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창무 2015. 4. 30.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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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말씀 요한복음 21:1-25 

요절 요한복음 21: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즘 우리 사회는 경남기업 성완종 회장이 자살하면서 남긴 리스트 때문에 홍역을 앓고 있습니다. 성 회장은 그동안 정치권 실세들에게 돈을 주면서 인간관계를 형성해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비리 수사의 대상이 되고 나서 그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차갑게 외면을 당했다고 합니다. 배신감에 치를 떨게 되었고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서 복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배신과 복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배신 그러나 용서와 사랑과 회복’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바로 요한복음의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21장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속에 예수님의 사랑이 충만케 되고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후에 예수께서'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 후'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두 번 나타나셨던 사건을 의미합니다. 이 두 번의 만남을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아직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2절과 3절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를 포함한 일곱 명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디베랴 바다 근처에 모여 있었습니다. 디베랴 바다는 베드로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였습니다. 3년 전 베드로는 바로 이 디베랴 바다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5:10)."하시며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의지하여 이 바다 위를 두 발로 걸어가는 신비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나운 광풍을 말씀 한 마디로 잠잠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목격한 곳도 디베랴 바다였습니다. 돌 하나 풀 한 포기까지 어디 하나 예수님과의 추억이 서리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와 결정적인 차이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전처럼 제자들과 늘 함께 다니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잠깐 모습을 보이신 후 홀연히 사라지셨습니다. 제자들 역시 부활하셔서 영광스럽게 되신 주님 앞에 감히 전처럼 가까이 다가가기가 부담스러웠습니다. 뭔지 모를 거리감, 서먹서먹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대장인 베드로라면 다를 수 있었습니다. 평소 베드로의 성격대로라면 거침없이 주님께 나아가 자꾸 어디 가지 마시고 우리 회식 한 번 하자고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중에 가장 말이 없어진 사람이 있었으니 베드로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사실 베드로는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부둥켜 끌어안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있었던 일을 도저히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계집종 앞에서 무려 세 번 씩이나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그 일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주님을 부인했었습니다. 전날 주님을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했던 그 맹세는 부도난 수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살았던 사나이 베드로는 여기서 완전히 무너져 버렸습니다. 엎지른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듯이 예수님은 부활하셨지만 베드로의 실패는 여전히 실패로 남아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결국 모든 의욕을 상실한 채 슬픔과 절망감이 깊이 배인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먹고는 살아야지..." 다른 제자들도 별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함께 가겠다" 그러면 제자들이 배에 오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밤새도록 그물질을 반복했지만 피라미 새끼 한 마리조차 잡히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너 같은 실패자한테 내가 잡힐 줄 알았니?' 물고기들조차 자신을 이렇게 조롱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제자로서 실패했는데 어부로서도 참담한 실패였습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멍하니 어두운 밤바다를 바라보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셨던 한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정말 그랬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함께’가 아니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지난 3년 간 베드로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접붙여진 가지로 살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풍성한 은혜와 진리의 말씀을 공급 받을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삶에서 가장 충만하고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열매도 없어 보이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문득 베드로는 예수님이 너무 보고 싶어졌습니다. 나즈막한 목소리로 '예수님~' 하고 불러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뱃전을 치는 파도 소리뿐이었습니다.


다 같이 4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제자들이 생존의 바다를 깊은 어둠과 절망 속에서 헤매고 있던 바로 그 시간, 제자들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밤샘 작업에 서서히 지쳐가는 제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낙심하고 있는 제자들, 춥고 배고프고 서러운 제자들 곁에 예수님은 이미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5절과 6절을 보십시오(쉬운 성경). "친구들이여, 한 마리도 못 잡았느냐?" "네,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를 잡을 것이다." 제자들은 지친 몸을 추스려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졌습니다. 뭔가 묵직한 느낌이 왔습니다. 그물을 끌어올릴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나게 많은 고기들이 잡혔습니다. 백쉰세 마리의 물고기가 그물 안에서 펄떡거렸습니다. 바로 이때 요한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아니, 이 장면은 어디서 보았던 장면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처음 부르셨을 그 때와 너무 똑같았습니다. 곧 요한이 소리쳤습니다. "주님이시다!" 그 말과 거의 동시에 옆에서 '풍덩'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베드로가 물에  뛰어든 소리였습니다. 차가운 바다를 가르며 주님이 계신 해변을 향해 베드로는 전속력으로 헤엄을 쳤습니다. 그런데 헤엄치는 베드로의 모습이 이상했습니다. 좀 전까지 벗고 있던 겉옷을 두르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주님께 대한 예의를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여전히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해변에 도착하자 거기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피워놓으신 숯불이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숯불 위에는 생선과 떡이 먹음직스럽게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숯불을 보는 순간 움찔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그 날 새벽에 베드로는 바로 대제사장의 집 뜰에 피워둔 숯불 앞에서 몸을 녹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날 이후 숯불만 보면 베드로는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이 숯불처럼 빨갛게 달아올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그 뼈아픈 숯불의 기억을 아침상을 차려 주신 사랑의 숯불, 한 없이 따뜻한 주님의 심장과 같은 숯불의 기억으로 바꾸어 놓고 계셨습니다.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뻘쭘하게 서 있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자 어서 와. 아침 먹어야지. 많이 배고팠지? 추우니까 숯불 곁에서 몸도 녹이고 말이야." 그러나 제자들은 감히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너무 죄송하고 송구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17:18,20)" 제자들은 이 말씀을 따라 죄사함의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의 손에 들린 것은 복음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을 그물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 곁을 지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당부까지 외면해 버렸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차라리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해변에 집합시켜서 ‘엎드려뻗쳐’를 시키셨다면 속이 편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들 왜 그랬니?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니?" 이런 말씀조차 한 마디 없으셨습니다. 다만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실 뿐이었습니다. 말이 없으셔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지금도 변함없이 제자들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만 삼키고 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떡과 생선을 못 자국 난 손으로 가져다가 제자들의 입에 넣어 주셔야 했습니다. 


