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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설교/마가복음 2016.10.02 13:26

    예수님의 제자양성 제 4강 (찬송: 515장)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말씀: 마가복음 6:1-8:21 (교독 : 6-13, 30-52)

    요절: 마가복음 6:37a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리는 지난 주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에 대한 자세와 예수님께 향한 믿음에 관해 제자들을 훈련하신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두 가지 훈련은 제자도의 가장 기본이 되는 훈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그 다음 단계로 제자들에게 전도 훈련, 목자 훈련을 시키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셨고 양들의 선한 목자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도를 배우기 위해서 이 두 가지 코스는 필수 훈련 코스라 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제자들의 성장을 위해 둔해도 너무 둔한 그들의 영적 감수성을 업그레이드하도록 도전하셨습니다. 우리도 오늘 말씀을 통해서 또 실제적으로 현장에 나가서 전도 하고 양들을 섬기는 가운데 목자 예수님의 심정과 믿음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후 처음으로 고향에 내려가셨습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이 얼마나 빼어난 말씀의 종이요 능력 많은 하나님의 사람인지는 다른 지역에서 이미 충분히 입증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고향에서는 얼마나 더 큰 환대를 받게 될지 제자들의 기대가 컸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지혜와 권능에 크게 놀랐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반응이 나와야 할까요? 당연히 우리 고장에서 큰 인물이 났다고 기뻐하고 예수님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고향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예전에 고장 난 우리 집 문짝을 고쳐주었던 그 청년이 아니냐?”하면서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아는 것이 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인간조건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의 진면목을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또 내가 알던 평범한 사람이 나보다 더 뛰어나고 대단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고향 사람들에게 이런 무시와 배척을 당하실 줄은 전혀 몰랐기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셨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이 사건을 성경에 기초해서 해석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고향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는 일은 늘 있어왔습니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두루 다니시며 말씀을 가르치시기로 방향을 잡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배척하는 고향 사람들과 끝까지 논쟁을 해서 담판을 지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은 컸지만 인간적인 정에 연연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은 넓고 전도할 곳은 많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한 배척을 다루시는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배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복음 역사를 섬기는 사람이 가까운 사람에게 얼마든지 배척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과 여기에 너무 매이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찾아 전도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해외에 선교사로 나가는 사람을 보고 ‘아직 자기 가족도 구원하지 못했으면서 뭐 하러 그렇게 먼 곳에 나가서 선교를 하려고 하느냐?’며 힐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족을 먼저 다 구원한 후에 선교를 하려고 하면 아마 죽을 때까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전도는 가족 전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은 복음 자체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우리의 인간 조건이 더 먼저 눈에 들어오기 쉽기 때문입니다. 철없던 막내가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 형님! 예수님 믿고 구원 받아야 합니다.’고 하니 ‘감히 네가 나를 개종시키려 드느냐?’하면서 가족들이 화부터 내곤 합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 아닙니다. 예로부터 늘 그래왔고 당연히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리고 아직 때가 아니구나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양으로 삼아 복음 전파에 힘쓰면 됩니다. 가족들을 계속 살피고 기도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분들의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복음이 들어갈 준비가 갖추어 지는 때가 옵니다.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도 예수님을 오해하여 집으로 납치해 가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야고보서를 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아울러 배척 받는 것은 본격적인 전도 훈련을 앞둔 제자들에게 마음 준비가 되었을 것입니다. 전도는 배척 받는 일에 익숙해 지지 않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전도가 힘든 것은 배척 받을 때 마음이 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전도하다가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생들로부터 철저히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배척을 이기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심으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제자란 예수님께서 가신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제자로서 복음 때문에 무시 받고 배척 받는 일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무시와 배척을 극복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림으로 진정으로 영광스러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까지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예수님을 보고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배운 바를 실습해 보도록 하셨습니다. 실습 방법은 자립적으로 전도하는 훈련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시때때로 예수님께 책망만 듣는 제자들이 어떻게 전도를 하고 누굴 도울 수 있을까 싶습니다. 현재 제자들의 상태를 보면 아무래도 너무 무리한 시도가 아닐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과감하게 제자들을 전도하도록 내보내셨습니다. 왜냐하면 백 번 강의를 듣는 것보다 한 번 직접 해 봄으로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전도 훈련을 통해서 제자들이 무엇을 배우길 원하셨을까요?


