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창무 2017. 6. 4.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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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15 강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말씀 / 누가복음 9:1-17

요절 / 누가복음 9:1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하니"


충북 음성에 가면 유명한 꽃동네가 있습니다. 이 꽃동네가 시작된 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한 신부님에게 계속 찾아와서 한 끼 식사비를 구걸해 가는 걸인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이 보니 걸인은 항상 아홉 사람 몫의 밥값이 모일 때까지 계속 구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해서 걸인의 숙소까지 쭉 따라가 보았습니다. 걸인은 그곳에 누워 있던 다른 걸인 아홉 사람에게 밥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신부님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당신은 자기 몸도 성하지 않은데 어떻게 아홉 사람이나 먹여 살리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걸어 다닐 수 있거든요. 걸어 다닐 수 있는 제가 누워있는 그들을 책임지지 않는다면, 이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한마디가 신부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걸인마저 이렇게 하고 있는데 나는 이웃에 대하여 얼마나 책임을 지고 있는가?’ 신부님은 이때부터 부랑자들을 돕기 위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현재 꽃동네에는 장애인, 부랑인, 노인 등 1,950여명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현대판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적은 한 걸인의 책임감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도 오늘 말씀을 통해 오병이어의 기적에 동참할 수 있는 책임감 있는 주님의 제자들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셨습니다. 앞선 6장 13절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그때는 사도 임명장을 주셨습니다. 이번에는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셨습니다. 그러면 지금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능력과 권위를 주시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예수님은 제자들이 나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귀신을 제어하고 병든 자를 고치는 것도 이 하나님 나라를 더 잘 전파하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자유와 생명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의 세력에 매여 참된 자유가 없습니다. 영혼과 육체가 깊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정치 문제나 경제 문제는 드러난 현상일 뿐이고 세상의 근본 문제는 하나님 나라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서 죄와 죽음의 사슬을 끊어 주고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서 자유와 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는 일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시던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곁에서 지켜보고 거들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자들 스스로가 예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 나라를 널리 전파하도록 예수님은 제자들을 과감하게 내보내셨습니다.


홀로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을 당부하셨습니까? 차 조심하고 소매치기 조심하라고 하셨을까요? 3절부터 5절을 보십시오. 세 가지 당부를 하셨습니다. 첫 번째가 '여행을 위해 아무 것도 준비하지 말라'였습니다. 우리는 보통 여행을 떠날 때 캐리어에 짐을 바리바리 다 싸들고 갑니다. 가능한 한 여비도 넉넉하게 준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필요한 것들은 도대체 어디서 구하란 말입니까? 4절에 답이 있습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그곳에서 제자들을 영접하는 사람들을 통해 공급을 받으면 됩니다. 그래도 여전히 문제는 남습니다. 영접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어떡합니까? 바로 이 지점에서 믿음이 요구됩니다.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사람들을 굶어 죽게 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두 번째 당부는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떠나라'였습니다. 왜 중간에 머물던 곳을 떠나려 하겠습니까? 처음 들어갔던 집이 무언가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잠자리가 불편할 수도 있고 밥이 입맛에 안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사람에게 합당한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대로 만족하게 여기며 감사히 받아야 합니다. 세 번째 당부는 '영접하지 않는 자를 향해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한다고 모두가 영접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럴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리라 하시는데 이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이 말은 ‘이제 너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더 이상 아무런 미련을 두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전도자는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지만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에게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미련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을지 말지는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으로부터 전도 여행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은 제자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과연 우리끼리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너무 고생할까봐 겁도 났을 것입니다. 카톡방에 '아직 우리는 이런 큰일을 감당할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죄송해요.' 이렇게 메시지 하나 보내고 스마트폰을 끄고 잠수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6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제자들은 순종해서 나갔습니다. 흩어져 각 마을로 두루 다니며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쳤습니다. 동시다발적으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이 들불이 번지듯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들이 벌어졌습니까? 7절과 8절을 보십시오.