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아버지의 원대로

이창무 2017. 8. 5.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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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20 강


아버지의 원대로


말씀 / 누가복음 22:39-62

요절 / 누가복음 22: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지난 6월 14일 한밤 중 영국 런던의 24층 아파트 그렌펠 타워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불과 15분 만에 화염이 건물 전체를 삼켜 최소한 80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대참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지난 금요일 밤 1시에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있는 86층짜리 토치 타워에서도 큰 불이 나서 주민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화재 영상을 보면 두 건물이 모두 비슷하게 아파트 중간층에서 발화한 불길이 외벽을 타고 위로 번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 건물의 소재도 비슷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두바이 토치 타워에서는 런던과 달리 두 시간 만에 불길을 잡고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났을까요? 토치 타워에는 강철과 콘크리트로 불길을 차단하는 방화벽이 있었고, 그렌펠 타워에는 이런 시설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록 큰 불이 나더라도 이처럼 미리미리 철저히 준비한 곳에서는 큰 피해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때로는 불같은 시련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일이 안 생기면 좋겠지만 도무지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에는 그런 시련을 맞은 한 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분은 앞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아셨습니다. 체포와 조롱과 욕설과 구타, 끔찍한 처형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디로 가셔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준비하신 방화벽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인생에서 불같은 시련과 고난을 맞이하기에 앞서 우리가 해야 하는 오직 한 가지 일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후 예수님은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다음 행선지는 감람산이었습니다. 감람 산 서쪽 골짜기에 겟세마네 동산이 있습니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늘 습관을 따라 기도하시던 장소였습니다. 평소 예수님은 이곳에 홀로 기도하려 가셨습니다. 그런데 이날만큼은 제자들도 함께 따라갔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따라오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돌 던질 만큼 거리를 두고 기도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정도 거리라면 예수님이 어떤 내용으로 기도하시는지 제자들도 충분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기도에 몰입하시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을까요? 예수님께서 어째서 이렇게 평소와 달리 제자들을 곁에 두시고 함께 기도하고자 하셨을까요? 이것은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기도를 배우길 간절히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기도들이 나옵니다. 한나의 눈물어린 기도, 다니엘의 하루 세 번 기도, 엘리야의 갈멜산 기도, 과부의 한 맺힌 기도, 소경 바디매오의 기도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깊고 심오한 기도는 바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기도를 배워서 기도의 사람들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제자들에게 닥칠 시험과 환란을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간곡히 당부하셨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40)" 그러면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가 있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에게 기도는 평소 몸에 밴 습관이었습니다. 39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예수님에게 있어서 기도생활은 특별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반복을 통해서 몸에 밴 하나의 습관이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이 덥든지 춥든지 항상 기도하셨습니다. 어디를 가시든지 기도하기에 적합한 자기만의 기도처를 두셨습니다. 또 하루 중에 일정한 시간을 기도 시간으로 떼어 놓으셨습니다. 나중에 가룟 유다가 이곳으로 예수님을 체포하러 올 수 있었던 것도 예수님의 기도 습관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 힘들고 어려운 순간을 만나면 누구나 기도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기도를 내내 안 하다가 갑자기 하려면 기도가 잘 나오질 않습니다. 평소 기도가 몸에 배어 있어야 결정적인 순간에도 자연스럽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성경 속에서 가장 위대한 기도로 꼽히는 겟세마네 기도는 어느 날 갑자기 탄생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꾸준한 기도 습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습관이 있습니까? 자기 전에 꼭 스마트폰을 보는 습관이 있습니까? 8시 뉴스를 시청하는 습관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습관은 바로 기도의 습관입니다. 매일 일정한 시간, 일정한 장소에서 기도하는 습관입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의례히 그 시간만 되면 내가 거기에서 기도하고 있는 줄 다 알고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도는 날 잡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날 잡아서 기도하려고 하면 날이 안 잡힙니다. 이것저것 할 게 많아서 계속 미루게 됩니다. 날 잡아서 기도하려는 것은 사탄에게 '날 잡아 잡수시오.'라고 것과 같습니다. 기도는 날마다 하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사도 바울은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처럼 기도의 습관을 형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우리 호흡처럼 일상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겸손한 자세로 기도하셨습니다. 41절을 보십시오.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당시 유대인들의 전형적인 기도 자세는 일어서서 하나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와는 달리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이는 항복과 복종의 표시이자 간절한 청원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는 것은 기도하실 때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낮추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겸손한 기도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기도를 모범으로 삼았기 때문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이 전형적인 기도 자세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대부분 기도할 때 무릎 꿇거나 엎드려 기도합니다. 하지만 몸만 무릎을 꿇는다고 겸손한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무릎 꿇고 기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는 순간 우리 마음도 이 자세에 합당하게 준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항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다만 하나님께 자비와 긍휼만을 간절히 구하는 마음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이렇게 우리가 겸손한 자세로 기도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열납하시고 기꺼이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42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여기서 이 잔이 무슨 잔일까요? 잠시 후 예수님께 닥쳐 올 십자가 곧 죽음의 잔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고난의 잔을 마셔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적어도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있을 때부터 이미 마음 준비를 단단히 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막상 십자가가 코앞으로 닥치자 번민하지 않을 수 없으셨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받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 실망할지도 모릅니다. 인류 역사에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인 사람들은 여럿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독배를 마시고 죽은 소크라테스가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기꺼이 죽음의 잔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이웃집에서 빌렸던 닭 한 마리를 꼭 갚아주라는 다소 유머러스하기까지 한 유언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기도는 인류의 구원자로서는 너무 나약해 보인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은 전혀 다른 죽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자기 자신의 신념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전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당하시는 저주와 심판의 죽음이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은 가장 친밀한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으셔야만 했습니다. 이 죽으심의 고통은 누구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육체를 지니셨던 예수님이십니다. 얼마나 마음이 짓눌리시고 힘이 드셨겠습니까? 이때 예수님은 처음부터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힘든 것은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괴로운 것은 괴롭다고 속마음을 토해내셨습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기도는 있는 모습 그대로 내 마음 상태를 주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아파요" "힘들어요" "무서워요" 스스럼없이 이야기합니다. 격식 차리지 않습니다. 꾸밈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기도란 아이가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부모에게 자기의 사정을 토로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나의 마음 상태 그대로를 입으로 말하고 표현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때에 누릴 수 있는 놀랍고도 엄청난 특권입니다. 


