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이창무 2015. 4. 30. 11:24
반응형

2012년 봄학기 복음서 제 5강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말씀  /  마가복음 2:1-22

▣ 요절 /  마가복음 2:22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으로 영원 전부터 하늘 보좌 가운데 계신 분이셨습니다. 하늘은 어떤 곳입니까? 하늘은 의와 거룩만 있는 곳입니다. 하늘은 언제나 희락과 화평이 넘치는 곳입니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조화를 이룬 곳입니다. 반면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는 천당 아래 분당, 곧 깨어진 땅 위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깨어진 땅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깨어진 땅입니다. 사람과 자연 사이의 관계가 깨어진 땅입니다. 이 땅에는 슬픔과 아픔이 있습니다. 이 땅에는 죄가 있고 죽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저 높고 높은 하늘을 떠나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 땅에 내려 오셨을까요? 하늘이 너무 심심해서 땅 위를 한 번 구경하러 오셨을까요? 천사들의 경배만으로는 부족해서 사람들로부터 경배와 섬김을 받으시려고 오셨을까요? 이 더럽고 악취가 나는 세상을 싹 쓸어 엎어 깨끗이 청소하기 위해 오셨을까요?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늘 보좌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 두 가지로 말씀하여 주십니다.


첫째, 죄사함을 주러 오신 예수님 (2:1-12)


갈릴리 가버나움이란 동네에 중풍병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온 종일을 침상에 누워 지내야만 했습니다. 등에서는 욕창이 나서 살이 썩어 들어 갔습니다. 제 발로 화장실에 갈 수조차 없었고 제 손으로 음식을 입으로 가져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살았으나 죽은 자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중풍병자에게는 네 명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중풍병자를 바라보는 네 명의 친구들의 눈에는 늘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어울려 들로 산으로 뛰어 놀던 벗이 저 지경이 되어 있는데, 멀쩡히 잘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것만 같았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마을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제서야 희망이 생겼습니다. 빛이 보였습니다. 예수님 앞에 이 친구를 데려갈 수 만 있다면, 그 분이시라면 중풍병에서 이 친구를 낫게 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침상에 누이고 네 귀퉁이를 끈으로 단단히 묶고 어깨에 매었습니다. 병자를 매단 채로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땀이 주룩주룩 쏟아지고 숨이 턱 밑에까지 차 올랐습니다. '친구야!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그들이 마침내 집에 도착했을 때 곧 밟혀 넘어질 것 같은 넘쳐나는 인파를 보았습니다. 쥐 한 마리도 집으로 들어가거나 나올 수조차 없었습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순간 약속이나 한 듯 털썩 주저 앉고 말았습니다. 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돌아갈래? 여기서 포기할까?" 잠시 짧지만 깊은 침묵이 흘렀습니다. 다른 친구가 입을 열었습니다. "아니! 그럴 수 없어. 코 앞에 예수님을 두고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어" 그들은 침상을 매고 지붕 위로 올랐습니다. 진흙을 부수고 나뭇가지를 들어 내었습니다. 지붕 한 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생겼습니다. 그 구멍 사이로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아래를 보니 얼굴이 하얗게 질린 한 사람이 보였습니다. 집주인이었습니다. 있는 대로 인상을 쓰고 있는 무리들의 찌푸린 얼굴들도 보였습니다. 비난하는 그들의 손가락도 보였습니다. 집주인에게 정말 죄송했습니다. 집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꽃다운 나이에 중풍병에 걸린 이 불쌍한 친구를 살려야 했습니다. 이 친구를 살릴 수만 있다면 사람들의 비난이나 손가락질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고민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예수님마저 우리를 내치시면 어찌할까?'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통합찬송338장)


네 명의 친구들은 떨리는 맘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쳐다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미소와 눈빛 속에서 '너희들의 믿음이 참으로 대단하구나.' 하시는 음성이 들리는 소리도 없이 마음으로 전달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 우리의 무례함은 보지 않으시고 오직 우리의 믿음만을 보시고 영접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네 친구들의 감사 또한 소리 없이 예수님께 전달되었습니다. 


