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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론

이창무 2015. 6. 13.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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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왔으나 어디서 퍼 온지 모르는 삼위일체론입니다. 아무튼 좋은 글입니다. >




오늘날 한국교회가 가르치는 교리 가운데 성도들을 가장 당혹케 하는 교리 중 하나가 삼위일체론이다. 세 분 하나님이 한 분이 되고 한 분 하나님이 세 분이 되는, 이 이상한 교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많은 사람들은 포기를 하고, 또 일부 사람들은 세분 하나님을 하나님의 세가지 존재양태론 곧 양태론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존재는 이해가 되지 않고 납득이 되지 않는 어떤 신비일까?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란 도대체 어떠하신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나님은 삼위이시다

하나님의 삼위 되심을 이해할 때 첫째로 중요한 것은 삼위라는 말의 뜻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라는 말은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말이다. 한국의 많은 성도들과 교회들은 하나님의 삼위 되심의 삼위를 세 분으로 생각하지 않고, 셋이긴 하지만 세 분이 아닌 다른 어떤 형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빨리 버려야 할 사고이다. 많은 경우 삼위는 한 분 하나님이 세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는 어떤 형태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초대교회가 이미 이단으로 규정한 사벨리우스(Sabellius) 이단, 곧 양태론 이단으로 흐르는 사고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 되심을 세 분 하나님으로 인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삼위일체론을 바르게 이해하는 첫 단추를 잘못 꿴 셈이다.


20세기 삼위일체론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세운 칼 바르트(K. Barth)는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 거의 폐기된 삼위일체론을 재건하고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참 모습임을 밝혀내는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이러한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하나님의 세 분 되심을 바르게 밝히는 데는 유감스럽게도 실패하고 말았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삼위 되심은 세 가지 ‘존재양태’(Seinsweise)라고 표현함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독자적 인격체로서의 세 분 하나님을 바르게 표현해 내지 못했다. 바르트의 ‘존재양태’라는 표현은 양태론 이단의 검은 그림자를 느낄 수 있는 표현으로 빨리 시정되어야 할 잘못된 표현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바르트의 이 ‘존재양태’라는 표현은 20세기 카톨릭 신학의 대가인 칼 라너(K. Rahner)가 이어받아 하나님의 삼위 되심을 하나님의 세 가지 ‘존립양태’(Subsisteniweise)로 표현함으로써 바르트의 잘못된 길을 반복하고 말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바르트와 라너를 이어받는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그 오류는 계속되고 있다.



성경은 세 분 하나님을 가르친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 분이시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성부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일 때는 정확한 말이지만,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삼위를 지칭하는 말로서는 지극히 부적절하다. 구약에 기술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성부 하나님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신명기 6장 4절의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에서 표현되고 있는 ‘하나’라는 표현은 삼위일체론에 적용될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이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시고 참 신이라는 뜻의 하나이다. 중동 지방에 수많은 신들이 있지만 그 모든 신들은 거짓 신들이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참 신이시고 유일한 하나밖에 없는 신이라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세 분 되심을 뚜렷하게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책장을 열게 되면 세 분 되신 하나님의 모습은 너무나 뚜렷하게 등장하고 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예수께서 세례 받으신 장면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성경에 계시된 대표적 장면 가운데 하나이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성령이 강림하고 있고, 하늘로부터 성부 하나님의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선언이 나타나고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시고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이 예수 위에 강림하신 것이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분 하나님의 모습을 뚜렷이 인식할 수 있다.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한결같이 세 분 하나님을 나란히 언급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 신약은 아버지 하나님만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아들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있고 성령이신 하나님을 언급한다. 초대교회는 이 마태의 가르침에 따라 세 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고 바로 이 세례를 베푼 자리가 초대교회의 삼위일체론이 형성된 삶의 자리였다.


