 배격하는 것이다.1)


5) 이스라엘의 신앙은 결정적으로 특징은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그들의 신앙의 중심과 핵심은 한분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의로우시고, 거룩하시다. 그들의 하나님은 친히 언약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셨다. 구약의 계시는 그렇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규정하셨다.


2. 특별계시에 나타난 언약과 믿음 그리고 언약의 성취


1) 사도바울의 율법과 언약의 이해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특징은 ‘믿음의 의’에 있다고 말씀한다(창15:6). 죄 사함의 은혜 공로가 인간의 공로가 없이 오직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은혜의 선물은 할례를 받은 상태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그 전에 주어졌다.(창15:6) 그래서 ‘믿음의 의’를 전제로 하는 것이며 할례는 의의 표징이요. 할례는 인(도장)으로서의 역할을 한 것이라고 바울은 주장한다.


2) 사도바울의 신학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 ‘이신칭의’의 교리는 구약의 계 시에 의존하여 신학적인 논지를 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하셨다. 첫째,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으시고 그를 부르시고, 그를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둘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셋째,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서 아브라함에게 후손이 있을 것이요, 큰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요, 그 민족이 가나안을 그 기업으로 받을 것임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모든 민족들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언약의 보증과 더불어 제시하시며, 할례의 표징으로 인치시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한 이 후에 그 약속을 확증하셨다.


“내가 네 하나님이 되며 네 백성의 하나님이 되리라.” 는 이 약속들은 구 백성과 이스라엘 통하여 그리스도에게까지 확대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온 인류와 온 세상에까지 확대된다.(롬4:1이하)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 요구가 아니라 약속이 그 계시의 핵심인 것이다. 인간의 편에서는 믿음이요. 믿음의 행위요, 믿음의 행실이다.


3) 아브라함의 언약을 기반으로 한 시내산 언약의 의미, 그 언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다. 언약의 모든 혜택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안에서 주어진다.


‘시내산 언약’과 율법적인 경륜이 새 시대의 시발점을 이룬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신앙과 구약의 경륜의 본질은 과거 아브라함에 주어진 그 약속이 후대의 율법의 경륜으로 인하여 폐지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아브라함의 언약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갈3:15이하)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어진 약속은 그 누구도 감히 폐기할 수 없는 하나의 약정, 혹은 유언과 비교된다. 거기에 포함된 모든 혜택도 마찬가지다. 그 약속들은 값없이 주어진 하나님의 경륜이다. 성경은 “씨들”을 오로지 야곱에게서 나오게 될 하나의 씨를 말씀하셨는데 결국 탁월하신 ‘씨’가 되신 그리스도에게서 나는 ‘씨’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한 약속으로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그의 구원의 소유물들을 양도하셨다. 이는 그 소유물들이 언젠가는 그리스도께 속할 것이며, 그의 소유가 되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것들을 온 세상에서 모아들인 교회에게 주실 것임을 시사한 것이다. 결국 언약은 이스라엘의 신앙의 핵심이요 골자로 남는다.


4)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에서 나타낸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본질


율법으로 시작되는 은혜 언약의 경륜의 의미와 중요성은 무엇이며, 또한 이스라엘의 신앙의 본질 혹은 골자는 무엇인가?


첫째, 율법은 언약에 덧붙여진 것이다. 언약 후에 주어진 것이다. 본래 약속과 연관된 것이 아니었다. 은혜언약은 영원하지만 율법은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인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안에서 그 약속이 성취되고 그가 그 약속의 내용을 받으셔서 나누어주실 때가 오기까지만 지속되는 것이었다.(롬5:20) 둘째, 율법의 일시적이며 잠정적인 성격은 이미 그 기원에서부터 표현되었다. 율법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온갖 종류의 매개 수단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약속은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친히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그 약속에 참여하게 된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거룩하며 의롭고 선하며 신령한 것이다.


5) 언약을 성취하시는 과정에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이 필요했다.


율법은 약속과 모순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끊임없이 성취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수단의 역할을 감당했다. 율법이 없었다면 약속과 그 약속의 성취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고 이스라엘은 곧바로 이교도 신앙으로 빠져 들어갔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시와 약속은 물론, 자신의 신앙과 자신들의 위치까지도 읽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율법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진노 아래와 죽음의 선고 아래 가져다 놓았다. 모든 사람을 죄의 범위 속에 묶어둠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주어졌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그 약속이 모든 신자들에게 베풀어지게 하셨다. 그리하여 이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얻을 기업에 이르도록 해 주는 것이다.(갈3:21,4:7)


모세의 등장과 함께 정말 새로운 시대가 하나님의 계시와 이스라엘 역사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율법 아래에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도 율법 이전에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계속하는 것이다. 율법은 약속에 덧붙여진 것으로 약속을 무효화시키거나 폐기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속을 그 자체 속에 취함으로써 약속은 발전과 성취에 기여한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의 핵심과 이스라엘의 신앙의 중심은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약속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기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추진하는 힘인 것이다.


6) 언약의 관계에는 이제 좀 더 구체적인 순종의 질서가 요구됨.


약속을 수단으로 하여 땅의 모든 족속들에게 복이 되어야 할 그 부르심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율법의 보호와 징계 아래 있어야 했다. 그리고 율법의 본질이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다. 첫째, 율법은 약속에서 나온 것도, 믿음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다만, 약속에 덧붙여진 것으로서 그 약속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성취를 위하여 길을 마련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둘째, 율법의 내용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바 그 목적과 일치한다.


7)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은 독특한 면이 있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세우신 독특한 민족이었고, 약속을 지닌 백성으로서 나아가도록 운명 지워진 민족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런 목적을 늘 염두에 두고 특별한 삶을 살아만 했다. 그런 시각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은 독특한 면이 있다.


첫째로, 그것은 철두철미하게 종교적이다. 공적인 예배를 규정하는 일과 윤리적, 시민적, 사회적, 정치적 규정들에 있어서도 종교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다. 율법은 추상적인 유일신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역사적인 관계에 근거한 것이다. 둘째로, 철저하게 도덕적이다. 도덕법, 시민법, 의식법등 세 가지로 구분한다. 그리고 율법 전체가 도덕적인 원리들에 의해서 영감되고 유지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셋째로, 이스라엘의 율법은 거룩한 법이이다. 이스라엘의 이 율법처럼 죄를 심각하게 죄로 바라보는 법이 하나도 없다. 넷째, 모세의 율법은 또한 자유의 법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백성 편에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들이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자신에게 지운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8) 언약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이스라엘의 정치와 율법 : 하나님께서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목적은 이스라엘의 통치체제 전반에 있어서 다른 민족과 다르게 왕은 하나님의 율법에 매여 있어야했다.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자가 되어야 했다. 거기에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셨다. 그리고 율법의 제정자가 하나님이셨다.


이스라엘은 이처럼 언약의 길로 가면 풍성한 복을 받게 되고,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면 저주가 임하게 하셨다.(신28:29) 그들의 정치와 율법은 철저히 언약적인 관점에서 부여되었다. 시내산 언약에서 그 율법의 목적을 밝혀주셨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에게 그렇게 신지식을 전해 주고, 오직 그런 방식으로 민족을 통치하게 하셨다.


9) 언약적인 관점에서 본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심


성경은 언약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바라본다. 구약의 역사서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의 진전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분이신가를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다.


사사시대: 사사들의 시대부터 이스라엘의 역사는 한편으로는 배도와 형벌, 그리고 두려움으 로 얼룩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원과 축복이 임하는 역사였다.


바벨론 포로시대 : 바벨론 포로로 이스라엘은 하나의 백성으로 씻음을 받고, 우상 숭배에서 벗어낫고,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통치에 놓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율법 조문만 맹목적으로 탐구하고 옛 언약과 본질, 정신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성경과 관련된 스콜라주의가 발전하였고, 여러 분파들이 일어나서 신적인 계시를 임의적으로 다루어 영적 이스라엘을 육적 이스라엘로 대체시켜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계속 되었으며, 바벨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은 정치적 독립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것은 이스라엘의 신앙에 유익이 되기도 하였다.


팔레스타인 내에서나 바깥에서 이스라엘은 그 자신의 모습을 유지 했고, 어디서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하나이심과 순결하심을 선포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민족들에게 복이 될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슴에 품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이교도들 가운데 있게 될 기독교 세계를 위하여 길을 열어 놓았던 것이다.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신실한 백성이 보존되었고, 많은 이들이 이스라엘의 구속을 조용히 기다렸다. 주님의 모친 마리아는 이들 중 가장 영광스러운 실례로 최고의 계시를 받아 그것을 지키게 된 것이다.(눅1:38) 이렇게 해서 구약 전체가 그리스도께 집중된다. 그 분은 하나님의 완성된 계시이다. 그는 율법의 성취시요, 모든 의의 성취시요 이제 그의 피로 세워지는바 언약의 성취이시다. 구약에서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인도되었으나 신약에서는 모든 것이 그에게서 파생된다. “내가 네 하나님이 되고, 네가 내 백성이 되리라.”는 바로 이것이 그 약속의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그 약속의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약속이, 과거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도 계실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그로 말미암아 새 예루살렘에서 완전히 성취되는 것이다.(계21:3)


제7강 성경


1.성경과 계시


두 계시는(일반계시, 특별계시)에 대한 지식은 성경으로부터 온다. 계시는 그것을 기록한 성경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있었다. 모세 이전에도 분명 계시가 있었으나 성경은 없었다. 그 계시는 후에 글로 기록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성경은 계시 그 자체가 아니요. 계시의 묘사요 기록으로서 그것을 통해서 계시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성경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다. 성경을 그보다 앞서는 계시와 구별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계시와 분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성경은 계시에 우연하게 임의적으로 부쳐진 결함 있는 보조물이 아니라, 그 자체가 계시를 구성하는 부분이다. 성경이라말로 계시의 성취요 모퉁잇돌이요 반석인 것이다.


1)성경은 어떤 보조물이 아니라, 그 자체가 계시를 구성하는 부분이요. 성경이야말로 계시의 성취요. 계시의 모퉁잇돌이요. 계시의 반석이라는 성경의 자증(4가지)


첫째 하나님은 그의 선지자들에게 계시를 입으로 선포하라고 명하기도 하시지만, 또한 그 계시를 기록할 것을 자주 명하신다. 출17:14에서 ‘아말렉’과 전쟁의 승리 기사, 출24:34:27에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에 따라서 율법과 규례들을 기록할 의무를 부여받는다.


민33:2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여정을 기록함, 신32에 모세가 부른 노래를 기록하게 하심, 선지자들에게도 받은 계시의 내용을 기록하라고 명령하신다.(사8:1, 30:8, 렘25:13) 그 명령들은 하나님께서 아무도 그의 말씀에 가감하지 말 것을 요구하셨다. 그의 계시를 글로 기록하는 일을 특별히 보살피셨음을 강조하셨다.


둘째 모세와 선지자들 스스로 그들이 말씀을 입으로만이 아니라 글로써도 선포해야 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인식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모든 율례와 규례들을 알려주시고, 율법 하나하나를 일일이 하나의 서문처럼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그 때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등의 말씀들이 나타난다. 율법을 주시는 일 전체가 여호와께서 하신 일로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선지자들도 예언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예언들을 소개하면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이상” “말씀” “계시”등의 표현을 쓴다.


셋째 신약 성경에도 증거가 나타난다. 예수와 사도들이 모세와 이사야와 다윗과 다니엘 등을 통해서 주어진 구약 성경의 말씀들을 거듭거듭 인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기록되었으되” “성경에 이름과 같이”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등의 문구를 사용하여 그 인용문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런 방법을 통해서 그들은 구약성경이 여러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고, 여러 다른 저자들들 통해서 기록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경이 유기적으로 하나를 이루며 또한 그 기록된 형태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이 저자이심을 분명히 시사하고 있다. 성경에 포함된 책들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주어진 것이다.(영감靈感-계시를 기록하는 일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성령의 구체적인 활동을 가리켜 일반적으로 영감이라 부른다.)


넷째 신약 성경에 대해서는 비록 예수께서 친히 기록된 문서를 남기지는 않으셨으나 사도들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자격을 구비시키셔서 특히 그가 떠나신 후에 세상 속으로 나아가 그의 증인들이 되도록 하셨다.


그들에게 성령을 베푸셔서 성령이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모든 내용을 기억나게 하시고,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셨다. 온 세상으로 나아가라는 명령에는 성경을 기록하여 예수를 증거 하라는 명령도 포함되어 있다. 마태는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족보를 기록한다. 마가는 복음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로 시작되었고 그에게서 기원되었다는 점을 말한다. 누가는 사도들의 증언을 근거로 해서 데오빌로에게 확신을 주도록 제시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복음서를 기록하였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의 복음이 계시를 통해서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았음을 확신하고 있다. 그 입의 말씀과 펜으로 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 그는 누구든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까지 하였다. 사도 요한도 계시록 마지막 장에서 이 책들의 예언에 무엇을 덧붙이거나 제하여 버리면 무서운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던 것이다.


