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제자양성 제 5 강 (♬ 461. 십자가를 질 수 있나)
복음 신앙과 제자도
말씀: 마가복음 8:27-9:13, 9:30-32, 10:32-34
요절: 마가복음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라는 프랑스의 사진작가가 있습니다. 브레송은 '결정적 순간'이라는 말로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그는 사진이란 일상 속에서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여 담아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에도 전반부와 후반부를 가르는 결정적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에서 제자들은 그 결정적 순간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질문하시고, 제자들의 말을 통해 이를 확인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이를 기초로 복음 신앙과 제자도에 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도 오늘 말씀을 통해 복음 신앙을 배우고 제자도의 기본자세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1학기 기말 시험 문제를 내셨습니다. 첫 번째 시험 문제는 객관식 문제로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문제였습니다. 제자들은 얼마 전 전도 여행을 다니면서 많은 정보를 수집했기 때문에 이 질문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라고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회개와 하나님 나라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은 세례요한의 후계자로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불같이 뜨겁게 메시지를 전하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볼 때 엘리야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냥 막연하게 선지자 중의 하나로 했습니다. '군맹무상'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장님 여럿이 코끼리를 만진다는 뜻입니다. 한 장님이 코끼리의 다리를 만져보더니 이것은 나무라고 했습니다. 다른 장님은 코끼리의 귀를 만져보고는 이것은 부채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장님은 상아를 만져보고는 이것은 창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부분적으로만 경험해 보고 각자 자기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의견은 분분했지만 그래도 뚜렷한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이 정도의 인정과 평가를 받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견해는 예수님을 만족시키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만큼은 사람들보다 더 나은 견해가 있으리라고 기대하셨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무리들과 구별하여 제자들에게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주셨고, 바람과 폭풍을 잠잠하게 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서 항상 함께 하면서 예수님의 인격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체험했습니다. 아무리 둔한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이 정도면 예수님이 진정 누구신지를 알만한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두 번째 시험 문제를 주관식으로 출제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 베드로가 즉각 부저를 누르고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정답이었습니다. 역시 베드로는 수제자다웠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나도 맞출 수 있었는데 아깝게 부저를 조금 늦게 눌렀다며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어 메시아라는 말을 헬라어로 번역한 말입니다. 곧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셔서 구별해 내셨다는 표지였습니다. 주로 왕이나 제사장을 세울 때 그들의 머리 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왕은 백성들을 원수로부터 구원하고 공의와 평화로 다스리는 역할을 부여 받은 직분이었습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백성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도록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왕과 제사장들은 역사적으로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왕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나라를 다 망쳐놓고 이방나라들의 포로가 되도록 만든 장본인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은 안중에 없고, 오직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기득권 집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은 탄식하고 고통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서 한 구원자이자 왕을 그들에게 보내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친히 기름 부으실 자입니다. 그래서 결코 실패하지 않고 구원을 완성할 자였습니다. 바로 메시아 곧 그리스도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약속을 근거로 어서 그리스도가 오셔서 구원과 해방과 평화를 가져다주실 것을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해왔습니다. 그러므로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당신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약속하셨고 오랜 세월 우리가 기다려 왔던 바로 그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자이자 왕이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을 한 장소가 빌립보 가이사랴입니다. 이 지명은 각각 헤롯 빌립의 이름과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이름에서 하나씩 따온 것이었습니다. 헤롯왕은 그 지역에서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었고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제국에서 구세주로 칭송받는 인물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이 장소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세상이 뭐라 해도 나의 구원자는 예수님이시요 내가 경배하고 섬길 왕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신앙고백이 제자도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첫째로 오직 제자만이 예수님을 깊이 알고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습니까? 흔히 예수님을 인류의 사대성인 중 한 사람이며 기독교의 창시자로 알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혁명가, CEO, 교육자, 철학자, 시인, 외계인 등등 다양한 견해들이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 계몽사에서 나온 12권짜리 위인전기 중 한 권으로 예수님을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기를 읽고 저는 예수님이 위대한 마법사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복음서를 읽고 특별히 산상수훈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간디는 예수님의 가르침야말로 모든 윤리 사상 중의 최고의 윤리라고 인정했습니다. 그의 비폭력 저항 운동의 모티프도 여기에서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여러 견해들이 있지만 예수님을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로 본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안티 크리스천들도 기독교와 교회를 마구 공격하면서도 신기하게 예수님 자체를 욕하고 헐뜯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Jesus Christ Superstar'라는 브로드웨이의 유명한 뮤지컬 제목처럼 예수님은 온 인류의 슈퍼스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님을 높게 평가한다 해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예수님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좋아하고 심지어 존경하기까지 하면서도 진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모르는 것일까요? 이는 그들이 예수님에게 관심을 있을지언정 삶으로 예수님을 따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스타에 열광하는 팬이지 제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와 교제 속에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직 제자만이 예수님의 참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열두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다 알고 나서 따랐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를 따르라'하시니 순종해서 그냥 따랐습니다. 