신약에는 구약에서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던 세 분 하나님의 모습이 자세히 기술되고 있다. 복음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술이고,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부터의 사도들과 교회의 역사 속에서는 성령의 활동이 자세히 기술되고 있다. 사도들은 성부 하나님 외에 다른 두 하나님을 명백하게 경험하고 있었고, 다른 두 분 역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사도 도마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하나님”(요 20:28)이라고 했고, 사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4)라고 세 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원했다.


성경의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흔히 발생하는 큰 오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일한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각 다른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시며, 또한 성령은 성부나 성자가 아니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요 14:16~17). 이 본문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보혜사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와는 다른 분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성자께서 성부 하나님께 구하겠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성자와 성부 역시 다른 분이시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에서 밝히 볼 수 있듯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는 다른 분이셨다. 예수께서는 끊임없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고 계셨다. 성부와 성자가 동일하다면 성자께서 성부께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일이 된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제자들을 가르치셨고 기도할 때는 자신 곧 성자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기도는 성부 하나님께 성자의 이름으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성령이신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의 기도를 도와주시고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하나님이시다(롬 8:26~27).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탄식하며 기도하시는 성령은 성부가 아니시다. 성령은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성부 하나님께 간구하는 분이시다. 성부와 성령이 같은 분이시라면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성부께 기도한다는 이 본문의 내용은 너무나 이상한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흔히 발생하는 크나큰 오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일한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기 다른 하나님이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의 기도는 성부와 성자가 다른 분이라는 것을 극명하게 잘 나타내 준다. “조금 나아 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자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에 복종시키는 비장한 기도를 드리셨다.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과 이 땅에 오셔서 구원 사역을 행하시는 성자는 같은 분이 아니라 다른 분이셨다. 마침내 성자께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는 부르짖음을 남기시고 운명하셨다. 이 성자의 부르짖음은 성부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죽으신 것이 아니고 성자 예수께서 고통을 당하시고 운명하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부 수난설’은 교회의 역사 처음부터 이단이었다.


삼위일체론을 오해함으로써 십자가에서 하나님 자신이 죽었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흔히 있는데, 이는 정교하게 가다듬어 다시 표현해야 하는 잘못된 표현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은 성자이시지 하나님 자신이 아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죽음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 속에 나타난 제2위 성자의 죽음이었다. 몰트만(J. Moltmann)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Der gekreuzigte Gote)에서 이를 하나님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죽음으로 바로 표현했다. 즉 십자가는 성부와 성령의 가슴 한 가운데에서 죽으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었다.


십자가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성부께서 성자를 버리신 사건이었다면 부활은 성부께서 성령을 통해 성자를 살리신 사건이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죽었다면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은 어디에 있겠는가! 성부께서는 성령을 보내셔서 죽으신 아들을 다시 살리셨고, 다시 사신 성자께서는 승천해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예수께서는 성부 하나님이 아니시고 성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성자 하나님이다. 그런 까닭에 사도신경은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물론 사도행전 7장 55절의 스데반이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라는 말씀에 기초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사도신경이 예수를 성부 하나님과 다른 분으로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셨고 마침내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세상을 구원하는 성령의 시대가 태동하게 되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그러므로 성령을 또 다른 형태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이와 같은 잘못은 삼위일체론에서 삼위 하나님이 각각 다른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크나큰 오류이다.


세 분 하나님의 동격성을 강조한 정통신조들

고대교회의 정통신조들 가운데 가장 권위있는 신조는 325년의 니케아 신조와 381년의 콘스탄티노플신조이다. 이 두 개의 신조는 동서교회가 공히 정통신조로 고백하고 있는 유일한 신조인데, 이 둘을 합해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신조라고도 한다. 이 두 개의 신조를 제외한 그 어떤 신조도 모든 교회에서 공인받을 수 있는 정통성을 가진 신조는 없다. 이 신조에 필적할만한 서방교회의 신조로는 사도신조를 들 수 있다. 이 사도신조의 현재의 형태는 6~7세기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주후 215년 경에 쓰여진 히폴리투스의 “사도적 전통”(Apostolic Tradition)에 질문형식의 신조에 사도신조의 원시형태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원형은 매우 오래 된 것으로 보이는 신조이다.


