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심문 받으신 예수님

이창무 2017. 8. 13.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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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21 강


심문 받으신 예수님


말씀 / 누가복음 22:63-23:25

요절 / 누가복음 23:14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요즘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재판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회장 측의 변론 전략의 변화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습니다.

처음에는 강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지원을 해주었을 뿐이라고 주장했었습니다.

최근에는 나는 아무 것도 몰랐고 다 아래 사람들이 알아서 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두 주장이 서로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을 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해서든 무죄 판결을 받아내는 위해서가 아닐까요?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도 재판을 받고 심문과 답변을 주고받으십니다.

하지만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목표는 무죄로 석방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재판 과정을 통해 도대체 무엇을 이루고자 하셨을까요?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심문 받으신 예수님은 진정 누구셨는가 깨닫고, 그분이 우리에게 어떤 증언을 들려주시는가를 귀 기울여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가룟 유다의 밀고로 체포되셨던 예수님은 곧바로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셨습니다.

공회는 재판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밤에는 모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야간 불법집회를 열어 예수님 사형으로 정죄했습니다.

날이 새기를 기다려 형식적으로나마 정식 공회를 열어 추인을 받고자 했습니다.

22장 63절을 보십시오.

그 사이에 지키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희롱하고 때렸습니다.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물었습니다.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그 동안 예수님이 백성들 가운데 선지자로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비꼬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많은 말로 예수님의 면전에 대놓고 욕을 했습니다.

여기서 욕을 했다는 단어를 원어로 보면 누가복음 5장 21절에서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라는 구절에서 ‘신성 모독하다’는 말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바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욕하고 조롱한 대상이 실상은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 의해 신성 모독죄로 고발을 당해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정작 신성 모독죄를 범하고 있는 자들은 바로 예수님을 고발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날이 새자 정식으로 공회가 열렸습니다.

끌려 온 예수님을 향해 공회원들이 두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였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그리스도이신지 알고 싶었기 질문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맞다 하시면, 예수님을 자칭 그리스도라 주장하는 이단으로 몰아세울 심산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속마음을 모르실 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지 여부는 공회원들의 추인 여부에 달려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해 주실 것입니다.

어떻게 입증해 주십니까?

69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십자가 죽음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 이후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게 되실 것입니다.

지금은 공회원들이 예수님을 재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심판 때에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이 재판장이 되셔서 공회원들은 심판하실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그리스도가 되심을 강력하게 주장하신 것입니다.

공회의 두 번째 질문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였습니다.

이 질문의 목적 역시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얽어맬 확증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라고 답하셨습니다.

‘너희 질문 속에 이미 답이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대답도 예수님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맞다 시인하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공회원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다 끝났네 다 끝났어)”

보통 재판은 원고와 피고 사이에 길고 지루한 법정 다툼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러면 예수님께서 자기 입으로 모든 혐의를 다 시인하신 셈이 됩니다.

그들은 신이 났습니다.

이 정도면 증거가 충분하다 여긴 공회는 예수님께 대한 사형 판결을 확정 지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라서 독자적으로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무리들은 예수님을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끌고 갔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식민지의 종교에 대해 포용 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로마가 종교 문제 때문에 사형 판결을 내리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죄목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공회에서는 신성 모독죄로 사형을 언도한 반면 빌라도에게는 반란죄로 예수님을 고발했습니다.

죄목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백성을 미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이 가이사 곧 로마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자칭 왕 그리스도라 했다 곧 반란의 수괴 노릇했다는 혐의였습니다.

물론 이 세 가지는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반로마 선동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이곳저곳에 다니시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셨을 뿐입니다.

세금을 내지 말도록 했다는 말은 더더욱 터무니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그리스도라 하신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항상 정치적 메시아로 오해하지 않도록 경계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유대인들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거짓 주장을 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문제들이 로마 총독에게 가장 민감한 이슈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얼마나 교활합니까? 얼마나 악랄합니까?

공회원들이 예수님을 고발하였지만, 정작 고발당해야 할 사람들은 죄 없는 사람을 얼토당토않은 거짓말로 고발한 그들 자신들이었습니다.


23장 3절을 보십시오.