2)계시를 기록하는 일에 있어서 성령의 구체적인 활동에 관한 설명 :


(1)일반은총의 세계에서 성령의 역사: 성령의 영감의 본질에 대해 다소나마 빛을 비추어줄 수 있는 또 다른 현상이 예술가들의 영감이다. 하나님이 피조물들의 생각과 의지에 영향을 주신다. 하나님은 그의 영을 통하여 그의 창조 세계에서 역사하시며, 그 속에 임재 하신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 행동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서 일어나며,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의 계획에 따라 일어난다.


(2)내주하시는 설령: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자녀들의 마음속에 거주하신다. 우리에게 내주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게 하시고, 하나님께로부터 베풀어지는 것들을 알게 하시며, 지혜와 지식의 은사들을 주시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그들이 소원을 갖고 행하도록 그들 속에서 역사하신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모든 신자들이 누리는 것으로서 정신을 조명하시며, 의지와 성향을 지배하시고 이끄신다.


(3)성경 기록의 영감-계시를 기록하는 일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성령의 구체적인 활동: 세상과 교회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활동과, 선지자와 사도들에게 역사하신 활동이 서로 구별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진리는 하나님이 그 말씀의 진정한 주인이시며, 다만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대리자들로 사용하셔서 그 말씀을 표현하셨다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인하여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활동이 촉진되고, 힘을 얻고 순결해진다. 성경은 한순간에 그 전체로서 완전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2.구약성경


1) 구약39권 중에서 5권은 율법서, 12권(여호수아부터 에스더까지)은 역사서, 5권(욥기-아가서), 시가서 17권은 선지서로 이루어진다. : 이 모든 책들은 여러 세기를 거치는 동안 다양한 상황 속에서, 아주 다양한 사람들의 수고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또한 각 부분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어떻게 해서 점차로 생겨나게 되었으며, 각 책들이 어떤 정황 속에서 기록되었는지를 정확히 아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런 지식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일에 큰 유익을 얻게 된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령의 영감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의 삶과 생각 속에 깊게 그리고 광범위하게 역사했음을 우리가 배우게 된다.


2) 율법서와 역사서 : 모세의 때까지는 성경도 없었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도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모세였다. 모세의 율법 제정을 기초로 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이스라엘의 후기의 역사 속에 세 가지 거룩한 문헌이 등장하게 되는데 시가서 예언서 “지혜” 문헌이다. 이러한 성령의 특별한 은사들이 셈족에게 특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독특한 자연적인 은사들과 함께 발휘되었다. 예언은 아브라함에게 시작되며, 야곱과 모세와 미리암에 의해서 시행되지만 사무엘과 그 이후 시대에 이르러 특별히 두드러지게 되고, 바벨론 포로 이후의 시대에까지 이스라엘 역사를 통틀어 계속 시행된다. 선지자들의 책들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에 두 가지로 구분된다. 전선지서로는 여호수아,사사기,사무엘상하,열왕기상하가 있다. 후선지서로는 말씀의 선지자. 주전 9세기부터 요엘과 오바댜의 시대로부터 선지자들은 그들의 예언의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게 되고,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을 받기도 했다.


3) 노래와 예언 : 노래(시편)들이 예언과 함께 병행되고 있다. 역사서에 여러 주제들에 관한 노래들이 보존되어 있다. 검의 노래, 우물의 노래, 헤스본 정복의 노래, 홍해를 건넌 것을 기념하는 노래, 모세의 노래, 드보라의 노래, 한나의 노래,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즈음한 다윗의 애가, 아브넬을 위한 다윗의 애가, 야살의 책등이 있다. 선지자들의 책에도 여러 노래들이 보도되고 있다. 예를 들어서 이사야 5장의 포도원의 노래, 이사야 14장의 패망한 바벨론 왕을 조롱하는 노래, 이사야 38장의 히스기야의 찬양, 요나서 2장의 요나의 기도, 하박국의 찬양의 노래 등이 있다. 이 노래들 중 많은 것들이 시편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어느 것이 어느 것에게로 전수되었는지를 가늠하기 매우 어렵다. 노래와 예언도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형식에서도 그런 관련성이 나타나고 있다. 둘 다 성령의 권능의 영감에서 나왔으며, 둘 다 자연과 역사의 세계 전체를 시야 속에 두며, 둘 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의 빛 속에서 보며, 둘 다 메시야의 왕국을 선포하며, 둘 다 시의 언어와 형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4)예언과 잠언 : 예언과 시편 외에 호크마, 즉 잠언 혹은 지혜 문학이 있다. 요담의 우화, 삼손의 수수께끼, 나단의 비유, 드고아의 여인의 행동 등에서 드러나듯이 이것 역시 자연적인 은사에 기초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 문학은 특별히 솔로몬에게서 그 고유한 성격을 갖게 되었고, 그 이후 바벨론 포로기 이후까지 다른 지혜 자들의 잠언에서 욥기, 전도서, 아가서 등에서 계속되었다. 예언은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들의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시편은 하나님의 종들의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할 때에 나오는 메아리를 표현하였고, 잠언과 지혜문학은 하나님의 뜻을 실제적인 삶과 행실과 관련짓는다. 신적인 계시라는 기반에 근거를 둔다. 출발점은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인간적인 면에서 전반적인 의의를 지니는 것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모든 시대에 걸쳐서 보존되는 것이다. 구약의 경륜 하에서, 선지자직과 제사장직과 왕직이 그 부르심을 완수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 거룩한 문헌이라는 고귀한 보화가 온 세상의 공통적인 소유가 된 것이다.


구약 성경은 신약 성경에서 절정에 이른다. 구약은 신약에서 드러나며 신약의 핵심과 본질이 이미 구약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이라는 명칭은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에 그의 백성들에게 주신 은혜 언약의 두 경륜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후에 그 용어들이 그 언약의 두 경륜의 묘사와 해석을 구성하는 두 가지의 기록들을 각기 지칭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바뀌어졌다.


3. 신약성경


신약 5권의 역사서(사복음서와 사도행전) 21권의 교리서(사도들의 서신서) 1권의 예언서(요한계시록)로 이루어진다. 주후 1세기의 후반부에 기록 되어진 것이다. 복음서가 신약 성경 맨 처음에 들어 있는데, 순서는 연대기적인 것이 아니라 자료의 성격에 따른 것이다. 복음이라는 단어는 처음에는 기쁘고 유쾌한 메시지를 뜻하는 일반적인 단어였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좋은 소식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그러다가 후대에 가서야 비로소 이그나티우스, 유스티누스등 교회의 저자들이 그리스도의 그 기쁜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는 책 혹은 기록들을 지칭하는 뜻으로 사용하게 된다.


1. 복음서 저자들의 기록과 기 신약성경의 기록들 : 신약 성경의 네 권의 복음서에는, 하나의 복음이 네 사람에 의하여, 네 가지 시각에서, 네 가지 형식으로 각기 다르게 묘사 되었다. 이런 사실이 현존하는 성경의 그 네 가지 책에 붙여진 명칭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마태가 전한 복음서, 마가가 전한 복음서 등이 그것이다. 각기 바라보는 면은 다르지만, 사복음서 안에 하나의 복음이,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의 한 가지 형상이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1)마태복음은 주후 64년경 팔레스타인에서 특별히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쓰였다. 예수께서 참으로 그리스도시며 구약성경의 모든 예언들이 그에게서 성취되었음을 그들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하여 본래 아람어로 복음서를 기록했다.


2)마가는 처음에 바울을 섬겼고, 후에는 베드로도 섬겼다. 주후 64-67년경에 마가복음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3)누가는 바울과 함께 여행한 동역자였다. 마지막까지 그를 충실히 도왔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 관한 역사서를 기록하였고, 팔레스타인과 소아시아와 그리스와 로마에까지 복음이 처음으로 퍼져나가는 일에 관해서도 역사서(사도행전)를 기록하였다. 대략 70-75년경에 기록하여 데오빌로라는 사람에 보냈다.


4)요한은 교회가 반기독교 세계로부터 말씀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경향으로부터 오는 이런 위험 요소들을 안전하게 극복하도록 인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80년부터 95년 사이에 복음서를 기록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머무실 때에도 성육신하신 말씀이셨음을 시사했고 그의 서신서 들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지금의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성육신하신 말씀이심을 시사하고 있다. 계시록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미래에도 계실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신약의 책들은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역사적인 계기를 통해서 기록되었다.


2. 성경의 후속적인 연구들에 대한 언급 : 첫째 성경은 각 책마다 개별적인 기원을 갖고 있다는 것 외에도 그 책들이 결국 하나의 문집으로 혹은 정경으로(즉 믿음과 생활의 규범이 되는 책들의 목록 속에)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선지자와 사도들이 기록한 원본이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유실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셋째 구약은 히브리어로 신약은 헬라어로 각각 기록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넷째 성경을 해석하는 일에 굉장한 배려와 노력이 들여졌다.


결국 최종적으로 우리가 판단 할 때에 흔히 나타나는 인간적인 실수를 사용하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유지시키시고, 그의 생각들이 세상의 지혜를 무너뜨리고 승리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 자신이시라는 것을 명심하자.


제 8강 성경과 신앙고백


1. 정경화 과정


1)구약과 복음이 초대교회에 일치되게 받아들여짐


기독교 교회 전체에서 한결 같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왔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우선 구약 성경의 경우가 그렇다.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에는 구약을 언급하며 구약에 호소하는 예가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 마치 그런 일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기라도 한 거처럼,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유대인의 구약의 권위가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기독교 교회에 전수된 것이다. 복음은 구약을 전제로 하고 있다. 사실, 구약이 없었다면 복음이 받아들여질 수도 인정받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복음이란 결국 구약의 약속들의 성취이므로, 구약이 없다면 복음도 허공에 뜰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약은 복음이 딛고 서 있는 주추대요, 복음이 자라나온 뿌리라 하겠다. 복음이 가는 곳마다 구약 성경도 함께 나아갔고, 아무런 반대도 받지 않고 즉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구약 성경이 없는 신약의 교회라는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교회는 율법과 시편과 선지자들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2)사도들의 서신서와 구약 : 교회의 정경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임


이러한 구약 성경이 사도들의 글들에 곧 첨가되었다. 이 글들 중 복음서와 공동 서신서 같은 것들은 온 교회를 위하여 기록된 것들이다. 그리고 몇몇 서신서 들의 경우처럼, 로마나 고린도나 골로새 등에 있는 특정한 교회들을 위하여 기록된 글들도 있다. 이 글들이 사도들과 사도적 인물들에게서 나왔으므로, 처음부터 이 글들이 기독교 교회들로부터 높임을 받았고 모임들에서 큰 소리로 읽혀졌고 때로는 다른 교회들에게도 보내어져서 함께 읽혔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예를 들어서 사도 바울은 친히 자기가 골로새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를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보낼 것을 요구하며, 또한 골로새의 그리스도인들이 그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낸 편지도 주목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골4:16).


3)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복음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그리고 베드로후서3:15-16에서 베드로는 그의 독자들이 최근 바울에게서 받은 편지를 언급 할 뿐 아니라 바울의 다른 편지들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그 편지들이 베드로 자신이 제시하는 것과 동일한 교리를 가르치나 때로는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배우지 못한 연약한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왜곡시킬 소지가 있음을 말하기도 한다. 물론 이 시기에 바울 서신들의 “문집”이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하지만 바울의 저작들이 그것들이 각기 보내진 지역 교회들에서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서도 알려져 있었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자연히, 이 초기의 교회들은 대부분 사도들과 그들이 제자들에게서 복음에 대한 지식을 얻었던 것이다.


4)서신서들이 가지는 중대성과 정경화 작업


사도들이 사망하고 그들이 설교가 끊어지자, 자연히 사도들이 저작들이 더욱더 소중해졌다. 2세기 중반의 증언을 통해서, 우리는 복음서들이. 그리고 후에는 서신까지도, 신자들이 집회에서 정규적으로 읽혀졌으며, 이런저런 진리의 증거로 여겨졌고, 구약의 책들과 동등하게 순결한 것으로 인정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2세기 말에 이르러, 신약의 책들이 구약의 책들과 더불어 “성경 전체”(the whole Scripture)로, “믿음의 기둥과 터”로, “그 성경”(the Holy Writ)으로 여겨지고, 예배 모임에서 정규적으로 읽혀지게 되었다(Irenaues),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Tertullian), 몇몇 저작들(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후서, 요한이서, 요한요삼서, 요한계시록)을 비롯해서 후에 외경으로 간주된 몇몇 책들 에 대해서는 오랜 기간 동안 그것들을 성경으로 간주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서 의견의 차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도, 점차로 견해들이 더욱 선명해졌고 의견의 일치가 있게 되었다. 이렇게 보편적으로 인정된 저작들을 함께 모아서 정경(政經:Canon: 믿음의 진리의 규범을 뜻함)이라는 이름으로 묶게 되었고, 360년 라오디게아 교회회의(the Synod of Laodicea)에서, 369년 누미디아(Numidia)의 히포 레기우스(Hippo Regius)에서, 그리고 397년 카르다고(Carthage)에서 정경으로 규정되고 확립 되었다.