아일랜드의 베스트셀러 작가 세실리아 아헌의 ‘P.S. I love you’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를 우리말로 옮겨 본다면 ‘추신. 너를 사랑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21장은 요한복음서의 ‘P.S. I love you’ 아닐까 합니다. 마치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랑해’라고 남겨 놓으신 편지 말미의 추신 같습니다. 이 사랑은 어떤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막막하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끝없는 사랑(endless love), 변함없는 사랑(unchanged love)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러브 스토리가 참 많이 있습니다. 제 막내딸 예나가 좋아하는 공주 이야기는 모두 공주가 왕자와 결혼하여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동화가 아니라 현실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20년 후 왕자는 바람이 났고 공주는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가 차라리 현실에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본질상 조건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순수했던 사랑도 변질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때 사랑했던 감정이 미움이 되고 복수심으로까지 발전하곤 합니다. 세상의 사랑에는 유통 기한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3년 동안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고 키운 제자들이 배신을 했습니다. 십자가,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그 시간에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 없었습니다. 두 번씩이나 거듭 나타나셔서 부활하셨음을 나타내시고 사명을 주셨건만 제자들은 결국 물고기 잡으러 낙향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제대로 한번 본때를 보여 주셔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조용히 찾아오셔서 제자들의 실패를 만회시켜주셨습니다. 절망의 바다에 빠져 침몰하기 직전의 제자들을 건져내 주셨습니다. 손수 준비하신 떡과 생선으로 허기진 제자들의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실패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에는 유통 기한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 때문에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실패해도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인생은 결국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저께나 오늘이나 영원무궁히 한결같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예수님은 여러 제자들 중에서 시몬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베드로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죄, 제자들을 선동하여 물고기를 잡으러 가게 했던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수제자직에서 사표를 내야 할 때가 바로 이때가 아닌가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 음성은 부드럽고 따뜻했지만 베드로는 적지 않게 당황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시던 날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이렇게 장담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날 밤 닭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만약 예전의 베드로라면 단 일 초의 주저함도 없이 "당연하지요. 저만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 있으면 어디 나와 보라고요!"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제 도저히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너무나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아무 선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나를 전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 또한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주를 향한 베드로의 사랑은 베드로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먼저 사랑하셨기에 , 지난 3년 동안 이 한심한 베드로를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시고 섬겨주셨기에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는 주님께 대한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근거를 자기 자신에게 두지 않았습니다. "저도 저를 잘 모르겠습니다. 죽도록 충성할 자신은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바쳐 헌신하리라고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그 사실 하나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주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같은 질문을 세 번 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같은 대답을 세 번 하였습니다. 마지막 질문에 베드로는 조금 흔들렸습니다. "정말 내가 주님을 사랑할까? 혹시 나만의 착각은 아닐까?" 그러나 아무리 다시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가 주님께 세 번 사랑을 고백하므로 세 번의 배신이 모두 다 덮어졌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허물을 덮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베드로는 만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권면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서로 뜨겁게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그와 동시에 예수님은 역시 세 번에 걸쳐 베드로에게 자기 양을 부탁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예수님에게 양은 어떤 존재입니까?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예수님에게 양은 자기 목숨을 버려 피 값으로 사신 존재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한 사람의 영혼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신 이후에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계속해서 양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장차 다시 오셔서 양들을 영원한 주님의 나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귀한 양을 베드로에게 맡기실 때 예수님은 다른 것은 묻지 않으셨습니다. "열심히 할 수 있느냐" "다시는 배신하지 않겠다고 맹세할 수 있느냐" "능력은 되느냐" "스펙은 갖추었느냐" 묻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오직 사랑만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기초해서 목자의 사명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후에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라(벧전5:2)" 베드로가 어떻게 억지로 하지 않고 자원함으로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양 무리를 베드로에게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로서 실패하고 어부로서도 실패하고 완전히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베드로, 그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죽었던 열정이 살아났고 죽었던 꿈이 살아났습니다. 더 이상 뛰지 않던 베드로의 심장을 부활의 주님께서 다시 뛰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이제 후로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하셨던 그 처음 부르심이 회복되었습니다. 베드로라 이름을 바꾸어 주시고 장차 교회의 반석이요 기둥이 되리라 하셨던 그 비전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다시는 주님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18절과 1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초대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는 말년에 로마에 가서 교회를 섬겼다고 합니다. 