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창무 2015. 4. 30.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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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말씀 / 요한복음 4:1-30

요절 / 요한복음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아내 힐러리가 힐러리의 고향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힐러리가 남편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저기 저 주유소에 휘발유를 넣는 사람이 보이죠? 저 사람이 바로 내 첫 사랑이었어요.” 클린턴이 이렇게 반응을 했습니다. “당신이 만약 저 사람하고 결혼했더라면 지금은 주유소에서 돈이나 받고 있겠구먼.” 그러자 힐러리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천만에요! 내가 저 사람하고 결혼했더라면 저 사람이 미국 대통령이 되었을걸요!” 그런데 힐러리는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목이 마른 것 같습니다. 이제는 자기가 직접 대통령이 되려고 차기 대선 출마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대상이 권력이든 무엇이든 사람은 누구나 다 목마른 존재입니다. 문제는 이 목마름의 욕구는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의 사랑으로 목마름을 채우려 하였지만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여인을 깊이 이해하시고 영생의 샘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버려진 한 인생이 구원을 받고 영생의 기쁨을 누리게 된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겸손과 인내, 무엇보다 한 영혼에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마리아는 어떤 곳입니까?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본래 하나의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이 기원전 72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후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에 이방인들을 이주시켰습니다. 이때 들어 온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들이 바로 사마리아인들입니다. 피만 섞인 것이 아니라 이방 종교까지도 섞여버렸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 역시 바벨론에 의해 망하기는 했지만 혈통이나 신앙 면에서 순수성을 지켰습니다. 유대인들은 ‘우리는 100% 순종이지만 사마리아 너희들은 잡종이야!’ 하면서 사마리아인들을 무시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 재건을 도와주겠다는 사마리아인들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화가 난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에 따로 성전을 세워서 거기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심 산의 성전마저 유대인들이 쳐들어가 모두 부셔 버렸습니다. 이후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상종 못할 원수지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마리아 땅에 한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여인이 사람과의 만남을 피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여인들은 선선한 저녁 시간에 우물가로 물을 뜨러 왔습니다. 아낙네들은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며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가장 태양빛이 뜨거운 정오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시간을 골라 일부러 이 때 온 것입니다. 또한 이 여인은 ‘까사녀’ 곧 까칠한 사마리아 여자였습니다. 말투부터가 그렇습니다. “왜 나한테 물 달라고 그러세욧? 아니 생수를 어디서 얻는다는 말이에욧? 어이없네. 그럼 당신이 야곱보다 더 위대하다는 말이에욧!” 한 마디로 ‘나를 건드리지 말라’입니다. 아니 여인이 왜 이렇게 사람과 관계성 맺기를 거부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18절에 보면 여인이 과거에 남편을 다섯이나 거친 경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남편인 듯 남편 아닌 남편 같은 남자와 동거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다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쫓겨났는지 남편과 사별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 과정에서 여인은 수많은 상처를 겪었으리라는 사실입니다. 좋은 남편을 만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백년해로하면서 잘 살고 싶었을 텐데 ……. 무려 다섯 번이나 반복된 결혼 실패가 가져다 준 고통과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 과정이야 어떠했든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수군 거렸습니다. “아니 글쎄 저 여자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대. 지금 사는 사람이랑은 정식 결혼도 안 했대. 차라리 혼자 살지 그게 뭐하는 짓이야.” 이런 말들이 비수처럼 다가와 여인의 아픈 상처를 더 크게 헤집어 놓았습니다. 이제 여인은 까칠함으로 무장을 하고 몸을 숨긴 채 이 지긋지긋한 삶을 지속해 나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28절 이후에 놀랍게 변한 여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제가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여러분도 제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로 와 보세요.” 대인기피증이 있던 여인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 먼저 나가서 큰 소리를 칠 수 있게 되었을까요?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삶에 활력이 넘치고 열정이 가득합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고 희망이 생겼습니다. 이 여인의 증거를 통해서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로 믿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부흥의 역사는 이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한 여인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어떻게 이렇게 놀랍게 변화될 수 있었을까요? 바로 그 비밀은 예수님과의 일대일이었습니다. 일대일의 원조는 UBF가 아닙니다. 예수님이십니다. 니고데모를 변화시킨 것도 일대일이었습니다. 일대일의 특징은 인격적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마음과 영혼 속으로 깊숙하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대일의 위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불과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보이는 단 한 번의 일대일을 통해서 한 여인의 인생을 변화시키신 가장 위대한 일대일 성경 선생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여인과 어떻게 일대일을 하셨을까요?


