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창무 2017. 6. 25.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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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18 강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말씀/ 누가복음 10:25-37

요절/ 누가복음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제가 근래에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들 중에 랭던 길키가 쓴 '산둥 수용소'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저자가 2차 대전 당시 중국에서 일본군이 세웠던 외국인 수용소에서 경험한 것을 쓴 책입니다. 당시 이 수용소에는 중국에 온 선교사들이 많이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평소 친절하고 누구보다도 신앙심이 투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물자가 부족한 수용소 생활이 계속 되자 점점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와 가족만을 챙기려하고 동료들을 위해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모습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그들 중에 한 명의 선교사는 전혀 달랐다고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영화 '불의 전차'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에릭 리델이었습니다. 육상 선수를 은퇴하고 중국에 선교사로 와있던 리델은 수용소 안에서 무엇이든 하나라도 생기면 필요한 동료에게 다 갖다 주었습니다. 특별히 수용소의 아이들을  돌봐주는 일에 누구보다 헌신적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쾌활하고 얼굴이 밝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에릭 리델은 1945년 2월에 뇌종양으로 수용소 내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저자는 그에게서 자기중심성을 포기하고 이웃을 사랑한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관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로만이 아닌 사랑의 실천을 요구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려줍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참된 신앙인의 자세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율법교사는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이 본업인 율법의 전문가입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가 질문한 목적은 예수님을 예수님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생이 무엇입니까? 제기역 2번 출구로 나오면 불로장생 타워가 있습니다. 중국의 진시황이 바랐던 것처럼 여기서 약초를 사먹어 늙지 않고 오래 사는 것이 영생입니까?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이란 불로장생이 아닙니다. 영생이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나요?',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나요?'라는 말과 같습니다. 율법교사의 동기는 별로 좋지 않았지만 질문은 기가 막히게 좋은 질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진지하게 물어야 할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반드시 그 답을 찾아야만 할 질문이기도 합니다. 만약 사람이 온 천하를 얻는다 하더라도 죽음으로 모든 것이 다 끝이라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받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은 모든 인생들에게 필요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점에서 율법교사는 제대로 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26절을 보십시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예수님은 왜 질문에 즉시 대답을 주지 않으시고 도리어 반문하셨을까요? 이것은 율법교사가 질문을 한 의도를 간파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몰라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목적이었음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앞부분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는 영생의 길에 관한 해답은 성경 말씀 속에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질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구원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성경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생과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뒷부분은 '네가 어떻게 읽느냐'입니다. 이 질문은 '네가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성경 속에 있는 객관적인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연 이 율법교사는 성경을 정확하게 알고 바르게 이해하고 있었을까요?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러 나왔다가 도리어 이제 자신이 시험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이에 율법교사는 어떻게 답을 했습니까? 27절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구약의 신명기 4장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여기에 생명 얻는 길이 나타나 있습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하나님이 주신 규례와 법도를 잘 듣고 준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는 모두 613개의 계명이 있습니다. 이 계명을 단 열 개로 축약한 것이 십계명입니다. 율법교사는 이 십계명을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을 합친 단 하나의 계명으로 집약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시험 문제 중에 제일 어려운 시험이 방대한 내용 중에서 핵심을 뽑아 짧게 요약하라는 시험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율법 교사는 대단한 실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문제의식이 훌륭할 뿐더러 대답도 정확합니다. 이 정도면 성경 선생으로서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만으로 성경을 제대로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과연 이것으로 충분할까요?