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 운동의 창시자이신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졌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설왕설래가 활발하게 오고 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하였습니다. 마침내 예수라는 이름이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습니다. 심지어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헤롯에게까지 민정 수석을 통해 정식 보고가 들어갔습니다. 헤롯은 과거 정권 유지를 위해 요한이 의로운 사람인줄 알면서도 죽였습니다. 그 이후 가끔씩 자다가 요한이 나타나서 '내가 반드시 다시 살아나서 너에게 복수할 거야'하는 악몽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들리니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겠습니까? 그래서 헤롯은 예수님을 만나서 자기 눈으로 직접 요한의 환생인지 여부를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본래 갈릴리 촌구석의 평범한 어부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세상을 술렁이게 하고 최고 권력자마저도 벌벌 떨게 만드는 영향력의 소유자들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잘 배우고 예수님의 전도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수영 선수를 오래 지켜본다고 해서 수영을 배울 수 있습니까? 자기가 직접 물에 뛰어 들어서 해 봐야만 배울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도 자기가 직접 예수님의 일을 해 봐야만 예수님을 제대로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엔 우리가 아직은 너무 어리고 부족하다구요? 맞습니다. 하지만 충분히 준비될 때를 기다리고만 있으면 그런 때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입니다. 어리면 어린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한 번 해 봐야 합니다. 자기가 해 봐야 어리고 부족한 것을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를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에 그런 중에도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생긴 전통이 '일대일 성경공부를 했으면 이제 너도 가서 그 말씀을 가르쳐라'입니다. 사실 다른 교회에서는 엄두도 못 낼 과감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놀라운 역사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한 양이 창세기 1강을 배우고 이거 대단한 진리다 하면서 바로 나가서 피싱하여 일대일을 했습니다. 이분은 창세기 1장 2절의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 하니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신은 하나님의 신발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양에게 하나님의 신은 당시 동해에 와있던 엔터프라이즈 항공모함같이 아주 크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양이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자 이분은 “아니 말씀 앞에서 자세가 어째서 그러냐?” 며 책망했습니다. 이렇게 가르치고 공부한 사람들이 후에 선교사가 되고 뛰어난 말씀의 종이 되고 많은 제자를 양성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경 공부를 하고서 전하지 않으면 성장하지 못합니다. 배운 것들이 그냥 머릿속에서만 맴맴 도는 추상적인 개념들로만 남아 있게 됩니다. 그러나 부족하더라도 내가 직접 전해 보면 믿음이 무엇인지를 실제적으로 배우고,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에 힘쓰는 가운데 캠퍼스와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제자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여쭈니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호칭이 제자에서 사도로 바뀌었습니다. 사도라는 이름에 걸맞은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님께 보고했습니다. "아 글쎄 제가 더러운 귀신아 나가라 하니까 정말 귀신이 꼼짝없이 나가더라니까요" "저는 배운 대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했더니 그 동네 사람들이 전부 다 회개하고 복음을 영접하지 뭡니까?" 그들은 자기들의 손으로 직접 경험한 놀라운 하나님 나라 역사를 앞 다투어 증언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의 보고를 받고 매우 만족하시고 기쁘셨습니다. 수고한 제자들을 위해 오랜만에 엠티를 가기로 했습니다. 장소는 갈릴리 해안에 있는 벳새다라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바비큐에 고기와 조개를 구워 먹고 밤새 마피아 게임을 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11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무리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예수님 일행을 추적해 왔습니다. 도대체 무리들이 왜 이러는 것입니까? 이는 헤롯왕에겐 없는 목자의 사랑의 냄새를 예수님에게서 맡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를 찾아 온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엠티는 취소되고 수양회가 대신 열렸습니다. 개회예배, 주제 1 강, 저녁 은혜, 특강까지 강사는 전부 다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시간가는 줄 모르고 계속해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무리들도 꼼짝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가만 놔두면 이 밤이 다가도록 메시지가 계속될 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 제자들의 제안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은 '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 미안 미안. 오늘은 여기까지. 여러분. 나중에 또 봐요.'정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은 의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13절 상반절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이 말씀을 원어로 보면 '너희'라는 말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너희가 먹을 주라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의도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능력과 권위를 위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전도 여행 중에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그 능력과 권위가 가진 위력을 체험했습니다. 그 다음엔 무엇이 따라와야 하겠습니까? 영화 스파이더맨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가 있습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With great power comes with great responsibility)“ 제자들이 이제는 책임감을 배워야 할 때였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 말씀은 예수님은 제자들이 양무리들을 책임질 목자임을 일깨워 주는 말씀입니다. 나를 어떤 존재로 인식하는가에 따라서 마음씀씀이가 달라집니다. “나는 손님이다” “나는 무리 중에 한 명일뿐이다. 