서방교회의 신조로서 오늘날 예배 때에 암송되고 있는 중요한 신조로 추앙받고 있는 사도신조는 그러나 삼위일체론 연구에 그다지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사도신조는 삼위일체론 연구에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하고 있는데, 그 중 첫째는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외아들이라는 것과 둘째는 이분이 부활하고 승천해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고백이다. 사도신조는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신조이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고 그것은 물론 사도들의 이해이기도 했다. 사도신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첫째는 천지를 만드신 전능하신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고, 둘째는 부활하고 승천하고 다시 오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고, 셋째는 성령과 교회와 죄용서와 몸의 부활에 대한 고백이다. 사도신조는 성령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해 각각의 항목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세 분 하나님을 거의 분명하게 드러내는 고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도신조 속에는 이 세 분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언급이나 그 가능성을 비추는 표현은 전혀 없다.


325년에 확정된 니케아신조는 그리스도교 최초의 정통신조이다. 이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임을 강조하려는 신조였다. 이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성부의 신성과 동일하지 않고, 성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일종의 피조물로서 시작이 있었고, 따라서 한때 그가 계시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는 아리우스(Arius)파에 대항해서 성자의 신성이 성부의 신성과 동일하다는 ‘호모우시아’(동일본질)를 밝힌 신조였다. “유일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온 우주에 앞서 나셨고, 참 신이시며, 참 신 가운데 신이시며 하나님에게서 나셨고, 창조함을 받지 않으셨고,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시며 …” 이 니케아신조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과 위격을 지니신 하나님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니케아신조는 결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혼동하지 않았고 이 두 분이 같은 분이 아님도 알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 하늘에 오르사 성부의 우편에 앉으셨으며 …”라고 사도신조와 동일하게 고백한다. 니케아신조는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신성과 위엄을 지닌 하나님이라는 것을 천명한 신조일 뿐, 성부와 성자가 괴상한 방식으로 같은 분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381년의 콘스탄티노플신조는 니케아신조의 발전된 형태인데 특히 성령에 대한 자세한 고백이 들어있는 신조이다. “… 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사오니, 그는 성부로부터 나오시고,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되셨으며 …” 이 성령에 관한 항목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실 주시라’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와 동일한 신성과 위격을 가지신 하나님임을 고백한 것이다.


요약하면 고대교회의 전통신조들은 유일하신 성부 하나님 외에 성자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시고, 성령께서도 참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신조들이다. 즉 고대교회의 정통신조들은 하나님이 세 분이심을 고백하는 신조들이다. 고대교회의 정통신조들은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하는 그 어떤 신조도 고백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 세 분 하나님이 동일한 권위와 신성을 가지신 분들로 영원토록 예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들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론을 삼신론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

하나님이 세 분이라면 결국 삼신론이 옳은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삼신론은 고대교회에서 이미 이단으로 규정되었고 성경적으로도 정당치 않은 이론이다. 왜냐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상호간에 아무런 관계도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세 신(神)이 아니고 하나로 존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다. 그러면 세 분 하나님이 하나로 존재한다는 일체성의 내용은 무엇일까?


요한복음 10장 30절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성자 예수와 성부 하나님이 하나라는 이 말씀은 이미 삼신론이 잘못임을 드러내고 있는 중요한 말씀이다. 그러면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했을 때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


삼위일체론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성경에 입각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역사 위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계시와 성경를 떠나 사변으로 치달으면 안된다. 사변으로 치닫게 되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실패한다.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성경의 계시에 철저하게 입각된 교리이고, 예수의 역사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에 대한 자연스러운 결론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0장 30절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말씀의 ‘하나’를 이해할 때도 사변을 하면 안된다. 이 ‘하나’라는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요한복음을 쓴 사도 요한이 이 ‘하나’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즉 성경 기자가 스스로 설명하고 있는 내용과 그것을 설명하는 구조를 떠나 괴상한 구조를 끌어들여 사변하면 안된다는 말이다. 사도 요한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말씀을 스스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본문을 유념해 자세히 살펴야 한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7~11).