2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먼저 '네 대답이 옳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율법교사의 대답에 전적으로 동의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율법교사가 정말 영생을 얻고자 한다면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행하고 이를 실천에 옮겨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율법 교사의 한계를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율법교사는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했습니다. 모르는 말씀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성경 말씀대로 행치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1장 4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의 위선을 책망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율법교사들은 까다로운 규칙들을 많이 만들어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습니다. 하지만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율법을 많이 알고 있으니까 신앙이 좋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만약 여기서 율법교사가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았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선생님! 지금까지 제가 머릿속으로는 말씀을 잘 알고 여러 번 가르치기도 했지만 정작 삶에서 실천은 하나도 없었군요. 앞으로도 다 지켜 행할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이 모양이니 저는 어쩌면 좋습니까? 저는 이제 영생을 누릴 수 없는 것인가요?" 이렇게 말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율법교사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29절을 보십시오.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이웃의 범위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를 물었습니다. 그가 이 질문을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율법교사에게 자신을 옳게 보이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동족인 유대 민족만을 이웃으로 삼았습니다. 이방인이라든가 사마리아인들은 이웃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공식 문서에 이방인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지옥의 불쏘시개 감으로 쓰기 위해서라고 쓰여 있을 정도였습니다. 율법교사는 '내 이웃이 누굽니까?'라고 질문하면, 예수님이 ‘우리 이웃은 당연히 동족인 유대인이지.’라고 대답할 줄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웃을 충분히 사랑했습니다. 이미 다 행하고 있는데 뭘 새삼스럽게 행하라고 하십니까?” 이렇게 대답하려고 했습니다. 만약 이 작전이 잘 통하지 않더라도 플랜B가 있었습니다. "내 이웃은 누구일까요? 이웃인 듯 이웃 아닌 이웃 같은 이웃도 있지 않습니까? 이웃의 정의는 너무 애매모호한 구석이 많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율법교사는 이웃 사랑을 실천의 영역이 아니라 논쟁의 영역으로 끌고 가고 싶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은근슬쩍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 생각이었습니다. 요즘 법조인 중에 법에 대한 지식을 이용해서 법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사람을 가리켜서 '법꾸라지(법률 미꾸라지)'라고 부르곤 합니다. 알고 보니 원조 법꾸라지가 바로 이 율법교사였습니다.


우리는 성경 공부를 많이 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성경 공부를 하고 메시지도 듣습니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 말씀을 먹고, 따로 성경 다독을 하기도 합니다. 율법교사처럼 가르치기도 합니다. 덕분에 우리는 성경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것,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행하고 있느냐? 얼마나 실천에 옮기고 있느냐? 입니다. 알기는 알지만 행하지 못할 때가 참 많지 않습니까? 말은 그럴듯한데 삶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으로 이기적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부끄러운 현주소가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두 가지 갈림길이 있습니다. 한 갈래는 자신을 옳게 보이려는 길입니다. 자신이 잘 하고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말씀의 의미를 축소시키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을 해야 하는데 이웃의 범위를 가족과 친구로 축소시키면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도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다 정도로 축소하면 지킬만합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 '말씀이 참 어렵네요' 한 마디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성경이 이해하기 어렵고 애매모호한 부분이 많아서 그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행할 수 있겠다고 변명할 여지가 생깁니다. 이 외에도 소감 쓰기로 행함을 대체한다든지 등등 별별 창의적인 방법으로 행함을 요리조리 피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길이 있습니다. 두말없이 말씀을 실천에 옮겨보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주님의 명백한 뜻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행함에 성공할 수도 있지만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탄식하고 부르짖게 됩니다. "주님, 저의 이 끈질긴 죄악된 본성을 어쩌면 좋습니까? 저를 불쌍히 여기서 말씀을 행할 힘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또 삶 속에서 말씀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며 자기와의 싸움을 싸웁니다. 이렇게 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가 말씀대로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복음의 은혜가 더 깊이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신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는 질문이 참 의미심장합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성경대로 행함을 통해 완성됩니다. 우리 모임 이름이 '성경읽기선교회'입니다. 이 이름이 명실상부해지려면 우리가 '성경행하기선교회', '성경실천선교회'도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성경읽기가 행함으로 온전히 열매 맺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해 한 비유로 답하셨습니다. 바로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이 길은 총 27킬로미터에 이르는 좁고 굽은 비탈길이었습니다. 길 주변에 큰 바위와 동굴들이 많이 이를 은신처 삼아 활약하는 강도들의 피해가 많은 곳이었습니다. 한 대학생이 예루살렘에서 입사 면접시험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그만 강도떼를 만나고 말았습니다. 가진 모든 것을 다 털렸고 심지어 입고 있던 옷까지 빼앗겼습니다. 강도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 사람을 반쯤 죽은 상태가 될 때까지 집단 폭행을 가했습니다. 그는 외진 길에 중상을 입고 쓰러졌으니, 이대로 내버려두면 죽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을 지나갔습니다. 죽어가던 사람에게 큰 희망을 생겼습니다. 이 비유를 듣던 사람들은 제사장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성직자니까 당연히 이 불쌍한 사람을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아니, 그런데 이상합니다. 제사장은 멀리서 쓰러진 그 사람을 보더니 다른 길로 돌아 그를 피해 갔습니다. 이런 낭패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저기서 또 한 사람이 왔습니다. 그는 레위인이었습니다. 그도 역시 성전에서 제사장을 도와 봉사하는 성직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있나요? 레위인마저도 죽어가는 사람을 잠시 보더니 멀리 돌아 떠났습니다.


