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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설교/요한복음 2015. 5. 10. 18:36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말씀 / 요한복음 6:1-15

    요절 / 요한복음 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입니다. 요한복음의 일곱 가지 표적 중 네 번째 표적이자 사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 유일한 기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미 세 복음서에 기록된 이 사건을 왜 다시 한 번 더 기록했을까요? 이는 다른 복음서에는 나와 있지 않은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보충하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배불리 먹은 것은 무리들이지만 예수님의 초점은 제자들에게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제자들의 믿음이 성장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예수님의 기대와 소원을 따라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노를 젓는 제자들에게서 콧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어기야 디야 어기여차 뱃놀이 가잔다!" 왜 이렇게 제자들의 기분이 업(Up)된 것입니까? 출발할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막6:31)" 그 동안 제자들은 밤낮 없이 밀려드는 무리들을 섬기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습니다. 피곤에 절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이 한 마디는 가뭄 끝에 찾아 온 단비와도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이번 엠티에서 무엇을 할까 선상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싱싱한 활어회를 실컷 먹어 보자" "해안길을 따라서 자전거를 타고 가 보자"


    들 뜬 마음을 안고 바다 건너편에 내린 제자들의 눈앞에 전혀 예기치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Welcome! Jesus" 수많은 무리들이 이미 거기에 도착해서 예수님 일행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이 무리의 수는 성인 남자만 오천 명, 전부 다 합치면 어림잡아 만 명에서 이만 명 정도나 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유대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습니다. 무리들은 성전과 제사장들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무리들은 예루살렘과 정반대 편까지 예수님을 추적해 왔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행하신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무리들은 기적 밖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부패하고 형식화된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었기에 그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셔서 자기에게 나아오는 무리들을 보셨습니다. 무리들을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무리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습니다(막6:34). 표적 신앙은 바람직하지 않았지만 표적을 구할 수밖에 없는 무리들의 심정과 상황을 깊이 이해하셨습니다. 명목상 백성의 목자로 세움 받은 제사장들은 양을 먹이기는커녕 양을 잡아먹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어떻게 먹일까 그들을 어떻게 살아나게 할 수 있을까 잠시 깊은 고민에 빠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민을 나눌 사람이 없을까 하여 옆에 있던 제자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엄청난 무리들을 보는 순간 제자들은 짜증이 확 올라왔습니다. 이미 엠티는 물 건너갔습니다. 잠깐의 휴식까지 빼앗다니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오만가지 인상을 쓰고 있는 제자들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백성을 먹일 목자로 세우시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까지 무리들에 대한 책임감이나 심정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그 무엇보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예수님에게 한 가지 고민이 더 늘어났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해야 제자들의 부족한 믿음을 성장시킬 수 있을까’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번 기회를 무리들을 먹이실 뿐 아니라 제자들의 믿음을 성장시킬 수 있는 계기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믿음 학교의 교육 방식은  오늘날 학교 교육과는 달랐습니다. 철저한 현장 교육이었습니다. 아울러 일대일 문답 교육이었습니다. 그러나 공통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어김없이 시험을 보셨습니다(6).


    5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예수님은 열 두 명의 제자들 중에 빌립을 콕 집어 질문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왜 하필 빌립이었을까요? 혹시 빌립이 제자들 중에서 대외협력부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보다는 빌립이 평소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대표할 만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빌립은 자신의 믿음에 대해 문제의식이 별로 없었습니다. 만약 베드로에게 이 질문을 했다면 베드로는 이번에도 또 "주님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제가 장모님 집을 팔아서라도 알아서 다 해결하겠습니다." 이렇게 큰 소리를 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은 예수님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요즘 건설 일용직 평균 일당이 십만원 정도이므로 이백 데나리온이라고 하면 이천만원 정도 되는 거금입니다. 이 자리에 만 명 정도되는 무리가 있었다고 가정하면 이천만원으로 한 사람 당 이천원 꼴로 해서 김밥 한 줄 정도씩을 나누어 줄 수 있었습니다. 빌립은 순식간에 이런 계산을 해낼 정도로 현실 판단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주변에 있던 제자들이 또 한번 감탄을 했습니다. "역시, 빌립이야. 머리는 빌립을 못 따라간다니까..." 그런데 빌립이 수학은 잘 했는데 국어는 잘 못했던 모양입니다. 국어를 잘 하려면 행간을 읽어서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빌립의 계산 능력을 시험하셨겠습니까? 제자들에게 이백 데나리온의 돈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셨겠습니까? 설령 이백 데나리온이 있다손 치더라도 당장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일 양식을 살만한 곳이 없다는 점을 모르실 리가 없으셨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자기의 믿음을 테스트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빌립은 시험에서 불합격하고 말았습니다.