성부와 성자께서 하나라는 사실은 성부가 성자이고 성자가 성부라는 말씀이 아니고 성부는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는 성부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의 독특한 존재방식을 설명하는 말이다. 성부께서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께서 성부 안에 계시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는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그러므로 성자께서 행하시는 일은 성부께서 성자 안에서 자신의 일을 행하시는 것과 동일하다. 그런데 유념해야 할 것은 요한은 어느 곳에서도 성부가 성자이고 성자가 성부이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가 한 분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요한의 말의 핵심은 성부가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계시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는 하나이다는 것이다.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고 또한 성자와 함께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거하시고 또한 성부와 함께 거하시는 이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양태를 설명하기 위해 고대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만든 교부들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다마스케누스(Damascenus)의 요한이 사용한 이후 동서교회 양쪽에 걸쳐 삼위 하나님의 일체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이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상호침투를 통한 내주와 순환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도 요한이 설명하고 있는 성부가 성자 안에 침투해서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침투해서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양태에 대한 성서적 표현에 상응하는 용어이다.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성자의 사역인 동시에 성부의 사역이다. 성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에서부터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까지 언제나 성자와 함께 계셨고 성자 안에 계셨다. 성자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성부는 어디 계셨을까? 성부께서는 십자가에서 성자와 함께 성자 안에서 함께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나 성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고난을 받으셨다. 성자는 자신을 세상을 위해 내어 주시는 고난을 겪으셨고, 성부는 자신의 외아들을 세상을 위해 내어 주시는 고난을 겪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성자의 고난인 동시에 성부의 고난이었다.


이와 같은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는 성자와 성령과의 관계에도 해당된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 때부터 그를 잉태하신 영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해 출생하셨고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 동안 그분 안에 계셨고 그분과 함께 거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셨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는 삼위일체론은 성부가 성자가 되고 성자가 성령이 되고 성령이 성부가 되는 기괴한 사실을 설명하는 교리가 아니다. 그런 것은 기괴할 뿐만 아니라 있을 수도 없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는 삼위일체론은 한 분 하나님 안에 다른 두 하나님이 침투하여 거하시고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양태를 설명하는 교리이다. 즉 한 하나님을 보면 그분과 더불어 다른 두 하나님의 모습과 영광을 함께 보게 되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양태에 대한 설명이다. 이런 까닭에 예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삼신론은 세 분 하나님의 존재만 설명할 뿐, 이 하나님이 위와 같은 방식으로 일체를 이루고 있는 일체성을 전혀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된 이론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

삼위일체론은 신약의 요한복음에만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게 아니다. 신약성서 전반에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모습이 뚜렷이 나타난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14장 9절에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예수의 말씀과 연장선상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나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본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골로새서 2장 9절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분이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신성의 충만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전히 거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는 삼위일체론은 한 분 하나님 안에 다른 두 하나님이 침투하여 거하시고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양태를 설명하는 교리이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고후 5:19)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 바울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셨다”는 말씀과 요한복음 14장 10절의 요한의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니라”라는 말씀은 그 의미가 완전히 동일하다.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는 것을 설명하는 교리이다. 이 교리는 사변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사건이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이고 하나님 자신의 사건임을 설명하는 교리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 아버지와의 깊고 깊은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가슴을 드러내는 사건이라는 것을 말하는 교리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 아버지의 가슴 한 가운데 있는 십자가이다. 또한 바로 이런 시각에서 사도 요한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라고 기술했다.


성자 안에 성부와 성령께서 온전히 거하셨던 역사는 오순절 이후 성령 안에 성부와 성자가 온전히 거하시는 역사로 변천된다. 이것은 성령 안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의 또 다른 형태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롬 8:9)이고, 우리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난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성령은 “하나님의 영”(벧전 4:14)이고, 우리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만난다. 따라서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는 성령 안에서 예배해야 된다.