고발을 접수한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고발된 항목은 세 가지인데 빌라도는 오직 세 번째 항목만을 심문하였습니다.

빌라도가 생각해도 첫 번째, 두 번째 항목은 너무 터무니가 없어 심문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 빌라도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중요했습니다.

빌라도는 사형 판결을 내릴 수도 석방할 수도 있는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이었습니까?

“네 말이 옳도다”

만약 이 순간 예수님 곁에 변호사가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을 것입니다.

유죄 판결을 면하려면 혐의를 전면 부인하거나 최소한 묵비권이라도 행사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무 망설임이나 주저함 없이 내가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가 맞다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유대인의 왕이 맞기 때문입니다.

무슨 다른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옳은 것은 옳다’, ‘틀린 것은 틀리다’ 하셨습니다.

설사 이 때문에 자기에게 어떤 불이익이 돌아온다 하더라도, 심지어 죽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결코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점에서 베드로와 대조가 됩니다.

베드로는 무려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 했습니다.

자기도 잡혀서 예수님과 함께 끌려갈까봐 두려운 나머지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부인했습니다.


오늘날 세상도 똑같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가 예수님의 제자냐?”

물론 이런 식으로 곧이곧대로 묻지 않고 돌려서 질문합니다.

“이 세상이 우연과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믿느냐?”

“성경의 일점일획이 전부 다 진리라고 믿느냐?”

“세상의 종말이 있고 그 후에 심판이 있을 것이 믿느냐?”

“동성애가 죄라고 믿느냐?”

“정말 믿느냐?”

“아직도 그렇게 믿느냐?”

이런 질문에 “네, 믿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순간 우리는 꼴통으로 취급 받기 십상입니다.

너도 소위 개독교의 일원이구나 하는 판단을 받습니다.

우리가 가진 생각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도 문제입니다.

매주 성경 공부를 하고 거기다 소감까지 쓰다니 정말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시대에 전도하러 캠퍼스로 나가고 낯선 땅에 선교사로 나가다니 정상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광신자가 아니냐?’ 심지어 다른 기독교인에게서까지 ‘너 이단이 아니냐?’는 소리까지 듣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법정에 서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생활에 여러 가지 지장을 초래할지도 모릅니다.

왕따를 당하거나 이유 없는 갈굼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불이익을 당하기 싫다면 부인하거나 침묵하면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튀지 말고 조용히 두더지처럼 신앙생활하면 됩니다. 

싫은 소리 안 들으려면 제자답게 살기를 포기하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눅9:26)”

심문 받으신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지 않으셨고 진리를 증언함에 주저함이 없으셨습니다.

결코 유불리를 먼저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도 눈물로 이를 회개한 후에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임을 분명히 증언했습니다(벧전1:1,벧후1).

초대 교회 당시 예수님의 제자인 것이 밝혀지기만 해도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거나 화형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내놓고 제자의 길을 갔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정도로 박해 받는 상황은 아니지 않습니까?

작은 불이익 하나 감수하지 못해서 우리의 정체성을 부인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심문 받으시는 중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셨던 예수님처럼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크고 작은 불이익이 따른다 할지라도 믿음과 담대함으로 진리를 증언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심문을 마친 빌라도는 어떤 결론을 내렸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빌라도는 머리가 나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교활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깜빡 속아 넘어갈 만큼 순진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심문해 본 결과 고소 조건이 타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무리들은 당황했습니다.

더 이상 증거나 논리를 가지고 사형 판결을 받아낼 자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기서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했습니다.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유대인들의 2단계 전략은 압박 전술이었습니다.

무조건 떼를 써 빌라도를 굴복시키고자 했습니다.

빌라도에게 예수님은 참 골치 아픈 존재였습니다.

죄가 없는데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풀어주자니 무리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 뻔했습니다.

그런데 무리들의 말 속에서 이 진퇴양난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일찍이 여우라는 별명을 붙여주셨던 분봉왕 헤롯이 다스리던 영지였습니다.

“알고 보니 내 관할 구역이 아니었구먼. 그거 잘 됐구먼.”

빌라도는 협조 공문을 얼른 하나 써서 앓던 이를 빼듯이 예수님을 헤롯에게로 보내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헤롯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헤롯은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을 보자마자 이렇게 기뻐하다니 동방박사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헤롯이 기뻐한 이유는 동방박사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헤롯은 단지 호기심이 많았을 뿐이었습니다.