    첫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동역하는 법을 배우길 원하셨습니다. 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기왕 전도할 바에야 한 지역에 한 명씩 보내시면 더 많은 지역을 전도할 수 있었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두 명씩 가도록 하셨을까요? 이는 서로 동역하는 법을 배우도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독불 장군 식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둘 이상의 사람이 모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합심하고 동역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고 누구에게나 그 사람에게 주신 독특한 하나님의 은사가 있습니다. 동역하는 사람이 있어야 내 약점을 메꾸어 줄 수 있습니다. 각자의 은사가 모아지고 합쳐져야만 하나님의 역사를 풍성하고 균형 있게 섬길 수 있습니다. 동역이 전혀 안 되는데 복음 역사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하는 말을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합심하고 동역하는 곳에서만이 복음은 자라고 열매를 맺습니다. 이와 같은 동역의 중요성은 우리가 전도를 하면서 더욱 절감하게 됩니다. 혼자 전도하러 가면 주눅이 들어서 말 한 마디 꺼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설령 용기를 내어 전도를 한다 하더라도 계속 혼자 말해야 한다는 것이 큰 부담입니다. 또 만약 양이 거절하고 떠나가면 그 허전한 마음을 누가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전도 파트너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옆에서 웃고 서 있기만 해도 힘이 부쩍 부쩍 납니다. 제자들이 이때 동역의 중요성을 배웠기 때문에 사도행전에서도 합심 동역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베드로는 한 때 경쟁자였던 요한과 함께 동역하여 예루살렘 교회를 세웠습니다. 능력 많은 사도 바울도 처음에는 바나바와 동역을 했고 후에는 실라와 함께 동역을 했습니다. 우리도 전도하려면 전도 파트너가 필요합니다. 이번 가을 학기에 각자 나의 전도 파트너를 한 명 씩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나는 아직 어려서 전도하기에는 너무 일러 하는 사람도 파트너와 짝이 되어서 같이 나가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양을 못 얻는다 해도 함께 커피 마시고 기도하고 교제한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 가을학기 캠퍼스 곳곳에서 전도 파트너와 함께 전도 데이트를 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둘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악한 영들과 싸우는 법을 배우길 원하셨습니다. 7절 하반절과 1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어떤 사람은 ‘21세기에 무슨 귀신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인 마귀가 있으며 그가 부리는 졸개들인 귀신이 있다고 증언합니다. 우리가 이를 강의실에서 공부할 때나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면서 실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도를 하다 보면 이것이 정말 그렇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전도를 하려고만 하면 이상하게 이를 방해하려는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전도자가 한 영혼을 구원하고 온전케 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그 사람을 붙들고 있는 영적인 어둠의 실체를 마주치게 됩니다. 그 어둠의 세력이 한 사람을 놓아주지 않으려고 움켜쥐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이때 전도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위로부터 권세가 임해야만 악한 영들과 싸워 물리칠 수 있습니다. 이 권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으로부터 나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한 제자만이 더러운 귀신들을 물리치고 한 영혼을 건져 내는 생명 구원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물질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길 원하셨습니다. 8절부터 10절을 보십시오. 여기서 예수님은 참 이상한 방향을 주십니다. 보통 여행을 갈 때는 커다란 캐리어 가방 안에 갈아입을 옷부터 시작해서 손톱깎이까지 온갖 것을 바리바리 다 싸들고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지팡이와 신발 외에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도록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거 뭐 실탄(돈)이 있어야 일을 하지.’라고 말하곤 합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돈이 있어야 전도를 하지. 돈이 없는데 어떻게 선교를 합니까?’ 라고 어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전도 여행을 위한 여비를 따로 챙겨가지 말도록 명하셨습니다. 이는 전도와 선교에 물질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교를 하려면 물론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눈에 보이지 물질에 모든 것이 달린 것처럼 여기는 사람이 되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필요한 물질을 공급해 주실 줄 믿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 것과 그렇게 살고 실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전도 여행을 통해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해 보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저는 지난여름 모스크바 수양회를 다녀오면서 현지 선교사님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선교사님들 대부분이 처음 모스크바에 올 때 간단한 인사말 외에는 아는 러시아어가 하나도 없었고 수중에는 6개월 살면 바닥이 날 돈 밖에는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선교지에 나오셨습니다. 한편으로 물질 자립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몰려오는 양들을 신나게 제자양성 하셨다고 합니다. 이분들 중 아무도 굶어죽지 않았습니다. 이제 모두 다 자리를 든든하게 잘 잡으셨고 자녀들도 훌륭하게 성장했습니다. 이런 믿음의 체험이 있기 때문인지 여러 선교사님들이 이제는 또 다른 곳에 가서 개척할 마음이 있으신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생생하게 체험하길 원한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전도와 선교의 현장으로 달려 나가야만 합니다. 




