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

이창무 2017. 6. 18. 14:52
반응형

2017년 누가복음 제17 강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


말씀 / 누가복음 9:46-62

요절 / 누가복음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외국인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것을 가리켜 '귀화'라고 합니다. 이 귀화 절차 중 하나로 반드시 귀화 시험을 치러야 합니다. 귀화 시험에는 예를 들어 이런 문제들이 출제된다고 합니다. "고조선의 최초 도읍지는 어디인지 쓰시오."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몇 대 대통령인가?" 생각보다 굉장히 어렵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의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 이 정도는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로서 내면성과 자세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6절을 보십시오. 제자 중에서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이 시점에서 적절한 변론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그리스도는 왜 고난을 받으셔야 하는가?',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런 주제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누가 크냐? 누구의 서열이 제일 높으냐?'를 놓고 제자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벌어졌습니다. "지난 번 전도 여행 때 나만큼 큰 역사를 이룬 사람이 있어?" "오병이어를 들고 나온 사람이 누군지 벌써 잊은 거야?" 그러자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조용히 웃으며 말했습니다. "너희들 중에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본 사람이 있을랑가 몰라." 자신들이 보기에도 부끄러운 나머지 이 논쟁을 예수님께는 비밀에 부치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모르실 리가 없었습니다. 갑자기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셨습니다. 어린 아이는 어떤 존재입니까? 요즘에는 아이를 한둘만 낳기 때문인지 어린 아이가 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어린 아이는 힘이 없고 미숙해서 끊임없이 보살펴 주어야 하는 귀찮은 존재, 하찮고 가치 없는 존재로 취급 받았습니다. 제자들이 보기에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신 분 곁에 세상에서 가장 작은이가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을 통해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셨을까요? 48절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어린 아이는 이 세상의 모든 작은 자들을 대표합니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장애가 있는 사람, 아무 타이틀도 없고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 등등이 작은 자입니다. 제자들이 이런 한 사람을 영접하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더 나아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작은 자가 직통으로 하나님께 이르게 하는 관문이었습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이라고 여기고 영접하지 않습니다. 무시하고 배척합니다. 작은 자들보다는 큰 자들을 상대해야 나도 큰 자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권력과 부와 명예를 가진 큰 자들과 인맥을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달라야 합니다. 제자는 작은 자를 무시하거나 배척하지 않습니다. 귀하게 여기고 환영합니다. 작은 자든 큰 자든 모두를 다 영접하고 낮은 자리에서 섬깁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그런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장 높고 영광스러우신 분이십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는 비천한 마구간 구유 위에 태어나셨습니다. 일생 가난한 삶을 사시면서 낮은 자리에서 섬기셨습니다. 세상에서 멸시를 당하던 세리와 창기와 각종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가장 높은 분이시지만 가장 낮은 자리에서 보잘 것 없고, 병들고, 버림받은 자들을 보듬어주고 높여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가장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 예수님께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요, 가장 위대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얼마 전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하였습니다. 1912년 조선에 선교사로 왔던 서서평(엘리자베스 쉐핑)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서서평 선교사는 이 작은 나라에 와서 그 중에서도 가장 작은 자들에게 특별히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애 못 낳는다고 버려진 여인들, 무식하다고 쫓겨난 여인들, 고아들을 데려다가 성경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11명의 여자아이들을 양녀로 삼고 친딸처럼 키워서 시집을 보냈습니다. 나환자, 거지들, 각종 병자들을 찾아가서 씻기고, 먹이고, 입혔습니다. 한복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평생 결혼도 안 하고 헌신하다가 54세에 소천하였습니다. 마지막 남은 시신마저 의대 해부실습용으로 기증하고 떠났습니다. 서서평 선교사의 장례식에 온 광주시민이 몰려와서 이렇게 목 놓아 울었다고 합니다. “어머니, 어머니, 우리는 어떻게 살아요?” 