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물을 포도주로

이창무 2015. 4. 30.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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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요한복음 제 3 강  


물을 포도주로


말씀 / 요한복음 2:1-11

요절 / 요한복음 2: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사건은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때 아프리카 가나 선수단이 입장하는 장면에서 MBC 중계 화면에 ‘예수께서 첫 번째 기적을 행하신 나라’라는 자막이 나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방송 후에 이 ‘가나’가 그 ‘가나’가 아니라는 시청자들의 빗발치는 항의를 받아야 했습니다. 어설프게 알면 이런 큰 실수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그동안 G.B.S. 1강 말씀으로 또는 바이블 까페 주제 강의로 가장 선호하는 말씀이었기에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합니다. 그러나 이 친숙함이 오히려 우리가 이 말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 말씀 뿐 아니라 이번 학기 요한복음 말씀 전체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하여 봄 학기 요한복음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나타난 심오한 진리들을 어설프게 알지 말고 정확하고 깊이 있게 배워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갈릴리 가나라는 동네에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거기 있었습니다. 본문의 분위기로 봐서는 마리아가 단순히 하객으로 참석한 것 같지는 않고, 친척의 결혼식 잔치를 도와주기 위해 간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도 이 결혼식에 초청을 받았고 제자들까지 덤으로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요즘 웬만한 결혼식은 15분을 넘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 유대의 혼인 잔치는 무려 일주일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혼인 잔치의 키워드는 뭐니 뭐니 해도 기쁨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이보다 더 기쁘고 즐거운 이벤트가 있겠습니까? 기쁨이 있으려면 일단 먹을거리가 풍성해야 합니다. 이번 혼인 잔치의 모든 음식들은 김모세 주니어 목자님이 작성한 대동맛지도에서 추천 받은 맛집들에서만 특별히 주문했습니다. 저녁에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안암 비전 오케스트라의 축하 연주회가 이어졌습니다. 밤에는 수많은 폭죽이 터지며 형형색색의 불꽃을 하늘에 수놓았습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잔치집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술입니다. 유대에서는 약혼 기간이 일 년이었기 때문에 보통 약혼과 동시에 결혼식에 쓸 포도주를 담가 놓았다고 합니다. 하객들은 숙성이 잘 된 포도주를 마시며 즐거워하고, 잔치집의 분위기는 더욱 후끈 달아올랐습니다. 그런데 이 혼인 잔치집에 한 가지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포도주가 떨어지면 손님들은 주최 측의 준비 부족을 탓하고 원망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와중에 술에 거나하게 취한 몇몇 사람들이 일어나 깽판을 부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일순간에 훈훈했던 분위기가 급격하게 냉각되고 말 것입니다. 지금이야 얼른 대형 마트에 달려가서 사 올 수도 있겠지만 이때는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이대로 가면 혼인 잔치가 파국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이야기의 결말은 알고 있습니다. 10절에서 보듯이 이 잔치는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최상급 포도주가 제공됨으로써 해피엔딩으로 끝이 났습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가능했을까요? 여기에는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예수님과 마리아와 하인들만이 아는 비밀이 있었습니다. 기적을 만들어 내 그 비밀은 무엇이었을까요?