정경에 대한 공격 (18세기)


이 구약과 신약 성경이, 모든 기독교 견해들이 그 위에서 서로 교제하며 그들의 입장을 세우거나 혹은 입장을 세운다고 주장 하는 바 선지자와 사도들의 근간(根幹)을 구성하는 것이다. 모든 교회들은 공식적인 고백 가운데서 이 성경들의 신적 권위를 인정해왔고 또한 그것들을 믿음과 생활의 신뢰성 있는 규범으로 알고 사용하여 왔다. 이 점에 대해서는 기독교 교회들에서 한 번도 견해의 차이나 갈등이 없었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공격이 외부에서(예컨대, 2세기의 켈수스(Celsus)와 포르피리오스(Porphyry)등의 이교도 철학자들의 공격을 들 수 있다) 이루어졌다. 기독교계 내부에서는 그런 공격이 전혀 없다가 18세기에 가서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2. 교회와 성경


교회가 감당해야하는 사명과 성경


그런데 교회가 하나님께로부터 이 성경을 받은 것은 그저 그것에 기대기 위함도 아니요, 이 보배를 땅속에 파묻어 두기 위함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교회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그것을 해명하고, 그것을 선포하고, 그것을 적용하고, 그것을 번역하고, 그것을 외부에 널리 퍼뜨리고, 그것을 권장하고, 그것을 수호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경 속에 제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사상들이 언제나 어디서나 인간의 사상들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게 할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다. 교회가 부르심을 받은 일은 그 전부가 하나님의 말씀을 수종들고 시행하는 데 있는 것이다. 신자들의 집회에서 그 말씀이 선포되고 해석되며 적용될 때에, 언약의 표징 속에서 함께 나누어지고 또한 권징 가운데서 유지될 때에, 그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보다 넒은 의미에서 보면, 말씀을 섬기는 이러한 일에는 더 많은 것들이 포함된다. 예들 들어서, 우리의 마음과 삶에서, 우리의 직업과 사업에서, 집과 들판과 사무실에서, 학문과 예술에서, 국가와 사회에서, 구제와 선교의 일에서, 삶의 모든 영역과 길에서, 이 말씀을 적용하고, 시행하며, 규범으로 삼는 것이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어야 한다.(딤전3:15) 즉, 세상을 대적하여 진리를 떠받치고 그것을 유지하며 굳게 세우는 하나의 주추대요. 교회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무시하고 잊어버리면, 교회는 그 의무를 태만히 하는 것이요 또한 그 존재자체를 해치는 것이다.


성경과 그 성경을 중심으로 교회에 부여된 사명 : 하나님의 말씀을 수호하는 일


교회가 이 점에서 느슨해지면, 곧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에 대하여 다른 의견이 생겨나게 된다. 성령이 교회에게 약속되었고 또한 모든 진리에로 인도하는 인도자로 주어졌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교회 전체나 혹은 그 일부분이 무오성(infallibility)을 선물로 부여받았음을 시사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도 시대의 교회들에서부터 이미 이교도 신앙이나 유대교에서 비롯된 갖가지 이단들이 일어났다. 그 이후의 시대를 통틀어서, 이것들이 교회를 계속해서 위협하는 두 가지 암초들로 작용하게 되며, 따라서 교회는 항상 각성하여 조심스럽게 이것들을 피하여야 했던 것이다. 우로나 좌로나 치우친 그런 이단들에 대적하여, 교회는 단호하고도 분명하게 목소리를 내고, 또한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말씀 속에 허락하신 진리가 무엇인지를 진술할 의무가 있다. 교회는 소규모의 회의와 대규모의 회의(공의회)를 통해서, 교회의 확신에 따라서 신적 진리로 지켜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를, 그리하여 당면 사안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으로 지켜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세움으로써 그 일을 행하여왔다.


성경과 신조, 신앙고백


이렇게 해서 성경에 세워진 진리는, 그것을 믿고 포용하는 모든 사람들의 편에서는 하나의 신앙고백(a confession)으로, 하나의 신조(信條:a creed)로 이어진다. 신앙고백은 모든 신자들의 의무요. 또한 그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명령이기도 하다. 온 마음과 심령으로 참되게 믿는 사람은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즉, 그를 자유하게 한 그 진리를 증언하며, 또한 그 진리로 말미암아 그 마음속에 심겨진 소망을 증언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마10:32, 롬10:9-10, 고후4:13,벧전3:15, 요일4:2-3) 그러므로 모든 신자와 모든 교회는 성령의 증거 하심이 거기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고백하는 법이다. 그리고 오류들과 이단들이 점점 교묘해짐에 따라서, 교회는 자기가 고백하는 진리를 제시하는 데에 더욱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그 신조를 명확하고도 애매하지 않은 형태로 진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자연히 구두로 하는 고백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밀려서 기록된 고백이 되는 것이다.


신안고백과 신조의 목적 : 성경을 유지시키고 개개인의 변덕스런 처사에 대항하여 성경을 보호하는 데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런 교회적인 고백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갖가지 근거들에 대해 반대를 제기한 자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서, 네델란드의 항변파(抗辯派:the Remonstrants)는 신앙고백이 성경의 유일한 권위와 양심의 자유를 해치며 지식의 성장을 저해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반론들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신앙고백이나 신조들의 기능은 성경을 뒤로 밀어놓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유지시키고 개개인의 변덕스런 처사에 대항하여 성경을 보호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백과 신조들이 양심의 자유를 해치기는커녕, 오히려 연약하고 무지한 심령들을 곁길로 가게 만들려는 온갖 종류의 이단 사설들에 대항하여 양심을 견고히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고백들은 지식의 성장을 저해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경로로 자라도록 지켜주며, 신앙고백 고백들 자체가 믿음의 유일한 규범인 성경을 근거로 점검받고 개정되는 것이다. 그 점검과 조사는 물론 정당하고도 합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런 점검은 어느 때에나 행해질 수 있는 것이다.


사도신경


기독교 신조들 가운데 시기적으로 가장 오랜 것은 사도신경(使徒信經:The apostolit creed)이다. 물론 사도들이 직접 이것을 작성한 것은 아니나, 2세기 초엽부터 이것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것은 마태복음28:19의 세례의 명령에서 발전된 것으로, 본래는 현재의 것보다 약간 짧았으나, 기본적으로는 동일했다. 이것은 기독교가 근거를 두는 위대한 시실들에 대한 짤막한 요약으로서, 계속해서 모든 기독교계의 공통적인 근거와 깨뜨릴 수 없는 연합의 끈으로 역할을 해오고 있다. 이 사도신경에 네 개의 고백들이 추가되었는데. 그것들 모두가 전교회적인(ecumenical) 성격을 띠는 것들이었고, 많은 교회들이 그것들을 받아 들였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the Council of Nicea)의 신조: 개혁주의 신앙고백의 제9항에서 니케아 신조로 불리나, 사실은 니케아 신조가 확장된 것으로 -물론 그 속에 니케아 신조를 포괄하고 있다 - 그보다 훨씬 후대에 생겨난 신조:451년의 칼케돈 공의회(the Council of Chalcedon)의 신조;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타나시우스(the Creed of Athanasius) 신조로 잘못 명칭이 붙여진 신조, 이 모든 신앙고백들 속에 그리스도와 삼위일체에 관한 교리가 세워져 있는데. 이는 초기 몇 세기 동안 그것들이 문제로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리스도를 누구라 생각하는가? 이것이야말로 주의 말씀을 근거로 교회가 스스로 답변하고 또한 온 세상을 상대로 지켜가야 했던 절대 절명의 문제였던 것이다.


유대주의자들과 이교도의 사설에 대한 기독교의 진리수호: ‘그리스도는 누구신가?’라는 문제


유대교적인 견해 쪽에 선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한 인간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요. 비범한 은사들을 지녔고, 예언적인 심령으로 힘을 발휘했고, 행위와 말씀에 능한 사람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사람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교도적인 견해 쪽으로는, 예수를 신들의 아들로, 하늘에서 온 신적인 존재로, 구약의 천사들처럼 잠시 동안 이 땅에 그림자 같은 몸(a shadow-body)으로 자신을 나타낸 그런 신적인 존재로 여기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가 아버지의 독생자로서 육신이 되신 분이심을 고백하기를 원치 않았다. 이 두 이단들을 대적하여,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을 좇아서 한 편으로는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하나님의 독생자이셨음을 주장하며,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그가 진정으로 육체로 오셨음을 주장해야 했던 것이다. 교회는 명확한 정의(定義)의 문제에 대하여 오랜 씨름 끝에 신조들 속에서 그런 믿음을 그렇게 고백한 것이다.


사도신경이 요약하고 있는 기독교 사실들에서(그리스도의 인격(person) 교리, 삼위일체의 교리) 기독교 교회들 모두가 의견의 일치를 보며, 이로써 유대교와 이교를 대적하여 하나의 단위로 연합되는 것이다. 교회는 사도 요한과 일치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로 오셨음을 부인하는 모든 반 그리스도적 가르침에 배척하였다(요일2:18, 22; 4:2,3). 이렇게 해서 기독교 교회는 그런 신조들을 작성하고 공인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핵심을, 그 고유한 성격을 유지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신앙고백들을 제정한 공의회들과 교회 회의들이 온 기독교 세계에 그렇게도 위대하고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것이다. 사도신경이 요약하고 있는 기독교 사실들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격(person) 교리와 삼위일체의 교리에서, 기독교 교회들 모두가 의견의 일치를 보며, 이로써 유대교와 이교를 대적하여 하나의 단위로 연합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교회들이 서로 분열되는 현상이 있다 해도, 이러한 연합을 잊어버리거나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동방교회의 정교회 교리


그러나, 이러한 공통적인 기초에서 곧 온갖 이견(異見)들과 분열들이 일어났다. 2세기 후반에는 권징을 통해서 몬타누스파(Montanists)가 분리되었고, 3세기 중반에는 노바티아누스파가 분리되었으며 4세기에는 도나투스파가 분리되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삼각하게, 동방교회와 서방 교회가 점차 서로 분열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 요인들이 거기에 작용했다. 우선, 그리스 사람들과 라틴 사람들 사이에 반목이 있었고, 콘스탄티노플과 로마 사이에 긴장이 계속되었으며, 총대주교와 교황 사이에 수위권 다툼이 계속되었다. 여기에 교리와 예배에 관한 갖가지 사소한 이견들이 있어 서로 대립하였다.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존재에 있어서 성령께서 오직 성부로부터만 나오신다는 그리스 교회의 고백이었다. 서방 교회는 성령께서 성부와 또한 성자로부터 나오신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이들 사이의 분열이 짧은 간격을 두고 계속 있다가, 1054년에 완전히 분열되었다. 동방 교회는 자신들이 초대 교회의 가르침을 더 충실하게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스스로를 정교회라 여겼는데, 이 교회는 온갖 분파들이 형성되고(아르메니아파 그리스도인들, 시리아의 네스토리우스파, 페르시아의 도마파 그리스도인. 단성론을 주장하는 시리아의 야곱파, 이집트의 콥트파, 레바논의 마론파등), 또한 1453년 이슬람교가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함으로 인하여 광장한 손실을 겪었다. 그러나 동시에 슬라브족들의 회심으로 동방교회는 중요한 이득을 얻었고, 그리스, 터키. 러시아,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등에 정교회로서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다.


서방교회 로마 카톨릭의 세속화


서방에서는 로마의 주교들의 지도하에 가톨릭 교회가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그 세력을 계속해서 확장시켰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회심으로 말미암아 오랜 박해와 증오의 시기가 지나가고, 안식과 특권을 누리는 시기가 이어졌다, 교회의 세속화가 일사 천리로 진행되었고, 콘스탄티누스의 회심으로부터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별로 이룬 것이 없었다. 처음 몇 세기 동안 교회가 이교를 저항하고 정복시켰듯이, 후에도 교회는 여러 민족들과 유럽의 문명의 회심을 위해 온 힘을 기울였고, 기독교의 위대한 진리들과 교회의 독립성을 확고히 유지하는 데에 힘을 쏟았고, 기독교 예술과 학문의 발전에 효과적으로 협력하였다.


교회는 널리 세력을 확장해 가는 동안 본래의 사도적인 기독교가 지시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런 사실은 특히 다음 세 가지 점에서 잘 드러난다.


1)카톨릭 교회는 전통을 점점 더 높이 치켜세워서, 성경 다음가는- 그리고 때로는 성경과 버금가는- 신앙의 독자적인 규범의 위치에다 올려놓았다. 미사, 성직자의 독신, 성자로 공인하는 일 ,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 등, 수많은 로마 교회의 교리들과 관행들이 그 어떠한 성경 본문으로도 입증되거나 지지를 받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그런 교들과 관행들이 “전통”을 근거로 유지되는 것이다. 이 전통에 대해서, 물론 “어디서나, 언제나, 누구나 믿어야만” 비로소 전통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나, 어떤 것이 전통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로마의 교황인 것이다.