그런데 따르다 보니 어느새 이분이 그리스도이심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안전하게 그저 멀리서 예수님을 지켜보려고만 하면 결코 예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모험을 감수하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될 때 비로소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갈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오직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제자만이 예수님과 깊은 관계성을 맺을 수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은 제자 훈련의 전환점이요 분수령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양성 제 1학기는 이 고백을 목표로 달려온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 고백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더 이상 2학기 진도를 나가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에게 이 고백이 왜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스승과 제자이기 이전에 먼저 구주와 죄인으로서 관계를 맺어야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단지 스승 정도로만 안다면 예수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간직하고 실천하면 그만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 삶의 모범으로 여기고 예수님을 잘 본받으면 됩니다. 맞습니다. 이것이 스승과 제자의 올바른 관계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과 스승과 제자, 그 이상의 깊은 관계성을 맺기를 원하십니다. 무엇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요 왕으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왜 이런 만남이 필요합니까? 예수님이 온 인류의 구원자이시자 왕이시라는 이 사실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제자들은 장차 사도가 되어 온 세상에 다니며 이 복음을 전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경험해 보지도 못하고 고백해 보지도 못한 복음을 어떻게 세상 만민에게 증거하며 전파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남의 이야기 하듯이 전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주 예수께서 나를 구원하셨으니 여러분도 구원 받기를 원합니다.'라는 자세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만나 은혜와 감격이 내 안에 있어야 제자는 복음 전파자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예수님을 따르다보면, 제자들의 삶에는 수없이 많은 시련과 위협, 아픔과 고난이 있을 것입니다. 단순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성만으로는 이런 일들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언젠가는 예수님과의 관계에 금이 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원자로, 내 스스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한계상황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나를 건져내신 분으로 만났을 때, 믿음으로 이런 고난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경배 받으시기 합당하신 왕으로 영접한 제자만이 모든 충성과 헌신을 다해 절대적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제자도가 약해지고 주님께 대한 충성과 헌신이 희미해져 갈 때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그 바탕에는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시요 나의 왕으로 고백했던 그 신앙 고백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마치 부부 사이에 결혼 서약을 잊어버리고 사랑고백이 사라지면 권태기가 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그리스도십니다. 나를 죄와 죽음에서 건져내신 구원자시며 나의 모두 충성과 헌신을 다 바칠 왕이십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신앙고백을 날마다 새롭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이 고백을 기초로 복음 전파자가 되고 끝까지 신실하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기초로 자신이 그리스도로서 겪어야 할 사역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예수님은 반드시 고난을 받고, 버린바 되고, 죽임을 당하고, 살아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말씀했을까요? 예수님이 고난 받고 버린 받고 죽임 당하셔야만 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을 대신하여 속죄를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서 53장 5절은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의 대속적인 고난이 없이는 우리의 죄가 결코 제거될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 대신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버림받고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그런 후에야 예수님은 죄로 죽을 인생들이 장차 얻게 될 부활 생명의 첫 열매가 되시기 위해 사흘 만에 살아나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그 후의 부활, 이것이야말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제자들에게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른다는 성서적 메시아 관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반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옆으로 모시고 가서 항변했습니다. 항변했다는 말은 꾸짖었다는 말입니다. “주님, 이제부터입니다. 그런데 지금 돌아가시다니요. 죽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양들 앞에서 이런 어리석은 말은 입에 담아서는 안 되지요.” 베드로가 왜 이렇게 심하게 반발하는 것입니까? 이는 베드로의 메시아 관이 예수님의 메시아 관과 정면으로 충돌했기 때문입니다. 성서적 메시아 관은 유대민족 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온 인류를 구원하는 보편적 메시아 관입니다. 또한 인생의 근본 문제인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고난의 메시아 관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메시아관은 민족적 메시아 관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고난 받는 동족을 생각하면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가족과 직장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은 예수님이야말로 고난 받는 동족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시고 이스라엘을 회복할 메시아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민족적 메시아사상은 당시 모든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것이었습니다. 또한 베드로의 메시아 관은 영광의 메시아 관이었습니다. 메시아는 모든 원수들을 다 이기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환영받는 강력하고 영광스러운 메시아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메시아가 고난 받고 버린바 되고 죽임을 당한다니 베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마지막에 부활이라는 말은 아예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만의 메시아 관에 사로잡혀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33). 예수님과 수제자 베드로 사이에 서로 공개적으로 책망하는 민망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조금 전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베드로가 졸지에 사탄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제자와 사탄 사이는 백지 한 장 차이였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베드로라는 한 인간과 싸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배후에 역사하는 사탄과 영적 싸움을 싸우시는 것입니다. 이 영적 전쟁은 베드로의 마음에 역사하는 인본주의와의 싸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더 앞세우는 인본주의는 복음의 원수이기 때문에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수제자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에 놀라시고 특별교육을 하셨습니다. 