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이창무 2017. 7. 30.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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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19 강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말씀 / 누가복음 16:1-13

요절 / 누가복음 16: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지난 목요일과 금요일에 문재인 대통령과 대기업 총수들과 간담회가 있었습니다. 재개 순위 14위 안에 있는 재벌들이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재계 순위 50위권 밖에 있는 오뚜기 함영준 회장도 초청을 받아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뚜기는 마트의 시식 판촉사원을 포함한 3,099명의 전 직원이 모두 정규직이라고 합니다. 또 심장병 어린이 4,357명의 수술비를 후원했으며 상속세 1,500억 원을 성실하게 납부했습니다. 대표적인 서민음식인 라면의 가격을 2008년부터 10년째 한 푼도 올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민들은 오뚜기를 가리켜 갓뚜기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자발적으로 오뚜기 제품 구매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최근에 그동안 라면 시장을 휘어잡고 있었던 농심을 오뚜기가 대추격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오뚜기는 재물로 친구를 삼는 지혜를 발휘하여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오뚜기는 오뚜기 왕국의 확장과 번영을 위해 이런 지혜를 발휘했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영광을 위해 이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재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재물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과 지혜를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이 부자는 집은 예루살렘에 있었지만, 갈릴리에 거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토지의 관리를 청지기 한 사람을 세워 그에게 모두 맡겼습니다. 주인은 청지기에게 주인의 이름으로 계약을 체결할 수 있을 정도까지 전권을 위임해 주었습니다. 청지기는 맡은 재산을 잘 관리해서 주인에게 유익을 남겨 주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청지기는 어떻게 했습니까? 청지기는 자기 돈이 아니라고 주인의 돈을 펑펑 써버렸습니다. 먼저 로마에서 직수입한 포르쉐 스포츠카를 하나 뽑았습니다. 또 TV에 나오는 유명 쉐프들을 집으로 불러서 시도 때도 없이 파티를 벌였습니다. 항상 최신형 프리미엄 스마트폰과 수천만 원짜리 고급 시계를 차고, 수제 구두에 명품 브랜드 양복만 입었습니다. 틈만 나면 해외 연수란 명목으로 바다 건너 유명한 관광지에 다녀왔습니다. 이런 와중에 주인의 재산은 늘기는커녕 점점 축이 나고 있었습니다. 한 종이 보다 못해 예루살렘에 있는 주인에게 익명으로 투서를 넣었습니다. 거기에는 청지기의 모든 비리가 낱낱이 적혀 있었습니다. 주인은 즉시 청지기를 소환하여 추궁했습니다. "내가 네게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You're fired!" 청지기는 그 자리에서 해고를 당했습니다.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다만 청지기에게 짧은 인수인계 기간만이 허락되었습니다. 이에 청지기는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청지기 업계는 생각보다 좁았습니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로 해고된 사실이 대지주들에게 금방 알려질 것이 뻔했습니다. 다른 주인에게 가서 청지기로 재취업할 가능성은 제로였습니다. 그렇다고 막노동을 하자니 저질 체력이라 도저히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서울역에서 노숙자라도 할까 했으나 쪽 팔려서 이것도 도저히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고민하느라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불을 뒤척이던 청지기에게 갑자기 좋은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4)" 청지기가 생각해낸 자구책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빌붙기 작전이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일일이 불렀습니다. 그리고 기름 백 말을 빚진 자는 절반을, 밀 백 석 빚진 자는 오분의 일의 채무를 탕감해 주었습니다. 비율은 각각 다르지만 금액으로 보면 모두 500 데나리온, 현재 시세로 수천만 원에 해당하는 거액을 일괄적으로 깎아주었습니다. 비유 속에서는 두 사람이 나오지만 그 외에도 이런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더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많은 채무자들이 이제는 주인에게 빚진 것이 아니라 청지기에게 빚진 셈이 되었습니다. 후에 청지기가 몸을 의탁했을 때 인간의 도리 상 보살펴 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물로 친구를 만들었습니다. 이로서 청지기에게는 미래에 먹고 살 수 있는 길을 열렸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주인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기가 찰 노릇입니까? 이 청지기에게 온갖 저주와 악담을 퍼 부어도 시원치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8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주인이 청지기를 칭찬하다니요? 상식적으로 잘 납득이 되질 않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주인이 청지기의 모든 점을 잘했다고 칭찬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은 분명히 청지기가 옳지 않다고 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물을 허비했습니다. 불의를 저지르고도 사과나 뉘우침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제 살 길을 찾겠다고 추가적으로 주인의 재산을 크게 축내고 말았습니다. 윤리적으로 옳지 않을 뿐더러 법적으로도 범죄 행위입니다. 양재규 목자님에 따르면 이 경우 배임죄와 횡령죄에 해당되어 최소한 징역 5년 정도는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절대 청지기의 이런 행동을 본받거나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주인이 칭찬한 것은 청지기가 지혜 있게 행동한 점, 오직 이 한 가지 때문이었습니다. 청지기의 지혜로운 행동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큰 위기 상황 속에서도 멍하게 있지 않고 기막힌 아이디어를 내어서 미래를 대비한 점입니다. 아이디어에만 그치지 않고 청지기에게는 이를 즉시 실행에 옮기는 추진력도 있었습니다. 