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이창무 2018. 8. 13.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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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마가복음 22강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말씀 / 마가복음 11:27–12:17

요절 / 마가복음 12:17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최근 국군기무사의 계엄령 문건이 드러나서 우리 사회의 뜨거운 이슈가 되었습니다. 한편에서는 이 문건은 쿠데타의 실행 계획이 틀림없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단순하게 사회 혼란에 대한 대비책을 검토해 본 것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특별조사단의 조사 결과가 나오면 밝혀질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쪽이든 쿠데타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쿠데타는 프랑스어로 특정 세력이 무력으로 정권을 전복하고 비합법적으로 통치권을 장악하려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포도원의 비유가 바로 이 어떤 쿠데타 시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존재이며,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에게 행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의 자세를 새롭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1장 2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다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이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주요 구성원들로서 공식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여기서 이런 일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런 일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신 사건을 가리킵니다. 아무 권위도 없이 누가 감히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권위는 오직 산헤드린 공회만이 부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께 어떠한 권위도 부여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기에 감히 이런 일을 저질렀냐며 따지러 온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29절과 3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답을 주시는 대신 도리어 그들에게 반문하셨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예수님께서 왜 갑자기 요한의 세례의 출처 문제를 끄집어 내셨을까요? 답변이 궁색해지자 말 돌리기를 시도하시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요한이 왜 세례를 베풀었습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할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를 인정하게 되면 예수님에게 권위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싶지 않으니 요한의 세례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요한의 세례는 사람으로부터 왔다고 간단히 답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모든 백성들이 세례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참 선지자로 믿고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33)" 그들이 고심 끝에 마침내 내놓은 대답치고는 너무 싱거웠습니다. 비겁하게 대답을 회피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은 나도 답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을 통해서 사실상 그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주셨습니다.


12장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여우가 들어와서 포도나무를 짓밟지 않도록 산울타리를 둘렀습니다. 포도주를 쉽게 제조할 수 있도록 즙 짜는 틀도 만들었습니다. 망대를 지어서 포도 서리하러 오는 도둑들을 감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주인은 포도원에 필요한 일체의 시설을 완벽하게 구비했습니다. 길거리에 나가보니 심각한 청년 실업 사태로 빈둥거리며 손가락만 빨고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이를 본 주인은 그들을 다 농부로 고용해서 포도원에서 일할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농부들은 생활을 꾸리고 보람도 찾을 수 있는 일자리를 얻게 되어 너무나 기뻐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에게 감사의 카톡 메시지가 쏟아졌습니다. "고마워요. 사랑해요. 하트 뿅뿅" "우리 포도원 주인 킹왕짱" 그런데 주인은 행여나 농부들이 주인의 눈치를 볼까봐 세를 주고 먼 타국으로 장기출장을 떠났습니다. 당시 새 포도원의 경우 정상적인 결실이 이루어지기까지 4년 정도 소작료를 면제해 주는 기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2절의 '때가 이르매'란 그 면제 시기가 지났다는 뜻입니다. 이제 포도원 주인은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소작료로 받고자 했습니다. 이 소출 얼마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소출 얼마는 포도원 주인과 농부들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표지입니다. 농부들이 소출 얼마를 바치는 것은 포도원이 자기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임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주인은 이를 통해 농부들과의 관계의 끈을 계속 이어가고자 했습니다. 주인은 농부들이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소출 얼마를 바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농부들의 반응은 전혀 예상과 달랐습니다. 약속했던 소작료를 바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종을 잡아 심히 때려서 돌려보냈습니다.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 빈손으로 돌아온 종을 본 주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만약 제가 주인이었다면 당장 동대문 경찰서에 연락해 전경 한 부대를 끌고 가서 모조리 잡아 족쳤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또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주인은 농부들이 이런 행동을 한 것이 종이 무례했기 때문이라고 여겼나 봅니다. 이번에는 인턴 레지던트를 다 마친 노련한 종을 보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농부들은 종의 머리에 상처를 내리고 능욕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 농부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도대체 농부들이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것입니까? 첫째는 욕심 때문입니다. 농부들은 포도원의 모든 소출은 자신들의 땀의 대가라고 여겼습니다. 그 소출의 얼마라도 주인에게 바치기가 아까웠습니다. 둘째는 감사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농부들은 처음에는 주인이 일할 수 있는 모든 환경과 기회를 준 것에 깊이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점 자신들이 받은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셋째는 주인을 업신여겼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농부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타국으로 떠난 뒤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주인의 섬세한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주인의 배려를 주인에 대한 멸시로 되갚았습니다. 주인의 오래 참음에 감격하기는커녕 점점 더 주인을 우습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 포도원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농부들은 종교지도자들을, 종들은 선지자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그들에게 극상품의 포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삶의 터전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 큰 은혜는 아무리 감사를 표현해도 부족했습니다. 