기적을 만들어 낸 첫 번째 비밀은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의 믿음이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발견한 마리아는 이를 예수님께 알렸습니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이 말은 단순히 포도주가 동이 났다는 말이 아니라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요청이 담겨 있는 말이었습니다. 만약 마리아가 예수님을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만 생각했다면 이런 요청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능력 있는 분으로 기대하고 믿었습니다. 어떻게 마리아에게 이런 믿음이 생겼을까요? 이는 예수님의 탄생 때에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계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마리아가 잉태할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구약에 나오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비슷한 상황에서 기적을 베푼 적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모세는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었고, 엘리야는 양식이 떨어진 과부의 집에서 기름과 밀가루가 끊임없이 나오게 하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은 모세나 엘리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면 어떤 모양으로든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마리아는 주인도 아니면서 혼인 잔치집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고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습니다. 참 아름다운 마음씨입니다. 또 예수님께 믿음으로 구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당연히 어머니의 요청에 즉각 ‘예스’하시며 들어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여자여" 일단 호칭부터 우리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여기서 여자라는 말이 원어에서 귀부인을 뜻하는 존칭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뭔가 어색합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거리를 두려고 하신다는 느낌이 듭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말씀은 완곡하면서도 분명한 거절의 의사 표시로 들립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반응을 보이셨을까요?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내 때'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십니다. 그 때마다 '내 때'는 십자가의 때를 말합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말씀은 아직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구속 역사를 완성하실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지금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잔치에 쓸 포도주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의미의 포도주를 이미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포도주는 바로 십자가에 흘리실 예수님 자신의 피, 언약의 피였습니다. 우리가 성찬식에서 포도주를 나누어 마시는 이유도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포도주 양조업자가 되려고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완성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마리아의 착한 아들로 살기 위해서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최우선적으로 성취하는 삶을 살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예수님 말씀에 담긴 이런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었을까요? 요한복음을 몇 번씩 공부한 우리도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이 당시 마리아가 이를 다 납득하고 이해하기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섭섭해 하고 예수님을 원망할 수 있었습니다. "‘여자여’라니! 우리가 남이가?" "뭐라고요? 상관이 없다니 해도 너무 하네." 이렇게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이 상황에서 마리아는 섭섭해 하지도 원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예수님의 대답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해했습니다.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말씀을 때가 이르면 해결해 주시겠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나서게 되실 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옆에서 도와 줄 하인들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하인들이 예수님의 어떤 말씀에도 순종할 수 있도록 마음을 미리 준비시켜 놓았습니다. 어떻게 마리아가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는지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분명히 합당한 이유와 선한 의도가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이 마리아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거절을 통과한 믿음입니다. 거절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진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합니다. 그러나 거절을 잘 소화하지 못하면 신뢰가 깨어지고 관계는 최악의 상태로 추락하고 맙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가인을 보십시오. 가인이 제물을 바쳤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제물을 거절하셨습니다. 이때 가인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4:5)' 가인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하실 수는 없어. 내가 동생 앞에서 이런 창피를 당해야겠어!'하면서 씩씩거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죄가 너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조심하라고 경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끝끝내 가인은 분을 참지 못하고 아벨을 돌로 쳐 죽이는 살인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가인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수 없는 제물을 드린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진짜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의 거절을 마치 부당한 일 인양 취급하고 하나님을 미워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요청을 거절하시는 것이 부당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셔서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무조건적으로 절대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들을 주신 분이 그 외에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 이 두 가지는 세상이 두 쪽이 난다 하더라도 우리가 절대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우리가 그 이유를 다 깨달아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행하심에는 전혀 불의가 없습니다. 