이렇게 로마는 성경과 교회의 관계 전체를 바꾸어 놓았다, 성경은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고 그저 교회에 유익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교회는 성경에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성경을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선언하여 그것에 권위를 부여하지 않으면, 성경이 전혀 권위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성경은 그 자체가 애매모호한 것으로서 교회가 그것을 명확하게 해 주어야 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성경은 교회에 앞서는 것도, 교회의 기초를 구성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성경에 앞서며, 성경이 의지하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선지자와 사도들이 영감의 은사를 받았으나, 교황도 똑같은 은사를 받았다. 그리하여 교황의 직분으로 “교황좌 선언”(교황의 권위에 의하여)을 발할 때에 성령께서 그것을 특별히 뒷받침하므로, 그것이 무오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그 자체로서 충족하며, 필요하다면, 성경이 없이도 얼마든지 잘 나아갈 수가 있고, 교회야말로 구원의 유일하고 참되며 완전한 중보자인 것이다. 교회는 또한 성례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은혜의 혜택들의 소유자요 분배자이다. 교회야말로 은혜의 수단이요, 지상의 하나님의 나라요 왕국이다.


2)둘째로, 카톨릭 교회는 물론 복음의 핵심-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등- 을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매우 불순한 요소들로 그것을 뒤섞어 버렸고, 그리하여 율법과 복음의 구별을 혼란케 하였다. 본래의 복음이 왜곡되는 이런 현상은 이미 초기부터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후대로 오면서 그런 현상이 급속히 파급되어 공식적인 인준을 얻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싸움 -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에서, 로마교회는, 특히 종교개혁 이후의 로마 교회는, 그저 명목상으로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점점 더 펠라기우스 편을 들어왔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듣는 사람에게 죄와 자기 자신에게서 얼굴을 돌이켜 하나님과 은혜를 향하고 또한 이러한 회심의 상태 속에서 끝까지 보존될 능력을 주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스스로 원하고 스스로를 보존하는 일은 사람 자신이 기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행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일을 스스로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마 교회는 그 선행들은 두 가지로 분류한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정규적인 계명들을 지키는 행위와,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덧붙이신 권면들을 충족시켜 주는 행위들(독신, 청빈, 순종)이 그것이다. 첫 번째 길도 좋은 길이다. 그러나 두 번째 길이 더 낫고, 더 어려우면서도 더 짧고 더 안전하다. 첫 번째 길은 평신도를 위한 길이요, 두 번째 길은 종교적인 사람들 - 수도사들과 수녀들 - 을 위한 길이다. 누구든지 이 선행의 길을 걸으면 교회로부터 성례들을 통하여 언제나 자기에게 합당한 만큼 은혜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끝까지 인내하면, 천국에 -회심 때나 죽음의 때가 아니라 연옥에서 고통의 기간을 거친 후에 - 이를 것이다.


3)셋째로, 가톨릭 교회는 곧 성직자와 평신도를 서로 구별하기 시작하였다. 정당한 의미에서 제사장들은 일반 신자들이 아니라 성직자들이다. 그리고 이 성직자들도 갖가지 계층으로 분류하였다. 신약에서는 장로와 감독(혹은, 주교)이 모두 동일한 직분 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서로 혼용되었다. 그러나 2세기부터 이런 동질성이 무시되었고, 감독은 집사와 장로들(사제들)보다 훨씬 높이 올려 졌고, 점차 사도들의 계승자요 전통의 보존자로 간주되게 되었다. 이 주교들은 휘하에 참사회원, 사제. 지도 신부 등을 거느리며, 대주교, 수도대주교, 그리고 교황을 그 위에 모시는 것이다. 이러한 완전한 교회적인 성직위계 구조는 교황에게서 절정에 이르는데, 1870년 로마의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의 무오성이 공식으로 선언되었다. 그는 온 교회의 “아버지(즉 아빠라는 뜻이다)요,”사제장이요, 베드로 후계자요,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최고 입법적 사법적 권위요, 또한 대규모의 직원단(추기경, 고위 성직자, 행정관, 서기 등)의 도움을 받아 온 교회를 통치하는 사람이다.


처음에는 올바른 방향에서 약간 이탈하기 시작하는 데서 비롯된 이 오류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더 악화되었다. 그들은 이러한 오류들을 발전시켜왔고 지금도 계속해서 발전시키고 있어서, 결국 옛 기독교 카톨릭 교회는 언제나 더욱더 극단적인 교황권 지상주의 색채를 띠게 되고, 로마 교회(즉 로마의 교회에 복속되는 교회)요, 교황주의 교회가 되어왔으며, 이 교회 안에서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힘을 발휘하여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점점 더 뒤로 감추어오고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


그러나 교회의 이러한 부패 현상을 막고자 하는 정력적인 노력들이 끊임없이 새롭게 일어났다. 중세 시대에는 특히 상황을 개선시키고자 애를 쓰는 인물들과 그런 경향들이 계속 있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운동들이 그 당시에는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어떤 운동들은 실질적으로 거의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어떤 운동들은 강제로 진압 되고 피로써 제거되기도 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을 상대로도 이런 억압과 말살의 수단들이 사용되었으나 그 당시는 그런 수단들이 성공하지를 못했다, 그리하여 개혁을 위한 때가 무르익었다. 교회가 영적으로 윤리적으로 수준이 너무나도 낮아서 교회에 속한 백성들에게조차 더 이상 신뢰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갈 수는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고, 무언가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소망이 강하게 퍼져 있었고, 수많은 선민들이, 예컨대 이탈리아의 백성들이, 신앙과 기독교를 비방하고 조롱하는 완전한 불신앙에 빠져있기도 했다. 만일 종교개혁이 없었다면 교회가 과연 어떻게 됐을지 생각조차 하기가 어렵다, 종교개혁이야말로 로마 교회에게도 하나의 축복이었고,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축복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성경중심의 종교개혁


그러나 종교개혁만이 새로운 시대가 선포한 유일한 놀라운 운동은 아니었다. 종교개혁 이전에도, 종교개혁과 병행하여, 또한 그 이후에도 다른 운동들이 있었는데, 그 하나하나가 각기 나름대로 종교개혁만큼 중요성을 띠는 것이다. 인쇄술의 발전과 화약의 발견, 중류 계층의 부상, 아메리카의 발견, 문학과 예술의 부흥, 새로운 자연 과학과 철학- 이 중요한 운동들과 사건들 모두가 다시금 자의식이 각성되고 있다는 증거였고, 또한 중세로부터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의 증거들이었다. 그리고 종교개혁이 물론 그 자체의 원리에서 비롯되었고 또한 그 자체의 목적을 향해 나아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은 이 모든 운동들의 영향과 지원을 받아 일어난 것이다. 더 나아가서, 중요한 사실은 종교개혁이 로마 교회를 반대하면서 스스로 문제의 뿌리를 파헤쳐 그것을 다루었다는 것이다. 외형적인 형식의 개선으로 만족하지 않았고, 부패의 원인을 제거할 것을 고집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확고한 출발점과, 신뢰할 만한 규범 혹은 기준, 그리고 적극적인 원리가 필요했다. 로마 교회가 전통들을 주장한 반면에, 종교개혁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찾았다. 종교개혁은 그 말씀이야말로 그 자체만으로도 그대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으며 교회의 삶과 복지에 필수적이며, 또한 스스로 충족하고 명확하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로마 교회가 인간의 구원을 선행과 연관지은 데 반대하여, 종교개혁은 이것을 그리스의도 사역에서 찾았다.


종교개혁의 특징


그리스도의 사역이야말로 완전하며 인간이 보충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교황이 그리스도의 무오한 대변자라는 로마 교회의 주장에 반대하여, 종교개혁은 이것을 교회에게 부어지시며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에게서 찾은 것이다. 종교개혁이 이러한 적극적인 원리를 발견한 것은 과학적 조사와 추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죄악에 짓눌린 마음이 드디어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 안에서 화목과 용서함을 찾은 체험을 통해서였다. 종교개혁은 철학적 과학적 운동이 아니라 종교적이요 도덕적인 성격을 띤 운동이었다. 분열과 분리의 사건에서 항상 일어나듯이, 많은 사람들이 불순하고 비열한 동기들을 지니고서 이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중심과 핵심에 있던 사람들은 로마의 멍에 아래에서 고뇌하고 있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었다가 이제 구주의 발 아래에서 다시금 안식을 찾은 자들이었다.


루터


루터는 이러한 죄 용서의 체험만으로 충분했다. 그로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물론, 루터는 이런 새로운 시각을 얻고서, 자연적인 것이 언제나 속된 것으로 보았던 로마교인보다 온 세상을 더욱더 자유롭게, 또한 더욱 폭넓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얻은 칭의에 완전히 안주하였고, 속된 모든 것들 - 예술과 과학, 국가와 사회 - 은 그것들 스스로 나아가도록 내버려두었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설교의 직분을 회복시키는 것으로 제한하였다. 일단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성경에서 답변을 찾은 다음에는, 거기서 노력을 중단시켜버린 것이다.


칼빈


그러나 스위스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츠빙글리와 칼빈에게는 루터가 중단해버린 부분이 그들의 사역의 시작일 뿐이었다. 그들 역시 합리적인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죄와 은혜, 죄책과 화목의 체험을 통해서 종교개혁에 이르렀다. 이러한 체험은 그들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안주하지도 않았고 길을 멈추지도 않았다. 그들은 앞으로 뒤로 더 파고 들어갔다 죄 용서에서 표현되는 하나님의 은혜 이면에 하나님의 주권이 자리 잡고 있다. 그의 모든 탁월하심과 완전하심 중에 계시는 무한하시고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그 하나님의 주권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만일 하나님이 구원 사역에서 주권자이시라면, 그는 언제나 어디서나 -재창조에서나 창조에서나- 주권자이시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에 왕이 되셨다면, 사람의 머리와 손에서도, 집과 사무실과 들판에서도, 국가와 사회에서도, 예술과 과학에서도 왕이 되신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 하는 질문만으로는 부족했고, 그보다 더 높고 더 깊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또 하나의 질문에까지 나아가야 했으니, 곧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그에게 합당한 영광을 받으시는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츠빙글리에게 있어서는, 그리고 칼빈의 경우는 그보다 훨씬 더, 십자가의 피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았으면 이제 비로소 종교개혁의 일이 시작된 것뿐이었다. 말하자면, 온 세계가 그들 앞에 활짝 열려 있었다. 그 나름대로 그냥 굴러가도록 내버려둠을 당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말미암아 침입을 당하고 거룩해지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교회와 도시를 향해 나아갔고 가장 인접한 곳에서부터 그 일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설교의 직분을 회복시킴은 물론, 예배와 교회의 권징까지도 회복시켰다. 그들은 일요일의 종교적 생활만이 아니라, 일주일 동안의 시민 생활과 사회생활까지도 개혁시켰다. 거기서부터 그들의 종교개혁은 다른 땅과 다른 곳에로 퍼져나갔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주로 독일과 덴마크, 스웨덴, 그리고 노루웨이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칼빈의 종교개혁은 이탈리아와 스페인, 헝가리, 폴란드, 스위스, 프랑스, 벨기에, 그리고 네덜란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미국과 캐나다에서까지 받아들여졌다. 예수회 사람들의 반동종교개혁에 의해서 여러 나라에서 도전 받고, 공격을 당하고, 파괴되는 일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이 영원토록 로마 교회의 세계 지배권에 종지부를 찍었을 것이다.


