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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동생활과 성경 공부
    설교/마가복음 2016.11.28 22:23


    공동생활과 성경 공부


    말씀 : 마가복음 3:31-35, 4:24-34

    요절 : 마가복음 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이번 가을 학기에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목적과 또 제자들을 교육하신 내용이 무엇인가를 배웠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어떤 방법으로 가르치셨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제자를 양성하는데 있어서 교육 내용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방법도  역시 중요합니다. 마치 크고 싱싱한 생선을 한 마리 낚아 올렸다 하더라도 손질하고 요리하는 방법을 모르면 맛있게 먹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의 방법으로 예수님의 제자를 양성하는 공동체를 이루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신 후부터 늘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며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실 때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따로 제자들을 모아서 말씀의 뜻을 설명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심방 가실 때, 초대 받아 가실 때, 여행을 가실 때, 잠깐 쉬려고 하실 때도 늘 함께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위험을 당하시거나 고향에서 배척을 당하실 때도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은 제자들과 종종 만나신 것이 아니라 24시간 365일 늘 함께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은밀한 개인기도 시간을 가지실 때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공동생활을 하실 때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피곤할 때 조용히 혼자 쉬고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피곤할 때 제대로 쉴 수 없었습니다. 한 제자가 문제를 일으켜서 해결하고 나면 또 다른 제자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하루 종일 열두 명의 제자들을 살피고 돌봐주시느라 따로 출퇴근이 없었습니다. 또 제자들 앞에서 본을 보여주셔야 한다는 생각에 늘 긴장하고 사셔야 했을 것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수년을 이렇게 살아야 했으니 예수님께서 얼마나 피곤하셨겠습니까? 요즘 선생님들 중에 근무 시간 외에 따로 시간을 내어 제자들과 함께 하는 분들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하고 싶어도 혹시 그러다가 사고가 날까 염려되어 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하물며 아예 제자들과 함께 먹고 자며 공동생활을 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공동생활을 하려면 전폭적인 자기희생이 요구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교육 방법을 쓰셨을까요?


    첫째로 공동생활은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성을 맺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성을 맺기 원하셨습니다.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성을 맺으려면 상대방을 구체적으로 잘 알아야 합니다. 장점과 강점, 허물과 약점까지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 줌으로써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을 맺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함께 사는 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사람이 언제 친해집니까? 친해지려면 일단 밥을 같이 먹어야 합니다. 우리말에 식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식구는 먹을 식, 입 구 곧 한솥밥을 같이 먹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가족이 아니더라도 밥을 같이 먹으면 한 식구가 됩니다. 또 서로 어색하던 사이도 엠티 한 번 갔다 오면 금방 친해집니다. 공동생활을 하면서 친밀한 사랑의 공동체가 만들어집니다. 스트레스 받는 일이 많다가도 공동체 안에서 즐겁게 교제를 나누고 나면 스트레스가 다 사라집니다. 기쁜 일이 있을 때 함께 기뻐해 주고 슬픈 일이 있을 때 함께 울어줄 사람이 있기 때문에 격려와 위로를 얻습니다. 나를 이해해 주고 받아주는 사랑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든든한 인생의 버팀목이 되는지 모릅니다.


    둘째로 공동생활은 인격과 성품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생활에 항상 유쾌하고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공동생활하면 뭔가 말은 멋있어 보이는데 실상은 힘든 점도 참 많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로마 제국에 부역하던 세리 같은 자들을 처단하던 열혈당원 출신의 시몬이 있었습니다. 동시에 세리 출신인 마태가 있었습니다. 이 둘은 한솥밥을 먹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둘은 서로 얼굴만 봐도 밥맛이 뚝 떨어졌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제자 중에는 식사 당번을 펑크 내는 사람, 빌려가서는 안 가져오는 사람, 아예 말도 안 하고 그냥 가져가는 사람, 유난히 깔끔을 떠는 사람, 유난히 더러운 사람 등등 별별 사람이 다 있었습니다. 날마다 안 싸우는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공동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제자들의 약점과 허물과 실수를 참고 감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힘이 듭니다. 하지만 이해하려고 애쓰다 보면 어느 순간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장점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의 위대한 장점들을 본받고 배우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공동생활을 하다보면 다른 제자들 앞에서 내 자신의 약점과 허물과 실수가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자존심이 상하고 부끄럽습니다. 나도 몰랐던 내 인간성의 바닥이 드러납니다. 팩트로 드러나기 때문에 도저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만이 깨어지고 강한 인간성이 부서집니다. 하나 둘 뉘우치고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공동생활을 통해 너를 알고 나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됩니다. 크고 작은 갈등 속에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우리 내면은 점점 예수님을 닮은 인격과 성품으로 변화됩니다. 공동생활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성화의 도구입니다.