첫째로 예수님은 여인에게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게 될 때 사마리아 땅을 밟지 않으려고 요단 동편의 우회로를 선택했습니다. 비록 두 배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마리아인들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4절에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거꾸로 반드시 사마리아로 가야만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반드시 거쳐서 가시고자 하셨을까요? 바로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께서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 여기에서 성취되었습니다. “나에게 묻지 않은 사람들에게 내가 나를 나타내고 나를 찾지 않던 사람들에게 내가 발견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않은 나라에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있다.' 하였다.(사65:1, 현대인의 성경)”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 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관심은 오로지 이미 망가진 인생이지만 먹고 살기 위해 하루하루 꾸역꾸역 삶을 꾸려 나가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대와 사마리아 사이 장벽을 넘어 이 여인을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후 숨어버린 아담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며 먼저 찾아 오셨습니다. 또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던 아브라함을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얍복강 나루에 홀로 된 야곱을 먼저 찾아가 만나주신 분도, 호렙산에서 모세를 먼저 찾아가 만나주시고 부르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는 찾지 않던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 가서 만나 주신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이야기는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신 분이 육신이 되어 죄 많은 세상에 찾아오신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찾아오시지 않으셨다면 아무도 먼저 예수님을 찾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1988년 5월 교양관 벤치 앞에 앉아 있던 저를 예수님이 먼저 찾아오지 않으셨다면 저는 결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고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영혼을 살리는 일대일 역사는 먼저 찾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가만히 있는데 일대일 양이 제 발로 찾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번 학기 매주 목요일마다 보건대 런치 미팅이 이공대 캠퍼스에서 있습니다. 매주 안수진 사모님께서 맛있는 요리를 정성껏 준비해 도시락에 담아 직접 학교까지 가지고 오십니다. 처음에는 생활관 식당 한쪽 구석에서 미팅을 했는데 결국 식당 아줌마에게 발각되어 식당에서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수진 사모님에게 ‘힘들지 않으세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모님은 ‘괜찮아요. 양들이 집밥을 좋아해요. 이렇게 해서라도 한 말씀 듣게 해야 되지 않겠어요?’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마음이 우리를 먼저 찾아오신 예수님의 마음이 아닐까요? 이미 대학을 졸업한 학사 목자님들이 거의 한 세대 차이나는 양들을 만나기 위해 굳이 다시 캠퍼스를 찾을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캠퍼스 내에 팽배한 기독교에 대한 안티한 분위기를 고려해 볼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목자님들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결심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캠퍼스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왜냐하면 캠퍼스 저 어딘가에는 또 다른 사마리아 여인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몰라 헛된 것을 찾아 방황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나처럼 어둠 속에서 홀로 울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제 발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캠퍼스로 찾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봄학기 피싱역사를 통해서 바로 그 한 사람을 꼭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일대일 성경 공부를 통해 그 한 영혼이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실 유일한 분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겸손과 온유로 여인을 따뜻하게 영접해 주셨습니다. 여인을 먼저 찾아오신 예수님의 첫 마디가 무엇입니까? 7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한글 번역만 보면 예수님이 반발로 물을 달라고 명령하신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NIV 성경을 보면 지금 사마리아 여자에게 “Will you give me a drink(나에게 물 좀 주시겠습니까)?”  ‘나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시면서 아쉬운 소리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끝까지 다 보아도 예수님께서 물을 마시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이 꼭 물이 필요해서 여인에게 부탁하신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물을 좀 달라 하신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여인과 관계성을 맺기 위해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는 꼬투리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기서 예수님이 경계심 많은 이 여인에게 조금이라도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셨다면 여인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 자리에서 물 한 바가지를 끼얹고 도망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할 자리에까지 자신을 기꺼이 낮추셨습니다. 