이 분은 마더 베리 선교사님의 롤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책상에는 이런 글귀가 항상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Not Success, But Service”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우리는 누구를 롤 모델로 삼고 있습니까? 성공한 사람입니까? 섬기는 사람입니까?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과 견고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성공하려면 힘 있는 사람들을 쫓아다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목자님들은 누구를 쫓아다니고 있습니까? 양들을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시고 사회적 지위도 있는 목자님이 17학번 새내기에 전화를 하셔서 밥 한 번 같이 먹자고 사정을 하십니다. 그래도 잘 만나주질 않습니다. 이런 어린 양들을 쫓아다녀봐야 인생에 도움이 안 될 것 같습니다. 괜히 자존심에 스크래치만 납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작은 자들을 섬기기 위해 스스로 작은 자가 되신 목자님들이야말로 위대하신 분들입니다. 항상 낮은 자리에서 섬기시는 사모님들이야말로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큰 자이십니다. 우리 옆에 계신 이 분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는 크게 성공한 분들입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 어린 양 한 사람을 영접하고 섬기는 예수님을 닮은 위대한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9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예수님께 아뢰었습니다. "주님, 아 글쎄 어떤 사람이 허가도 안 받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다가 우리한테 딱 걸렸지 뭡니까? 그래서 제가 혼을 내고 다시는 그런 일을 못하도록 했습니다. 저 잘했지요?"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잘 했다. 네 덕분에 지적 재산권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구나."라고 하셨을까요? 5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 쫓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왜 금지할 필요가 없습니까? 이는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역해 놓고 예수님의 반대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기서 그들을 금지시키면 그들은 쉽게 반대자로 돌아설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적대적인 세상 속에서 사역해야 제자들이 쓸데없이 반대자를 늘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좋은 일 하는 것을 굳이 막을 이유가 없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대신 전파해 주고 있습니다. 이 또한 전혀 막을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와 함께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 나라에 유익이 되는 일이라면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내 편, 네 편으로 편 가르는 것보다 하나님 나라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5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곧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가 가까이 왔다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 땅으로 가려면 중간에 사마리아를 거쳐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자들이 먼저 가서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숙소를 준비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 일행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과 해묵은 원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행선지가 유대의 수도인 예루살렘이라는 이유만으로 다짜고짜 배척을 한 것입니다. 이는 사마리아인들도 차별 없이 사랑하시는 예수님께는 너무나 부당한 처사였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야고보와 요한이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역시 예수님께서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여주신 제자들다운 화끈한 제안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그래. 내 속이 다 시원하구나. 이참에 본때를 보여주어 아무도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자." 이렇게 하셨을까요? 5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돌아보시며 꾸짖으셨습니다. 왜 꾸짖으셨을까요? 제자들의 말 속에서 자기들이 무슨 대단한 존재가 된 것인 양 거드름을 피우는 교만의 냄새가 났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로 속이 좁아서는 앞으로 구속 역사를 이루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지금은 심판의 때가 아니라 은혜의 때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심판의 집행자가 아니라 은혜의 복음의 선포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마을이 비록 지금은 예수님을 배척할지라도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회개하고 구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깟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복음 역사를 망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후에 사마리아에서는 전도자 빌립에 의해 예수님의 복음을 영접하는 역사가 크게 일어났습니다.