    빌립은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시는 일,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일, 삼십팔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빌립은 이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돈도 없고 돈이 있어도 떡을 살만한 곳도 없지만 주님, 주님이시라면 무엇인가를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빌립에게는 그만한 믿음의 상상력이 없었습니다. 빌립이 만약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아갈 사람이라면 믿음의 상상력이 없어도 큰 상관이 없습니다. 현실 판단이 뛰어나고 계산만 잘 하면 능력을 인정받아 잘 살 수 있었습니다. 빌립에게 훌륭한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빌립을 예수님의 제자로 양들의 목자로 부르셨습니다. 빌립은 믿음이 없이 현실만 보고 계산만 하다가 늘 부족하다,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빌립이 목자가 되고 제자가 되려면 그 무엇보다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잘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셔서 그의 한계를 드러내시고 스스로 문제의식을 갖고 믿음을 배우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아마도 시험을 좋아하는 분은 아무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번 주 수요일에 안겸손 목자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야, 나도 중간고사 같은 시험 좀 보고 싶다." 근처에 있던 학생 목자님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겸손 목자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시험을 치른다는 말은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은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시험을 보고 싶다' 하는 말은 '나도 더 배우고 싶다.' '나를 키워 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빌립의 믿음을 시험하셨듯이 예수님은 때때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왜 시험하시겠습니까? 골탕을 먹이시려고요? 창피를 주시려고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을 키워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통해서 우리가 가진 믿음의 현주소를 확인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제가 돕던 한 리더가 군대 말년에 힘들어 진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알았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돌변한 그의 모습을 보고 저는 낙심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또 한 명의 양이 떨어져 나가는구나 하고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모님이 그가 전역을 하는 날 부산에 있는 군부대로 찾아가 보자고 했습니다. 일단 집으로 가기 전에 체포해서 마음을 움직여 보자고 하셨습니다. 저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새벽에 부산행 KTX를 타고가 무작정 정문 앞에서 기다렸습니다. 결국 만났습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설득을 거듭 한 끝에 간신히 일대일은 계속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습니다.


    그날 저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부끄러웠습니다. 첫째는 양 앞에서 펑펑 눈물을 쏟았기 때문에 부끄러웠습니다. 대화를 하는 도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그의 마음이 칠흙같이 어두운 것을 보고 안타까와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목자로서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지만 남자로서 좀 부끄러웠습니다. 두 번째는 너무 일찍 포기하고 말았던 제 자신의 믿음 없음으로 인해 부끄러웠습니다. 만약 그 사모님의 강권함이 없었더라면 저는 한 영혼을 그냥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미 졸업을 했는데 어떻게... , 군대에 있는데 어떻게..., 저토록 완강하니 어떻게... 등등 저에게 나름대로 포기할 이유는 많았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제게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라도 능히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저는 믿음의 시험에서 불합격하고 말았습니다. 목자로서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두번째 시험에서도 불합격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장차 말씀의 종이 되어 있을 그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 보았고 이를 붙들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선교사가 되어 있습니다. 저를 테스트하셔서 깨닫게 하시고 저의 믿음을 키워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믿음이 있다는 말은 현실을 뛰어 넘어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주머니 속에 땡전 한 푼 없어도 오천 명 먹이는 상상을 할 수 있게 합니다. 믿음은 지금 우리가 있는 마크홀에 100명 학생 제자들이 우글거리는 모습을 그려보게 할 수 있습니다. 빌립이 가진 탁월한 현실 감각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자이자 목자인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믿음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아무리 계산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시대입니다. ‘노답’이라는 말이 괜히 유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야말로 믿음의 상상력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한 걸음 씩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현실을 뛰어넘어 예수님의 원대한 계획을 볼 수 있는 제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앞에서 저자 요한이 빌립을 언급할 때는 별 다른 설명이 없이 그냥 빌립이라고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만 해도 누구나 빌립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안드레를 소개할 때는 수식어가 길게 붙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안드레는 빌립에 비해 별로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안드레가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지만 중종 제자 중에 안드레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안드레는 특별히 두각을 나타낸 적이 없었습니다. 평범하고 조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있어도 있는 줄 모르고 없어도 없어진 줄 모르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안드레가 사람들에게 소개될 때는 그냥 안드레로 소개 받는 법이 없었습니다. 항상 시몬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로 소개 받았습니다. 안드레는 평생 자기 형인 베드로의 그늘에 가려진 인생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은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온 장본인이 바로 안드레였습니다.