이제 백성들이 해야 할 것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섬기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다 잊어버렸습니다. 물질과 쾌락을 추구하는 탐욕스러운 자들로 변해갔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길 거절했습니다. 스스로 왕이 되어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의 자비하신 손길을 뿌리치고 도리어 선지자들을 때리고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포도원 농부의 비유 속에는 지나온 이스라엘의 역사가 축약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비유는 우리로 하여금 창세기 2장과 3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이 준비된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거기에 아담을 두시고 그 땅을 관리하고 경작하도록 하셨습니다. 아담은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으며 무한대의 자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도록 하셨습니다. 이 선악과는 아담에게 너는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 네 위에 너의 창조주이시며 주인이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지였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어느새 감사를 잊어버리고 불평이 생겼습니다. 그 나무를 보자 꼭 따먹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마침내 자기가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며 반역을 저질렀습니다. 그 이후로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어떻게 해서는 하나님을 밀어내고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성향이 깊숙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생명과 물질과 시간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습니다. 당신 머리 위에 당신의 참된 주인이 계시다고 말해주면 온 몸으로 거부합니다. 그 진실을 일깨워 주는 사람을 도리어 미워합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류는 포도원 비유의 배은망덕한 농부들이고, 하나님께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시도했던 아담의 후예들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갑질이 계속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갑질은 빨리 사라져야 할 적폐 중의 적폐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갑질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소위 말하는 '을질'도 문제입니다. 제 동역자가 이번 주 초등학교 영어 캠프의 보조 교사로 일했습니다. 그런데 새로 영국에서 온 원어민 선생님이 고충을 토로했다고 합니다. 이 영국인의 말에 따르면 영국에서는 학생들이 기본적으로 'Sir'라고 부르며 선생님의 말을 따르고 존중한다고 합니다. 학부모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 초등학생들을 가르쳐 보고 너무 놀랐다고 합니다. 아이들이나 학부모나 하나같이 선생님을 우습게 여기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디 선생님뿐이겠습니까? 저도 회사에서 팀장 하다가 제 머리 꼭대기에서 저를 가르치려고 드는 팀원 때문에 속 터져서 죽을 뻔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기 머리 위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길 싫어합니다. 마지못해 억지로 굽히기도 하지만 마음속으로 권위를 깊이 받아들이려 하지는 않습니다. 하물며 온 세상의 주인이신 창조주가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겠습니까? 인정은커녕 이를 생각하기조차 싫어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아무 간섭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만 믿어드리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소출의 얼마를 요구받는 순간 갑자기 인상을 쓰고 돌변합니다. 괜히 부담주지 말고 내버려두라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여름수양회에서 배운 바대로 하나님께서 유월절과 무교절 규례를 세우신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삼으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잊지 않고 항상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나의 생명, 나의 가족, 나의 직업, 나의 소유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아무 자격 없는 우리를 다만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해 주셨고 목자의 사명까지도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어떻게 감히 딴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포도원을 주시고 그 속에서 일하며 열매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시간이 흘러도 이 감사를 놓치지 않고 꼭 붙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은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주인은 보낼 수 있던 모든 종을 다 보내었습니다. 이제는 딱 한 사람만 남았다고 말합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바로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내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종들이 갔기 때문에 농부들이 무시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아들만큼은 존대하리라 기대합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주인은 혹시 바보가 아닐까? 아니면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눈이 먼 것 아닐까?" 농부들을 다 쓸어버렸어도 몇 번을 했을 상황에서 이 몹쓸 인간들에게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다니요? 이것이 말이 되는 일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주인이 원했던 것이 소작료가 아니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소작료가 목적이었다면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주인이 정말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주인이 바란 것은 농부들과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아들을 존대하기만 한다면 주인은 지금까지 저지른 모든 반역과 악행을 기꺼이 용서하고 농부들과 새롭게 다시 출발할 용의가 있었습니다. 농부들과는 달리 주인은 농부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바보여서가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에 눈 먼 포도원 주인은 마침내 아들을 보내었습니다. 이에 대한 농부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7절과 8절을 보십시오.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여기서 농부들의 진짜 속셈이 무엇이었는지 드러납니다. 소작료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농부들은 포도원을 통째로 꿀꺽 집어삼키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들만 제거하면 자기들이 주인이 될 수 있을 줄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생각은 거대한 착각에 불과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농부들은 마지막 구원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렸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심판 밖에 없었습니다. 농부들은 진멸 당하고 포도원은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습니다. 농부들은 포도원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 했던 시도는 다 헛된 것이었습니다. 자기 것이 되지도 못했을 뿐더러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는 특권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정말 바보는 따로 있었습니다. 애초에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했던 농부들이야말로 어리석은 바보였습니다.