이 두 사건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제자들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해서 교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만의 특징은 분리와 배척입니다. 자꾸 우리와 너희를 분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닌 너희를 배척합니다. 거기에 논쟁과 다툼과 분열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분리와 배척의 자세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제자는 관용과 포용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도 자칫하면 제자들이 빠졌던 것과 같은 함정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모임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잘못하면 여기서 캠퍼스 선교 단체 중에 우리만이 최고라는 독선과 아집이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자꾸만 다른 선교 단체나 일반 지역 교회를 비난하고 깎아내리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이것은 쓸데없이 적을 만드는 미련한 짓입니다. 반면에 우리를 적대시하는 사람이나 모임에 대해서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이들은 우리를 반대하는 적들이 틀림없으니 같이 맞받아치고 싸워야 할까요? 제대로 손 좀 봐줘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이런 마음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자에게 합당한 마음가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뭐라고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구원의 복음, 은혜의 복음을 전파해야 할 사람들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지금은 비록 적대시 한다 해도 나중에 얼마든 친구가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목자는 사람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데 화가 난다고 다 쏟아 부으면 당장 나는 시원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을 잃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이 있을 때 우리는 사랑과 온유로 반응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고 했습니다. 직장에서 정당한 이유도 없이 나를 핍박하는 상사가 있더라도 복수하면 안 됩니다. 불쌍히 여기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목자 생활하다 보면 양이 괘씸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자가 참아야 양이 살아납니다. 자녀에게 너무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참아야합니다. 참지 못하면 주워 담기 힘든 말을 해버리고 나서 크게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혹시 주변의 동역자 중에 나를 오해하고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감당해주어야 합니다. 무지와 오해와 교만을 참고 끝까지 인내로 감당할 때 언젠가 사랑을 깨닫고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쓸데없이 적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적을 친구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합당한 자세입니다. 우리가 좁은 마음을 넓혀서 관용과 포용의 자세를 가진 주님의 제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57-62절까지는 제자도에 관한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누가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을지 가르쳐줍니다. 5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나아와 청했습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정말 용감하고 기특한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도 어려운 시대에, 믿는 정도가 아니라 어디든 따르겠다니 이 결단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까? 이런 사람이라면 환영하고 격려하며 칭찬을 해주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외로 아주 썰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5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여우와 공중의 새와 같은 미물이라 할지라도 돌아가서 쉬고 누울 일정한 거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은 일정한 안식처가 없다는 말니다.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장래의 안정이 보장되는 삶이 아니라 아무런 보장이 없는 불안정한 각오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왜 이런 부담스러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동기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상과 꿈을 따르는 낭만주의자였습니다. 그는 구름떼 같은 많은 군중들을 몰고 다니는 예수님의 인기가 부러웠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겉으로 보이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이 너무나 고상하고 아름다워 보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생활은 막연한 꿈과 이상만으로, 낭만으로 쫓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리 낭만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제자의 삶은 근본 머리 둘 곳 없이 가난하게 사신 예수님을 배우는 삶입니다.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냉대와 멸시, 모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가난한 삶을 각오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각오가 없다면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어! 이건 아닌데' 하다가 낙오해버릴지도 모릅니다. 낙오하지 않으려면 각오부터 해야 합니다.