청지기의 잘못이 아흔아홉 가지라도 이 점 한 가지만큼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8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여기서 이 세대의 아들들과 빛의 아들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빛의 아들들은 빛이신 하나님의 자녀인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은 여전히 어둠에 속해 있는 세상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세상은 불의하고 그 안에 빛이 없습니다. 하지만 위기 상황 속에서 재빠르게 미래에 살 길을 도모하는 측면에서는 매우 뛰어납니다. 1993년 6월 7일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200여명의 임원들 앞에서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바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어라'라는 말입니다. 품질을 혁신해서 세계 일류가 되지 않으면 미래에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 후 미래전략실을 만들어서 20년, 30년 후를 대비하는 방안들을 수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24년이 흐른 올해 2분기에만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이 14조원으로 애플을 제치고 세계 1위가 되었습니다. 재벌이 살아남고 성장하기 위해 이렇게 몸부림치는 투쟁을 한다면 하물며 빛의 자녀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빛의 자녀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멀리 궁극적인 미래까지 내다봅니다. 그 미래는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미래를 준비하는 것 못지않게 빛의 자녀들은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일에 철저해야 마땅합니다. 멍하니 손 놓고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서 창의적인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내어야 합니다. 거기에 더하여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과감성과 추진력도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위기를 극복하고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일구어갈 수 있습니다.


요즘 한국 교회가 위기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주일 학교가 아예 없는 교회가 전체 교회의 60 퍼센트에 달한다는 조사결과가 있습니다. 이 말은 곧 한국 교회에 미래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학생 복음 운동이 위기라는 말도 오래 전부터 들었습니다. 요즘 많은 캠퍼스 선교단체들이 학생의 대가 끊겨서 명맥을 유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임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알면 알수록 크고 작은 위기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멍하니 있으면 되겠습니까? '위기다. 걱정이 태산이다.'하면서 말만 하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제 살 길을 모도하기 위해 미래를 대비하는 세상 사람들보다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들이 치열하게 고민하고 씨름하는 것 못지않게 우리도 하나님 나라 역사를 위해 고민해야 합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고 또 과감하게 추진하고 시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에 여름수양회를 창세기 수양회로 했습니다. 전에 없던 획기적인 시도였습니다. 솔직히 망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망하지 않았습니다. 학생 양들도 작년에 비해 열네 명이 더 참석했습니다. 수양회 가운데 창세기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는 더 늦기 전에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가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 한 사람이 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동참하여 합심 동역으로 이루어 갈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고민하고 제안하고 기도하고 동역하는 지혜로운 청지기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할 일이 무엇입니까? 9절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불의의 재물이라는 표현을 오해하곤 합니다. 불의의 재물이란 앞선 비유의 청지기처럼 불의한 방법으로 벌어들인 재물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무조건 돈을 많이 벌어서 좋은 일에 쓰면 만사 오케이라는 식이 됩니다. 성경은 이런 식의 돈세탁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재물을 가리켜 불의하다고 하셨을까요? 이는 재물이 사람의 마음을 불의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재물을 모으는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죄를 많이 저지릅니다. 사람을 착취하기도 하고 때로는 속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재물은 사람의 마음을 교만하게 합니다. 돈이 많으면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게 됩니다. 또 하나님보다 돈을 더 의지하게 됩니다. 여유가 생기면 죄 지을 생각부터 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딤전 6:10).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중세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처럼 아예 돈을 더럽게 여기고 만지지도 말아야 하겠습니까? 이것도 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돈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선한 일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면 재물에 대한 예수님의 처방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돈을 버는 방법에 대해서는 연구를 많이 하지만 어떻게 해야 돈을 가치 있게 쓸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돈을 버는 것보다 어떻게 쓰느냐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물질을 친구를 사귀는데 쓰는 것이 가장 지혜롭고 가치 있게 쓰는 길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귀어야 할 친구가 누구일까요? 9절을 다시 보면 그 친구는 재물이 없어질 때에 우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할 사람입니다. 재물이 없어질 때란 이 세상의 종말이 왔을 때, 개인적으로는 죽음 이후의 때를 말합니다. 재물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없어질 날이 옵니다. 