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상처 입은 치유자

이창무 2015. 5. 6.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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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치유자

Bible Cafe Message , 2010.3.10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3-17


 


살아가면서 참 답답한 때가 이럴 때입니다. 반드시 변화되어야 할 사람이 전혀 변화가 없을 때입니다. 그러면 살면서 가장 씁쓸하고 슬픈 때 중에 하나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다? 바로 변화되지 않아야 할 사람이 변하는 모습을 볼 때입니다. 저 모습 저 대로 오래 동안 간직해 주었으면 하는데 자꾸만 변해 가는 모습을 볼 때 안타깝습니다. 이 자리에 많은 새내기들이 오셨습니다. 새내기 시절은 순수하고 열정이 넘치는 시기입니다. 물론 난 아니야 라고 인정하지 않는 새내기도 있을지 모르지만 지나고 나면 그런 분들도 내가 그 시절에는 그랬지 하면서 인정을 하실 것입니다. 그 순수함과 열정이 변치 않고 계속 간직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면 많은 분들이 그렇지 못하고 자꾸 변해 갑니다. 

안도현 씨의 '연애편지'라는 시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연애편지'는 꼭 남녀 간에 주고 받는 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청년 시절의 순수함과 사랑이 담긴 모든 것을 상징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제가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스무 살 안팎에는 누구나 한번쯤 연애 편지를 썼었지

말로는 다 못할 그리움이여

무엇인가 보여주고 싶은 외로움이 있던 시절 말이야

틀린 글자가 없나 수없이 되읽어 보며

펜을 꾹꾹 눌러 백지 위에 썼었지

끝도 없는 열망을 쓰고 지우고 하다 보면 

어느 날은 새벽빛이 이마를 밝히고

그때까지 사랑의 감동으로 출렁이던 몸과 마음은

종이 구겨지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리곤 했었지

그러나 꿈속에서도 썼었지

사랑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잃어도 괜찮다고

그런데 친구, 생각해보세

그 연애 편지 쓰던 밤을 잃어버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타협을 배우고

결혼을 하면서 안락을, 승진을 위해 굴종을 익히면서

삶을 진정 사랑하였노라 말하겠는가

민중이며 정치며 통일은 지겨워

증권과 부동산과 승용차 이야기가 좋고

나 하나를 위해서라면

이 세상이야 썩어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친구, 누구보다 깨끗하게 살았노라 말하겠는가

그 스무 살 안팎에 쓰던 연애 편지는 그렇지 않았다네

남을 위해서 자신을 버릴 줄 아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집안에 도둑이 들면 물리쳐 싸우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가진 건 없어도 더러운 밥은 먹지 않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사랑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한 발자국씩 찾으러 떠나는 거라고

그 뜨거운 연애 편지에는 지금도 쓰여 있다네

 