    셋째로 공동생활은 삶의 현장 속에서 예수님을 배울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제자양성은 지식 전달이나 기술 전수가 아니라 신앙과 인격 교육입니다. 이런 교육은 강의실에서 가르치는 것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실제 생활에서 인격과 인격이 맞부딪치는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 ‘섬기는 종이 되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좋은 말씀이라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실천은 없었습니다. 섬기는 종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본 적도 없고 경험한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직접 대야에 물을 떠서 냄새나는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충격이 큰 만큼 그 가르침은 잊을 수 없는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또한 양을 어떻게 돌보고 먹여야 하는지,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예수님의 경건과 헌신, 겸손과 사랑을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며 생활 속에서 하나씩 하나씩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침 뿐 아니라 삶 속에서 본을 보여주심으로 제자들을 키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공동생활을 통해 형성된 신앙 공동체를 매우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마가복음 3:31-35절에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집으로 데려가려고 찾아 온 장면이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예수님은 혈연 공동체인 육신의 가족보다 새 언약의 공동체인 제자 공동체를 더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자 공동체는 제 2의 가족이며 새로운 영적인 가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왜 예수님이 제자들을 열두 명만을 택하셨을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제자도 기왕이면 다다익선으로 수백 명씩 한꺼번에 키우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 공동체를 가족과 같은 공동체로 만들기 원하셨습니다. 그 목적에 적절한 규모가 바로 열두 명의 공동체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지금은 핵가족 시대라 가족의 규모가 훨씬 더 작아졌지만 전통적인 한 가족의 규모가 보통 이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제자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세우시고 친 가족보다 귀하게 여기신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예수님이 어떻게든 공동체를 지키고 보호하고자 하셨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바리새인과 헤롯으로부터 좋지 못한 악영향을 받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계하셨습니다(8:15). 사도 바울이 여러 교회에 편지를 보냈던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바울은 알고 보면 굉장히 부드럽고 융통성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이단이나 거짓 가르침에 대해서만은 너무나 단호하고 엄격했습니다. 심한 책망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공동체가 예수님의 피로 사신 백성들이며 그 피로 연결된 예수님의 가족임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구성원의 숫자가 대략 열두 명쯤 되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바로 요회입니다. 요회가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도 제자양성 때문입니다. 요회는 제자양성의 기본 단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회 안에서 친교를 누립니다. 같이 밥도 먹고 대화하고 때로는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어떤 때 보면 가까이 사는 요회 식구들이 멀리 사는 가족들보다 더 친밀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양들은 요회의 섬김과 사랑을 먹고 성장합니다. 장막이 존재하는 이유도 제자양성을 위해서입니다. 장막은 처음부터 경건을 훈련하고 공동생활을 통해 실제적으로 예수님을 배우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장막훈련을 통해 준비된 제자들이 선교사로 부름 받아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습니다. 지금도 선교사님들이 가끔 한국에 오시면 형제들이 군대 이야기 하듯 같이 장막 생활했던 목자님들과 장막을 추억하며 웃음꽃을 피우곤 하십니다. 또한 우리의 각 가정은 세상의 다른 가정에는 없는 사명이 있습니다. 자녀들과 양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키우는 사명입니다. 각 가정을 가정 교회(House Church)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비추어 볼 때 우리의 요회나 장막이나 가정이 제자양성을 위한 공동체로서 아직 부족하고 아쉬운 면도 있습니다. 먼저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성이 더 깊어져야 하겠습니다. 요회 식구 중에 힘든 일을 겪는 동역자가 있다면 바쁜 중에 시간을 쪼개서라도 심방을 갈 필요가 있습니다. 각 가정을 개방해서 양들이나 동역자들을 자주 초청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또한 싫은 사람, 미운 사람이 있을 때 회피하려고 하지 말고 이를 내가 영적으로 한 단계 더 성숙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 사람이 내 인격과 성품의 성숙을 위해 주님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무엇보다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배우는 공동체로 함께 만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이번에 제자수양회를 전체로 하지 않고 팀별로 했습니다. 팀으로 하니까 해야 할 것이 많아 힘든 점이 있었지만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점을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요회이든 장막이든 가정이든 예수님을 배우기 위해 애쓰고 여기에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공동체가 살아 있어야 제자양성이 일어나고 복음 진리를 전달하고 계승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중세 교회가 타락하고 깊은 나락에 빠졌을 때 그래도 수도원 운동을 통해 복음과 신앙이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세계 선교도 ‘홀리 클럽’이나 ‘건초더미 기도회’ 같은 소그룹 공동체를 통해 일어났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가 내외적으로 많이 힘든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작은 제자 공동체가 살아있는 한 언제든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 모임의 요회와 장막과 가정이 예수님의 제자를 낳고 키우고 훈련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미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더 분발해서 제자도와 복음 신앙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다음 세대에 계승하는 역사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양성 방법 중 공동생활과 함께 가장 중요하게 여기셨던 두 번째 방법은 성경공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주로 하신 일은 성경공부였습니다. 공동생활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동생활을 하면서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만약 공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그냥 같이 밥 먹고 잠만 잔다면 이를 제자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제자공동체는 합숙소도 아니고 사교클럽도 아닙니다. 