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조직신학

하나님은 몇 분인가

이창무 2015. 6. 11.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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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그런데 출처를 잘 모르겠네요..ㅠㅠ]


하나님은 몇 분인가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혼란되고 불일치되는 교리이다. 과연 기독교는 몇 분의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가?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면, 대개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의견과 세 분이라는 의견이 반반으로 나누어지는 통탄스러운 현실을 발견하게 된다. 한국교회에는 전통적으로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으나, 1980년대 이후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주장이 신학자들에 의해 계속 제기되고 있다. 총신대의 차영배교수가 <개혁교의학: 삼위일체론>에서 “신은 분명히 세 분”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장신대의 김명용교수도 <목회와 신학>에 기고한 논문에서 “하나님은 세 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물론, 이런 주장들은 삼신론 三神論이라는 거센 비판에 직면하였으나, 그 비판자들 또한 양태론 樣態論이라는 반격을 받았다. 그러면, 무엇이 성경적이고 사실적인 하나님의 실체인가? 과연 하나님은 한 분인가, 세 분인가?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


우리는 구약에서도 신의 복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에게 단수형 ‘엘’이 아니라 ‘엘로힘’이라는 복수형이 사용된 것도 그러하거니와, 예를 들어 창세기에 기록된 인간의 창조 기사에 나오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는 언급에서도 분명히 신의 복수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성자나 성령은 구약시대에 아직 분명히 계시되지 않았고 희미한 흔적만 이따금 발견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철저히 성부 하나님 한 분만을 믿었다.


따라서, 성자가 성육신하여 세상에 와서 자신이 신이라고 말했을 때,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으로 정죄하고 결국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더욱이, 그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하늘에는 여전히 성부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하고 그에게 기도하였을 때, 유대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 말은 하나님이 두 분이라는 주장을 결과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통적인 유일신 신앙에 대한 근본적 도전으로서, 다신론의 범주에 속하는 이신론 二神論을 도입하는 이단적 발상이라고 간주하였다. 여기에 유대교와 기독교가 결별할 수밖에 없는 신관의 차이가 있었다.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에 대하여는 서로 일치하였으나, 추가적으로 그 분 외에 다른 분이 있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 상반된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스도인은 성부를 믿을 뿐 아니라 성자도 신이라고 믿고 섬기는 사람들이었다. 더욱이, 예수님은 두 분뿐 아니라 또 한 분이 더 있으며 승천 후에 그 분을 보낼 것이라고 가르쳤고 오순절에 성령이 오심으로서 기독교는 세 분의 하나님,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믿는 종교가 되었다.



초대교회의 혼란과 니케아회의


이제 기독교는 유대교와 결별하고 선교활동을 통하여 세계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심각한 신관의 혼란에 직면하게 된다. 일단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믿게 되었으나, 이 셋의 관계와 각자의 본질에 대하여 이견이 제기되었을 뿐 아니라, 선교과정에서 다양한 신관과 접하게 됨으로서 혼란이 가중된 것이다. 그리하여 열 가지가 넘는 신관이 대두되었으며, 주로 그리스도에 대한 견해 차이가 핵심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견해로는 아리우스의 삼신론과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이 있었다. 아리우스는 세 분이 모두 신이기는 하지만 본질과 등급에 차이가 있는 신들이라고 생각하였다. 성부는 영원하지만 성자는 세계창조를 위해 그 직전에 창조된 존재로서 성부와는 품격이 다른 이등급 신 theos deuteros이며, 성령은 그 보다도 열등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본질에 차이가 있는 세 종류의 신이라는 삼신론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런 견해는 다신론적 배경을 가진 로마와 그리스지역의 기독교인에게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퍼져나갔다. 한편, 사벨리우스는 유일신론적인 배경에서 이해하여 하나님이 결코 세 분일 수 없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이 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양태론을 주장하였다.


기독교는 어떤 이념이나 사상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고 관계를 회복하며 교제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신관의 차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교회가 초기에는 외부적 핍박으로 위기에 봉착하였으나 이제 내부적 혼란과 대립으로 자체붕괴에 이를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에,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교로 선포한 콘스탄틴 황제는 신관의 확립이 기독교의 통일과 발전을 위한 급선무라는 인식 하에 324년 최초의 세계교회회의를 소집하였다.