나는 믿음으로 전도했는데 사람들이 싫어합니까? 나는 믿음으로 초청했는데 양들이 나를 무시합니까? 나는 믿음으로 살려고 했을 뿐인데 친척들과 가족들이 불효자라고 손가락질합니까? 괜찮습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만을 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10:52)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마8:13)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15:28)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약5:15)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받는 고양이가 되시겠습니까? 예수님께 믿음으로 인정받는 호랑이가 되시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께 인정 받았던 중풍병자의 네 친구들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일어나 네 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11)' 네 친구들에게 이제는 그 말씀만 있으면 되었습니다. 이게 웬 일입니까?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5)' 예수님의 입에서 흘러 나온 말씀은 치유가 아니라 죄사함의 선포였습니다. 아니! 죄사함이라구요? 이 사람에게 절실한 것은 중풍병에서 고침 받는 것이 아닐까요? 겉으로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더 절실한 필요가 있습니다. 치유보다 더 앞 선 것이 죄사함입니다. 질병이 어디서부터 왔습니까? 병은 죄로부터 온 것입니다. 세상에 죄가 없었더라면 죽음도 질병도 없었을 것입니다. 죄가 들어 온 후 죽음의 저주가 이 땅에 임하였습니다. 질병은 죽음이 부리는 여러 하수인 중에 하나입니다. 먼저 죄사함을 받아야 병고침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돈이 필요합니까? 나만을 사랑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까? 건강이 필요합니까? 맞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이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심각한 문제는 필요가 채워지지 못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홍수가 나서 다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마25:38,39). 구원의 방주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나 우리 시대 사람들이나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습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죄를 용서 받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르기를 죄는 빚을 지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마6:12).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순종을 그분께 돌려 드리지 못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빚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을까요? 예수님은 우리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들과 같다고 하셨습니다.(마18:24) 일만 달란트는 우리가 16만년을 매일 벌어서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액수입니다. 이 빚을 착한 일을 해서 갚을 수 있나요? 테레사 수녀 정도면 다 갚을 수 있었을까요? 천만에요. 갚기는커녕 날마다 빚이 더 늘어만 갈 뿐입니다. 오늘도 나는 선한 일을 하겠다고 결심을 했었지만 사람을 미워했고 음란했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죄는 내 영혼에 죄책감과 수치심이란 흔적을 남깁니다. 아무리 양심의 입을 틀어 막아도 가슴에 새겨진 죄의식은 주홍글씨처럼 지워지지 않습니다. 빚에 눌린 삶이 얼마나 참혹한 지 아십니까? 정선희의 남편 탤런트 안재환씨가 왜 스스로 죽음을 택했었습니까?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여 떠 안게 된 35억의 빚에 짓눌려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일만 달란트 죄의 짐을 안고 있는 우리 인생에서 이 빚을 해결하는 일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5)"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인류 역사의 가장 위대한 해방 선언입니다. "죄짐을 지고 신음하던 내 아들아! 이제 내가 너에게 죄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을 선언하노라. 너의 모든 채무가 탕감 받았다. 너는 이제 자유다." 신용불량자에게는 채무 이행이 면제되었다는 소식보다 더 좋은 소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 죄만을 짓다가 죄로 심판 받을 수 밖에 없던 우리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기쁜 소식을 우리 가운데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정말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정말 믿을만한 말일까요? 내가 죄사함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나요?" 혹시 이런 의문을 갖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들이 동일한 의문을 품었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사할 수 있다는 말이냐? 무슨 권세로 감히 죄를 용서한다고 함부로 말하느냐?(7)'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저라면 쫄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유만만하시며 역으로 그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9)" 둘 다 사람으로 할 수 없는 말입니다. 둘 다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말입니다. 죄사함을 베푸시는 분은 중풍병자를 일으키실 수 있는 분입니다. 중풍병자를 일으키실 수 있는 분은 죄사함을 베푸실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11)" 그러자 이제껏 누워있던 중풍병자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자기가 누워있던 자리를 들고 성큼 성큼 사람들 앞에서 걸어 나갔습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께서는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는지 그 첫 번째 목적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이 땅에 죄에 얽매여 일생을 죄의 종노릇하다 죽을 우리 인생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2:13-22)


세관에 세리가 한 명 앉아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레위였습니다. 세리 레위는 모두가 다 아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공공의 적이었습니다. 그는 인간 쓰레기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는 중풍병자만도 못한 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중풍병자에게는 네 명의 진짜 친구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한 명의 친구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누굴 원망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자신이 한 일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동족에게서 돈을 뜯어내 로마에 바치고 삥땅 친 돈으로 호위 호식해 왔습니다. 가진 것은 돈 밖에 없었습니다. 사랑도 우정도 진리도 인생의 의미도 목적도 아무 것도 남은 건 없었습니다. 세리 레위도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탈출구가 없었습니다. 그가 앉아 있는 이 한 평 남짓한 세관은 이제 그에게 창살 없는 감옥과 같았습니다.