스무 살 안팎 바로 새내기 여러분들의 나이입니다. 여러분! 남을 위해 자신을 버릴 줄 아는 것이 사랑이라도 믿으시죠? 불의를 보면 물리쳐 싸우는 것이 정의라고 믿으시죠? 가진 것 없어도 더러운 밥은 먹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닌가요? 만약 아니라면 정말 큰 일입니다. 세상에 대해 날카롭게 각을 세울 줄 알던 젊은이도 세월이 가면 무뎌지고 변해 가는데 아예 처음부터 세상에 물들어 있다면 그 미래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게 됩니다. 여러 분의 순수함과 열정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이미 변해 버린 한 사람이 나옵니다. 어쩌면 여러분의 미래가 될 수도 있는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세리 레위입니다. 먼저 레위라는 이름에 주목해 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12개의 지파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지파가 레위 지파입니다. 그런데 이 레위 지파는 다른 지파와는 아주 다른 독특한 지파였습니다. 다른 지파들은 다 자기 땅을 가지고 거기서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오직 레위 지파만 자기 땅이 없었고 따라서 농사를 지어 먹고 살 수 없었습니다. 왜나하면 레위 지파 사람들은 특별히 제사장 직무를 대대로 맡아서 수행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레위 지파는 유서 깊은 성직자 집안입니다. 이 지파 안에서는 아버지도 제사장이고 할아버지도 제사장이고 물론 아들도 제사장이 되어야 했습니다. 본문의 세리 역시 레위라는 이름을 가진 것을 볼 때 틀림 없이 레위 지파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레위의 부모님들은 레위가 나중에 자라서 훌륭한 제사장이 되라고 그런 이름을 붙여 주셨겠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제사장이 되지 않고 세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세리는 어떤 직업일까요? 요술공주일까요? 골프 선수인가요? 영어로 보면 세리를 Tax Collector라고 표현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세리는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레위를 동대문 세무서에 세무직 공무원 쯤으로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시 세리와 현대의 세무 공무원은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시오노 나나미가 지은 유명한 '로마인 이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로마의 세금 징수 제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세리는 공무원이 아니라 자영업자였습니다. 로마는 세리들을 모아서 일정 지역에서 일년 간 거두어 들일 세금에 대해서 경매를 붙였습니다. 당연히 가장 높은 금액을 걷겠다고 한 세리가 징수권을 따냈겠지요. 그러면 세리는 세금을 거둬서 로마에게 약속한 금액을 납부하고 나머지는 자기가 차지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안 봐도 훤하시죠? 세리들은 징수권을 따낼려고 무리하게 높은 금액으로 입찰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한 세액을 납부한 후 남는 자기 몫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악착같이 세금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우리 나라도 조선 시대 때 백골징포, 황구첨정 그런 것이 있었잖아요. 이스라엘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리들도 정한 세금 이외에도 이런 저런 구실을 붙여서 세금을 만들어 백성들을 착취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속담 중에 '산 속에는 늑대가 살고 산 아래에는 세리가 산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세리는 세무 공무원보다는 사채업자 쪽에 훨씬 더 가깝다고 보시면 됩니다. 사채업자들 중에 신체 포기 각서 이런 것을 받는 경우도 있다고 하잖아요? 세리도 그에 못지않게 악랄하게 세금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거두어 들인 세금을 자기 민족을 식민 통치하고 있는 로마 정부에 모두 다 갖다 바치니 이스라엘 사람들의 눈에 세리가 어떻게 보였겠습니다? 천하에 상종 못할 인간 말종 취급을 받았던 것입니다. 친구들도 다 떠나가고 세리의 자녀들은 학교에 가서 우리 아버지가 세리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레위가 이런 세리가 되었을까요?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던 당시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루에 두 끼를 먹기도 빠듯할 정도로 만성적인 빈곤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대대로 성직자 직을 물려 받은 레위 집안이 그리 넉넉한 집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학교 다닐 때 급식비를 못 내 정부 보조금을 의지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학원비가 없어 혼자 공부하며 대입을 준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머리 좋은 레위는 열심히 공부해서 민족 예루살렘 대학교 경영학과에 당당히 합격했습니다. 이젠 장미빛 미래 만이 나에게 펼쳐질 것만 같았습니다. 새로운 좋은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대학의 자유를 만끽했습니다. 선배 누나의 초대를 받아 바이블 까페에 왔다가 성경 공부도 시작했습니다. 성경 공부를 하면서 진지하게 내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직 잘 모르지만 그래도 내 인생을 가장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에 투자해야 겠다는 결심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 삶은 아마도 서로 사랑하며 나누는 삶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대학생활의 기쁨도 잠시 레위는 바로 다음 학기 살인적인 등록금을 낼 길이 막막했습니다. 동시에 두 세 개의 과외를 하고 과외가 짤리면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장학금을 받으려면 학과 공부도 소홀히 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 토익 준비도 해야 하고 자격증도 적어도 한 두개는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는 방학 때는 학원에 다녀야 했습니다. 하루 하루가 정신 없이 바쁘게 지나갔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장 눈에 보이는 유익이 없을 것 같은 성경 공부는 자꾸만 뒤로 미루게 되었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변변한 직업을 얻지 못하고 놀고 있는 백수 형들과 백조 누나들을 보면서 나는 절대로 저렇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찌질하게 살지 않으려면 돈이든 권력이든 하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군대에 갔다 온 후 레위는 이런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습니다. 스펙 쌓기 전쟁이라는데 스펙의 지존이 되기 위해서 있는 온 힘을 다해 준비를 했습니다. 어느덧 졸업할 때가 가까이 되자 진로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어차피 권력은 로마인이 쥐고 있으니 가능성이 별로 없었습니다. 결국 레위는 돈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세리가 되었습니다. 물론 레위도 세리가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는 직업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정과 존경이 밥을 먹여 주는 것도 아닌데 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쓰면 된다고 자신을 합리화시켰습니다. 견습 세리 시절 인정 사정 봐주지 않고 무자비하게 세금을 뜯어 가는 선배 세리들의 모습을 보고 마음의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돈 버는 재미, 돈 쓰는 맛을 알아가면서 그런 갈등은 다 사라져 갔습니다. 레위는 어느새 동료 세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악랄한 중견 세리가 되었습니다. 올해의 세리상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양심의 가책 따위는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원하던 바대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우선 로마에서 직수입한 외제 승용차을 한 대 뽑았습니다. 수영장이 딸린 펜트하우스 한 채를 샀습니다. 요단강변에 주말에 쉴 수 있는 조용한 별장 하나도 마련했습니다. 레위는 자기가 원하던대로 럭셔리하고 쿨한 인생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루저'들을 비웃으며 나야말로 '위너'라고 큰소리 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상하게도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외적인 화려함과 풍요로움이 커져갈 수록 그의 내면은 공허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슬슬 피하고 이제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었습니다. 자기 돈을 보고 떡고물이라도 얻어볼까 하여 접근하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나눌 친구 한 사람 없었습니다. 그는 너무 외로웠습니다. 자기 삶에 정작 중요한 그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어느날 세관에 출근해서 여느 때처럼 촛점을 잃은 몽롱한 눈으로 거리를 내려다 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 자기에게 다가오는 한 남자를 보았습니다. 그 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잠시 후 레위에게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는 레위의 인생을 송두리채 바꾸어 놓은 그 한 마디였습니다.