이와 같이 중대한 사명을 가지고 회집된 니케아회의에서는 아타나시우스를 중심으로 삼신론과 양태론을둘 다 거부하고 정통적인 삼위일체론을 확립하여 니케아신경을 발표하였으며, 이 신관이 오늘날까지 모든 기독교의 정통적 견해가 되어 왔다. 니케아회의는 한편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결코 한 분의 세 모습이 아니라 서로 다른 분이라는 성경적 신앙을 확인함으로서 양태론을 거부하였으며, 세 분은 본질상 차이가 있는 세 종류의 신이 아니라 모두 동일한 본질 homoousios을 가진 완전한 신이라고 고백함으로서 아리우스의 삼신론을 거부하였다. 아타나시우스신조는 니케아의 삼위일체론을 보다 자세히 설명하여 “성부 한 분이 있고 다른 분 성자가 있으며 또 다른 분 성령이 있다 Alia et enim persona Patris, alia Filii, alia Spiritus”고 분명히 언급한 후에, “세분은 모두 공히 영원하고 동등하다 Sed totae tres personae coaeternae sibi sunt, et coaequales”고 고백하였다. 실로, “세 인격을 혼합하거나 본질을 구분하지 않는 것 Neque confundentes personas, neque substantiam separantes”이 모든 교회의 정통적 신앙이다. 삼신론이란 세 분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세 분의 본질에 차이가 있어서 동등한 신이 아니라 세 신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로서, 삼위일체론은 확립되고 더 이상 재론되지 않았다. 기독교의 신관은 라틴어로 tres persona una substantia, 즉 동일한 본성을 가진 세 분이라는 문구로 분명하게 요약되었다. 그리하여, 서구교회의 신자들은 성부뿐 아니라 성자와 성령도 함께 사랑하고 예배하면서 세 분과 교제하며 인격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해 왔다.



한국교회의 혼란과 그 원인


우리는 이미 서구교회에서 신학이 정립된 이후에야 선교되었기 때문에, 삼위일체론은 그들이 니케아회의에서 확립한 바를 그대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 혼선이 야기된 이유는 주로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다신론적인 한국사회에서 기독교는 상대적으로 유일신론이라는 점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유대교나 이슬람교의 유일신론과 기독교의 유일신론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점은 별로 부각되지 않았다. 그 결과,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가르침이 공고하게 정착되었다. 한편, 실제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다른 분으로 믿고 그렇게 관계함으로서 세 분이라는 의식도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존재하였다. 따라서, 한국교회에는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생각과 세 분이라는 생각이 공존하게 되었고, 이 모순된 두 개념을 조화시킬 수 없기 때문에 신비 또는 불가사해한 교리로 간주하여 논의나 설명을 회피하였다.