5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에게 영광스러운 제자로의 부르심이 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 사람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 사람은 자신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책임이 있으니, 그 일을 먼저 한 후에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이 요청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60)" 예수님은 그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너무 냉정하신 것 아닐까요?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아버지의 장례도 치를 수 없는 걸까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지금 이 사람이 요청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분명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 허락을 구한 것은 지금 장례를 위해 가봐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가 예수님께 청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돌아가시면 유산을 정리하고 그 후에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아버지의 나이가 많거나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라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언제 있을지 모르는 일을 계속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일을 기약 없이 연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59절에 나오는 이 사람의 말을 이렇게 부를 수 있습니다. “핑계” 예수님께 이런 핑계는 안 통합니다. 예수님은 다 아십니다. 지금 이 사람의 모습은 다른 제자들의 모습과는 확연하게 차이 납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실 때, 그들은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다른 제자들이라고 해서 다 아버지가 없었겠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가장 높은 우선순위에 있는 일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는 일보다 우선되어야 합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장례를 치르는 일은 다른 가족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즉시 따라야 했고, 먼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에 헌신해야 했습니다.


61절을 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려고 합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그는 먼저 자기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62)" 예수님은 이 사람의 요청에 대해서 ‘안 된다’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왜 이번에도 예수님은 안 된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가족과의 작별 인사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너무 매정하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대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이 사람이 지금 전적으로 주님을 따르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을 따르려는 마음은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61절에 나오는 이 사람의 말을 이렇게 부를 수 있습니다. “미련” 만약 그가 미련이 남은 상태에서 가족들에게 작별을 하러 돌아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울고불고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가족들을 뿌리칠 수 없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기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밭은 삐뚤빼뚤 들쑥날쑥 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먼저 이것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그러면 왜 주라고 부르는 겁니까? 여전히 내 마음대로 다하면서, 여전히 내 뜻대로 살면서, 왜 주라고 부르며, 왜 주를 따른다고 말합니까? 이렇게 이 땅에 미련을 두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뒤를 돌아본 자들을 볼 수 있고, 그들의 선택에 대한 결과가 어떠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롯의 아내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멸망에서 건지심을 받았지만, 소돔을 더 사랑함으로 뒤를 돌아보았고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으로 애굽에서 구출되었지만, 광야 생활 중에 애굽을 그리워했고 불평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제대로 가려면 미련을 버리고 앞만 보고 가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농부가 소 두 마리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곤 하였습니다. “여보, 이 두 마리의 소를 잘 키워서 한 마리는 하나님께 드리고, 또 한 마리는 우리 집을 짓는데 씁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전염병이 돌아서 소 한 마리가 죽고 말았습니다. 이 때 농부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말하였습니다. “여보, 주님의 소가 죽었소!” 즉 주님께 드리기로 했던 소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주님의 소와 집을 짓기 위해 쓰기로 한 소에게 꼬리표를 붙여 놓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항상 문제가 생기면 꼭 주님의 소만 죽습니다. 주님께 드리기로 한 것은 항상 뒤로 밀립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께 드릴 기회가 와도 망설이다 뒤돌아설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first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에 가서 예수님이 second, third도 안됩니다. The last, 항상 예수님은 맨 나중으로 쳐지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앞서 서서평 선교사님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서서평 선교사에게는 개인적인 아픔이 하나 있습니다. 그녀는 사생아로 태어나서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유일한 가족이 어머니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어머니는 개신교로 개종한 딸에게 크게 화를 내고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서서평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에 선교사로 가겠다는 결단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먼 길 가는 딸을 축복해주기는커녕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렸습니다. 안식년을 맞아 고국에 잠시 돌아온 서서평 선교사님은 한복을 입은 채 보고 싶은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디서 거지같은 옷을 입고 거지꼴로 나타났느냐 고함치면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이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을까요? 하지만 서서평 선교사는 이런 아픔을 가슴 속에 묻어두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는 서서평 선교사처럼 삶의 최우선 순위를 예수님과 그의 나라에 두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편안하고 쉽게 갈수 있는 잘 포장된 길이 아닙니다. 희생의 길이고, 헌신의 길이며, 결단이 따르는 길입니다. 쉬운 길이 아닙니다. 대가가 따르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처음부터 쉽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우리 주님이 먼저 가셨고, 또한 주님이 그 길을 걸어가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주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때에 우리가 받을 보상은 크고 영원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본을 좇아서 그 길을 따라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셨고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자신을 희생하셨고 온전히 헌신하셨으며 그 결심을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사명의 쟁기를 굳게 잡으셨고 가장 값진 희생의 대가를 치름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갈 차례입니다.


오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라 하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유연하고 너그럽게, 예수님을 따르는 나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단호하게’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것을 반대로 하곤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는 너무 엄격하고 단호한 반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너무 유연하고 너그러운 것 아닐까요? 오늘 말씀대로 우리가 작은 자를 섬기고 내 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관용과 포용의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또한 다른 어떤 일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반응형

'설교 > 누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0) 2017.07.30
너도 이와 같이 하라  (0) 2017.06.25
하나님의 그리스도  (0) 2017.06.11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0) 2017.06.04
말씀을 듣고 결실하는 자  (0) 2017.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