 


본문의 세리 레위의 모습은 바로 현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세리가 마이너리티라서 일종의 차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요? 현대 사회에서는 오히려 세리가 다수가 된 느낌입니다.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세리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원하는 것 같아요. 다 필요 없으니까 그저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요? 세리 레위에게서 현재 우리 자신의 모습과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요?


 


첫째, 고독입니다. 현대인은 외롭습니다. 현대인의 특징은 공동체를 잃어 버렸다는 것 입니다. 제가 어릴 때 놀 때는 골목에 나가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골목에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집에서 혼자 놉니다. 혼자서 컴퓨터 게임을 합니다. 사람은 공동체 속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이익을 중심으로 모이는 모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죠. 친밀함과 인격적인 소통이 있는 모임을 말합니다. 사람은 이런 공동체 안에 있을 때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고립된 개인은 병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은 누구나 외로움의 문제를 안고 살아 갑니다. 집 밖에 나가면 사람은 넘치도록 많은데 나의 마음 속 깊은 것까지 함께 나눌 사람이 없습니다. 외로움을 이기려고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많아 졌습니다. 과거에는 단백질을 보충하려고 길렀던 강아지에게 이제는 유산을 물려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유치원생에게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이 뭐냐고 물었더니 1위가 동생이랍니다. 이제는 집에 가도 형제가 없고 부모님은 맛벌이 하느라 늘 바쁘십니다. 사람들은 인격적 사귐이 있는 공동체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종 까페나 인터넷 동호회를 만들어 보지만 만족을 얻지 못하고 늘 다툼으로 쉽게 깨지곤 합니다.


 


둘째, 탐욕에 이끌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어떤 가치보다는 대부분 욕망을 쫓아 살아갑니다. 어떤 물건을 사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지름신이 강림한다고 하죠. 일단 지르고 보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최신 전자 제품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새로 나온 컴퓨터, 노트북, 아이팟, 카메라 등을 보면 갖고 싶어 집니다. 여자들은 패션에 관심이 많습니다. 오리지널 명품을 사고 싶어 합니다. 나중에 가면 집이나 자동차로 대상이 바뀔 뿐 패턴은 똑 같은 것입니다. 욕망하고 소유하고 다시 또 욕망하고 또 소유하고 그런 삶의 반복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공허함입니다. 남는 것이 없습니다. 남는 것이라고는 이제는 흥미를 잃어버린 굴러다니는 페품들뿐입니다. 꼭 필요한 것도 아닌데 충동에 이끌려 자꾸 소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소유가 곧 자기 자신이니까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에 내 자신의 존재 의미와 가치가 결정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비싼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 봐 주고, 없으면 무시할 거라고 보는 거죠. 그러니 거기에 목을 맬 수 밖에 없습니다.


