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이창무 2015. 4. 30.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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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말씀 / 요한복음 4:31-54

요절 / 요한복음 4:35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경영학에서 쓰이는 블루오션과 레드오션이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블루오션이란 새로 탄생한 경쟁이 없는 시장을 말하고 레드오션이란 기존의 경쟁이 치열한 시장을 말합니다. 기업은 당연히 블루오션에 들어가야 높은 수익을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블루오션이 아무에게나 보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블루오션은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눈을 뜰 수 있는 사람에게만 보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과의 일대일을 통해서 사마리아라는 블루오션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눈을 들어 이 비전을 공유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도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시대와 캠퍼스를 향한 예수님의 비전을 공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사마리아 여자가 동네도 달려 간 사이 제자들이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의 손에는 수가 할인 마트에서 사 온 삼각 김밥과 컵라면이 들려 있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적대적인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면서 겨우겨우 구해 온 음식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랍비여 잡수소서. 면발 불겠습니다. 시장하실 텐데 어서 드셔야죠.” 그런데 이때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그래 장하다. 고맙구나. 역시 너희들 밖에 없다.” 하셨나요? 다같이 32절을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갑자기 제자들이 무안해졌습니다. 또 예수님의 말씀이 잘 납득되질 않았습니다. 분명히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낯 선 동네에서 예수님께 음식을 가져다 줄 사람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더구나 여기는 까칠한 사마리아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을 가만히 보니 아까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쓰러지셨던 그 때 그 모습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얼굴에 만족과 기쁨과 생기가 넘치고 있었습니다. 무언가 잡수신 것은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꼽쳐둔 비상식량이라도 있었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예수님은 어떤 양식을 드신 것일까요? 


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여기서 드디어 예수님의 비밀 식량의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자신이 직접 누가복음 19장 10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방금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영혼 중 하나였던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내 구원하셨습니다. 한 영혼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진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한 영혼이 돌아오면 하나님은 이처럼 크게 기뻐하십니다. 예수님도 더할 나위 없이 기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큰 기쁨은 육신의 배고픔마저도 싹 잊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에게 먹는 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먹어야 삽니다. 먹어야 힘이 납니다. 먹으면 즐겁고 만족이 생깁니다. 그래서 일까요? 요즘 티브이에서 먹방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맛집 탐방 프로그램이 넘쳐 나고 CF에서는 영화배우 하정우씨처럼 잘 먹는 먹방 스타들이 뜨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먹는 일이 중요하다지만 사람은 밥만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먹는 것 외에도 사람에게 만족과 힘을 주는 것들은 많습니다. 옛날부터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고 불리어 왔습니다. 좋은 책 또는 좋은 영화를 보면 만족이 있습니다. 또 통장에 현금이 두둑이 쌓여갈 때 우리는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릅니다. 사람들이 내 페이스북에 들어와서 ‘좋아요’를 눌러주고 훈훈한 댓글을 주르륵 달아줄 때 만족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이런 양식들이 전부일까요?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양식은 한 마디로 말해서 사명입니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분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완수함으로 얻게 되는 양식입니다. 사람은 단순히 ‘먹고 배부르다.’ 혹은 ‘재밌다.’ 하는 정도로 만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누구나 사람은 자기 자신의 삶이 의미 있는 삶, 가치 있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고 또 이를 자기 삶을 통해 구현해 낼 때 우리는 거기에서 진정한 만족을 얻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해기 위해 평생을 찾아 헤매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별 가치 없는 일에 자기 삶을 허비합니다. 그런 인생은 얼마나 허망합니까?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가 목자로 부르심 받은 것 자체가 얼마나 큰 복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이 누구인지를 잘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말씀으로 양들의 생명을 살릴 사명이 우리에게 있음을 압니다. 이 사명을 감당할 때 목자는 기쁘고 힘이 나고 보람을 느끼고 만족을 얻습니다. 내가 돕고 섬긴 양이 거듭 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변화되는 모습을 경험한 목자는 그 기쁨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반면 그 동안 흘린 모든 땀과 눈물을 다 잊어버립니다. 역시 목자는 일대일을 해야 살맛이 납니다. 전도를 해야 힘이 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영적 DNA가 이미 그렇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양이 변화된 모습을 보면 정말 목자는 안 먹어도 배가 부릅니다. 