아무리 세계 1위의 갑부 빌 게이츠라 할지라도 죽을 때는 빈손으로 가야 합니다. 재물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재물에 손해 보더라도 친구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죽음과 종말 이후에도 우리를 영접해 줄 친구가 누구일까요? 일단 가장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를 영접해주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5절에서 제자들을 향해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영 죽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세상에 이런 친구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친구가 되십니다. 이 예수님을 얻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르고 위해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젊음을 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친구삼기 위해 투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무모한 희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향유 부은 마리아에게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마26:13)”지금 마리아의 얼굴은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고 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누구보다 물질을 가장 지혜롭게 투자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승천하셔서 이 땅에 계시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가진 물질로 예수님을 대접해 드릴 방법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이런 고민을 할 것을 미리 다 아시고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 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지극히 작은 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 이어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말씀해주셨습니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라는 거지는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연명하려 했습니다. 부자는 거지 나사로를 못 본 체 했기 때문에 죽음 이후 음부에 내려가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란 이 나사로처럼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재난을 당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시간과 물질을 사용하는 것이 예수님을 친구로 삼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영접하고 대접한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25:34)”


다음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를 영접해 줄 친구는 곁에 있는 믿음의 동역자들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양들입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2:19,2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우리가 천국에서 요회 동역자들을 만나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사모님이 매주 주일마다 차려주셨던 맛있고 푸짐한 점심 식사를 잊을 수가 없어요. 너무 감사했어요."하면서 두 팔 벌려 반갑게 맞이하지 않겠습니까? 또 목자는 한 양을 돕고 섬기기 위해서 애쓰고 많은 수고를 합니다. 시간을 쪼개서 전도하고, 일대일하고, 심방하고, 밥 사주고, 놀아주고, 섬겨줍니다. 양이 해산의 수고를 감당하신 목자님을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만났을 때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목자님의 배품과 섬김 덕분에 저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어요. 고마워요.' 하면서 목자를 등에 업어 덩실덩실 춤을 출 것입니다. 이처럼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 믿음의 동역자들, 그리고 양들을 친구 삼기 위해 재물을 쓰는 사람이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하지 않은 재물을 가지고 영원히 함께 할 친구를 사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보셨습니까? 2차 대전 때 오스카 쉰들러라는 사업가가 무고하게 학살당하는 유대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군용 식기공장에 유대인들을 직원으로 채용했습니다. 다른 유대인들을 다 죽이는데 거기 채용된 유대인들은 군용 식기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독일군들이 잡아가지 않았습니다. 전쟁의 막바지에는 수백 만 마르크의 돈으로 독일 당국과 흥정을 해서 유대인 1,100명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 쉰들러는 독일군 측 식기 공장을 운영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유대인들이 나서서 쉰들러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친구삼고 살려 주었기 때문에 우리도 당신들에게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유대인들이 금니를 빼서 반지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 반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온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다(Whoever saves one life saves the entire world).” 우리가 출세하고 성공하려면 인맥이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이왕 인맥을 쌓으려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인맥을 형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원한 친구를 얻으려면 투자를 해야 합니다. 물질은 이렇게 잘 쓰기 위해서 열심히 버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동역자들을 위해, 양들을 위해 물질과 시간을 투자하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이 청지기의 문제는 작은 일에 불의하고 충성심이 없는 것입니다. 작은 일은 열심히 해도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또 작은 일에 불의해도 사람들이 잘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것쯤이야 괜찮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속담에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 불의한 자는 큰일에도 불의합니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됩니다. 