    그러면 제자들의 전도 여행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30절을 보십시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전도 여행으로 인해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나고 복음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났습니다. 선교 보고를 하는 제자들의 마음에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하지만 몸은 고된 여행으로 인해 녹초가 되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무리들이 예수님 일행을 가만히 놔두질 않고 모처럼 온 휴가지까지 따라왔습니다. 제자들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제자들과 달랐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무리들은 이제까지 탐욕스러운 정치 지도자에게 착취당하고 권위적이고 율법적인 종교 지도자들에게 무시당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들을 보실 때 예수님은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오죽 했으면 염치 불구하고 여기까지 따라왔을까 싶어 그저 불쌍하고 안타까운 심정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끝이 날 줄 몰랐습니다. 결론적으로 하시더니 다시 끝으로, 마지막으로, 다시 말하자면 하시면서 말씀은 계속 되었습니다.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지고 날은 저물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참다못해 예수님께 나와 제안했습니다.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먹게 하옵소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딱 여기까지니 이제 그만 합시다. 할 만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명하셨습니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6:37a)" 제자들은 당황했습니다. 이 무리들을 먹이려면 최소한 이백 데나리온의 돈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호주머니는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설령 그만한 돈이 있더라도 이곳은 빈들인데 어디서 음식을 구해올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도 이 사정을 모르실 리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에게 이런 명령을 하셨을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도 양들을 불쌍히 여기는 목자의 심정과 책임감을 배우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양이 없을 때는 전도해서 한 양을 얻으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또 양이 있으면 있는 대로 고민이 생깁니다. 양이 있어서 쉬고 싶어도 쉬지 못할 때가 있고 양의 문제를 알면 알수록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지 부담감이 점점 커집니다. 차라리 양을 보내어 자기 문제는 자기가 스스로 해결하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 예수님은 끝까지 양들을 사랑하시고 어떻게 해서든지 양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내 형편, 내 상황을 챙기기보다는 다만 양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돕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목자의 심정이 제자들에게도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목자의 심정과 책임감이 있다고 해도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양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목자의 심정과 책임감만큼 목자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한 단계 더 나갈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있는 것을 가져오도록 하셨습니다. 탈탈 털어보아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를 축사하신 후에 모인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오병이어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거두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이 사건이 제자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양을 먹이는 키우는 일은 오롯이 제자들의 몫이 아니라 실은 하나님께서 친히 먹이고 키우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없는 것을 만들어 내라고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제자들이 그들에게 이미 있는 것을 가지고 나와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동참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목자에게 필요한 것은 양들을 향한 상한 목자의 심정과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신다는 믿음, 이 두 가지입니다. 후에 베드로는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베드로에겐 은과 금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긍휼의 마음과 예수 이름 권세에 대한 믿음만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베드로는 오병이어 사건에서 예수님께 배운 것을 그대로 행했을 뿐이었습니다.