삼위일체론은 철저히 성경에 기초해야 한다

삼위일체론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성경에 기초해야 하는 교리이다. 그것은 또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신 하나님 상호간에 일어나는 신비한 구원의 역사를 바르게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교리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세월이 흐르면서 삼위일체론은 점차 사변적 형태를 띠게 되는데, 이 사변적 형태로의 잘못된 발전의 핵심은 셋이 하나이고 하나가 셋이 되는 ‘3=1’의 괴상한 논리에로의 발전이다. 한 분이 세 분이 되고 세 분이 한 분이 되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있을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우리의 이성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존재의 신비라는 괴상한 논리로 무장해 교회와 성도들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이론으로 발전했다. 이것은 주로 서방교회에서 일어났다.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만드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갑파도키아 교부들의 맏형격인 가이샤라의 바실(Basil)은 세 분 하나님의 일체성을 세 하나님의 코이노니아(koinonia)의 개념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갑파도키아 교부들은 세 분이 한 분이 되고 한 분이 세 분이 되는 괴상한 논리는 상상할 수 없었다. 원래의 삼위일체론의 도식인 하나님의 한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는 세 분 하나님을 명백히 전제하면서 이 세 하나님이 한 본질을 공유하고 있다는 뜻이 있다. 즉 세 하나님의 신성에 높고 낮음의 차이가 없고 동일한 신성을 공유하고 있고, 이 신성의 교류를 통한 하나됨을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였는데, 이런 의미에서는 세 분 하나님은 하나이시지 한 분은 아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본질(우시아)을 실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한 분인 동시에 세 분이 된다. 하나님이 한 분인 동시에 세 분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힌 최초의 신조는 아타나시우스신조(420~450년)이다. 이 신조는 동방교회가 인정하지 않는 서방교회만의 신조이다. 서방교회가 이런 경향으로 흐르게 된 것은, 터툴리안(Tertullian)이 삼위일체론의 도식에서 ‘하나의 본질’(우시아)을 ‘하나의 실체’(una substan- tia)로 이해하고 있었고 이 흐름을 어거스틴(Augustin)이 이어받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아타나시우스신조는 ‘하나의 본질’을 ‘하나의 실체’(una substantia)로 이해하면서 ‘삼일’(三·一)의 교리를 구체화시켰다.


그런데 이 발전보다 더욱 불행한 것은 ‘3=1’이라는 것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고 이해가 어렵기 때문에 세 분 하나님을 하나님의 세 가지 존재양태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서방교회 안에 수없이 반복되어 나타나는데, 이미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놓았다는 터툴리안에게 그런 경향이 있었고, 20세기에는 칼 바르트와 칼 라너라는 신구교의 신학의 거장들이 이런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런 모든 오류의 배후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어야 한다는 성경의 계시와는 관계없는 철학적인 대전제가 깔려 있다.


삼위일체론의 사변적 발전은 금물

현재 한국교회에 전달되어 있는 삼위일체론은 철학적으로, 사변적으로 상당히 발전되어 있는 삼위일체론이다. 이 삼위일체론은 교회와 성도들을 끊임없이 당혹케 하고,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에 많은 이단이 발생할 소지를 지니고 있다. 삼위일체론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서교회가 공히 인정하고 있는 고대교회의 정통신조들을 바르게 연구해야 하고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놓았던 동방교회의 신학을 연구해야 하며, 그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입각해 이해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성경에 입각해 알게 되는 하나님은 성자 안에 성부가 계시고 성령 안에 성자가 계시고 성부 안에 성자가 계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다. 성자 안에 성부가 계시고 성부 안에 성자가 계시기 때문에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콘스탄티노플신조가 규정한대로 빛 가운데 빛이요 참 하나님 가운데 참 하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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