종교개혁시대 이 후 이단들과 싸움


그러나 그런 정복은 허용되지 않았다. 종교개혁은 처음부터 로마 교회의 공격을 받았다. 트렌트 공의회에서 로마는 스스로 의도적으로 의식적으로 종교개혁과 맞붙었고, 그 이후 거기서 취한 방향을 계속 고수하였다. 더욱이, 종교개혁은 내부의 분열과 끝없는 논쟁들로 인해서 스스로를 약화시켰다. 그와 더불어, 16세기 초반부터 소시니주의와 재세례주의가 등장하였다. 이 둘은 자연과 은혜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갈등 속에 있다는 동일한 기본 사상에서 파생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은혜를 회생시키고 자연을 살리든가, 자연을 희생시키고 은혜를 살리든가, 둘 중의 한 가지를 택하였다. 이처럼 창조와 재창조,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이성과 계시, 땅과 하늘, 인류와 기독교 세계 - 이런 대조되는 것들을 계속해서 더 제시할 수 있겠지만 - 가 서로 똑같이 반목하고 있다는 사상이 그 후에도 적극적으로 계속되었고, 오늘 날까지도 적극적으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16세기에 일어난 분열과 분리만이 아니었다.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 숫자가 증가했다. 17세기에 들어서서 네델란드에서는 항변파가 등장하였고, 잉글랜드에서는 독립주의, 독일에서는 경건주의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18세기에 와서는 여기에 모라비안주의, 감리교, 스베덴보리주의 등이 가세했고, 또한 같은 세기에 자연신론, 혹은 이신론의 홍수가 모든 교회들에 범람하였다. 19세기 초 프랑스 혁명 이후, 로마 교회와 개신교 교회들 모두에 강력한 신앙 부흥이 일어났다. 그러나 분열은 계속되었다, 다비주의, 어빙주의, 몰몬교, 심령주의등, 온갖 분파들이 교회들에게서 조각조각 떨어져나가서 그들 스스로도 약화되고, 내적인 의심과 무관심의 자세에 휩싸여버렸다. 그리고 교회들의 바깥에서, 일원론의 강력한 세력이 유물론의 형태로나 범신론의 형태로 그 힘을 결집시켜서 기독교 신앙 전체에 마지막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통일성과 보편성을 이룰 모든 희망이 사라져 버린 것 같다. 그러나 한 가지 위로가 있으니, 그리스도께서 모든 나라와 족속과 민족과 언어에서 그의 백성을 모으신다는 것이다. 그가 그들 모두를 모으실 것이요, 그들이 그의 음성을 들을 것이며, 그들이 한 우리에 있어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게 될 것이다.(요10:16)


제10과 삼위일체론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 여하에 따라 서기도 하고, 폐해지기도 한다고 했다. 헤르만 바빙크 또한 ‘삼위일체의 신앙조항’이 우리 신앙고백의 핵심이요 기독교를 구별하는 표요 모든 참된 기독교인들의 영광이요 위로라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만물이 그 하나님으로부터,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창조와 재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은 시작이요 완성자이시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론’에 대한 그릇된 인식들에 대한 문제제기


1)통일성과 각각의 인격성문제 2)하나님의 삼위성과 통일성의 문제 3)삼위일체론을 인간적인 추론과 학술 활동의 열매라 생각하는 경향 종교적 생활에는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요. 유일하며 단순하다는 것과 그럼에도 그 하나님의 인격, 계시, 활동의 영향력에서 삼위 하나님께서는 ‘삼중적’(threefold)이시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깨어짐이 없는 전체를 이루시고 풍성한 다양성과 변화를 지니고 있다. 바빙크는 ‘삼위일체론’의 역사적 흐름을 성경에 의존하여 삼위일체론을 정립하고 있다.


1. 본질과 존재 그리고 위(位)


1)본질 또는 존재라는 용어 : 본질과 존재란 말은 삼위 모두에 의해서 비슷하게 그리고 동등하게 소유되고 있는 신적 성질을 가리킨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모든 피조물적 존재 사실과 구별되는 삼위 안에 공통적인 신적 성질을 지칭한다. 존재나 본질이란 용어는 하나님의 통일성을 시사한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통일되어 있고, 순전하며 복잡성이나 구분이 없다. 그리고 그 통일성은 사람들 사이에서처럼 계약적이거나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고,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적 요소이다.


2)위(位)라는 말 : 신적 본질 안에 있는 삼중적 구별의 존재 사실을 지칭한다. 즉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서로 병립하거나 구분되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로서의 충분한 신적 본질이 각자에 의해서 그리고 모두에 의해서 소유되는 방식으로 각자 안에서 각자를 통하여 그리고 각자를 향하여 있는 세 가지 구별되는 존재방식의 존재 사실을 지칭하는 것이다.


3)본질(존재)과 위, 그리고 삼위 간의 관계의 구별: 본질의 구별이 아니라 관계의 구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별은 신적 계시에 근거하여 실재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존재와 위격은 ‘실체적으로’(materially)가 아니라 실제로(really)다르다. 그 차이는 존재방식의 차이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차이다. 삼위는 존재 안에 있는 존재양식들이다. 따라서 삼위는 서로가 다르다. 마치 한 존재양식이 다른 존재양식과 다르듯이 말이다. 성경은 아주 유일신론적 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성자와 성령께서 신적 성질과 속성들을 돌리며, 그들을 성부와 동일시하고 있다.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의 신적 본질 안에서 구별되는 주체들이다.


2. 삼위 각론(各論)


1)성부(아버지 되심) : 아버지 됨은 제2위에 대한 적극적 관계를 의미한다. 또한 아버지란 이름은 하나님이란 이름보다도 신성에 대해 더 적절한 지칭이다. 신약에서의 아버지란 이름과 구약에서의 여호와란 이름은 하나님의 위격적 특성에 대한 지칭이고, 고유명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그분만이 온전히 아버지이시다. 그는 오직 아버지일 뿐이다. 그는 성질상 아버지이다. 그는 영원부터 시작도 끝도 없이 아버지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자를 낳음도 영원하고, 성자도 성부와 같이 영원하다. 왜냐하면 만일 성자가 영원하지 않다면 성부도 영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2)성자(아들 됨) : 성자의 위격적 속성은 낳아짐, 혹은 아들 됨이다. 하나님은 전개될 수 있으시고, 자기를 전달할 수 있으신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출생이란 영적이고 단순한 것이다. 즉 이는 분할이나 분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출이나 분리 없이 일어나고, 그것은 신적 본질 안의 분리나 분할(다양성)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출생은 영원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3)성령 : 성령의 위격적 특성은 ‘나오심’ 또는 ‘내어쉬어짐’이다. 성자와 관련해서 논쟁점이 그의 신성이었음에 반해서 성령에 대해서는 그의 인격성이 논의의 초점이 되었다. 성신의 인격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의 신성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되어졌다. 그러나 바빙크는 성신의 인격성과 신성에 대한 믿음이 철학의 산물이 아니라 기독종교 자체의 핵심이며, 교회의 신앙에서 나온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 성경의 점진성 속에 나타난 성령에 관한 계시 : 초기에는 주로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일깨우시고, 그리스도께 기름 부어 그 사역에 준비시키신 것과 같은 과거의 사역에 모든 주의가 집중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만이 충분하다고 여겨졌고, 주관적 조명의 필요성은 충분히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가 그 자체의 생명의 근원을 반성하고 명상하며, 구원의 객관적 원리들뿐만 아니라 주관적 원리들도 성명하기를 시작하자마자, 교회는 기쁨으로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고백하였다.


3. 사역에 나타난 삼위의 구별


1)신적 본질 내에 있는 이 구별이 외적으로 계시된다.


모든 외적 사역들은 하나님의 사역이다. 창조와 구속에서 한 분의 같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나 비록 모든 외적 사역들이 하나님의 존재 전체에 속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위에게는 신적 본질 내에서의 그의 존재 순서에 상응하는 특정한 사역이 돌려진다. 삼위의 협동을 수단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창조, 구속, 성화의 사역에서 각 위에게 분명한 위치와 질서가 주어지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성부에 의해서 기원하고, 성자를 통하여 수행되며, 성령을 통해 온전케 된다.


2)존재론적 삼위일체가 경륜적 의미에서 구분된다.


경륜적 의미에서 창조의 사역은 특히 성부께 돌려지고, 구속의 사역은 특히 성자께 돌려지며, 성화의 사역은 특히 성령께 돌려지는 것이다. 경륜은 특별한 의미에서 성부는 구약에 속하며(히1:1), 또 그런 의미에서 성자의 경륜은 성육신에서 시작되었고, 성령의 경륜은 오순절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요7:39) 성부는 보냄을 받지 않고 오신다. 그러나 성자는 성부에 의해서 보냄을 받으시고(마10:40), 성령은 성부와 성자 모두에 의해서 보냄을 받으신다.(요14:26)


3)존재론적 삼위일체에서 성부가 그 존재 사실의 순서에서 구별된다.


성부가 첫째이고, 성자가 둘째이며, 성령이 셋째이듯이, 계시 역사에서도 성부가 성자에 앞서며, 성자가 성신에 앞서는 것이다.


4. 성경적 삼위일체론


1)구약에 나타난 삼위일체 교리 : 계시의 하나님은 한 신적 본질 안에 고도의 구별을 가지고 계시며, 충분히 무한하신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엘로힘(복수형)은 말씀과 성령을 수단으로 해서 창조하신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엘로힘 하나님께서 발하신 말씀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우주가 그것으로 창조되고 유지되는 큰 능력이다(창1:3).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에게서 나오는 것이므로, 그와는 구별되고, 그래서 후에 지혜로 인격화되었다(렘10:12).


2) 하나님의 성신이 구별된 인격으로 언급됨 : 창조와 섭리의 사역은 하나님의 신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도 했다.(창1:2, 시33:6; 104:3) 만물에게 생명과 빛을 주시는 성신을 통해서 모든 피조 계에 내재하신다. 이렇듯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세상은 그의 말씀을 그 객관적 원리로 하고, 그의 신을 그 주관적 원리로 하는 것이다.


3) 여호와의 사자 : 이 삼중적 원인은 특별계시의 영역, 구속사역에서 더 분명하게 된다. 여기서는 더 이상 엘로힘만이 아니고, 하나님을 언약과 맹세의 하나님, 계시와 역사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시는 여호와로도 나타내신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중보자 없이 하나님을 계시하시지 않으신다(출33:20). 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리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이다(시107:20).


5) 신약의 삼위일체론


(1) 구약과 신약의 일치 : 신약은 구약의 참된 발전이며, 삼위일체 개념은 어디서나 전제되고 함의되어 있다. 신약의 가르침은 구약에서 발견되는 삼위일체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 여호와는 주(Lord)보다 그 의미가 더 풍성한 아버지(pater)라고 불렸다. 그리고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에게서 모든 구약의 예언들, 선지자와 왕, 제사직과 희생제, 여호와의 종, 다윗의 자손, 여호와의 사자, 지혜들의 완성에 이르렀다. 그리고 성신의 내려 부어주심은 구약 약속의 실현이었다(행2:16)


(2) 신약의 삼위일체 : 그리스도의 탄생과 세례는 삼위일체를 계시한다(눅1:35). 아버지는 아들을 세상에 주시고(요3:16), 아들 자신은 하늘로부터 내려온(요6:38)반면에 그 자신은 성령으로 마리아의 몸에서 수태되었다(마1:20). 세례 때에도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아버지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자임이 선포되었다(마3:16-17).


①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철저히 삼위일체적이다. 그는 그가 그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신(Spirit)으로 묘사하며(요4:24), 아주 특별한 의미에서 그의 아버지이신(마11:27)성부를 우리에게 선포하신다. 또한 그리스도와 성부는 구별되지만 그리스도는 성부의 유일하신 독생자요, 사랑하는 아들이신 것이다(마11:27). 그래서 그 영광, 생명, 그리고 능력에 있어서 성부와 동일하신 것이다(요1:14). 그리고 그리스도를 인도하시며 그로 하여금 주어진 과업에 적합하도록 준비시키시는 성신(막1:12)을 언급한다.


②그의 죽음에 있어서 : 그는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하나님께 흠없이 드렸고(히 9:14), 부활은 아버지로 말미암은 일으키심이며 동시에 그로 말미암아 그가 성결케 하시는 영을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능력 있게 증거한 예수님 자신의 행위이다(롬1:3)


③부활 후에도 그는 40일 되던 날에 그를 살리신 영으로 하늘 높은 곳으로 승천하셔서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을 복종케 하셨다(벧전3:19,22).사도들의 가르침에서 그들은 구원의 삼위적 신적 원인을 인정하고 높이고 있다. 기뻐하심, 예지, 선택, 권능, 사랑, 그리고 나라가 아버지께 속한 것이다


6. 삼위간의 관계


1)성부 :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 이름은 하나님을 만유, 특히 인간의 창조자로 지칭하는 칭호이다(민16:22). 또 신정정치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신자들의 아버지로 불리운다.(마6:4). 특별한 의미에서 성자의 아버지이시다. 예수께서는 항상 그가 성부에 대해 갖는 관계와 다른이들이 성부와 맺는 관계를 본질적으로 구별하셨다. 성자에 대한 성부의 이 관계는 시간 내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고 영원부터 있는 것이다.


2)성자 : 로고스(Logos), 이것은 이성(reason), 말(Speech), 말씀(Word) 또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번역되었다. 요한이 그리스도를 로고스로 부르는 것도 창조와 구속에서, 그 안에서, 또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기 때문이다(요1:3,14)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1:2), 아버지의 품속에 있었다. (1:18).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자기교통의 대상이시라는 말이다(5:26,17:24). 그러므로 로고스는 영원부터 신적 본능, 생명, 사랑 등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아버지를 온전히 계시하실 수 있으셨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은 구약에서 천사에 대해서(욥38:7),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신31:8; 8:5; 14:1, 호11:1), 신약에서는 교회가 이스라엘의 자리를 차지한다. 양자가 됨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영적 출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3)성령 : 성신론은 신구약의 여러 책들에서 동일하다는 것을 먼저 밝히고 있다. 신약은 이전에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심(마22:43), 노아의 날에 증언하신, 이스라엘이 그에 대해 저항했던(행7:51), 그리고 믿게 하시는(고후4:13) 성신은 메시야에게 내려오시고, 예언된 대로 교회에 거주하시는 바로 그 신이신 것이다(마12:18, 눅4:18-19, 행2:16).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은 자체로 하나가 되시고 성령 안에서 동등함을 종결하시며 그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 가운데 거하신다. 성신은 모든 피조물 내에 내재하는 생명의 원리이신 하나님이시다. 또한 그는 그 자신이 하나님과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또한 그가 하나님과 모든 실존하는 대상들의 관계를 규정하시므로 거룩한 신이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성신의 신성은 특히 창조사역(창1:2)과 구속사역에서 메시아를 기름 부어 직무에 합당하게 하는 일(사11:2), 사도들을 그들의 독특한 사역에 준비시키는 일(요14:16), 신자들에게 은사와 달란트를 나누어 주는 일(고전12:4-11)등등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와 교제하게 되고, 이 교제는 직접적이다. 성신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이다(요14:23)성령은 인격체일 뿐 아니라 참된 하나님이다. 그것은 인격체들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동일 선상에 놓고 있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마28:19) 우리는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축복을 받는다. 따라서 교회는 성령을 근심하도록 하지 말고, 성신의 훈계를 받아야 한다(사63:10). 이 성신에 대한 신성모독은 용서받을 수없는 죄이다(마12:31-32).