제자공동체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제자공동체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공동체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먼저 복음의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복음, 나도 경험하지 못한 복음을 어떻게 전파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복음의 사람, 언제 누구를 만나더라도 성경을 풀어 복음을 가르칠 수 있는 말씀의 종이 될 수 있도록 성경공부에 집중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수시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시간 약속을 잡고 센터에서 만나서 말씀을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나 집에서나 바닷가에서나 빈들에서나 길에서나 어디서든지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이른 아침에도 식사 시간에도 저녁 늦은 시간에도 언제든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장소와 환경에 구애됨이 없이 기회만 있으면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집중적인 말씀 공부를 통해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접하고 믿음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이 하나님 중심적인 가치관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제자의 마음 깊이 새겨졌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오순절 날에 한 번의 설교로 삼천 명을 회심시키는 놀라운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 설교의 내용을 보면 구약성경을 관통하여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맨날 꾸중만 듣던 그 베드로가 아닙니다. 이는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공생애 기간 내내 예수님으로부터 시도 때도 없이 수시로 말씀 공부를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이 3년이란 짧은 시간 안에 위대한 사도로 변화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꾸준하고 집중적인 말씀 공부였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말씀의 권세와 잠재력을 경험하도록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귀신이 쫓겨나가고 병든 사람이 치유되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말씀으로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는 모습을 곁에서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수많은 무리들이 사방에서 모여드는 장엄한 광경도 보았습니다. 촛불 같았던 말씀의 역사가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둘씩 짝을 지어 전도 여행을 다니면서 복음으로 사람들이 변화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말씀에는 엄청난 권세와 잠재력이 있음을 마음에 깊이 새기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사람을 구원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말씀을 깊이 생각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시되 일방적으로 주입식으로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말씀의 숨은 뜻을 깊이 생각하도록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이 진리의 말씀에 대한 탐구 정신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말씀의 뜻을 알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질문을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비밀을 풀이해주셨습니다. 답을 너무 빨리 주면 사람은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스스로 질문하고 충분히 고민해 본 후에야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4:24에서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말씀을 들을 때 주의 깊게 듣고 깊이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말씀을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숨겨진 보화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대해서 생각하는 힘이 길러지지 않고는 결코 자립적인 성경 선생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 모임이 성경 공부를 너무 많이 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던 것에 비하면 결코 많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날마다 일용할 양식 말씀을 먹는 것은 예수님께서 수시로 말씀을 가르치셨던 것과 연관됩니다. 매일 매일 말씀을 먹지 않으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자연스럽게 세속적이고 인본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매주 한 편의 소감을 쓰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깊이 생각하도록 훈련하셨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즘은 깊이 생각하고 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쓰더라도 문자 메시지 카톡 메시지 쓰는 정도가 고작입니다. 140자로 제한이 있는 트위터가 유행한 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깊이 생각하기 보다는 즉흥적인 느낌을 더 중요시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소감을 쓰려니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쓰려고 하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씀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캐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승,전,소감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가장 잘 배우는 방법은 가르쳐 보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말씀을 직접 가르쳐 보면 배울 때와는 또 다른 감동과 깨달음이 있습니다. 내가 전한 복음을 듣고 사람이 구원 받고 살아나는 모습을 보면 그 감격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양식 먹고, 일대일 하고, 소감 쓰고, 평범한 것 같지만 여기에 자립적인 성경 선생이 되고 빼어난 말씀의 종이 되는 비결이 있습니다. 우리가 더욱 성경 공부에 힘써서 성경선생이요 말씀 전파자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제자양성 방법인 공동생활과 성경공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반복해서 가르치셨던 내용을 살펴보면서 제자도의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이미 한 번 가르쳤던 내용을 다시 반복해서 가르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복 교육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첫째로 그 내용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하고 핵심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반복 교육을 해서 잊을만하면 다시 가르쳐서 생각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듣는 사람이 잘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물도 계속 반복을 하면 바위에 구멍을 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더라도 계속 반복해서 듣다보면 마음  속에 깊이 영접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양성을 하시면서 반복하여 가르치신 것들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가 본성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지만 반드시 영접해야 하는 제자도의 중요하고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반복 교육하신 세 가지 제자도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첫째, 양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 중에서 4복음서 모두에 다 나오는 기적이 하나 있습니다. 또 마가복음에서 유일하게 비슷한 기적이 두 번 반복되는 기적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목자의 심정과 책임감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누구나 사람은 자기중심적입니다. 틈만 나면 자기 생각만 합니다. 내 걱정만 합니다. 남의 일은 나 몰라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런 마음을 잘 아시기 때문에 목자의 심정과 책임감을 반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세 번이나 반복해서 양들을 부탁하셨습니다.