이 두 사람은 왜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을 피해서 그냥 지나갔을까요? 예배 준비가 너무 급하고 바빴기 때문일까요? 이 사람이 죽은 줄 알고 시체를 만져 부정해지지 않으려 한 것일까요? 하지만 이 길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퇴근길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이유들은 변명이 될 수 없었습니다. 사실 무슨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유는 오직 하나 내가 희생하기 싫어서였습니다. 이 사람이 당했다는 것은 근처에 강도가 있다는 뜻입니다. 괜히 어물쩡거리다 나까지 당할 수도 있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 사람이 강도가 파 놓은 함정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설사 이런 경우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적지 않았습니다. 힘도 들고 시간도 많이 들고 돈이 들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목격자 진술을 하러 경찰서에 불려갈 수 도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억울하게 용의자로 오해 받을 수도 있습니다. 남을 도우려 하다가 이렇게 되면 얼마나 큰 낭패입니까? 남을 돕는다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자기 시간과 삶을 희생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 누가 이 제사장과 레위인을 향해 쉽게 손가락질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기 한 사람이 더 나타났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나왔으니 이제는 평신도 유대인이 등장할 차례가 아닐까요? 그런데 이게 누구입니까? 그 사람은 유대인과 철천지원수지간인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 비유를 듣던 사람들은 이 장면에서 한숨을 쉬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죽어가는 유대인을 보고 ‘꼴좋다. 쌤통이네.’ 하면서 한 대 더 때리고 갈 지도 몰랐습니다. 이제 강도 만난 사람은 죽을 일만 남은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33, 34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을 태워 주막에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사마리아 사람이 놀랍게도 쓰러진 유대인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는 먼저 군대에서 배운 심폐 소생술과 인공호흡을 실시했습니다. 다행히도 심장이 다시 뛰고 호흡이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상처가 너무 깊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가방을 뒤져 기름과 포도주를 꺼내 상처에 부어 소독을 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서 두건을 벗어 쫙 찢어서 상처를 싸 매주었습니다. 응급처치는 했지만 위험 지역에 병자를 방치할 수는 없었습니다. 병자는 짐승에 태우고 자기는 산길을 걸어 안전한 주막에까지 데려갔습니다. 밤새도록 곁을 지키며 정성을 다해 간호를 했습니다. 이제는 정말 떠나야 했습니다. 거래처와 중요한 회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면 정말 할 일 다 한 것 아닙니까? 얼마든지 ‘여기서부터는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하고 그냥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끝이 아니었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사마리아인은 지갑 속에 현금 두 데나리온을 탈탈 털어서 주막 주인에게 주며 병자를 부탁했습니다. 이 정도면 당시에 최소한 3주는 더 주막에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혹시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겠다고 약속까지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사람은 정말 사랑의 끝판 왕입니다. 가족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원수를 위해 누가 이런 희생을 감당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33절에 나온 대로 죽어가는 한 사람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쓰러진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이 내 이웃인가? 아닌가?' 이런 것은 전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이 한 가지만을 생각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았고, 불쌍히 여겼고, 그래서 지체 없이 도와주었을 뿐이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은 긍휼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가장 큰 명령은 '사랑하라'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제사장, 레위인, 평범한 이스라엘 사람,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마리아 사람 순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더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불쌍한 사람을 지나쳤고, 사마리아인은 끝까지 도왔습니다. 누가 더 성경에 더 가까이 있습니까? 성경을 많이 아는 제사장과 레위인입니까? 성경대로 실천한 사마리아 사람입니까? 성경을 많이 알아도 내 마음에 자비와 긍휼이 없으면 성경을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었다면 이웃 사랑을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영생의 기쁨이 있습니다.