7.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대표적인 이단에 관하여


1)아리안주의 : 아리안주의의 본질은 성자와 성부와의 동일본질을 부인한다. 즉 성부만이 하나님이고 나머지는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성자에게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간 위치를 부여해 상당한 사변의 폭이 허용되고 결국 성자의 신성이 전혀 주장되지 않기까지 이르렀고, 이것 때문에 아리안 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2)사벨리안 주의 : AD2-3세기의 사벨리안의 주의의 선구자는 노에투스(Noetus), 프락세우스(Praxeus), 에피고누스(Epigonus)그리고 클레오메네스(Cleomenes)이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 자신이 태어났고,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다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는 같은 분이다. 또는 그리스도의 신성은 성부이고 인성은 성자라고 주장했다.


3)프락세우스 : 성부 수난설은 가 주장하였다. 성부, 성자, 성신이 같은 인격존재라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일성을 주장하였다.


4)마르셀루스, 포티누스 : 성자와 성신이 창조와 구속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자존적이 되고 인격적이 된 신적 속성들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하나님이 자신을 아들과 신으로 존재하셨는데 후에 하나님이 자신에게로 돌아갔다는 말이다. 이러한 구조는 삼위가 단지 한 하나님이 연속적으로 담당하는 세 가지 역사, 세 가지 계시의 양식일 뿐이라고 가르치는 ‘양태론적 단일신론’의 생성을 가져왔다.


5)세르베투스 : 교회의 삼위일체론을 삼신론적이고 무신론적으로 보았다. 그는 하나님은 나뉘어 질 수 없으며 그리스도와 성신의 신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위격을 말해서는 안되고 성향, 나타남, 신적양식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부는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로고스를 통해 창조와 구약에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되신 것이다. 로고스 안에 내재하시는 성신을 하나님의 자기 부여의 한 양식이다. 왜냐하면 성신을 통해서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 안에 거하시고 그들에게 생명을 부여하시기 때문이다. 결국 이 과정이 마쳐지면 삼위일체는 사라지고 만다.


8. 삼위일체론의 중요성


1)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은 참으로 살아 계신 분으로 계시해 준다.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제한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독자적 존재 사실을 또 한편으로는 그의 영광스러운 본질의 충만을 주장한다. 하나님은 절대적 본질이요, 지금도 계시고 과거에도 계셨으며 장차 오실 영원하신 분이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순한 추상적 존재가 아니다.(이신론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큰 간격을 내고, 그 둘 사이의 관계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추상적인 구별 없는 실체, 순수하고 다양성 없고, 단조로운 존재로 환원시켜 버린다. 결국 모든 참된 예배를 억누르는 것이다. 범신론은 하나님을 우리에게 가져오기는 하나, 그를 피조계와 동일시하고, 그의 독자적 존재 사실을 부인하며, 역시 종교를 약화시키고 무시하는 것이다.)


삼위일체성을 하나님의 사유나 그의 의지, 그의 사랑, 선하심, 온전하심 등에서 이끌어 내려는 시도들은 부적절하다. 사유로부터의 파생은 삼위성을 낳지 못하고, 신적 의지에 돌려지는 성신의 나오심을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사랑에서의 시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삼위일체를 받아들이면, 우리는 우주를 떠나서라도 그것을 이해하기 시작하며, 전적으로 그 자신 안에서, 그 자신에 의해서 하나님은 독립적이며, 영원하고, 전지하며, 자비로우시며, 사랑하시며,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신 분이시다.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을 본질의 충만, 참된 생명, 영원하신 영광으로 계시해 준다. 하나님은 동시에 세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온전한 통일성을 낳는다. 셋이 같은 본질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아름다운 다양성을 낳는데 성부, 성자, 성령이 구별되는 위격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동일 본질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구별이 있다면 이 구별들, 또는 독자적 위격들은 그 본질이 동등해야 한다. 하나님 안에는 하나님 이하의 것이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리안주의’는 충분히 반박된다. 또 ‘사벨리안주의’의 ‘양태론적 삼위일체론’도 정죄한다. 왜냐하면 삼위의 동일 본질은 이 삼위가 참으로 서로 구별될 때에만 의미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2) 삼위일체론은 창조론에 대해서 굉장한 의미를 가진다.


삼위일체론은 이신론과 범신론, 유대주의와 세속주의의 잘못에 대해서 강력히 반대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신론은 우리의 본성, 직업, 우리의 사업, 우리의 과학, 우리의 기술 혹은 구원의 영역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없이하여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범신론은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피조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버리고 세계와 해, 달, 별들과 기술, 과학, 국가를 신성시하며 피조물, 종종 우리 자신의 조작물 가운데서 우리 자신의 위대성을 숭배하게 한다.


그러나 교회는 두 가지를 고백한다. 즉 하나님의 자연을 초월하여 본지에 있어서 세계와 구별됨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존재와 더불어 세계 안에 현존하며, 공간의 어느 점에서든지, 시간의 어느 순간에 대해서든지, 세계로부터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그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초월하여, 우리를 위한, 우리 안에 계시는 유일한 하나님이시다.


실천적 의미에서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전 구속계시의 핵심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온전하고, 분명하게 계시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오셨고 성신 안에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시는 것이다. 구속사역은 그 성격상 철저히 삼위일체론적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말미암고 하나님을 통하고 하나님 안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삼중적 구별을 나타내 보인다. 즉 그것은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은혜와 성신의 교통하심으로 요약된다.


우리는 삼위일체론은 성경의 증언, 삼위의 사역, 그리고 주로 우리 안에서 느끼는 삼위의 사역으로부터도 안다. 우리는 자신들을 성자에 의해서 구속된 그리하여 성부, 성자와 성신을 통해 교제하는 성부의 자녀로 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가 받는 축복의 원천이다. 그의 이름으로 우리가 세례를 받고, 그 이름이 우리의 신앙고백의 요약이다. 그 이름이 우리에게 내리는 모든 축복의 원천인 것이다. 영원히 우리의 찬양과 찬미의 대상으로 있고, 그 이름 안에서 우리의 영혼이 안식하고 양심이 평안을 얻는다.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의 우리의 구원이 삼위일체론과 관련되어 있다.


제14장 은혜언약


1. 죄를 범한 인류에게 하나님의 형벌


그 형벌은 구원을 갈구하게 하게 했다. 인류는 특별계시를 떠나서 문화와 종교라는 방식으로 수고한다. 하지만 구원은 인간의 수고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에 의하여 주어진다.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의 면전에 설 수없는 존재가 되었다. 왜냐하면 죄를 범한 인류가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형벌을 받은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벌은 하나님의 공의와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셔서 완전한 조화를 이루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거룩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킨 사랑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가 먼저 확고히 세워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 사랑이기에 ‘완전한 사랑’인 것이다.


구원을 갈망하게 한 하나님의 형벌


하나님의 형벌은 인류가 구원(잃어버린 낙원, 영원한 복락, 모든 악에서 구속)을 갈망하게 하고, 그토록 많은 인간의 수고는 문화와 문명을 낳았다. 하지만 그 인간의 수고로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구원의 본질은 인간의 수고에 의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주어진 것이다. 구원은 인간의 수고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문화의 영역에서 다루지 않고 종교의 영역에서 취급하는 것이다.


구원을 갈망하는 다양한 방식


인류는 다양한 종교로 구원을 구하였다. 그리고 그 다양한 종교는 각각의 다른 ‘최고선’을 추구한다. 그러나 특별계시 밖에서는 최고선을 찾을 수가 없는데 사람들은 각각의 수고로 ‘구원’과 ‘최고선’을 찾고 있다. 그것이 사람의 수고로 찾아가는 문화이든, 다양한 종교로 찾아가든 특별계시 밖에서는 서로 구원과 최고선을 찾지 못한다. 특별계시 밖에 있는 종교는 서로 다른 ‘차이점’(다양한 방식의 종교적인 관점)과 모든 종교의 ‘획일성’(획일화된 신관, 세계관, 초자연적인 문제, 예배와 삶으로 구성된 종교의 획일성, 하지만 동일하게 구원과 최고선을 찾지 못하는 비극)을 들어낸다.


요컨대, 여전히 하나님의 공의로 형벌은 주어지고, 그 형벌은 ‘구원’과 ‘최고선’을 갈구하는 데에 이르도록 한다. 하지만 ‘구원’은 인간의 수고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긍휼을 베풀어주심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것은 특별계시 안에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2. 인간의 수고와 하나님의 긍휼


특별계시의 밖의 종교와 특별계시의 종교


특별계시 밖에 수많은 종교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것을 이교라고 하는데 그런 종교는 각각 다양한 관점으로 구원을 찾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과 최고선에 이르지 못한다. 결국은 ‘이교의 본질’은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의 형상으로...” 바꾸어 버린데 있다.


이교의 신개념-①자연의 신비한 힘


②신을 인간적인 것과 동일시함


③관념, 정신의 수준으로 봄


특별계시 밖에서 인간의 수고와 특별계시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


왜냐하면 특별계시 없이는 인간들의 종교와 사상가들의 철학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과 세상, 죄와 구원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자의’ ‘자성’에 의한 종교와 특별계시에서 그리스도를 기초로 한 종교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전자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수고’다. 거기에는 인간의 성취가 있고, 인간의 규율지킴이 있다. 그러나 후자는 하나님이 사람을 찾아오신 긍휼의 역사이다. 인간의 수고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끄시는 ‘구원’이 있다. 이것이 ‘인간의 수고’와 ‘하나님의 긍휼’이 다른 점이다.


3. 창조와 섭리 그리고 구원은 하나님의 경륜(經綸)에 속한다.


찾아오신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 전체를 경륜하신다.


인간의 타락 직후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잊지 않으시고 친히 찾아오신다. 하나님은 인간을 교제의 길로 이끄신다.(창3:7-15) 그 하나님께서 인류역사에 지속적으로 말씀하시고, 행동하심으로 나타내셨다. 그분은 오직 한분만이요.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창조와 섭리 그리고 구원의 역사를 주관하신다.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롬11:36)


하나님은 처음부터 구원역사를 시작하셨고, 구원역사의 전체에 그분의 경륜을 보이셨다. 하나님의 구원경륜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의 경륜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깨뜨려질 수없는 하나님의 경륜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시길 기뻐하신 구원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하시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양자 삼으시고 영생에서 그 구원의 절정을 이루신다.


구원의 경륜의 특징3가지


①첫째 하나님의 선택은 그분의 사랑 안에서 미리 아신 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도록 정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을 가진 선택이다.(롬8:29)


선택은 특정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선택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기초이며, 모든 신자들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믿음에 이르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이다.(엡1:4)


②두 번째, 하나님의 경륜 속에는 하나님이 택한 자들을 구원하는 성취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졌다. 이처럼 구원의 경륜은 ‘창조’, ‘섭리’ 그리고 ‘재창조’의 경륜도 마차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졌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③세 번째, 하나님의 경륜 속에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그 구원을 이루어가는 적용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구원계획은 성부, 성자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교제 안에서 세워진 것이다. 창조와 섭리가 성부로부터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 마찬가지로 재창조도 성령의 적용 활동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확신으로 넘치는 위로


하나님의 경륜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만사가 영원 전부터 결정되어 있다면 사람은 신적인 변덕에 놀아나는 장난감에 불과 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사람이 스스로 변덕스러운 삶을 살려고 애를 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고백’이 그런 식으로 학대를 받아왔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경륜을 부인해서도 안 되고 그것을 대적하여 마음을 완악하게 해서도 안 된다. 우리의 죄악성과 무기력을 자각하여 어린아이 같은 믿음으로 그 하나님의 경륜을 의지해야 한다. 어려움과 곤란 중에서 온 마음으로 그것을 충만하게 확신해야한다. 왜냐하면 구원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함께 구원의 역사 전체를 생각하셨고, 결정하셨으며 그들이 그 역사를 실행하시고 완성해 가시는 것이다. 모든 일이 하나님에게서 나오며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은 흐트러짐 없는 확신으로 그 경륜 속에서 안식한다.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의 의지의 역사요. 영원의 세계에 속하는 계획하신 것에서 실제로 정한 때에 반드시 실현되는 전능한 능력의 성취이다. 이것을 기억하면 선택이 주는 이러한 위로를 더욱 분명하게 납득하게 된다.


4.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사람이 타락하자마자 ‘은혜언약’으로 시작된다.