겸손함으로 굳게 닫힌 마음의 빗장을 여셨습니다. 빌립보서는 이 예수님의 겸손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그런데 겸손하신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만만하게 보였는지 그 다음 여인으로부터 갖가지 수모를 겪으셔야 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부드럽고 친절한 말로 접근을 시작했는데 상대방에서 이런 싸한 반응이 오면 참 당황스럽습니다. 어이가 없어 바로 말이 거칠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흥분하지 않으시고 차분하게 하나님의 선물과 생수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말했습니다.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습니까?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사람이 가장 기분 나쁠 때가 언제입니까? 남과 비교당할 때입니다. 특히 남자는 더 그렇습니다. 여자들이 종종 저지르는 실수입니다. 그냥 아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면 될 것을 꼭 엄마 친구 아들을 거론하는 바람에 속을 뒤집어 놓습니다. 야곱이 아무리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감히 예수님과 비교를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번에도 전혀 화를 내지 않으시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에 대해서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여인에게 네 남편을 불러 오라 했을 때 여인은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어디서 감히 거짓을 고하느냐? 당장 이실직고하지 않을까? 네가 물매를 맞아야 진실을 고하겠느냐?” 이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책망 한 마디 없이 여인의 말을 다 받아주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가슴둘레는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가슴이 얼마나 넓으시기에 이렇게까지 다 품어주시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겸손과 온유함으로 여인을 품으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해 주셨기에 여인은 위태위태하면서도 끝까지 예수님과 일대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여인의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끝까지 품어주실 수 있으셨을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여인의 내면을 깊이 이해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을 보고 “저 사람은 몹쓸 사람이야. 안 되겠어. 아예 이제부터는 상종을 말아야지.” 이렇게 판단하고 정죄해 버립니다. 그러나 쌩떽쥐베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진실은 마음의 눈으로 볼 때에만 보인다." 예수님은 까칠한 말로 상처 주는 여인의 내면 속에 깊은 상처로 얼룩 진 과거가 있음을 보셨습니다. 강해 보이는 여인 겉모습 속에 여리디 여린 마음이 있음을 보셨습니다. 겉으로는 남편의 사랑에 목마른 여인처럼 보이지만 사실 더 깊은 곳에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진정한 예배자가 되고 싶은 거룩한 갈망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과거와 현재를 훤히 다 알고 계셨습니다. 여인의 갈증도 아시고 죄도 아시고 여인의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예수님 앞에서 더 이상 감추거나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엉망이면 엉망인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오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해하시고 감당해 주시고 용납해 주시고 품어주십니다. 한 때 지하철 벽면에 걸린 적도 있는 과거 삭발했던 영블레싱 사모님의 사진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만약 일대일 목자님이 겉모습만 보고 판단했다면 부담되어 어떻게 일대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목자는 그 내면 속에 있는 깊은 갈망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먼저 다가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영블레싱 사모님이 계신 것입니다. 때로는 양들이 목자 앞에서 거칠게 반항하고 속 썩이곤 합니다. 그러나 그 뒷모습 속에는  진리를 알고 싶고 참된 사랑을 갈망하는 속사람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배워서 한 사람의 내면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목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감당해 주시고 참아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묵상하며 우리도 어떤 사람이라도 넉넉히 품고 섬길 수 있는 일대일 성경 선생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여인을 진리의 말씀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품어주고 감당해 주는 것만으로 한 사람이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한편 여인의 약점과 허물을 다 감당해 주시면서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진리를 분명하게 증거해 주셨습니다. 10절에서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13절과 14절에서는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또 23절에서는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고자 하시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다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 욕구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일 것입니다. 욕구를 채우려고 하는 것이 나쁜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욕망이 만족을 모르고 끊임없이 더 큰 만족을 향해 무한하게 팽창한다는 점입니다. 욕망이 채워졌을 때 만족은 그저 순간일 뿐입니다. 