넷째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42절 하반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예수님은 단지 자기의 고민과 고뇌를 토로하는 단계에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더 높은 곳을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소원 너머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자신이 이 땅에 오셨는가를 생각하셨습니다.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의 길을 열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입에서는 위대한 자기부인의 기도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더 나아가 적극적인 순종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바로 이 지점이 겟세마네 기도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를 온 마음으로 껴안으셨습니다. 이후로 사실상 예수님의 마음에서 주저함이나 망설임, 모든 번민이 없어졌습니다. 남은 일들은 그저 되어야만 할 일들이 되어가는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골고다언덕에 앞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로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기도를 가만히 살펴보면, 대부분 "내 소원을 들어주시옵소서" "내 뜻을 이루어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좋습니다. 이것도 기도입니다.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바람직합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칠 때가 많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주님께 원하는 것을 고집만 할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기 원하시는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보다 주님이 생각하고 계획하시는 것을 품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크고 원대한 뜻을 발견했을 때는 과감하게 자기의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것을 영접할 수 있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꾸만 기도로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나 여건을 변화시키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다른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나 중심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으로 내면을 변화시키는 힘이 바로 기도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자기 부인의 위대한 기도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뜻에 순복하는 성숙한 기도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섯째로, 예수님은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다같이 44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예수님께서 지금 기도하시는 장소는 겟세마네입니다. 그런데 이 '겟세마네'라는 지명은 '기름을 짠다'라는 뜻입니다. 감람나무 열매의 기름을 짜는 기름틀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마치 기름을 짜듯이 자신의 땀과 피를 쏟아내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의 이 기도는 수 십 번 수 백 번 반복되었을 것입니다. 한 시간 두 시간 정도가 아니라 밤이 깊어지도록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의 온 몸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습니다. 힘쓰고 애씀이 얼마나 힘겹고 고통스러웠던지 땅에 땀방울이 떨어지는데 그 땀방울 하나하나가 핏방울과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아버지의 원이 나의 원이 되기까지 기도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란 뜻입니다. 자기의 소원을 부인하고, 주님의 소원을 영접하기까지가 그냥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온전히 죽고, 내 안에 주님의 소원으로 채워지려면 피땀 흘리는 내적 투쟁의 용광로를 거쳐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이 정도셨다면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본성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우리의 악한 자아를 주님의 뜻에 복종시키고 주님의 소원이 나의 소원이 되기까지 투쟁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과 영혼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탐심과 욕심, 이기심의 기름덩이들을 짜내는 것이 어떻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쉽지 않기 때문에 기도는 투쟁입니다. 기도는 씨름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기도는 노동이라고도 했습니다. 기도가 이렇게 힘들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다가 중도에 포기합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다가 말다가 하기 때문에 기도의 맛을 잘 모릅니다. 기도의 깊은 세계를 경험해보질 못합니다. 기도가 피상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합니다. 언제가 끝입니까? 기도하는 사람의 입에서 찬송이 흘러나오고 감사가 터질 때까지입니다. 대부분의 시편 기도가 절망과 탄식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항상 마지막 부분에서는 찬송과 감사로 마칩니다. 그 중간에 믿음의 도약이 있습니다. 땅에 처박혀 있던 눈을 들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의 도약이 일어나기까지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때까지 기도의 씨름을 계속 해야 합니다. 그럴 때 마침내 기도의 샘물에서 생수를 맛볼 수 있습니다. 나를 짓누르던 죄악된 소욕이 떨어져 나가고 영혼이 새털처럼 가볍게 날아오르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의 씨름을 끝까지 해내서 기도의 깊은 세계로 들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다섯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어떻습니까? 너무 수준이 높아서 나하고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까? 어차피 나는 안 될 것 같은데 지금부터 포기하는 편이 나을까요? 그런데 4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힘쓰고 애써 기도하셨을 때에 주의 사자가 내려와서 도우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힘쓰고 애써 피땀 흘려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았습니다. 주의 천사를 보내서 그 힘을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도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도를 잘 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8:26절에 보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만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기도의 소원을 불러일으키십니다. 성령께서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기도 제목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다 지치면 생령께서 새 힘을 주시고 격려하십니다. 복음성가 중에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라는 곡이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날 위해 기도하시는 그 누군가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이 성령님은 우리 앞서 연약한 가운데 기도로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보내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을 의지해서 힘을 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힘써 기도하고 계실 때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제자들은 예수님과 최후의 만찬을 함께 하면서 앞으로 닥칠 일들을 비로소 예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사람이 스트레스가 심하면 감정 노동 때문에 지쳐서 잠이 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도하란 명령을 받고도 잠에 곯아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46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예수님은 위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고난을 감당할 내적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몹시도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시험에 들어 넘어지고 난 후에야 기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입니다. 가장 좋은 기도는 시험에 들기 전에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일이 다 벌어진 후에 수습 차원에서 기도하는 것보다 일이 일어나기 전에 예방 차원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스트레스 받는다고 기도 대신 잠만 잤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4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말씀하시고 있는데 한 무리가 가룟 유다를 앞세우고 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가까이 아서 입맞춤으로 신호를 하고자 했습니다. 입맞춤은 친밀함의 표시입니다. 하지만 유다는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죽음으로 이끌어 가려 했습니다. 여기서 배반의 키스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가 이제는 사탄의 앞잡이가 되어 나타나다니 참으로 기가 막힌 일입니다. 평소 기도와 담을 쌓고 살았던 유다는 이미 시험에 든지 오래였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놓치고 되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49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검으로 싸우고자 했습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종의 귀를 만져 낫게 해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제자들은 매우 흥분되고 격앙된 상태였습니다. 감정적이 되어서 즉흥적으로 판단했습니다. 이런 식의 반응은 예수님께 도움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짐만 될 뿐이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손에 검과 몽치를 들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53절을 보십시오.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종교 지도자들이 과거 예수님을 잡을 수 없었던 이유는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은 때가 되었음을 아시고 담담히 그들의 체포에 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달리 차분하고 의연하셨습니다. 제자의 치명적인 배신 앞에서 결코 감정에 쉽게 휘둘리지 않으셨습니다. 똑같은 상황 앞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반응이 이토록 차이가 나는 것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셨고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잤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런 시련과 고난이 닥쳐왔을 때 기도를 하지 않은 사람은 감정적, 즉흥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면이 준비되지 않아 엉망인 상태로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한 사람은 쉽게 흥분하거나 충동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차분하고 의연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로 내면을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위기가 닥쳐 올 때 우리가 준비할 것은 칼이 아니라 기도입니다.