우리에겐 하나님께서 나를 중심으로 일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고연전이 열렸을 때 안암 센터 목자는 고대의 승리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연희 센타 목자는 연대의 승리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합니까? 고대가 승리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고 연대가 승리하면 미워하시는 것입니까? 짐 캐리가 주연했던 '브루스 올마이티'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바라는 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불평하던 주인공 브루스에게 하나님께서 일주일 동안 전능한 힘을 줄 테니 세상을 통치해 보라고 하십니다. 브루스는 신이 나서 사람들이 소원을 빌면 비는 대로 무조건 즉시 다 들어주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세상은 완전히 뒤죽박죽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 버렸습니다. 결국 브루스는 항복하고 하나님이 옳았음을 인정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지도록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뜻이 아니라 선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이 통치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장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거나 거절하신 듯 보일 때에도 하나님의 때에 이루실 줄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본문의 마리아처럼 원망하고 불평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일하실 때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가 거절을 통과한 참된 믿음의 소유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신뢰하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동역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적을 만들어 낸 두 번 째 비밀은 예수님을 향한 하인들의 순종이었습니다. 마리아가 하인들을 준비시키자 예수님께서는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직접 개입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먼저 하인들에게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둔 돌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채우도록 하셨습니다. 돌 항아리 여섯 개는 약 600 리터, 드럼통으로 세 드럼 정도 되는 양입니다.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이를 다 채우려면 적지 않는 수고가 필요했습니다. 혼인 잔치 집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하인들입니다. 혼인 잔치 집에서 제일 피곤한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하인들입니다. 이 바쁘고 피곤한 중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지금 잔치 집에 필요한 것은 포도주이지 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아 더욱 순종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하인들은 순종했습니다. 순종하되 억지로 대충대충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물을 아귀까지 채웠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자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일입니까? 연회장을 물 먹이는 일입니다. 먹는 물도 아니고 손 씻는 물입니다. 자칫하면 연회장을 모욕한 죄를 뒤집어쓰고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너무 위험해서 순종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하인들은 또 아무 군말 없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아무리 마리아가 마음을 준비시켰다고 하더라도 정말 놀라운 순종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연회장은 하인들이 건네 준 잔을 받아 마셨습니다. 그러자 코 속으로 산뜻한 와인의 향기가 올라왔습니다. 입 안에 한 모금 물자 감칠맛이 나는 최고급 와인이 느껴지면서 혀끝을 황홀하게 하였습니다. 이제껏 한 번도 맛 본 적이 없는 메이드 인 헤븐 천국산 포도주의 맛이었습니다. 물이 변해 포도주가 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로써 혼인 잔치 집은 큰 위기를 넘겼습니다. 오히려 최상급 포도주 때문에 모든 하객들의 칭찬이 쏟아지고 분위기는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항아리에 물을 채우느라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물로 된 포도주를 즐긴 사람은 연회장이었습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누가 번다는 속담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하인은 고생만 하고 남은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9절을 보십시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이 포도주가 물이 변하여 만들어졌다는 사실, 이런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 이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사실들을 알게 된 사람은 연회장이 아니라 하인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 줍니까? 예수님을 알고 경험하는 것은 열매를 즐기는 사람의 몫이 아니라 그 열매를 맺기 위해 순종하고 땀 흘린 사람의 몫이라는 사실입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연회장이 되시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섬기며 순종하는 하인이 되시겠습니까? 성공과 출세의 사다리를 올라가서 어디를 가나 주목 받는 삶을 살고 싶은 소원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낮아져서 섬기고 순종하는 삶은 미련하고 바보 같아 보여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기가 싫어합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하지만 실제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순종하며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운데 연회장이 되려 하지 않고 기꺼이 하인이 되고자 하는 많은 목자님들이 계심으로 인해 감사합니다. 시카고 안요셉 선교사님은 서울대 법대를 나온 수재요 한때 외교관이셨습니다. 그런데 안요셉 선교사님의 외무고시 동기 중에 UN의 반기문 사무총장이 계십니다. 만약 안요셉 선교사님이 성공의 사닥다리를 오르는 일에 자기의 모든 삶을 올인 하셨다면 지금 UN 사무총장의 명패에 반기문이 아니라 안요셉이라 쓰여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요셉 선교사님은 주님의 선교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외교관직을 미련 없이 버리셨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 나라의 대사가 되셔서 지금까지 미국 대학생들을 섬기는 일에 묵묵히 헌신하셨습니다. 안요셉 선교사님의 인생 소감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한때는 제가 큰 나무가 되기 위해 미국 양들을 비료로 삼으려할 때 아무리 애써도 양들이 모두 달아났는데, 회개하고 제가 비료가 되고, 미국학생들을 큰 나무로 키워야 되겠다 할 때 역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박철한 목자님이 처음에 성경 공부를 시작할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목자님들이 어떤 분들인가 듣고 나서 후덜덜 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 센타 목자님들도 한분 한분 알고 보면 참 대단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전혀 티를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대단한 분들입니다. 