그때 로마 황제 네로의 기독교인에 대한 대박해가 있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경기장에 끌려가 사자의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급히 베드로를 데리고 로마를 떠나 지중해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바로 그 때 베드로는 환상 중에 십자가를 지고 로마 쪽으로 걸어오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베드로가 놀라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님은 "네가 내 양을 버리고 로마를 떠나려 하니 내가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려고 로마로 들어가노라" 말씀하시고 어디론가 사라지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맡겨주신 양들을 도저히 버릴 수 없었습니다. 오던 길을 되돌려 다시 로마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군병들에게 잡혀 팔을 벌려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를 당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베드로는 내가 어찌 감히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죽을 수 있겠느냐며 거꾸로 된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를 청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한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13:37)'라고 장담한 적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첫 번째 기회에서는 이 말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두 번째 기회를 가졌고 자기가 한 말을 마침내 지킬 수 있었습니다.


흔히들 인간을 욕망하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제가 경영학을 배울 때 교수님들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해서 직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소비자들이 물건을 구매하도록 만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인간은 윤리적 존재라고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칸트 같은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옳습니다. 사람은 분명 때로는 욕망에 이끌려 때로는 의무감 때문에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욕망보다 더 강하고 의무보다 더 강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아가서 8장 6절은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다고 말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양을 맡기시기 전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셨겠습니까? 왜냐하면 이 세상에 사랑만큼 강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욕망이 그치고 의무감이 바닥날 때에도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사랑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잘 믿어서 복 받자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그저 해야 하니까 하자는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주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이전보다 더욱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고전13:2).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도 어떻게 다시 초대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그토록 치명적인 죄를 짓고 나서 어떻게 다시 다윗 언약의 주인공으로 회복될 수 있었습니까? 마음 중심에 주를 향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향하신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 끝없는 사랑을 알고 주를 향한 나의 사랑으로 반응하는 사람에게는 실패하더라도 회복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주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더 큰 사랑으로 가는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롬8:28). 그러므로 우리가 품어야 할 가장 큰 열망이 있다면 그것은 이전보다 더욱 주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평생에 힘쓸 큰 의무가 있다면 그것은 이전보다 더욱 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를 향한 우리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네 어린 양을 먹이라”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양 무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남겨주신 그 부탁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너희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우리가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주의 양 무리를 먹이는 일입니다. 물론 양을 먹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도 힘든데 어떻게 양까지 먹일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일대일 약속을 수시로 펑크 내고 옮기는 양 때문에 피곤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참고 양을 먹어야 하겠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전도 페스티발까지 해 가면서 꼭 양을 쳐야 하겠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양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먹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양은 내 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이요 예수님께서 자기 몸 버려 피 흘려 사신 양이기 때문입니다. 그 귀한 양을 우리 손에게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천국 가기가 두려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믿음의 선배들이 먼저 와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 믿음의 선배들에게 크게 혼이 날 것 같아 두렵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좋은 믿음의 유산을 너에게 물려주었건만 네가 다 말아 먹었구나!’하는 호통을 들을 것만 같습니다. 종교개혁자들, 한국에 온 선교사님들, UBF 신앙의 선배들에 비하면 저는 너무 부끄러워서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을 뿐입니다. 항상 제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질문은 ‘왜 이런 나를 목자로 부르셨을까?’입니다. 솔직히 답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확실히 아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저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도저히 그 사랑에는 비교할 수 없을지라도 저도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아무 자격은 없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부탁을 따라 일생 주님의 양들을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운명을 믿으십니까? 모든 운명을 믿지 않지만 단 한 가지 운명을 믿습니다. 예수님께 사랑 받고 예수님을 사랑할 운명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목자로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이 있다고 믿습니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우리를 일생 목자로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가 봄학기 주님께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며 주의 양 무리를 일대일로 먹이는 역사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2015.4.19, 이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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