헤롯은 오래전부터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혹시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의 환생이 아닌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또한 자기 눈으로 직접 예수님의 기적을 보기 원했을 뿐이었습니다.

온 인류의 구원자가 눈앞에 와 있는데 헤롯은 그분에게서 구경거리나 찾고 있었습니다.

왕이 되어 이것저것 다 누려봤지만 이제는 전부 다 시시해지고 꽤나 심심했던 모양입니다.

헤롯은 여러 말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너 세례 요한인거야? 그런 거야? 오늘은 뭘 보여줄래?”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침묵하셨을까요?

헤롯의 마음 상태를 간파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헤롯의 광대가 될 이유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지 말라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돼지만이 아니라 여우에게도 진주를 던져줄 필요는 없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이 반응이 없자 시무룩해졌습니다.

희롱하는 재미로 기적을 구경하는 재미를 대신하려고 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에게 빛난 옷을 입혔습니다.

이 옷은 왕이 특별한 행사 때에만 입는 은색 실로 짠 화려한 망토였습니다.

유대인의 왕 예수님을 뒤틀어 비아냥대는 것이지요.

헤롯 뿐 아니라 군병들까지 이 모습을 보고 낄낄거리며 웃었습니다.

아예 배를 잡고 뒹굴며 박장대소를 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얼마 후 이마저도 재미가 시들해졌습니다.

그러자 헤롯은 마치 다 씹은 껌을 길바닥에 뱉듯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어버렸습니다.

도대체 이 장면이 말이 되나요?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이런 모멸과 수치를 당할 수 있나요?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은 왜 욕하면 듣기만 하시고 때리면 맞기만 하시나요?

왜 수치와 모욕을 맞받아치지 않고 계속 참기만 하십니까?


혹시 누군가에게 희롱을 당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주위 사람들 사이에서 놀림감이 되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모멸감은 도저히 잊히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수치심을 견디질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구나 아무 잘못도 없이 부당하게 모욕을 당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분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수치와 모욕을 감당하셨을까요? 

놀랍게도 이 모든 일은 이미 수백 년 전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했던 일들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53:7,8)”

이사야 선지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저는 대학교 1학년 때 시위하다가 경찰서 유치장에 끌려간 적이 한번 있었습니다.

그때 한 아저씨가 경찰서 안으로 헐레벌떡 들어오더니 대뜸 경찰관을 붙들고 매달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옆에 그분의 아들처럼 보이는 아이가 말없이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무언가 큰 사고를 친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경찰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싹싹 빌기 시작했습니다.

‘다 내 잘못이다 내가 대신 들어갈 테니 아들을 딱 한 번만 봐 달라’ 하면서 큰 목소리로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는데도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허물 때문에 아버지가 수치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백성의 허물 때문에 대신 예수님께서 수치와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헤롯왕에게 자기 백성이란 자기를 즐겁게 해주는 오락 거리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자기 백성을 위해 끝까지 희롱과 곤욕을 말없이 참으신 왕, 허물 많은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수치를 당하신 왕이 계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백성들의 진정한 왕이셨습니다.

그리고 나의 왕, 우리의 왕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거짓말투성이에 갑질이나 일삼는 세상 왕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왕, 사랑의 왕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온갖 모욕과 수치, 조롱과 비방을 감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그러면 헤롯에게 떠넘겼던 예수님을 다시 돌려받은 빌라도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말했습니다.

14절과 15절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빌라도는 이방인으로서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굳이 예수님을 편들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런 빌라도가 심문해 본 결과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유대 문화에 익숙했던 헤롯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죄 없으신 분이라는 객관적이고도 강력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이 순간 예수님을 당장 무죄 석방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을 그냥 풀어주지 않고 때려서 놓고자 했습니다.

무리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태형을 가하는 선에서 적당히 타협을 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무리들의 반응은 빌라도의 기대와 달랐습니다.

그들은 일제히 소리 질러 외쳤습니다.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 놓아 주소서”

바라바는 누구입니까?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곧 십자가에서 처형이 예정되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이 무리들의 요구는 모순투성이입니다.