    전도하고 양을 섬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부담이 되고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이 일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세우신 제자 학교의 커리큘럼 가운데 전공 필수 과목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전도와 목양 훈련을 통해 복음과 예수님에 대해 실제적으로 깊이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 훈련을 통해 동역을 배우고 영적 전투를 배우고 물질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목자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 그 이름의 능력과 권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를 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대학교 3학년 때를 꼽을 수 있습니다. 저는 2학년 여름수양회 때 예수님을 만나고 그 해 겨울 방학 창세기 특공대를 통해 복의 근원으로의 부르심을 영접했습니다. 그 감격과 기쁨 때문에 아직 아는 것도 없고 미숙했지만 3학년 내내 캠퍼스 곳곳을 누비며 전도를 하고 양들과 일대일을 했습니다. 제 첫 양은 영문과 신입생이었습니다. 실은 이 양은 얼굴이 복학생처럼 보여서 제쳐두고 그 옆에 있던 사람에게 전도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사람은 거절을 했지만 복학생처럼 보이던 그 양이 옆에서 듣다가 내가 하면 안 되겠느냐고 먼저 말을 하는 바람에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저는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는 말의 의미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또한 양들을 도우면서 이리 저리 반발하고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는 양들을 보며 힘 들면서도 깨닫는 것이 있었습니다. 양들의 모습 속에서 바로 제 자신이 있었습니다. 죄인인 나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으시고 감당해 주셨는지를 생각하니 하나님의 사랑이 물밀듯이 넘치게 흘러 들어왔습니다. 제가 부족한대로 전도하고 양들을 섬기지 않았더라면 체험하지 못했을 일들을 그때 경험했습니다. 요즘 안타까운 일들 중 하나는 많은 학생들이 한 명의 양을 전도하고 일대일로 섬겨 본 경험이 없이 졸업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공부를 통해서 많이 배우지만 또 자신이 직접 한 사람을 도우면서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은혜가 큽니다. 그런데 이 기회를 놓치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많은 사람을 도울 수는 없을지라도 한 명의 양이라도 돕고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양들에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고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친히 오천 명의 무리를 보내시는 동안 제자들은 먼저 배를 타고 서둘러 건너편 뱃세다로 가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바다 한 가운데서 힘겹게 노를 젓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 제자들 곁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인줄 알아보지 못하고 '유령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안심시키시고 배에 올라가셨습니다. 왜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심히 놀랐을까요? 52절에 보면 이는 그들이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다고 하였습니다. 떡 떼시던 일 곧 오병이어 사건과 물 위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일과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실 수 있는 분이 물 위로 걸어오실 수가 없으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전자를 행하실 수 있다면 당연히 후자도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오병이어는 오병이어, 물 위로 걷는 것은 걷는 것, 이렇게 두 사건을 별개로 생각하고 연결 짓지를 못했습니다. 이런 일은 이때뿐이 아니었습니다. 8장에 보면 칠병이어로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 나옵니다. 이때 제자들이 오병이어 사건 때처럼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불과 얼마 전 오병이어 사건을 경험을 했으니 이번에는 ‘주께서 친히 먹이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제자들은 무리 숫자가 천 명이 줄어서인지 그 때는 그 때이고 지금은 지금이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또 8장 14절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떠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떡을 챙기는 것을 깜빡하여 떡 한 개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누룩이란 영향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바리새인들과 헤롯으로부터 영향력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누룩 하니까 누룩으로 발효시키는 떡이 생각났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왜 떡을 미리 안 챙겨왔냐고 제자들을 책망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동안 오래 참으셨던 예수님도 더 이상 제자들의 엉뚱한 소리를 듣기 힘 드셨던지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그리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칠병이어로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기억해 보도록 하셨습니다. 이런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 분이 지금 배 안에 떡이 없는 것을 걱정하고 계시겠습니까? 예수님은 떡 하나로 얼마든지 열두 제자를 배불리게 먹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를 가르쳐 주면 둘을 깨달으면 좋겠는데 하나를 가르쳐 주면 하나를 잊어버리는 것이 제자들의 현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영적인 감수성을 개발해야 합니다. 영적인 감수성은 한 가지 사건을 통해 거기서 영적인 원리를 발견하고 이를 다른 사건에도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건 그 때 일이고 지금 일은 지금뿐이라고 여기고 둘을 서로 연결시키지 못하면 영적 감수성이 둔한 것입니다. 믿음의 시각으로 상상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깊이 생각할 때 우리의 영적인 감수성은 업그레이드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도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아 그때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끝나고 맙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발견하고 그 하나님께서 현재 나에게 어떤 분이 되시고 어떻게 역사하실 분이신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말씀 뿐 아니라 과거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배울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고 상황이 바뀐다 하더라도 과거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은 현재에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안암 센터의 지난 40년 동안 캠퍼스에 전도하고 양을 섬기고 선교사를 세계 각국에 파송하는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과 능력과 경륜을 나타내셨습니다. 현재 우리 앞에는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과제들이 많이 주어져 있습니다. 시대도 변했고 양들도 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저께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제자도의 원리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믿음의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민감한 영적 감수성으로 과거로부터 배운 바를 토대로 새 역사를 창조해야 할 시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둔한 마음을 일깨워 주시고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가을학기 제자양성 공부를 통해 그리스도의 제자도를 잘 배워고 실천하여 이 시대 가운데 새롭게 역사하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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