그 다음에는 더 큰 것을 얻어야 겨우 만족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그런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수고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힘들게 얻은 만족감 역시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아무리 채우고 또 채워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아서 늘 다시 목마릅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이 짧은 만족과 만족 사이의 기간을 권태라고 불렀습니다. 모든 인간은 권태에서 벗어서 만족을 얻기 위해 일생을 수고하고 애쓰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보면 삶의 대부분의 시간은 권태로운 시간이고 고통의 시간입니다. 일찍이 전도서 기자도 해 아래 벌어지는 이런 삶의 현실을 목도하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이런 헛된 욕망의 추구가 도를 넘게 되면 중독이라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도박이나 알콜, 마약 중독 등의 무거운 중독 현상만이 중독의 전부가 아닙니다. 많은 현대인들은 일 중독, TV 중독, 게임 중독, 인터넷 중독, SNS 중독, 쇼핑 중독, 음란물 중독, 스마트폰 중독 등등 무언가 하나씩에 중독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독이 되고 나면 더 이상 내가 욕망을 통제할 수 없게 됩니다. 오히려 욕망이 나를 지배하고 다스립니다. 욕망에 이끌려 결국은 해서는 안 되는 행동, 할 필요가 없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게 됩니다. 멈추고 싶어도 스스로 힘으로는 멈출 수 없게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 역시 사랑에 대한 목마름으로 시작된 욕망의 추구가 결국 다섯 번의 결혼과 한 번의 동거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인간의 욕망은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우리 삶을 파괴할 정도로 까지 커져만 가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무한하신 하나님으로만 채울 수 있는 빈 공간을 유한한 세상의 것들로 채우려하기 때문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당신은 스스로를 위하여 우리를 만드셨사오며 우리 마음은 주님 안에서만 안식을 발견하나이다.”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사람은 목마름과 권태와 중독의 악순환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2:13)” 터진 웅덩이에 물을 부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해결책은 단 하나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목마름의 문제는 결국 예배의 문제와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중독되어 있는 그 대상이 바로 우상입니다. 우상 숭배란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다른 것을 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목마름 문제는 남편이란 우상에서 떠나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만이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이 회복될 때 그 관계를 통해 위로부터 생수가 부어져 우리 영혼의 빈 공간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이런 만족함과 충만을 경험한 사람은 더 이상 헛된 세상 쾌락의 노예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대신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하나님을 찾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생수는 영생하도록 솟아나기에 결코 마르거나 끊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드리는 참된 예배를 통해서 우리 안에 하늘의 생수가 충만히 부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헛되고 헛된 것을 구해 방황하는 캠퍼스의 목마른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의 샘물을 발견하고 참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는 신부를 데려올 때 지참금으로 암소를 주던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자가 정말 아름답거나 경쟁이 치열할수록 암소의 마리수가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라 제일의 미녀 정도 되면 암소 4마리까지 받기도 하고, 결혼만 해주면 감지덕지한 여자에게는 한 마리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 이해 못할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데려가는 이가 아무도 없던 그 나라 최고의 추녀에게 한 남자가 암소 8마리를 주며 청혼을 한 것 입니다.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인 최고의 신부감에게도 4마리가 최고였는데, 8마리는 상상도 못할 놀라운 값을 치룬 셈 입니다. 사람들은 별 볼일 없는 추녀에게 왜 암소를 8마리나 주고 데려가는지, 그 남자가 미친 것이라 손가락질 했습니다. 얼마 뒤, 사람들 사이에는 또 다른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 남자가, 결국은 그 별 볼일 없던 추녀와 헤어지고, 미녀와 재혼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결국 그것보라며 괜한 짓을 한 것이라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남자의 부인인 나라 제일의 미녀는 예전의 그 추녀였습니다. 어떻게 나라 제일의 추녀가 그토록 아름다운 미녀로 변했는지에 대해 의아해하자, 그녀는 답했다고 합니다. "남편은 나를 세상에서 제일 특별한 여자로 여겼어요. 나처럼 암소 8마리를 받은 여자는 세상에 나뿐이에요." 


사마리아 여인에게 암소 8마리를 주었던 남편이 있었을까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그 중에 단 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암소 8마리 정도가 아니라 자기 생명을 다 내어주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이 여인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수를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목말라 방황하던 사마리아 여인의 참 남편이 되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영원토록 마르지 않을 생수의 근원이시요 유일한 경배의 대상이시며 구원자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자기 목숨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우리 구주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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