    둘째, 섬기는 종의 자세입니다. 목자의 심정이 양들을 향한 기본자세라면, 섬기는 종의 자세는 제자들 상호간의 기본자세입니다. 예수님은 서로 누가 크냐 하면서 경쟁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얼마 후 또 이렇게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섬김을 강조하셨을까요? 섬김은 제자 공동체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섬기기보다는 섬김 받기를 좋아합니다. 내가 왕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이런 본성에 따르게 되면 사람 사이의 관계는 무한 경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갑질과 억압, 시기와 질투,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는 지옥 같은 세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제자 공동체는 섬김과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세상을 섬기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시고 왕시지만 도리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공동체의 원리 역시 섬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섬김이 있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셋째, 십자가의 도입니다. 제자들이 끝까지 귀를 막고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서의 고난과 대속적인 죽음에 대한 예고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듣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이를 수차례 반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하도 듣지 않기 때문에 변화산에서 변형되신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십자가의 도를 마음에 새기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에서도 떡과 포도주로 십자가의 의미를 전달해 주셨습니다. 세상에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고난보다는 영광을 사모합니다. 그러나 고난의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는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길이었습니다.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없이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제자는 누구입니까? 제자는 심정을 가지고 양들을 돕는 목자입니다. 제자는 동역자를 겸손히 섬기고 사랑하는 종입니다. 제자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결국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공동생활과 성경 공부를 통해서 그 부르심에 합당한 제자다운 제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그런 제자들을 낳고 키우는 역사 가운데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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