이런 만족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현재 누리고 계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사히 여기고 이를 감당함으로 하늘의 양식을 맛보고 누리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바로 얼마 전 제자들은 예수님과 밀밭 사이를 다니면서 아직 시퍼런 밀들을 보고 이런 말을 서로 주고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아직 추수하려면 넉 달은 더 있어야해.’ ‘맞아. 빨리 그 때가 와야 배터지게 먹어볼 텐데.’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추수할 때가 되었다 하시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기상 이변 때문에 주님께서 잠시 계절 감각을 잃어버리시기라도 하셨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추수는 곡식의 추수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영혼의 추수에 대한 은유입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주님께 나아올 모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그들은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눈에는 그런 현실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에 사마리아인들은 별 소원이 없어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순수성을 잃어버려서 기대할 구석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사마리아는 그저 거쳐 지나가는 땅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땅의 영적인 현실을 꿰뚫어 보고 계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마리아 사람들은 까칠하고 마음이 닫힌 것처럼 보였습니다. 개념 없이 막 사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안 차별과 무시를 받으며 마음이 낮을 대로 낮아져 있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자기들을 구원해줄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 제자들은 이런 현실을 전혀 보지 못했고 예수님은 보실 수 있었을까요? 제자들은 사마리아에서 먹을 것을 구하는 일에만 집중했던 반면에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과 일대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일대일 하시면서 사마리아인들 영혼 깊숙이 있는 참된 예배에 대한 목마름과 그리스도를 향한 갈망을 보셨습니다. 첫 열매는 곧이어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을 예고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는 곧 이어 사마리아 땅에 이 여인처럼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될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캠퍼스를 볼 때 어떻게 보이십니까?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으로 보이십니까? 아니면 모래 바람만 날리는 거친 들판으로 보이십니까? 솔직히 저는 추수할 밭으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요즘 학생들은 ‘첫째, 장래에 무엇으로 먹고 살까? 둘째, 어떻게 남친(여친)을 만들까? 셋째, 뭐 재밌는 것 없을까?’ 이 세 가지 생각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 기독교에 대한 반감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추수는커녕 비집고 들어갈 틈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과연 예수님도 이렇게 보실까요? 예수님이시라면 우리에게 눈을 들어 추수를 기다리고 있는 밭을 보라 명하시지 않겠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별 소원이 없어 보이는 캠퍼스 영혼들 가운데 인생에 대한 진지한 문제의식과 고민을 안고 진리를 갈구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요즘 세대를 가리켜 인간관계 결혼 출산 내집마련 연애는 기본이고 희망, 꿈까지 포기한 칠포 세대라 부릅니다. 이런 척박한 현실 속에서 위로부터 임할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캠퍼스에서 이런 사람들을 찾아가서 추수할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요즘 우리 학생회를 보면 보건대가 대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손건수, 이원섭, 김기드온, 김건아 목자님을 비롯해서 이성규, 황재익 형제님까지 다 보건대입니다. 과거에 보건대는 본교에 속해 있지 않았었기 때문에 선배도 없고 별 주목을 받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보건대야말로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새롭게 뜨고 있는 밭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형제가 군에 입대하면 목자가 마음으로부터 놓아 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군대에서 세상 물이 들어서 돌아오기 힘들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다릅니다. 최근 복학한 형제님들을 보십시오. 전보다 훨씬 더 신실해지지 않았습니까? 제가 전국 학생수양회에서 인생소감들을 들어보니 최근 형제들은 군대를 갔다 와서 변화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제는 신입생이 아니라 복학생이 황금어장인지 모릅니다. 이처럼 찾으면 캠퍼스 어딘가 새로운 블루오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새롭게 눈을 떠서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을 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보십시오. 사마리아 여인, 이 한 영혼과의 일대일을 통해 비전을 얻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전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한 영혼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때까지 끝까지 일대일로 돕다 보면 우리는 이 시대에 대한 통찰과 비전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요즘 캠퍼스는 무조건 힘들다는 선입관을 떨쳐 버리고 도전하여 한 영혼의 목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새롭게 눈을 떠서 캠퍼스의 블루오션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6절과 37절을 보십시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보통은 일을 마친 다음 일꾼에게 삯을 줍니다. 그러나 거두는 자에게 삯을 선불로 줍니다. 왜입니까? 추수할 것은 너무 많고 일꾼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0장 2절에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추수할 일꾼들로 쓰시고자 하셨습니다. 세상이라는 들판에 나가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고 거두는 기쁨에 참여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열매를 거두려면 누군가 씨를 뿌린 사람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뿌린 사람들은 구약 시대로부터 가장 가까이는 세례 요한까지의 선지자들을 가리킵니다. 