하나같이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뒤에서 조용히 섬기고자 합니다. 공부를 엄청나게 많이 한 지성인들이신데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단순하게 순종합니다. 저는 우리가 가진 능력의 원천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힘은 하나님의 말씀에 단순하게 순종하고 현장 속에서 뛰어 들어가 양들과 씨름하면서 섬기는 데서 나옵니다. 목자는 비어있는 돌항아리 같은 양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고자 합니다. 채우되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짜내서 아귀까지 채우고자 합니다. 이렇게 채워봐야 과연 변할까 싶지만 그래도 순종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채웁니다. 그렇게 했을 때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이 전혀 변할 것 같지 않던 사람도 변하여 새사람이 되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이런 단순한 순종과 섬김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깊이 알고 풍성하게 체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적을 만들어 낸 세 번째이자 결정적인 비밀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표적은 기적과는 다릅니다. 기적은 단지 신기하고 놀라운 일일 뿐입니다. 표적이란 그것을 행한 사람이 한 말을 증명하는 기적을 말합니다. 갈릴리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은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낸 첫 번째 표적이었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이 무엇을 입증해 줍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창조주시라는 사실입니다. 앞서 1장에서 요한은 만물이 예수님으로부터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증거하였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분 앞에서 모든 만물은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시인 바이런이 있습니다. 바이런이 케임브리지 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일 때, 신학 과목 학기말고사 논술시험 주제로 ‘가나 혼인 잔치에 대해 논하시오’라는 문제가 나온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이런은 답안지에 이 딱 한 문장을 쓰고 나갔다고 합니다. “물이 자기의 창조주를 보고 얼굴을 붉혔도다(Water saw its Creator and blushed).” 바이런은 이 한 문장으로 최고점 받았습니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표적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예수님은 우리에게 최상급의 기쁨을 주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잔치집에서 포도주는 기쁨을 상징합니다. 포도주 외에도 우리 삶에 기쁨을 주는 것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게임에서 기쁨을 얻습니다. 어떤 사람은 스포츠에서 기쁨을 얻습니다. 어떤 사람은 맛집에서 기쁨을, 어떤 사람은 수다를 떨면서 기쁨을 얻습니다. 각자가 가진 기쁨의 소스는 참 다양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그 기쁨이 바닥날 때가 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서도 잔치집에 기쁨을 주던 포도주가 다 떨어졌습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던 대상이 무엇이던 그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기쁘게 해주던 것들이 사라져 버릴 때 우리는 고통을 받습니다. ‘이제는 무슨 낙(樂)으로 사나?’하는 푸념이 나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곤경에 빠진 바로 그 때가 새로운 복의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최상급의 기쁨을 맛보게 될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은 무엇입니까? 구원의 기쁨, 죄사함의 기쁨, 영생의 기쁨,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로 완성된 최고의 기쁨입니다. 이제 다시는 고갈되는 일이 없을 영원한 기쁨입니다. 이런 기쁨을 누리길 원하십니까? C.S. 루이스는 '영광의 무게'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아마 주님은 우리의 갈망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시기는커녕 오히려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얼마나 한심한 피조물인지, 무한한 기쁨을 주겠노라는 제안을 듣고서도 그저 술이나 섹스나 야망 같은 것들이나 만지작거리면서 놀려고 하는 어리석은 피조물들입니다. 우리는 너무 시시한 것에 쉽게 만족해버립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더러운 것을 물로 씻어내는 정결 예식에 매달리는 유대교와 같은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천국산 포도주를 마시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술을 안 마셔도 술 마신 사람보다 더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고갈될 수밖에 없는 세상 기쁨에 만족하기보다 예수님 안에 있는 최고의 기쁨을 누리길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존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물을 가지고 시원한 얼음이나 뜨거운 수증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은 어디까지나 물일 뿐 물로 포도주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한계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수 있습니다. 질적인 변화,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질적인 변화, 근본적인 변화를 가리켜 재창조의 역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듯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목자가 양을 변화시킬 수 없고 부모가 자식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교육이나 제도도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심지어 내 자신도 나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오직 변화의 능력자 예수님만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5:17절에서 외쳤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는 마리아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고 싶은 소원, 하인과 같은 순종의 사람으로 변화되고 싶은 소원이 생겼습니다. 이런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세상에 기쁨을 주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역사에 쓰임 받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또한 저의 능력으로 될 일이 아닙니다. 오직 변화의 능력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저를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새 봄 학기 우리 가운데 주님의 능력으로 변하여 새사람 되는 역사가 많이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의 충만케 하여 주시고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경배하여 찬양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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