54절을 보십시오. 무리들은 예수님을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 갔습니다. 그가 왜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 갔을까요? 죽기까지 주를 따르겠다고 큰소리는 쳤지만 막상 현실에 부딪히자 베드로는 두려웠습니다. 그는 의리상 안 따라갈 수는 없고 잡힐까봐 멀찍이 따라 갔습니다. 밤이 깊어 추위가 찾아오자 사람들은 뜰 가운데서 불을 피우고 앉았습니다. 베드로도 몸을 녹이기 위해 불 곁으로 가서 함께 앉았습니다. 이때 한 여종이 그를 자세히 보고 있다가 말했습니다.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으니라.” 당황한 베드로는 손을 내저으며 이를 완강히 부인했습니다.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베드로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는 다른 사람이 그를 자세히 보고 있다가 말했습니다. “너도 그 도당이다.” 베드로는 전보다 더 강하게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하며 부인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의 강한 갈릴리 사투리 때문에 더 들통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한 사람이 장담하며 말했습니다.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베드로는 점점 더 궁지에 몰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이를 부인했습니다. “이 사람아 너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닭이 울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예수님께서 고개를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베드로의 눈과 예수님의 눈이 마주 쳤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너무 죄송해서 똑바로 예수님을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예수님을 시선을 외면했습니다. 하지만 잠깐 마주친 예수님의 눈은 여전히 따뜻했습니다. 잡혀 있는 자신보다 베드로를 더 걱정하시는 마음을 그 눈에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제야 베드로는 오늘 닭 울기 전에 내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밤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이날 밤 베드로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이 밤은 배신의 밤, 절망의 밤이었습니다. 이 밤에 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미 경고하셨던 대로 베드로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왜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자신을 너무 믿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원래부터 그럴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연약합니다. 나도 얼마든지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시지 않으면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반드시 계속 기도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모두 다 밤에 일어났습니다. 살다보면 우리 인생에도 밤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내일에 겪을 일이 눈에 불을 보듯이 환하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그런 밤 말입니다. 그런 밤에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인생의 밤이 찾아올 때 기도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이 주시는 쓴 잔을 받아 마시고 승리자가 될 수도 있고, 달콤한 유혹의 잔을 마심으로 패배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먼저 우리 삶에 기도의 거룩한 습관이 형성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겸손히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 자신을 쳐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예수님 닮은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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