선지자들은 가장 암담했던 시대에 눈물로 말씀의 씨를 뿌렸습니다. 언젠가는 그 씨가 자라서 열매 맺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열매 맺는 것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제자들에 의해 그 열매들은 추수되어 하나님의 곳간으로 들어갈 때가 되었습니다. 이때 뿌린 사람들 역시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수고와 노력이 헛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사람이 구원을 얻기까지 뿌리는 사람과 거두는 사람의 동역이 필요함을 배웁니다. 물론 뿌린 사람이 거두기까지 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뿌린 사람과 거두는 사람이 서로 다른 경우도 많습니다. 저만 해도 거두기는 UBF에서 거두었지만 그 전에 뿌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중학교 때 영어선생님이십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학교로 이분을 찾아가셔서 촌지를 찔러 주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저희 집으로 많은 책이 배달되어 왔습니다. 열어 보니 선생님이 받은 촌지 금액만큼 다 책을 사서 다시 보내주신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금박이 입혀 진 두꺼운 성경책도 한 권 있었습니다. 이런 선생님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고등학교 때 옆 반 친구였습니다. 이 친구는 참 특별했습니다. 모든 범생이들과도 다 친하고 모든 날라리들과도 다 친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에게 교회에서 문학의 밤이 있으니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저는 원래 이런 곳에 갈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의 말은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거기서 그가 십자가에 관한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거기서 친구가 모든 사람들과 화평한 관계를 맺는 비결이 혹시 십자가 신앙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분들이 먼저 씨를 뿌리지 않았다면 저는 대학교 1학년 때 일대일 성경 공부 초청을 거절했을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우리 모임에서 씨가 뿌려졌는데 다른 곳에 거두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제가 회사에서 팀장할 때 팀원 한 사람에게 전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원래 독실한 불교신자였습니다. 하지만 짝사랑하던 사람에게 고백했다가 차인 후 크게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제가 요한복음 성경 공부를 해 주었고 후에는 서초 센터 사모님에게 연결시켜 드렸습니다. 이후로 그는 우리 여름 수양회에서 큰 은혜를 받고 예배에도 꾸준히 참석했었습니다. 그러나 장로이신 회사 사장님께서 먼데 다니지 말고 가까운 자기 교회에 오라고 하시는 바람에 결국 그쪽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그때는 참 씁쓸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그의 카카오 스토리에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정말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 예수 믿으세요. 예수 안 믿고 어떻게 살아요.” 너무 뿌듯하고 감사했습니다. 한때 불경을 외운다고 손목에 염주를 늘 두르고 다녔던 사람이 이렇게 변화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어찌되었든 제가 이 사람의 변화에 처음 씨를 뿌렸던 사람이라는 사실이 감격스러웠습니다. 우리 모임을 거쳐 간 사람들 중에는 세계적인 신학자도 있고 목회자도 있고 영향력이 있는 평신도 사역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씨를 뿌렸지만 우리가 거두지 못했다고 해서 너무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우리가 거두었을 때는 우리 앞서 씨를 뿌린 이름 모를 성도들에게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이 땅 위의 모든 교회는 서로 경쟁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도와주는 동역 관계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뿌리든지 물을 주든지 거두든지 우리는 다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각자 자기 역할을 가지고 참여할 뿐입니다. 우리가 뿌리는 역할이든 거두는 역할이든 가리지 않고 때마다 우리의 역할을 충성스럽게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사마리아 여인의 증거를 듣고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는 주님의 말씀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 땅에서 이런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다니!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끝없이 밀려오는 양들을 보며 제자들은 추수하는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양들을 섬기느라 몸은 피곤했지만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새로운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서야 제자들은 '아!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그 양식이로구나.'하면서 무릎을 쳤습니다. 사명이 얼마나 큰 복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사마리아에 부흥을 가져 온 원동력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시작은 사마리아 여인의 간증이었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하는 여인의 증거는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두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인의 변화된 삶은 사람들에게 예수님께 대한 뜨거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았습니다. 41절과 42절을 보십시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어떻게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이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신 줄 알게 되었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그 땅 가운데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을 때 사마리아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고 제자들은 풍성한 추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와는 대조되는 지역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고향인 갈릴리였습니다. 43절을 보십시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고향 땅에서의 반응을 이렇게 예감하셨습니다. 