인간의 타락, 하나님의 형벌에 나타난 축복


하나님께서 사람의 타락에 대하여 형벌을 선언하셨다. 그 형벌은 동시에 축복과 보존의 수단이 되었다. 형벌 속에 그리스도의 오심을 계시하셨다. 그 복음에는 그리스도의 승리가 절정을 이루게 될 것을 선언하셨다. 그 복음이 약속으로 주어지고 그 속에 은혜언약의 선포와 제정이 내포되었다. 은혜언약은 노아나 아브라함의 삶에서 경험되었다. 은혜언약은 약속과 믿음을 내용으로 한다.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완전한 순종을 통해서 영생을 유업으로 받도록 되었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을 버리고 하나님의 관계를 파손하고, 하나님의 법을 미워하고 더 이상 그 법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은혜언약’을 사람에게 새로운 영생을 길로 하나님께서 여신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행위언약의 연장으로 은혜언약을 여신 것이다.


이제 은혜언약에 의하면 더 이상 인간이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서 무슨 일을 행할 필요가 없다. 은혜언약에 따르면 이제 처음부터 곧바로 그 영생을 받으며, 아이 같은 믿음을 가지면 그 믿음으로부터 선행이 나온다. 행위언약의 시대, 타락하기 전에는 행위를 통해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타락 이후에는 은혜언약 가운데서 영생이 먼저오고, 그 영생으로부터 선행이 믿음의 열매로 뒤따르게 된다. 타락 후에는 은혜언약의 시대로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사람의 마음에 거처를 찾으시는 것이다.


은혜언약과 선택


하늘에 이르는 절대적인 길이 타락한 직후에 사람에게 주어졌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덕분이다. 영원 전부터 확정된 구원의 경륜과 타락 직후에 주어진 은혜언약은 서로 지극히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은혜언약을 기준으로 선택을 부정하는 일도 있는데, 이는 다시 은혜언약을 파괴시키는 것이요. 복음을 다시 새로운 율법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된다. 은혜언약이 선택과 분리되면 결국 그것이 은혜언약일 수가 없고, 다시 행위언약이 되어버린다.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구원의 경륜은 행위언약에서 인간이 파기하고,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그 선하신 구원의 경륜을 따라 행위언약의 파괴를 넘어서, 은혜언약으로 다시 찾아오신 것이다.


기독교의 특징은 바로 구원의 종교이다. 순전한 은혜요. 순결한 종교이다. 그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경륜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다. 그래서 구원의 경륜 속에서 ‘선택’은 은혜언약과 다른 것이 아니다. 선택이 은혜언약의 기초이다. 선택은 은혜언약의 보증이다. 선택은 은혜언약의 중심이다. 선택과 은혜언약이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고수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하나님의 구원의 전체적인 경륜과 은혜언약


선택은 구원의 경륜 전체에서 일부이다. 경륜 속에는 ‘선택’이 우리에게 현실화 되는 ‘방식’까지 포함한다. 구원의 성취와 구원의 적용 자체가 그 경륜 속에 들어 있다. 구원의 경륜은 성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다. 각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다. 구원의 경륜은 영원세계와 시간세계를 넘나들고, 은혜언약은 시간의 세계에서 맺으시고, 은혜언약은 시대를 넘어서(계속되는 영원하신 하나님 속에서 확정된) 그 언약이 시행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은 구원의 근원이시다. 성자께서는 구원의 성취자이시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그 은혜로우시고, 전능하신 뜻이 긴 시간세계에 내려진 것이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구원경륜과 은혜언약의 관계


구원의 경륜과 은혜언약을 살펴보자! ‘영원’이 없이는 ‘시간’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 시간세계에 계시되었고, 은혜언약으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의 경륜과 은혜언약은 분리될 수가 없다. 그렇게 은혜언약이 구원경륜을 이 땅에 실현되는 것이다. 구원계획은 자체만으로는 충복하지 못한다. 시행이 되어야한다. 하나의 결정으로서 그 계획 속에는 ‘이행’과 ‘성취’가 포함되어있다. 그 계획 자체가 이행과 성취를 이루는 것이다. 그 계획이 시간이라는 세계 속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인간이 타락한 직후(창3장) 은혜언약이 사람에게 알려지고(계시), 하나님께서 그(사람)와 더불어 맺어지고(은혜언약 체결), 그 이후에 역사 속에서 각각의 세대에 약속이 이어져 오고(인간의 현실에서 경험하고), 그 언약은 영원한 구원경륜에 일부인데, 이는 온 세계 전체에 그 모습이 보여 지고, 세월을 지나는 과정에서 그 언약은 발전해 가는 것이다.


5. 인류의 역사 속에 실현되는 구원의 경륜 : 은혜언약


시간세계에서 발전하는 은혜언약의 괄목할 만한 특징


①첫째, 은혜언약은 언제나, 어디서나 본질상 하나이다.


여러 세대에서 새로운 형태로 드러나기도 하다. 그리고 은혜언약은 시간세계에서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내가 네 하나님이 되겠고,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것이 은혜언약의 핵심이다. 창세기3:15에서 시작된 은혜언약은 고린도후서13:13의 ‘사도적 축복’에 이르는 모든 것이 일직선상에 놓였다.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하심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원 전체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은혜언약이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왔다는 의미이다. 은혜언약이란 은혜를 그 내용으로 삼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은혜언약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영화롭게 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는 의미가 있다.)


②둘째, 은혜언약은 모든 시행에서 유기적인 성격을 띤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이처럼 연합하고, 교회는 이처럼 하나의 공동체로 있다. 안약의 관념을 그 그리스도와 교회 속에 내포하고 있다. 큰 틀에서는 행위언약의 연장선상에서 은혜언약이 주어지고, 행위언약의 폐기라기보다는 성취인 것이다.


결국 행위언약은 아담이 인류의 대표로 그 언약을 저버렸고, 은혜언약은 그리스도로 대치되어 완전한 순종으로 행위언약의 연장선상에 있는 은혜언약을 성취하신 것이다. 이처럼 은혜언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기적인 성격을 취하는 것이다.


③세 번째, 은혜언약은 이성적이며, 도덕적인 본성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실현되었다. 은혜언약은 하나님의 경륜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전능하신 뜻에 의한 것이다. 사람의 운명 같은 것이 아니라, 인격적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기뻐하신 뜻에 의한 것이다. 강요의 법이 아니라서 저항하는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영적인 힘으로 제압하시는 방식으로 실현하신다. 맹목적인 것이 아니고, 비이성적인 힘이 아니다. 지혜롭고 은혜로운 것이며 사랑이 풍성한 하나님의 뜻이다.


역사 속에 실현되고 발전하는 은혜언약


은혜언약은 본질상 불변한다. 여러 세대에 각기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며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함께 강물처럼 흘러가는데 은혜언약이 위기에 처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조치를 취하신다. 노아시대에 방주를, 아브라함 시대에는 세상에 흐르는 죄악 중에서 아브라함을 택하심으로 그 은혜언약을 간직하신다. 족장들과 그 가족들 내에서 은혜언약이 실현된다. 그 가족들에게 의의 표징으로 할례를 향하게 하시고, 마음의 할례의 표징으로 나아가 ‘믿음’을 주셔서 민족을 구별하신 것이다.


시내산에서는 이스라엘과 더불어 세우셨다. 이처럼 은혜언약은 어떠한 형식을 취하든지 그 본질적인 내용은 언제나 동일하고, 언제나 같은 복음이었다. 같은 그리스도요. 같은 믿음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은혜언약은 ‘죄 사함’과 ‘영생’을 그 은택으로 언약의 대상들에게 베풀어 주신다.


은혜언약으로 권면하시는 하나님, 믿음으로 반응하는 신자


은혜언약은 어떤 조건을 내거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의 명령의 형식으로 주어져서 우리들에게 믿음과 회개를 권면하는 것이다. 그 자체만을 보면 은혜언약은 순전히 은혜일뿐이요. 인간의 행위가 전혀 배제된다. 하나님 자신이 요구한 바를 자신이 베풀어 주며, 하나님 자신이 정한 법을 자기가 성취하는 것이다. 복음은 순전히 복된 소식이요. 요구가 아니라 약속이다. 의무가 아니라 선물이다. 약속과 선물로서 우리 속에서 실현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우리의 본성에 걸맞도록 권면의 성격을 취한다. 은혜언약은 이처럼 우리가 믿음으로 자유로이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이성과 우리의 의지를 통해서 이루어 가시는 방식으로 행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스스로 믿고, 스스로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으로 느껴진다.


은혜언약 안에서 본질을 요구하시는 하나님과 언제나 불완전한 인간


은혜언약은 이처럼 역사적이며, 유기적인 다양한 양태로 인류 속에 들어온다. 하지만 이 땅에서는 어떤 형식으로도 은혜언약의 본질을 완전하게 담아내기에는 불가능하다. 은혜언약은 우리에게 언제나 그 본질을 요구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아무리 참다운 신자라고 하더라도 은혜언약과 완전히 일치하는 삶은 없다. 우리 눈에는 은혜언약에 들어왔다고 보는 순간에도 아직 불신앙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을 가져서 은혜언약의 혜택을 누리지 모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어느 시대에든 언제나 그래왔다. 그러므로 믿음은 오늘도 완전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제18장 높아지심에서 그리스도의 사역


헤르만 바빙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은택은 너무도 풍성하다. 우리의 모든 완전한 구원은 모두 거기에 포함된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의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을 통하여 이루신 일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Ⅰ. 그리스도의 사역, 낮아지심으로 이루신 은택


1. 속죄(贖罪)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심으로써 우리가 얻는 모든 은택들 가운데서 가장 첫째가는 것은 ‘속죄(贖罪)’이다. 신약에서는 이 속죄를 ‘화목’으로도 표현한다. 화목이라는 것은 로마서3:25, 히브리서2:17, 요한일서2:2, 4:10 등에서 나타낸다.1)


속죄 이후에는 죄의 용서가 너무나도 완전하여 그것을 가리켜 ‘도말(塗抹)’하는 것으로도 말한다.(사43:25) 죄가 제거되므로 마치 그 죄들을 전혀 범하지 않은 것처럼 되는 것이다. 속죄가 진노를 사라지게 하며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사랑과 기뻐하심으로 그의 얼굴을 그의 백성에게 비추시도록 만드는 것이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그렇게 미래의 ‘그리스도의 제사’를 바라보았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들을 하나님 앞에서 덮으셨다. 그분은 우리를 은혜와 사랑에 참여하게 하시는 ‘대제사장’이시다.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화목제물’이다.(요일2:2, 4:10)


2. 속죄, 우리와 ‘교환 된다’는 의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과 이루신 이 객관적인 속죄와는 구별되는 다른 개념이 있는데, 이를 로마서5:10, 고후5:18-20에서 사용된다. 본래 ‘교환하다’ ‘다시 정산하다.’ 등의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의 제사를 근거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하여 취하신 새로운 ‘은혜의 자세’를 지칭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덮으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무마시키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세상에 대해서 ‘화목의 자세’를 취하셨고, 이를 그의 복음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신다. 그래서 복음을 가리켜 ‘화목케 하는 말씀’(고후5:19)이라고 한다.


이 회목은 객관적인 것이다. 이 화목은 우리의 믿음이나 회개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에 근거하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화목 하는 은혜로운 관계를 이루는 것이요.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수용하는 것이다.(롬5:11)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적대적인 자세를 물리치시고, 우리 편에서도 적대적인 자세를 제거하고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에게 새로운 화목의 관계 속에 들어갈 것을 명령 받는다. 이렇게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 우리가 행하도록 남겨진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목의 완전한 관계를 누리도록 명받고 있다. 믿음으로 받아들여야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고 평화를 이룬다. 결정적으로 성령께서 함께하심으로 구원의 날까지 그들과 동행하신다.(요3:6) 이것이 속죄의 은택이다.


3.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는 완전한 제사여서 온 세상의 죄를 화목케 하시기에 충분하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대상이었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하늘과 땅의 만물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하나로 모으시길 원하셨다. 앞으로 만물을 화목케 하실 때가 온다. 그래서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로 보는 것이다.(벧후3:13, 계21:1)


그리스도의 제사가 가지고 있는 충족성은 복음전도의 당위성을 가져온다. 그리고 회개와 믿음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의 축복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구약의 가르침이다.(구약의 선교사적인 사상) 모든 사람에게 나타날 구원의 은혜는 차별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딤전2:4)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이루신 것은 우주 만물의 회복을 향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가 유기체가 되고, 창조세계를 보존하신다. 그리고 창조세계가 회복을 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전도는 보편성을 띤다. 그래서 일반인도 이 은총에 참여할 약속으로 주셨다. 하지만 복음을 받아드리고 구원을 얻는 것은 일부에게만 제한시키신다. 결국 이 구원의 은총은 교회가 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신분으로 이루신 사역은 전적으로 교회와 관련된다.