 


셋째, 인간성의 상실입니다. 사랑하는 능력,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잃어 버렸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나만 잘 되면 되는 것입니다. 1964년, 키티 제노비스(Kitty Genovess)라는 여인이 뉴욕의 자기 집 근처에서 새벽 3시 30분경 강도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그녀가 격렬하게 반항을 했기 때문에 살인극은 30분 이상 계속되었고, 집 주변의 40가구에 그 소리가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그녀를 구하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아, 그녀는 그대로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미국 전역에 경악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었을 때 다른 행동을 했으리라고 자신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화상입니다. 팔 다리가 없는 사람만 불구자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능력이 없는 사람도 영혼의 불구자인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모릅니다. 사랑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경쟁하여 이기는 법은 배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약자를 배려해야 하는지, 다른 사람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법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참 어려워 합니다. 나름 노력은 하는데 친구 관계, 가족들과의 관계가 늘 삐걱거립니다. 그래서 아예 주위 사람들과 깊은 인간 관계를 맺기를 회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회는 어떤 사회로 불러야 할까요? 한 마디로 병든 사람들이 모여 있는 병든 사회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염두에 두시고 병든 자라고 표현하셨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병든 지도 잘 모릅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구요. "난 정말 누구일까" 이런 고민 해 보셨나요? 만약 있었더라도 대학 입학 할 때까지는 묻어두자고 유보해 두셨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또 졸업하고 사회 생활을 시작해서 정신 없이 살다보면 또 이런 질문을 던지기 어려습니다. 인생에서 캠퍼스에 있는 기간은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그리고 치열하게 탐구해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기입니다. 이 질문은 정말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나머지 인생은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진짜 큰 문제는 내가 누군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과대 포장하는 성향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늘 자기는 그럭 저럭 괜찮은 인간이라고 여깁니다. 안 좋은 면도 있지만 언제가는 노력해서 다 고쳐나갈 거라고 믿고 싶어 합니다. 난 건강한 사람이고 나쁜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은 건강하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병든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불쑥 반감이 들것입니다. 왜 멀쩡한 나를 병자 취급하냐고 따지고 싶을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리는 비정상이고 자기들은 정상이라고 여겼죠. 그들은 아직도 자기 자신을 잘 몰랐던 것입니다. 저도 이해합니다. 저도 예전에 제가 참 건강한 사람인줄 알았거든요. 저는 처음에 성경 공부를 아주 재미있게 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각종 병든 인간들, 비정상적인 인물들을 탐구하는 재미가 있었거든요. 지금 와서 그 때를 돌이켜 보면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나중에 다시 제대로 공부해보니 전부다 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그 지옥같은 대입 시험 기간을 다 이겨낸 아주 강한 사람들입니다. 스스로도 아마 그렇게 느끼실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너지기 쉬운 상태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저는 내면이 그렇게 무너지는 사람들을 수없이 많이 봐 왔습니다. 이렇게 어렵게 들어온 대학교를 끝까지 마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간혹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극단적인 경우도 보았습니다.


 