34절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씀은 특별한 부름을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자라면 누구나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첫째로,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 부인이 무엇입니까? 이를 위해 우리는 자기부인이 의미하지 않는 것부터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자기부인은 결코 자기 말살이나 자기 비하가 아닙니다. 여기서 부인해야하는 자기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일을 방해하는 자기입니다. 이런 자기는 본래 창조된 내가 아니라 타락한 나, 바울의 표현에 따르면 육신입니다. 내가 만약 창조된 그대로의 나라면 예수님 따라가기를 즐겨했을 것입니다. 부인해야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기가 있습니다. 이런 자기의 특성은 사람의 일만을, 특히 자기의 일만을 생각합니다. 자기를 최우선,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이는 한마디로 왕이 되고 싶은 자기입니다. 자기감정, 자기기분, 자기이익에 거스르는 그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자기 일이 급하거나 기분이 안 내키면 예배도 안 나옵니다. “말씀에 순종해야지” 그러면 “하기 싫은데요! 강요하지 마세요” 그러면 끝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다가도 자기생각, 자기 꿈과 맞지 않으면 자기를 부인하기보다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그러고는 왜 예수님이 나를 부담스럽게 하고 괴롭게 하느냐고 따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차마 예수님께 할 수 없으니 목자님만 괴롭게 합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를 고집해서는 도무지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우리 내면의 자기중심성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소감을 쓰면서 자기와의 싸움을 하게 됩니다. 소감을 쓰면서 말씀을 묵상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뜻과 대립하는 자기 생각, 자기 뜻이 드러납니다. 이때 자기에 대해서 No하고 하나님께 대해서 Yes하는 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소감을 잘 썼다는 말은 곧 자기 부인을 했다는 뜻입니다. 요즘 학생 제자들이 매주 금요 소감 발표에서 이렇게 말씀 앞에서 자기 부인하려고 투쟁하는 모습을 보게 되어 너무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가 날마다 말씀 앞에서 자기 부인을 배우고 복음적인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는 과연 무엇일까요? 어떤 절에서 관청으로부터 어려운 허가를 받아야 할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스님들이 모여서 누가 대표로 가서 허가를 받아올 것인가를 오래 논의했지만 아무도 나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 스님이 벌떡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가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스님도 십자가를 진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힘든 일을 한다고 다 자기 십자가는 아닙니다.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을 합니까? 또한 권세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합니까? 대부라는 영화를 보니까 마피아의 두목이 되기 위해서도 수많은 고난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35절 말씀을 볼 때 자기 십자가는 주와 복음을 위해서 고난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속죄의 십자가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속죄의 십자가는 예수님만이 홀로 지고 가실 수밖에 없는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는 속죄의 십자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참여의 십자가도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0절,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여기서 바울은 그분의 고난에 참여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면서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한 자만이 예수님의 부활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참여함으로서 예수님과의 온전한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과 별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모든 것을 다 알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감당하고자 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까? 주와 복음을 위해 매도 맞고 돌도 맞고 파선도 당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온갖 비난을 듣고 죄수로 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고난을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를 통해 곳곳에서 수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듣고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자신의 고난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에 참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제자는 제자가 아닙니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 회퍼는 그의 저서 ‘나를 따르라’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는 값비싼 은혜를 누려야 한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고난 없는 은혜, 부담 없는 은혜만 누리고자 합니다. 그런 은혜는 값싼 은혜입니다. 천박한 은혜, 싸구려 은혜입니다. 값비싼 은혜, 명품 은혜는 주와 복음을 위해서 십자가를 질 때 얻어집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십자가를 질 때 그때 복음의 진수를 맛보게 됩니다. 마침내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우리가 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되는가를 부연 설명해 주십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의 목숨은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하고 고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생명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기 못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자 하는 것은 결국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봐야 때가 되면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에는 영적 생명까지도 잃게 됩니다. 그러나 한 번 밖에 없는 고귀한 목숨을 주와 복음 역사를 위해 살 때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됩니다. 정말 나의 생명을 귀하게 여긴다면 우리는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또한 음란하고 죄 많은 이 세상은 십자가의 길을 용납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부끄러워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부끄러워하게 되면 장차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영광의 주, 심판의 주로서 오실 때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나는 너를 모르겠다” 하시면 정말 끝장입니다.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로부터 부인을 당하는 것보다 지금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는 것이 천 배, 만 배 더 낫지 않겠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인격과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를 기초로 우리는 복음신앙이 무엇인가를 정의할 수 있습니다. 복음신앙이란 한 마디로 예수님이 나의 구주요 왕이심을 고백하는 것이요, 예수님께서 성경대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신앙을 날마다 우리 입으로 고백하고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복음신앙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복음적인 삶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복음 신앙은 빛을 잃고 맙니다. 오늘날 신앙과 삶이 분리된 신자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불신자들 중에서 모독을 받고 있습니다. 복음적인 삶이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게 됩니다. 이때 우리 마음에는 참된 기쁨과 은혜와 평강과 확신이 차고 넘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복음신앙 위에 견고하게 뿌리를 박고, 또한 우리 삶이 그리스도를 배우고 본받는 복음적인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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