지금까지 무리였고 앞으로도 무리이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떤 문제에도 개입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책임을 떠맡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구경이나 하다가 떡이나 먹자”하면서 그저 먼발치에서 지켜만 보게 됩니다.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있다가 다 끝나고 평가만 하려고 합니다. 이러면 성장이 없습니다. 성장은커녕 오히려 점점 더 퇴보합니다. 그러나 “내가 책임을 맡은 자다” “내가 목자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뒷짐 지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무리들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여기고 그 문제 속에 뛰어듭니다. 그 과정 속에서 고생도 하고 수고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성장합니다. 이런 사람이 큰 사람이 됩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하여 하나님 나라를 전파할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임의 이름이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입니다. 그러면 이 시대 캠퍼스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복음을 심을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바로 학생들에게 있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학생들이 주인공입니다. 그러나 센터에 오면 스텝 목자님들, 학사 목자님들, 사모님들이 줄줄이 위에 계십니다. 그러다보니 위에 목자님들이 짱짱하니 양치고 역사를 섬기는 것은 목자님들이 다 하시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나는 어리니까 섬김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당연한 일일까요? 되돌아보니 저는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예수님을 만나고 3학년 때부터 요회 목자를 맡아 섬겼습니다. 저의 선배 목자님들이 어떻게 이런 나에게 그런 큰 책임을 맡기셨을까 참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물론 그때 저는 실수도 많이 하고 망한 적도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세상에 도전하는 믿음을 배웠고, 말씀의 능력을 체험했고, 목자의 심정을 배웠습니다. 작년에 저는 모스크바 여름 수양회를 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메시지부터 수양회의 모든 역사를 선교사님의 자녀들과 현지 러시아인 목자님들이 다 주도적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고등학생들도 두세 가지 일을 동시에 책임 맡고 있었습니다. 우리 선교사님들은 주로 바비큐 할 때 불을 피우고 노련한 솜씨로 고기를 구우셨습니다. 참 아름다워 보이고, 선교사님들이 더 존경스러웠습니다. 어려도 책임감을 가지고 맡아서 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잘 할 수 있습니다. 또 잘 못하면 어떻습니까? 그 과정 속에서 배우고 성장하기 때문에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시대와 양들에 대하여 책임감을 공유하고 다 함께 그들을 먹이는 목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이 책임감을 공유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요? 제자들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13절 하반절과 14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하니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은 책임을 지고 싶어도 책임질 능력이 안 된다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현재 제자들에게 먹을 것이라고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을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면 분자 단위로 나누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먹을 것을 사오는 수밖에 없는데 제자들에겐 돈이 없었습니다. 설령 돈이 있어도 빈 들인데 어디서 살 수 있겠습니까? 한 마디로 아무리 계산해 봐도 안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이 계산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빼 먹은 변수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가장 중요한 변수인 예수님을 빼고 한 계산은 정답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정답은 무엇입니까? 14절 하반절부터 17절까지를 보십시오. 아름다운 저녁 들판에 무리들이 오십 명씩 옹기종기 모여 앉았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손에서 떡이 떼어져 제자들의 손에 전달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음식을 무리들에게 전달했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의 손에서 음식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게 온 무리가 배불리 먹고도 남은 음식이 열두 바구니나 되었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했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비 같이 내려주셨습니다. 이날 제자들이 경험한 예수님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했던 바로 그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함께 계시다는 믿음으로 우리도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는 주님의 역사에 얼마든지 동참할 수 있습니다. 이 오병이어의 정신이 아무 가진 것 없던 사도들이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복음으로 지중해 연안 지역을 전부 물들일 수 있었던 힘이었습니다. 1966년 2월 23일 UBF 일지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수께서 가진 것 없고 오히려 굶주려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신 의미는 너희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라는 말씀이시다. 우리나라 현 실정에 있어서도 모든 사람들이 굶주리고 가난한 상태에 있는데, 이 때에 우리가 제자들의 입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들에게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UBF 선교 사업도 보리떡 두 개와 물고기 다섯 마리로 수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낳는 모체가 되고 있다. 허나 현재로는 선교 사업을 통해 우리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지만 아직 체질화되지 못하고 있다. 많은 것보다도 적은 정성을 바치는 것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가난한 후진국의 대학생들이었던 우리 선배들이 성서한국과 세계선교 역사를 이루어갔던 원동력도 오병이어의 정신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예수님은 부족한 우리를 이 시대 목자로 쓰시고자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목자로서 캠퍼스와 나라와 민족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믿음으로 이들을 먹여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바로 우리가 방황하는 양들, 갈급한 영혼들을 오병이어 정신으로 살리고 먹이는 목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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