이 비유에서 '그가 사랑하는 아들'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이 말은 '당신이 무슨 권위로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았느냐'는 종교지도자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역한 세상을 얼마든지 다 쓸어 엎어버리실 수 있었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죄인들을 당장 심판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끝까지 인생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마침내 외아들을 이 죄 많은 세상에 보내셔서 그를 믿음으로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길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예수님을 존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싫어하고 미워했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을 가로 막는 방해물 정도로 여겼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성문 밖으로 버렸습니다. 이렇게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한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기원후 70년 로마 장군 디도에 의해 예루살렘과 성전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 스토리는 처절한 비극으로 끝나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10절과 11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버림 받으시고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게 되실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머릿돌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성전인 교회의 머리가 되실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주의 놀라운 능력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의미를 종교지도자들은 이해했을까요? 못했을까요? 12절에 보면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인 줄 알았습니다. 이를 볼 때 그들이 머리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알았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당장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씀은 '잡고자 하되'입니다. 그들은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교만과 탐욕에 이끌려서 파멸로 향하는 길에서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이 모습은 사람 마음속에 자기가 주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얼마나 강력하고 끈질긴 것인가 하는 것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을 한 마디로 정의 내린다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누가 주인인가 놓고 싸우는 전쟁터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 전쟁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정치계, 경제계, 문화계 각 영역마다 주도권 다툼이 치열합니다. 심지어 부부 사이에도 주도권 다툼이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서 서구에서는 장미의 전쟁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아는 한 회사에서 연구소장이 회사를 집어 삼키려는 야심을 품었습니다. 온갖 권모술수를 부린 끝에 마침내 사장을 쫓아내고 자기가 사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실력 있는 직원들이 다 떠나고 고객들도 떨어져 나가 버렸습니다. 결국 회사를 폐업하게 되었고 그 사람은 사장은커녕 연구소장 자리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갈등과 분열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부분 본래 하나님의 소유인 교회를 특정인이 사유화하려고 시도하다가 사단이 벌어지는 경우입니다. 자녀도 내 자식이라고 부르지만 근본적으로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선물로 보내시고 잠시 맡겨두신 생명입니다. 내 것으로 할 수 없는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욕심을 부리다가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주인이시지만 갑질하는 주인이 아닙니다. 인자하시고 너그러우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느 정도 사랑하십니까? 하나뿐인 아들을 주실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문제는 우리의 을질입니다. 그 행동의 결과는 부메랑처럼 돌아와서 자기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 뿐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 알고 보면 행복의 길은 이처럼 단순합니다. 이제 우리가 포도원의 새로운 농부들입니다. 진멸 당한 옛 농부들의 과거를 교훈으로 삼아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우리 삶에서 극상품의 포도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종교지도자들을 예수님을 잡아넣을 구실을 만들기 위해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들이 판 함정이 무엇입니까? 14절과 15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먼저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장황한 칭찬을 늘어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속에 있는 생각을 다 이야기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건수를 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그 다음에 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이 질문에 만약 세금 바치는 것이 옳다고 답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금 납부에 거부감이 큰 식민지 유대 백성들을 모두 적으로 돌리게 됩니다. 반대로 세금을 바치지 말라 하면 어떻게 되었습니까? 납세 거부를 선동한 죄목으로 로마 당국에 체포당할 수 있는 빌미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대답해도 큰 곤경에 처할 수 밖에 없는 외통수에 내몰린 셈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먼저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데나리온은 당시 로마의 은화로서 앞면에는 “신(神)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티베리우스 가이사 아우구스투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뒷면에는 황제의 어머니 리비아가 신들의 보좌에 앉아 하늘의 평화를 주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려주셨습니다. 17절 말씀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란 무슨 뜻입니까?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은전은 가이사에게 되돌려주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뜻입니다. 로마가 세금을 거두어서 황제가 호위 호식하는 데만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세금은 로마 제국 내에서 질서와 안녕을 유지하고 복지 정책을 펼치는데 쓰였습니다. 유대인들도 그 혜택의 일부를 누리는 만큼 세금을 납부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가이사 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가이사는 하나님의 것을 가로챌 권리가 없습니다. 경배와 찬양과 절대적인 순종은 오직 하나님께 돌려 들려야만 합니다. 가이사가 만약 이것도 자신에게 돌리길 요구한다면 그 순간 곧바로 정당성을 잃어버립니다. 


가이사의 형상이 데나리온에 새겨져 있었다면 하나님의 형상은 어디에 새겨져 있습니까? 창세기 1장 27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너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의 모든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나 자신을 드려서 경배하고 섬길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이 맺혀질 때 그 안에서 국가와 가정과 사회와의 모든 관계성이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너희의 모든 것을 다 내놓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을 확인하는 표지로서 다만 소출의 얼마를 요구하실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바른 관계성을 맺기를 원하십니다. 이 바탕 위에서 우리가 얼마든지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을 누리면서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 내가 움켜쥐고 더 차지하려고 애를 써봤자 소용없습니다. 그렇다고 내 것이 되질 않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부담을 지우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행복에 이를 수 있는 키워드가 담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이 말씀대로 우리가 일생 하나님께 합당한 감사와 사랑과 헌신을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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