    안드레는 아까부터 예수님과 빌립 사이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었습니다. 대화가 끝난 후 예수님의 표정을 살펴보니 빌립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신 것이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안드레는 곧 그 자리를 조용히 빠져나왔습니다. 안드레는 빌립 같이 좋은 머리는 없었지만 건강한 두 다리가 있었습니다. 무리 속을 뒤지다 보면 뭔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여기 저리를 헤집고 다녔습니다. "누가 좀 먹을 것 가져 온 사람 없나요?"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습니다. 결국 안드레가 찾아 낸 것은 한 소년이 가지고 있던 도시락 하나뿐이었습니다. 도시락 안에 있는 것은 보리떡 다섯 개와 소금에 절인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였습니다. 보리떡은 당시 대표적인 서민 음식이었습니다. 조금 사는 집 사람들은 보리떡 대신 밀떡을 먹었습니다. 원문에 쓰인 물고기라는 단어에는 '작음'을 나타내는 접미사가 붙어 있습니다. 물고기조차 잉어처럼 큰 물고기가 아니라 송사리 같은 작은 물고기였습니다. 맥도널드에서 파는 해피밀 세트처럼 그야말로 아이들을 위한 조그맣고 초라한 도시락일 뿐이었습니다. 안드레는 이 오병이어를 들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 앞에 선 안드레는 한참 동안 말을 안 하고 머리만 긁적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답답했던지 이렇게 채근하였습니다. "뭔데? 빨리 말 좀 해 봐." 안드레가 더듬거리며 말했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9)" 안드레는 이 말을 하고 또 다시 머리를 긁었습니다. 동시에 주변에서 탄식과 조롱 소리가 흘러 나왔습니다. "참내, 저 친구가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머리는 모자 쓰려고 달고 다니나? 여기 만 명이 넘게 있는데 기껏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가지고 뭘 하겠다는 거야." "어이, 안드레. 자네나 실컷 먹게"


    이때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마치 이때를 기다리셨다는 듯 사람들을 식사 대형으로 편성하여 앉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방금 안드레가 들고 나온 오병이어를 가져오도록 하셨습니다. 오병이어가 든 바구니를 하늘을 향해 높이 드셨습니다. 그리고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이천만원이 있어도 부족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이천 원짜리 도시락을 두고 감사하셨습니다. 이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안드레는 가슴 속으로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제가 가져온 오병이어를 감사하게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오병이어처럼 제자들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저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바구니에서 떡과 물고기가 끊임없이 나왔습니다. 제자들은 솟아나는 떡과 물고기를 신나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갈릴리 해변에 즉석 무한 리필 뷔페식당이 오픈했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모두 다 원대로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렇게 먹고도 열 두 바구니나 남았습니다. 열두 제자들이 양식이 가득한 바구니 하나씩을 부수입을 챙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끄러워 고개를 듣지 못하는 제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좀 전에 의기양양하게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대답했던 빌립이었습니다. 여기서 빌립은 이 한 가지를 가슴 속 깊이 간직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바로 계산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변수는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여기서 안드레가 오병이어를 들고 나오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오천명을 먹이실 수 없었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병이어가 없어도 예수님은 얼마든지 무리를 먹이실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한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먹는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까? 하늘에서 만나를 비같이 내려 주시고 동풍이 불어 메추라기가 지면에 깔리게 해서 먹여주셨습니다. 오병이어는 오병이어일 뿐입니다. 안드레의 말처럼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오병이어가 오천명을 먹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천명을 먹이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감사하게 받으셔서 무리를 먹이심은 어떤 뜻이 있습니까?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제자들이 참여하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해결이 아니라 참여입니다. 제자들의 힘만으로는 머리로 계산해 봐도 안 되고 몸으로 뛰어 봐도 안 됩니다. 계산해 봐야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올 뿐이나 몸으로 뛰어 찾아 봐야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 뿐입니다. 예수님도 이와 같은 사실을 모르시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예수님께서는 하실 수 있음을 신뢰하고 그 일에 동참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작은 것이라도 주님께 들고 나오면 이를 받으셔서 주의 역사에 쓰임 받을 기회를 주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한국은 직장인들의 평균 근로 시간이 길기로 유명합니다. 멕시코와 우리나라가 늘 1위 자리를 놓고 다투고 있습니다. 날마다 야근이요 주말에서 출근하는 우리 학사 목자님들이 어떻게 양들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계산해 보면 답이 안 나옵니다. 시간을 쥐어 짜내서 겨우 양과 일대일을 해 주고 가끔씩 토요일에 전도를 나가는 것이 전부입니다. 사모님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자녀 양육과 가사에 매여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도 어찌하든 마리아 기도모임에 나와서 기도하고 음식이나 물질로 양들을 먹이고자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을 이루기에는 너무 작고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에 불과합니다. 학생 목자들도 치열한 스펙 경쟁, 취업 경쟁에서 낙오하지 않으려면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 와중에 바이블 카페를 섬기고 엠티를 준비하고 새내기들에게 전도를 합니다. 이것 역시 오병이어입니다. 한 팀의 일대일, 한 번의 기도, 한 번의 전도, 한 번의 헌금,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에게 시간도 물질도 능력도 모두가 다 턱없이 말도 안 되게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가지신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할 뿐입니다. 머리를 긁적이며 오병이어라도 들고 나아가면 주님은 감사하게 받으십니다. 한 팀의 일대일과 한 번의 기도와 한 번의 전도에 복을 내리십니다. 바로 그 지점을 출발점으로 삼으셔서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그 역사의 한 페이지에 우리 이름을 새겨 주십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이며 특권입니다.