어느 날 공허한 눈으로 밖을 내다보던 레위에게 예수님이 다가 오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뵙기를 간절히 원한다던 바로 그분이었습니다. 당대 누구보다도 권세 있는 말씀을 전하시고 수많은 기적을 행하신 선지자로 알려진 바로 그분이었습니다. 레위도 보고 싶었지만 감히 가까이 갈 수 없던 그분께서 자신을 향해 오실 때 레위의 가슴은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따르라(14)." 처음에 레위는 자기 귀를 의심했습니다. '세상에 도대체 나 같은 자를 제자로 삼으려는 선생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레위는 눈빛으로 예수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선생님! 제가 제자가 되면 선생님의 명성에 큰 먹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제자가 되면 선생님의 다른 제자들이 싫어할 것입니다. 저는 도저히 자격이 되질 않습니다." 예수님도 눈빛으로 레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레위야, 아무 걱정 하지 마라. 너는 그저 나만 믿고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나는 이미 너의 지난 모든 과거의 죄들을 용서했다.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이제 너는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내 제자가 될 것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결코 너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너를 반드시 변화시켜 새 사람이 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레위는 그 자리에서 세리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 이 한 마디와 레위의 즉각적인 순종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돈만 알던 추한 삶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고상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변했습니다. 고독에 찌든 인생에서 친밀한 사귐이 풍성한 삶으로 변했습니다. 세관에 앉아 비자금 장부를 기록하던 손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인 마태복음을 기록한 손으로 변했습니다. 돈을 뜯어 내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던 발이 사람을 살리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땅 끝으로 향하는 발로 변했습니다. 죄인 세리 레위가 인류의 스승 성 마태로 변했습니다. 


세리 레위는 자신이 거룩하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꿈인지 생시인지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이 예수님을 동료 세리들에게 소개해 주고자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그 초대에 응하셨습니다. 비스듬히 기대어 누우신 채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친밀한 식탁의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죄인들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있더니 죄인들이 웃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에 울고 웃는 죄인들의 천국 잔치가 열렸습니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못마땅하게 째려 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제자들에게 와서 넌지시 따져 물었습니다. "왜 너희 스승은 저런 상종 못할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며 자신을 더럽히고 있느냐?(16)"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7)" 중풍병자는 밖으로는 병자였지만 속으로는 죄인이었습니다. 세리 레위는 밖으로는 죄인이었지만 속으로는 병자였습니다. 서기관들은 밖으로는 건강하고 의인이었지만 속으로는 병자이고 죄인이었습니다. 누가 가장 심각합니까?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롬3:10) 하나 같이 다 죄인이고 하나 같이 다 죄로 인해 깊이 병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두 번째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병을 고치실 수 있습니까?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가져가셨습니다. 대신 자신의 의와 거룩을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상처와 질병을 가져가셨습니다. 대신 자신의 능력과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저주를 받으셨고, 죄 많은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으셨고, 죽어야 할 우리는 살아났습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치유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신 주님이십니다.


저도 예수님에게서 용서받고 고침을 받은 죄인입니다.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제가 지난 과거에 죄에 깊이 병들어 방황하던 시절을 속속 들이 다 알고 계신 한 분 계십니다. 바로 저의 일대일 목자님이셨던 이 에스더 사모님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에스더 사모님만 보면 제가 과거 얼마나 뼈 속까지 죄에 물들어 못 쓰게 되었던 죄인이었던가 새록 새록 생각이 납니다. 사모님을 힘들고 마음 아프게 했던 일들이 떠오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만든 나의 완악함과 죄악들이 떠오릅니다. 지금까지 이런 저를 길이 길이 오래 참으시고 또 참아주신 예수님의 사랑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늘은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 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찬304장)


예수님은 이 슬픔 많고 죄 많은 땅에 참 기쁨을 주러 오신 혼인집 새 신랑이 되십니다(19).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그림자가 뒤 덮은 이 땅에 넘치는 생명의 능력으로 임하신 새 포도주가 되십니다(22). 이런 기쁨과 생명력을 누가 누릴 수 있습니까?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처럼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세리 레위처럼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새 가죽 부대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죄인을 부르시러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믿음과 순종으로 나아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죄사함과 치유를 체험하는 복된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012.4.21 이창무)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