36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물으셨습니다. “당신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습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자존심이 상해서 차마 '사마리아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대답이 더 본질을 잘 드러내는 대답이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은 출신에 상관없이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처음에 율법교사는 내가 사랑해야 하는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 속에서는 여전히 내가 중심입니다. 나를 기준으로 해서 나의 이웃의 범위를 정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여기서는 내가 아니라 타인이 중심에 있습니다. 이웃이 필요한 사람이 기준이 되고 그 사람에게 누가 이웃이 되어 주겠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이웃은 정의될 수 없습니다. 오직 긍휼히 여기고 사랑을 실천함으로 이웃이 되어줄 수 있을 뿐입니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산둥 수용소'의 한 대목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의미와 안정성의 중심을 자신의 생명에 두는 대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 안에 둔다. 그는 자신에 대한 과도한 관심을 포기했기 때문에 그의 삶에서 진짜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 이웃의 복지가 된다. 이런 신앙은 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신앙은 내적으로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고, 자기중심성을 포기하여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p458)"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성경을 읽고 나에게 유익이 될 때에만 실천한다면 이런 기독교는 자기만족을 위한 종교에 불과할 것입니다. 선교사로 중국에 왔던 분들 중에서도 이런 자기중심성을 끝끝내 극복하지 못한 분들이 많았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충격을 줍니다. 그러나 에릭 리델과 같은 진정한 신앙인도 많이 있습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 말씀드렸던 서서평 선교사도 있고 그 뒤를 따른 마더 베리 선교사님도 계십니다. 진정한 신앙은 자기에 대한 과도한 관심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이웃의 필요가 최대의 관심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삶에 불쑥 강도 만난 자와 같이 우리의 자비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나게 하실지 모릅니다. 아니, 이미 우리 주변에 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은 캠퍼스의 양일 수도 있고, 센터의 동역자 중에 한 사람일 수도 있고, 어려움에 처한 선교사일 수도 있고, 방황하는 청소년일 수도 있고, 옆집 제기동 주민일지도 모릅니다. 이때 우리가 그들을 외면하지 말고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제는 내 중심의 생각과 삶에서 벗어나 이웃이 필요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6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율법교사에게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랑의 끝판 왕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주어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어라. 끝까지 책임지고 희생하라." 이것은 너무 무리한 명령 아닙니까? 과연 우리도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제 나름대로 조금 더 연장해 보겠습니다. 강도 만난 자가 사마리아인 덕분에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다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과거 자기처럼 강도 만나 쓰러진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 사람이 강도 만난 자를 그냥 두고 지나쳐서 갈 수 있을까요? 차마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먼저 받은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인이 자기에게 했던 것 그대로 이 사람은 강도 만난 자에게 해주고 그의 이웃이 되어줄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은 사실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놓고 백분토론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몸소 사랑을 실천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강도 만난 자였습니다. 우리들은 죄 때문에 사단에게 얻어맞아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이사야 1:5,6절 말씀처럼 ‘온 머리는 병 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받을 아무 자격도 없는 자들입니다. 주님이 더럽다 소망 없다고 피해 지나가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세리 레위를 피하여 지나가지 않으셨듯이, 사마리아의 목마른 여인과 만나주셨듯이, 우리도 불쌍히 여기시고 찾아와 주셨습니다. 성령의 기름으로 우리의 상처를 싸매어 주셨습니다. 십자가 보혈의 붉은 포도주로 우리의 아픔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아무도 나의 이웃, 나의 친구가 되어주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친히 나의 이웃, 나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두 데나리온이 아니라 자기 몸을 대가로 지불하시어 죄로 죽어 가던 나를 살려주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 말씀은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세상에 나가 죽어가는 영혼을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죽어가던 자였던 나를 살리신 그 예수님의 은혜와 그 감격, 그 놀라운 구원의 은총을 가지고 너도 가서 이와 같이 살라 하시는 명령입니다. 단순히 선한 행위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벅찬 감격을 품에 품고 주님이 가신 그 선한 사마리아인의 길을 가라는 명령입니다. 우리에게 이번 여름수양회가 그 구원의 벅찬 감격을 다시 회복하는 수양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강도 만난 자와 같이 세상 속에 버려져 죽어가던 양들이 살아나는 수양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긍휼의 심장으로 자비의 손과 발을 움직여 그들의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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