    우리에게는 박학장님으로 더 잘 알려진 박 다니엘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다니엘 선교사님은 정년퇴직을 하신 후 손주들과 놀아 주시며 안락한 노년을 보내실 나이에 멕시코 선교사로 나가셨습니다. 삼십 번 이상 반복해서 외워도 외워지지 않는 스페인어를 정복하시기 위해 무진 애를 쓰셔야 했습니다. 엘살바도르에 동역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시고 선교지를 또다시 옮겨 치안 부재, 살인적인 더위, 비자 문제 등과 씨름하시며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작년에 귀국하신 이후 계속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지금 우리들의 중보 기도가 절실히 필요로 하고 계십니다. 누군가 계산기를 두드려 본다면 애초에 가지 마셔야 했다는 결론을 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니엘 선교사님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주님께 드리셨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오병이어로 받으시고 축사하셔서 멕시코와 엘살바도르 선교에 귀하게 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암 1부의 모든 동역자들에게 선교 신앙, 변함없는 충성과 헌신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안드레를 보십시오. 나는 별로 잘 하는 것이 없다고 주눅 들 필요 없습니다. 나는 가진 것이 없다고 주눅 들 필요도 없습니다. 어차피 주님은 우리가 가진 것에 의지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가지신 것에 의지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요 참여입니다. 우리는 다만 오병이어를 들고 주님께 나아가 주의 역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오병이어를 축사하셔서 캠퍼스 선교와 세계 선교에 쓰임 받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복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 표적을 경험한 무리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14절을 보십시오. 무리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란 신명기 18장 15절에 예언된 모세와 같은 그 선지자로서 메시아를 뜻합니다. 더 나아가 무리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까지 했습니다. 무리들의 생각대로 예수님은 성경에 약속된 그 메시아가 맞습니다. 이 땅에 왕으로 오신 분이라는 사실도 맞습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은 오히려 혼자 산으로 몸을 숨기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백성들이 기대하고 있는 그런 메시야가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경제 대통령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으니 예수님만 계시면 먹고 사는 문제는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이때는 마침 유월절이 가까운 때라고 하였습니다. 유월절은 어떤 절기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 애굽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게 된 구원과 해방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기념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뿌리고 그 살을 가족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례 요한의 이 외침처럼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어린 양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뼈가 부수어지고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게 되실 분이셨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살과 피를 이 세상을 위한 생명의 양식으로 나누어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진정한 오병이어는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가 다 떼어진 떡 조각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또한 오병이어입니다. 이것이 이 땅을 사는 모든 성도의 소명입니다. 에베소서 5장 2절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예수님이 자기 몸을 버리고 떼어 우리에게 주사 우리를 살게 하셨듯이, 우리 역시 우리 몸을 떼어서 내어줌으로써 다른 사람을 살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양들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 아내를 위해, 자녀를 위해, 부모님을 위해,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을 배부르게 살리게 하시려고 주님에 의해 떼어진 떡 조각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오병이어처럼 보잘 것 없고 많이 부족할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그들을 먹이고 살리고자 하십니다. 다만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시고 믿음이 성장할 수 있도록 훈련하십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믿음의 훈련을 잘 받아 믿음의 진보와 성장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오병이어라도 들고 주님의 역사에 동참하여 세상을 섬기고 양들을 살리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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