Ⅱ. 그리스도의 사역, 높아지심


1. 그리스도의 높아지심(1) 부활


‘구원의 역사’가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으로 우리에게 그 은택으로 베풀어진다. 낮아지신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높아지신 분이다.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의 첫 번째인 부활은 우리를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보인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이시면서 동시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다. 낮아지신 분이면서 동시에 영광스럽게 되신 분이시다. 부활로 말미암아 그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고, 임금과 구주가 되셨다. 이는 참 이스라엘에게는 회개와 죄 사함을 주시고, 모든 원수들에게는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신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엡2:9-11) 낮은 상태에서 이루신 구원이 이제는 높은 상태에서도 이루신 구원이다. 높은 상태에서도 그분은 계속적으로 완전하시고 전능하시고, 참되시다는 것을 증명하신다. 마침내 그리스도는 신부인 교회를 완전하게 아버지께 돌려드리고, 점이나 흠이 없이 아버지께 드리기까지 그 일을 계속하실 것이다.(고전15:24, 엡5;25)


1)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의 시작은 부활이다.


그리스 정교회, 로마 카톨릭 교회, 루터교회 등에서는 그리스도의 지옥강하에 대하여 말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지옥에 내려가시고”라는 말의 의미는 문자적이고 실질적인 의미의 지옥강하가 아니다. 땅 아래 낮은 곳에 내려 가셨음을 의미한다.(엡4:9) 지옥의 고통과 같은 상태를 의미했다. 결국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부활로부터 시작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승천으로 이어지는 그 길로 나아가신 것이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네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하셨다. 그리스도는 부활 이후에 땅이 아니라 하늘에 속하게 되신 것이다. 무덤의 동일한 몸을 입으시면서 동시에 다른 형체, 부활체를 입으신 것이다. 죽으실 때의 육의 몸으로 심으나, 부활하실 때에는 그리스도나 신자나 마찬가지로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고전15:44)


2)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


그리스도의 부활은 고립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과 교회를 위하여 온 세상을 위하여 결코 다함이 없는 풍성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근본적으로 부활은 죽음에 대한 승리였다.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다. 그러므로 죽음을 정복하는 일도 오직 한사람에 의해서 일어났던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어김으로 죽음의 길이 인류에게 열렸다. 죄의 삯이 바로 죽음이기 때문이다.(롬5;12, 6:23, 고전15:21) 그러므로 죽음을 정복하는 것도 한사람에 의해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한사람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여 이루어야 했던 일이었다. 결국 부활은 죽음을 이기신 일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였다. 그는 사람으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장사되셨으며, 사람으로서 죽은 자의 세계로부터 살아나셨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죽음에 묶여 있을 수 없고 사단에게나 썩어짐의 권세에 지배를 받을 수가 없으신 분이었다. 무덤과 죽음과 지옥보다 더 강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입증한 사건이 부활이다. 그러므로 원론적으로는 사단이 이제 더 이상 죽음에 대한 지배권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이다.(히2:14)


3)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부활의 의미


그리스도의 부활은 영적이 부활이 아니라 육체의 부활이다. 그리스도는 단지 영적인 부활로서, 육체적인 부활이 아니었다면 전인의 부활이 아니다. 영혼과 육체를 지닌 그분이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지 못한 것이 되고 만다. 그분이 죄에 대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오직 죽은 자의 세계에서 육체적으로 다시 살아나시는 길 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물질의 세계에서 영적인 세계를 드러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주님의 육체적인 부활을 통하여,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들어가시기까지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죄와 그 모든 결과인 죽음까지 모두 이기시고 완전히 정복하셔서 썩지 않을 새 생명을 입증하셨다. 그러므로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세상에 들어오고, 죽은 자의 부활도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고전15;21) 그리스도께서 친히 부활이요 생명이시다.(요11:25)


4)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부활의 의미


신명기21:23에 의하면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로 명시되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저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런 유대인들의 생각을 바꾸었다.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저주요. 치욕이었다.(고전1:23)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모든 판단이 뒤집어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분이 받은 저주는 우리를 위해 대신 받은 저주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땅에서는 그분을 거부하여 부당하게 대우하였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면류관을 쓰신 것이다. 부활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의 증거이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났으나 영으로는 성결의 영으로 부활하셨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능력으로 선포하신 것이다.(롬1:3-4) 유대인과 로마인의 판결이 그릇되고, 그리스도가 법정에서 하신 고백이 옳았음을 보인 것이다. 결국 부활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를 다시 해석해야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5) 부활, 새로운 생명의 상태로 들어감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는 증거를 나타내신 것에 그치지 않고 전혀 새로운 생명의 상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요. 계속 진행되어질 높아지심의 시작이다. 그는 영원 전이나(히1;5), 대제사장으로 지명 받을 때(히5:5)나 그분이 부활로 다시 새로운 생명 속으로 들어가시는 때에도(행13:33) 하나님은 그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너를 낳았도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과거에 하나님과 함께 지니셨던 영광을 다시 취하셨다.(요17:5) 부활이 후에 그분은 다른 형체, 다른 모습을 취하였다. 다른 존재양식을 취하였다. 세세토록 살아계신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계1:18) 그는 생명의 주시오. 구원의 근원이시다. 부활은 성자의 “다 이루었다”는 선언에 성부 하나님의 아멘인 것이다.


6) 부활은 우리 의의에 관련됨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와 긴밀한 관련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의에 관련된 것이다. 우리의 죄를 사면하시는 일을 각 개인에게 적용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의를 위하여 살아나셨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이루신 화목이 실제로 우리에게 적용되도록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칭의’에 대한 증거인 동시에 그 근원이다. 이는 우리가 이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에 대하여 죽고, 새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화목과 죄 용서를 나누어 주시고자 할 목적으로 부활하셨는데, 이제는 우리가 실제의 삶에서 죄에 대하여 죽고, 다시 하나님께 대하여 살도록 하였기에 산 소망을 갖게 된다. 믿음으로 죄 용서를 받고 다시는 죄 가운데 살지 않고, 새 생명에 대하여 행하도록 한 것이다. 성화에 영화가 결부되어 있는 것처럼 부활로 말미암아 신자들은 산 소망에로 거듭난다.(벧전1:3) 하나님께서는 ‘부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소유하신 그 생명으로 우리를 보존하신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로 하나님과 함께 역사하신다.(롬6:8-10)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는 영원에 이르기까지 계속 진행된다.


2. 그리스도의 높아지심(2) 승천


부활 후 40일 후에 승천이 뒤따라 일어난다. 승천 사건은 간단하게 보고된다.(막16:19, 눅24:51, 행1:1-12) 그리스도의 예언하신 일이며, 사도들의 설교 중에도 증거 된 내용이다. 부활 후 40일은 승천을 준비였다. 승천에도 나아가는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부활 후 그분은 이전의 그리스도의 형체와 다르게 나타내셨다. 신비한 방식으로 나타내셨다. 승천은 영화의 과정이 아니라, 신격으로의 전환이 아니라 장소가 변화된 것이다. 땅에 계시던 그가 하늘로 올라가신 것이다. 승천은 자신의 행위였고, 능력이었다. 자신의 힘으로 승천하신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에 의하여 그를 하늘로 취하여 가신 것이다.(요3:13, 엡4:8-10, 벧전3:22) 부활과 함께 승천은 다시 자연법칙에 대해, 물질의 중력에 대해 승리하신 것이다. 더 나아가 그의 승천은 그를 대적하는 모든 마귀의 권세와 인간의 세력들에 대한 승리이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부활이 승천을 준비하는 것이었던 것처럼 승천은 다시 하나님의 우편에 앉을 준비였다.


3. 그리스도의 사역(3)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심


구약에서부터 이 자리는 그리스도의 자리였다. 메시아에게 약속된 자리였다. 예수께서도 자신이 이 자리를 예언하셨다.(마19:28,26:64) 승천 후에 그 자리를 소유하실 것을 여러 번 말씀하신 것이다. 사도들의 설교에서도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시는 일이 자주 언급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앉으셨다” “내 우편에 앉아있으리라”(행2:34) 때로는 자리를 취하시는 이을강조하시고, 앉으신 상태와 장소를 강조하시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눅22:69) 등등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께서 거기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 “일곱 촛대 사이로 다니신다.”(계2:1) 이런 모든 표현은 다 동일한 의미이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후 그리스도께서 온 우주에서 하나님 옆, 최고의 자리를 취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솔로몬이 자신의 어머니, 밧세바를 그의 우편의 자리에 앉게 함으로 그녀를 존귀하게 했다.(왕상2:19) 그리스도는 그의 완전한 순종을 근거로 신성에 따라 최고의 주권과 영광에로 높아지셨다. 창세전에 있던 영광을 다시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17:5) 그의 인성을 따라 존귀와 영광으로 관을 쓰신 것이다.(빌2:9-11)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을 비롯하여 그의 높아지심 전체가 심판을 위하여 재림하시는 데에서 종결되고, 그 절정에 이르는 것이다.(마25:31-32)


Ⅲ. 그리스도의 높아지신 상태에서 계속되는 그리스도의 3직


이제 그리스도는 종의 형체를 벗고 주요 왕의 형체로 일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만세 전부터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충만하셨다. 영원 전부터 영원토록 계속된다. 그런데 부활을 기점으로 이전에는 낮아지신 상태로, 이후에는 높아지신 상태로 그리스도께 주어진 직무(선지자, 제사장, 왕)를 감당하셨다.


1. 높아지신 상태의 그리스도의 사역(1) 계속되는 선지자 직무


주님은 부활 후에도 선지자로 활동하셨다. 부활 후에 설교하신 일에서 알 수 있다.


그분은 승천하시기까지 제자들에게 설교하셨다. 40일 동안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고, 주님은 부활 후에 ‘엠마오’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눅24:26-27, 44-47)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모든 내용이 그가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속에 집약되었다.(마2:18-20) 이처럼 그리스도는 부활 후에 선지사역을 감당하셨다.


승천 후에도 감당하신 선지자 사역은 사도들을 통하여 서신으로, 구두로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감으로 예수께서 선지사역을 이어가신다. 사도들의 설교와 서신은 예수의 가르침과 교훈에 대한 설명이요 해석이었다.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친히 그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예언의 역사를 계속하셨다. 그가 진리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친히 그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예언의 역사를 계속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말씀을 수단으로 하여 점진적으로 그 직분을 수행하신다. 그의 말씀을 보존하시고, 배포하시고, 그 말씀을 해명하시고, 해석하신다. 그의 말씀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민족들을 제자 삼으시고, 그들을 삼위 하나님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그의 계명 안에 행하도록 만드시는 도구이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언제까지나 세상 끝날 까지 그의 말씀과 그의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2. 높아지신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사역(2) 계속되는 제사장 직무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잠시 감당하시는 직무가 아니었다. 구약의 제사장들처럼 잠시 감당하다가 후계자에게 넘기는 직무도 아니시다.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쫒는 영원한 제사장이시다.(시110:4) 멜기세덱은 그저 모형적으로만 영원한 제사장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참으로 충만한 가운데 영원한 제사장이셨다.(히1:1-3) 주님은 영원에 속하신 분이었다. 그런데 시간의 세계에 들어오셔서 제물로 드리신 분이었다. 영원 전부터 제사장이시다.(히10:5-9) 이 땅에서 낮아지신 상태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시고, 이제 주님은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하늘나라에서 대제사장이 되시고, 영원히 그 직분을 감당하신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아버지께 그들을 위하여 대언 자가 되시는 것처럼, 성령께서도 그들의 마음속에서 아버지의 대언 자가 되신다.(요14:16)


3. 높아지신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사역(3) 계속되는 왕의 직무


그리스도는 부활 후에도 왕의 직무를 계속하신다. 부활과 승천 후에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를 높여 주와 그리스도와 임금과 구주가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왕 직은 낮아지심보다는 그분의 높아지심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성경은 왕 직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시온과 그의 백성과 교회를 대상으로 하는 그리스도의 왕 직(시2:6,요18:33)과 그의 원수들에게 향하여 시행하시는 왕의 직무이다.(시2:8, 계1:5) 전자는 은혜의 왕권이요. 후자는 권능의 왕권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에 관계에서 왕이시다.


‘머리’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그분은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의 생명을 충만케 하신다. 교회를 돌보시고 먹이시고, 보존하신다. 교회를 번창하게 하시고, 번영하게 하신다. 지체를 장성케 하시고, 연합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충만하심에 이르도록 교회를 충만케 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한편 주님은 세상에 대하여서도 왕 직을 감당하신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도 예외 없이 모두가 그리스도께 굴복하여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중보자가 되셔서 아버지께 굴복하심으로 감당하신다.(고전11;3) 교회에 대하여 은혜의 왕권을 감당하시지만 세상에 대하여는 권능의 주권을 부여받아서 왕과 주로서 모든 원수를 그의 발아래 두시기까지 왕으로서 통치하신다.(고전15:25, 딤전6:15)


마지막 때에 세상과 세상에 속한 각 개개인의 역사가 끝나고 난 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중보자라는 것을 각자 양심으로 그것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모든 무릎이 그리스도에게 굻고, 모든 입이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빌2:10-11) 그리고 언젠가는 그리스도께서 각 피조물에게 마지막 심판을 선고하실 날이 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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