왜냐하면 작은 일에 충성된 자는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과 충성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극히 작은 일이란 무엇입니까? 11,12절을 보면 지극히 작은 일은 바로 불의한 재물을 맡은 청지기로서 해야 할 일을 가리킵니다.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여기서 지극히 작은 것, 남의 것은 불의한 재물이고, 큰 것, 너희의 것은 ‘참된 것’, ‘신령한 것’, ‘영원한 하나님 나라’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볼 때 재물은 큰 것처럼 보입니다. 평생 재물을 얻기 위해서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재물은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또한 남의 것이란 하나님의 것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은 근본적으로 우리 것이 아닙니다. 모두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본래 우리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태어났고,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청지기가 주인에게 세움을 받고, 또 주인에게 해고당하는 것처럼,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 이 땅에 태어났고, 그분에 의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언젠가는 이 땅을 떠나야 합니다. 이 청지기에게 제일의 덕목은 충성입니다. 재물에 충성한다는 것은 재물 자체에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을 맡기신 주인의 뜻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뜻대로 재물을 쓰고, 주인을 위해서 재물을 늘리고, 주인을 위해서 재물을 잘 관리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뜻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맡기신 재물을 통해서 우리의 충성심을 테스트해 보십니다. 충성심이 인정되면 재물보다 더 큰 것, 참된 것, 영원한 것, 신령한 축복을 넘치도록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 재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선물입니다. 자녀들은 누구의 소유입니까?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맡은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내 가정이라고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우리는 가정의 청지기로서 가정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에 충성해야 합니다. 가정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외면한다면 결국 우리는 불의한 청지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말씀에 기초해서 가정 교회가 무엇인지를 가치관을 정립해야 합니다. 이에 기초해서 가정이 하나님 역사를 충성되게 섬길 때,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창세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가정과 같이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또한 구속 역사에 귀하게 사용해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인 재물과 가정을 맡은 청지기로서 충성을 다해 주님의 뜻을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섬겨야 할 두 주인은 둘 다 절대적인 충성심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시고, 재물도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고 하셨습니다. 재물도 우리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합니다. 재물이라는 말이 원어로 “맘몬”이라고 합니다. 맘몬은 본래 재물의 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재물의 신이 재물을 그냥 내려줍니까? 뼈 빠지게 일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 충성을 다할 때 재물을 줍니다. 또 재물이 늘어나면 날수록 더욱 더 재물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붓도록 요구합니다. 그래서 일평생 재물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도록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를 중히 여기면 다른 하나는 경히 여기게 됩니다. 중히 여긴다, 경히 여긴다는 말은 가치를 어디에 더 두느냐 하는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영어로 가치라는 말 worth에서 예배라는 worship 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두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은 재물을 섬기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재물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재물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재물은 섬김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재물은 친구를 삼는 수단일 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재물에 대한 바른 이해, 다시 말하면 돈에 대한 자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떤 학자는 예수님의 가르치심 중에 삼분의 이가 재물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물질생활과 제자도는 의외로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발을 붙이고 사는 동안에는 돈이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돈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존 웨슬리가 말하기를 '지갑이 회개해야 진정한 회개를 한 것이다'라고 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어디에 얼마를 썼는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이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재물에 관한 세 가지 교훈을 남기셨습니다. "첫째, 불의한 재물로 영원한 친구를 사귀라. 둘째, 하나님은 재물에 충성된 자에게 참된 것을 맡기신다. 셋째,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우리가 이 교훈들을 마음에 깊이 새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재물 때문에 불의에 빠지지 않고 재물로 친구를 삼는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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