둘째는 ‘삼위일체’라는 용어 때문이다. 본래 삼위일체라는 말은 중국에 온 로마 카톨릭선교사들이 라틴어 tres persona una substantia를 한문으로 직역한 것이다. ‘삼위 三位’라는 말은 tres persona, three persons, 즉 세 분을 의미하며, ‘일체 一體’라는 말은 una substantia, one nature, 즉 하나의 본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이 한문시대를 벗어나면서 ‘위 位’자를 ‘자리 위’라는 기초적인 의미만 알고 ‘분 위’라는 의미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게 되었기 때문에 혼란이 야기된 것이다. 과거의 한문세대는 ‘제위 諸位’가 ‘여러 분’이라는 사실을 모두 알았지만, 현대의 한글세대는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더욱이, ‘체 體’자는 당연히 ‘몸 체’로만 알고 보다 난해한 ‘본체 체’를 알지 못한다. 본체란 중국철학의 본체론에서 논하는 중심 주제로서 신과 같이 절대적이고 근원적인 존재의 본질을 가리킨다. 실로, 한문보다는 영어가 친숙한 오늘날의 한국인에게는 난해한 ‘삼위일체’보다 ‘three persons in one nature'가 훨씬 더 쉽고도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세째는 신조를 번역하거나 신앙고백을 작성함에 있어서 한국의 강력한 유일신론을 의식하여 모호한 문구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장로교회 12신조에서 2조는 ‘하나님은 한 분뿐이다’고 말하고, 3조는 ‘세 위가 계신다’고 고백한다. ‘세 위’란 번역하면 ‘세 분’이라는 말이므로 서로 모순된 ‘한 분’과 ‘세 분’을 동시에 고백함으로서 신조에 필수적인 명료성을 결여하여 신자들에게 혼란을 야기하게 되었다. 또한, 장로교 총회가 번역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5문은 ‘하나님 한 분밖에 다른 하나님이 계신가?’라고 묻고 ‘한 분뿐이시니, 참되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고 답한다. 그러나 영어원문에는 ‘분’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person’이라는 말이 전혀 없다: ‘Are there more Gods than one? There is but one only, the living and true God.’ 이 조항은 본래 ‘하나님이 세 분 three persons이지만 결코 세 신 three Gods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아타나시우스신조를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올바로 번역하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있는가? 한 하나님만 계시니...’로 해야 한다. 실로, 원문에는 ‘one person’이라는 말이 전혀 없는데도 열심히 ‘한 분’이라고 강조하고, 수없이 나와있는 ‘three persons’라는 말은 예외 없이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삼위 三位’로 번역하고 있다. 한글로 통일을 하든지 한문으로 통일하면 혼동이 없을 텐데, ‘한 분’은 한글로 ‘삼위’는 한문으로 번역하여 통일된 이해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더욱이, 많은 신학자들도 안전위주로 삼위일체론을 방치하여 심지어 신학회의 신앙고백도 잘못된 번역을 답습하고 있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의 신앙고백 2조를 보면,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이 영원토록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계심을 믿는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한 분 하나님이 세 분으로 계신다’는 말인가? 우리는 이런 불일치를 하루 속히 교정하여 우리가 실제의 예배와 신앙생활에서 하는 대로, ‘본질이 동일하고 동등한 세 분의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을 모두 믿고 한 분 한 분을 각기 사랑하고 섬겨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서 우리는 세 분이 같은 분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분명히 성부와 성자는 다른 분이며, 성부와 성령이 다른 분이고, 성자와 성령이 다른 분이라면, 왜 세 분이라고 고백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삼위일체론 서술과 고백이 모두 번역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원문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한다.



바르트와 사회적 삼위일체론


그러나 삼위일체론의 혼돈이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만은 아니다. 모든 서구의 신조가 tres persona 혹은 three persons를 고백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한 이해와 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근대에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령의 인격성을 부정하는 unitarianism 一位一體論과 binitarianism 二位一體論이 발생하였으며, 특히 구자유주의를 무너뜨리고 현대신학에 크게 공헌한 칼 바르트가 ‘Person’이라는 전통적 용어에 회의를 표명하고 ‘Seinsweise’, 즉 ‘존재방식’이라는 말로 대치하자고 주장함으로서 고대의 양태론이 다시 부상하게 되었다. 물론 바르트는 현대의 심리주의적 경향을 우려하여 그리하였고 자신이 양태론자가 아니라고 극구 변명하였으나, 전통적인 용어를 파기한 잘못과 그로 인한 혼란의 책임은 결코 간과될 수 없다. 다행히도, 이런 양태론적 경향에 반대하여 정통적인 삼위일체론, 즉 본질이 동일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분 하나님을 분명히 재확인하기 위한 ‘사회적 삼위일체론 Social Trinitarianism’이 발생하였다. 영국 옥스퍼드대의 레오나드 하지슨, 독일 튀빙겐대의 위르겐 몰트만, 미국 프린스톤신학교의 다니엘 밀리오리, 그리고 칼빈신학교 교장 코넬리우스 플랜팅가 등에 의해 주도된 이 정통적 삼위일체론의 보수운동은 세 분 하나님 사이의 지극한 사랑과 하나됨을 본받아 현대의 개인주의를 극복하고 교회와 가정과 사회의 공동체의식을 진작시키는 신론적 근거로도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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