실제 갈릴리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다음 절을 보니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예감이 틀렸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이유는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거기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보이신 표적 덕분에 일약 대세남으로 떠버린 동향 출신 스타 예수님이 반가왔을 뿐입니다. 제자로서가 아니라 팬으로서 환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갈릴리인의 믿음을 인정치 아니하셨습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에 이르셨을 때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왕의 신하 같은 최고위층 인사가 예수님께 나오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게다가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는 34Km되는 먼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신하에게는 예수님께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내려 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지금 이 신하의 아들은 사경을 해매고 있었습니다. 그는 절박했습니다. 표적과 기사를 보여주신 예수님께 매달려 기적이 일어나길 기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50a절을 보십시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예수님께서 왜 와 달라는 청을 뿌리치시고 말씀만 하셨을까요? 귀찮아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는 표적에 기초한 믿음을 바로 잡아 주시고 말씀에 기초한 믿음을 심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 단순하여 믿기 힘들었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말씀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능력으로 역사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신하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만을 굳게 붙들고 내려갔습니다. 


그가 말씀을 믿고 내려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내려가는 길에서 종들로부터 아이가 살았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때 그는 하인들에게 낫기 시작한 때를 묻고 바로 그때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때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아들의 치유는 우연이 아니었고 자연스러운 결과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역사한 결과였습니다. 말씀이 곧 능력이기 때문에 다른 표적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왕의 신하와 그의 온 집이 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간증도 필요하고 표적도 필요하겠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의 역사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기적이 효과가 있습니다. 지금도 오지에 있는 미전도 종족에게 선교하러 간 선교사들에게는 놀라운 기적들이 종종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기한 일은 이렇게 기적을 일으키던 선교사가 본국으로 돌아오면 전혀 기적이 일어나질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말해 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기적이란 말씀을 듣게 하는 계기로서 쓰일 수 있으나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초신자들에게는 간증이 상당한 힘을 발휘합니다. 아무래도 말씀보다 간증이 더 빨리 와 닿고 재미있고 감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단계를 지나면 말씀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본문의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이제는 너의 말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믿게 되었다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오늘날 부흥을 꿈꾸는 몇몇 교회들 중에는 신기한 일들을 보여주는 은사 집회나 유명인을 모셔 와서 여는 간증 집회로 부흥을 일으키려고 시도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만지기만 하면 병이 낫는다고 하기도 하고 이빨이 금이빨로 변한다고 하기도 하고 별별 일들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일들에 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말씀입니다. 말씀 그 자체를 믿으려고 할 뿐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바르게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사마리아의 부흥은 기적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여인의 간증이 발화점은 되었지만 폭발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대 한국 교회의 부흥도 캠퍼스의 부흥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해도 해도 잘 안 되니까 말씀 외에 뭔가 다른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볼 때 뿌려지는 씨도 말씀이고 거두는 도구도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땅 가운데 이 캠퍼스 가운데 말씀이 세력이 얻어 일어나는 진정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추수할 때가 이른 사마리아와 표적 신앙의 한계에 갇혀 척박해진 땅 갈릴리 두 곳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에서는 말씀으로 거두셨고 갈릴리에서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말씀으로 고치심으로 씨를 뿌리셨습니다. 익은 곳을 만나면 거두고 익지 않은 곳을 만나면 뿌리면 됩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거두게 됩니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사도 바울은 이 원리를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우리는 지금 전도 페스티발을 진행 중입니다. 전도의 원리도 동일합니다. 일단 캠퍼스에 갑니다. 가서 희어져 추수하게 된 사람을 만나면 거두어 일대일을 시작합니다. 아직 익지 않았으면 말씀의 씨를 뿌립니다. 결국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기에 항상 힘쓰면 됩니다. 우리가 캠퍼스 전도를 통해 우리를 목자 삼으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드리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하늘의 양식을 먹고 참 만족과 새 힘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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