예수님을 고발한 죄목이 예수님이 민란을 일으키려는 모의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고발만 있지 아무 증거가 없었습니다.

반면 바라바는 이미 민란을 일으켰고 살인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없애버리고 바라바는 풀어주라니 이것이 말이 되나요?

빌라도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예수님을 놓아 주자고 여러 차례 무리에게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빌라도가 예수님을 석방하고자 말할 때마다 무리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금방이라도 폭동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운이 들끓었습니다.

광기어린 외침이 계속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소리가 이겼습니다.

빌라도는 생각했습니다. “정국 안정이라는 대의를 위해 유대 백성 한 사람 쯤이야 희생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

빌라도는 자기가 손해를 보면서까지 정의를 추구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타협을 거듭하다가 결국 무죄인줄 뻔히 알면서도 예수님께 사형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 비겁한 결정으로 말미암아 빌라도는 지난 이천년 동안 사도신경 신앙고백을 할 때마다 불리는 명예롭지 못한 이름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죄 없으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넘겨졌습니다.

그 대신 죄 많은 바라바가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이 사형 언도를 받으셨습니다.

정의의 최후 보루인 재판정에서 불의가 일어났습니다.

분명 부조리한 일입니다.

이것은 비극적인 인혁당 사건 같은 사법 살인 사건입니다.

이 일은 누구에게 책임이 있습니까?

도대체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고 갔습니까?


첫째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한 당사자들입니다.

하지만 고발한 내용은 온통 거짓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거짓의 아비인 사탄의 속성과 닮아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가장 선하고 거룩해야 할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어쩌다가 사탄의 앞잡이가 되기까지 추락했습니까?

성전과 율법을 중심으로 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시기심으로 눈이 먼 자들이었습니다.

둘째는 무리들입니다.

무리들은 얼마 전까지 입성하시는 예수님은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는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외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나머지는 그저 구경하며 수수방관만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무리들은 왜 이렇게 변했습니까?

예수님이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줄 기대했는데 그렇지 않자 실망해서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세에 몸을 싣는 것이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현실의 유익을 쫓아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듯 움직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주님께 받은 은혜를 원수로 갚고 말았습니다.

셋째는 헤롯입니다.

헤롯은 진지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즐길 거리, 오락 거리만을 찾는 사람입니다.

자기 영혼과 구원에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진리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헤롯은 자기에게 찾아온 구원의 기회를 스스로 발로 차 버렸습니다.

헤롯에게서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느껴집니다.

넷째는 빌라도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빌라도는 그나마 양식이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비춰집니다.

어떤 면에서 빌라도는 재판장이 아니라 예수님의 변호인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십자가 사건에서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빌라도에게는 예수님을 무죄 석방할 수 있는 실질적인 권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종적으로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한 것은 결국 빌라도였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이 무죄인 줄 잘 알면서도 왜 이런 짓을 저지른 것입니까?

예수님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정의보다 자기 밥그릇이 더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진리를 알았지만 진리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리대로 행할 용기는 없는 창백한 지식인의 전형과도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고발당한 장본인은 예수님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예수님이 심문 받으신 법정은 도리어 인간들을 고발합니다.

우리가 애써 눈감고 외면하고 싶은 인간의 어두운 구석을 들추어내고 그 안에 썩고 악취 나는 죄악들을 폭로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무리들, 헤롯과 빌라도, 그들은 사실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우리도 기득권은 절대 놓치지 않으려 하는 이기주의자입니다.

현실의 유익을 쫓아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변덕쟁이입니다.

진리에 무관심하고 온통 엔터테인먼트에 몰입하는 쾌락추구자입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진리대로 행하지 않는 비겁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몰았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범인은 바로 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바라바가 있었던 그 자리, 유죄 판결을 받고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유죄 판결을 받으셨습니다.

죽을 이유가 없었던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처형장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셨습니다.

그 결과 죽어야 마땅했던 나는 살았습니다.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재판에서 발견하는 숨은 진실입니다.

우리가 이 진실 앞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나의 죄를 깊이 발견하고 회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와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죄인의 오명을 뒤집어쓰신 채 기꺼이 십자가로 향하셨던 우리 주 예수님께 한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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