이 병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본문에 보면 병든 자와 죄인이 서로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근본 원인은 바로 죄입니다. 죄는 우리 영혼의 바이러스 같은 것입니다. 원인 파악을 잘못하면 문제 해결도 할 수 없습니다. 죄라는 원인 파악에 실패한 다른 처방들은 치유도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들은 기껏해야 진통제에 불과합니다. 심하게 말하면 마약입니다. 고통을 잠시 동안 잊거나 완화시켜 줄 뿐입니다. 선배들이 술을 권하고 술 배우라고 하죠. 다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잊어 버리기 위한 방편을 배우라는 뜻입니다. 게임에 빠져서 가상 현실 속으로 도피하죠. 그러나 잊어버린다고 도피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나요? 또 인본주의라는 사상을 배경을 가진 책들이나 영화와 같은 것을 접하면 잠시 동안 기분은 좋아지죠. 이런 문화는 여러분은 매우 소중한 존재이고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존재라고 마구 띄워줍니다. 그러나 우리 문제는 자존감의 부족, 자기 존중심의 부족 때문이 아닙니다. 과도한 자존감이 이 질병을 더욱 악화시킬 뿐입니다. 죄란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죄가 우리 안에 거주하기 시작하면 가만히 있지 않고 우리 인간성을 파괴하고 영혼을 병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죄는 인간을 탐욕의 노예가 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죄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고 공동체도 붕괴시켜 버리죠. 고독하게 만듭니다. 결국 죽음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치유책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레위에 대한 치유책은 단 이 한 마디이었습니다.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라는 이 부르심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첫째, 공동체로의 부르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레위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신 일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과 제자들 뿐 아니라 다른 세리들과 죄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밥상을 함께 나누는 죄인들의 공동체, 제자들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세리 레위를 맞이하셨습니다. 참된 공동체에는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미 느끼셨겠지만 우리 모임은 평범한 동아리가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진실된 교제가 있습니다. 사랑이 있고 소통이 있습니다. 서로 교제하고 용서하는 가운데 내면의 치유가 일어나요. 우리는 서로가 죄로 인해 병든 사람들이란 걸 압니다. 그래서 죄인이라고 병들었다고 비난하거나 손가락질하지 않습니다. 허물과 실수를 감당하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어떻게 하든지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합니다. 같이 밥 먹는 것 만으로도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둘째, 내면적 가치를 추구하는 삶으로 부르심입니다. 지금까지 세리의 인생 목적은 오직 돈 많이 버는 것, 부자 되는 것, 갖고 싶은 것을 다 갖고 누리는 삶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세리 레위의 삶을 왜곡시키고 비참하게 만든 원인이었습니다. 삶은 무엇인까요? 삶은 계란인가요? 삶에는 그 이상의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육체와 함께 영혼의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영혼이 빈곤한 사람, 영혼이 죽은 사람은 온전한 만족과 행복을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간다고 예수님이 부자 만들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빛이 있습니다. 진리가 있고, 영혼의 풍성함이 있습니다. 이것을 맛보시지 않으면 그 기쁨을 모르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한 번 맛 본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자랑하던 삶이 얼마나 누더기 같은 허접한 삶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셋째, 예수님의 완전한 인간성을 배우라는 부르심입니다. 복음서를 진지하게 읽어 본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에게서 특별함을 느낍니다. 완전한 인간됨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평생 힌두교도로 살았지만 예수님을 자기 삶의 모델로 삼았습니다. 저도 어릴 때 위인전에서 예수님의 전기를 읽고 뭔가 다른 위인들이나 성인들과는 다른 독특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그 완전한 인간성의 깊이와 넓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얼마나 지혜로우신 분이신지 얼마나 거룩한 분이신지... 이 예수님을 알고 배워가면서 우리도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무너졌던 우리의 인간성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세리 레위에게 이 예수님은 누구셨을까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레위에게 예수님은 병든 자기를 찾아 오신 의사셨고,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구원자였습니다. 레위에게만 그럴까요? 아니죠. 바로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에게도 예수님은 의사이시고 구원자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바리새인의 서기관처럼 겉으로 강한 척, 의로운 척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은 다 아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외로운지 아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병들었는지 잘 아십니다. 우리가 어떤 죄인인지 다 아십니다. 우리가 어떤 무너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인지 잘 아십니다.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우면서 예수님이 내미시는 치유의 손길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원래 이런 문제 투성이, 골치 투성이 세상, 죄로 병든 인간들이 득시글 득시글 하는 이곳에 오실 이유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고치시려고 죄로 더러워진 우리를 자신의 피로 깨끗하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길 위에 서 있는 여러분의 삶 한 가운데로 찾아 오십니다. 그리고 나를 따라 와서 나와 함께 하자고 부르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창조의 영광이 충만한 온전한 사람으로 고쳐 주시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의 공동체로 불러 교제하며, 인생의 목적을 바로 잡아 주시고 자신을 배우도록 초청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서 자기 몸에 입은 상처를 통해 우리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의 상처 입은 치유자십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연애 편지입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내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완전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여러 분 모두가 성경 공부를 통해 예수님의 사랑과 완전한 진리를 발견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세리 레위가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신약 성경의 맨처음에 마태 복음이 있습니다. 낳고 낳고 시작해서 모처럼 성경을 읽기로 결심한 많은 사람들에게 수면제로 작용하는 그 마태복음입니다. 그 마태복음을 저술한 사람이 바로 이 세리 레위입니다. 아니 세리 레위가 아니라 지금은 성 마태로 불리웁니다.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이 없었다면 평생 공허한 눈빛으로 세관에 외롭게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로부터 삥이나 뜯다가 죽어 심판 받을 사람이었죠. 예수님은 이렇게 병든 죄인인 그를 부르셔서 성인으로 빚으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지금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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