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

이창무 2015. 4. 30.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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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 


말씀 / 요한복음 3:1-21

요절 / 요한복음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세상에는 저와 같이 평범한 사람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엄청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피겨 여왕 김연아 선수의 경기를 보다 보면 이것이 스포츠라는 사실을 잠시 잊게 되고 황홀한 예술 무대를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듭니다. 김연아 선수는 세계선수권 대회를 비롯해서 올림픽까지 출전한 모든 경기에서 단 한 번도 3위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는 세계 피겨 역사 상 유일한 선수입니다. 그런데 은퇴한 현재 나이가 겨우 25살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요즘 ‘넘사벽’이라고 부릅니다.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 니고데모도 그 당대에 넘사벽이라고 불리던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어떤 넘사벽도 넘을 수 없는 고차원의 세계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거듭남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거듭남의 진리를 발견하고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니고데모는 바리새인 중 한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바리새인을 우습게 하는데 바리새인이 되는 길이 결코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율법 교육을 받고 철저한 율법 준수를 서약하고 평생 이를 실천에 옮길 수 있어야 했습니다. 또한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지도자였습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라는 말은 72명으로 구성된 유대의 최상위 자치기구인 산헤드린의 공회원이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끼다니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란 직업이 교사라는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라는 뜻입니다. 니고데모의 트위터는 수십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니고데모가 트위터에 올린 한 마디는 곧바로 수도 없이 리트윗이 되어서 전파되었고 신문 기사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세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만 얻어도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이 세 가지를 모두 한 몸에 성취한 사람이었습니다. 니고데모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백성의 정복자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이 이름은 본명이 아니고 마치 조용필 씨를 가왕이라고 부르듯 주위 사람들이 헌정해 준 이름이 아닐까 합니다. 니고데모! 그 이름은 당시 모든 대학생들의 ‘워너비’였고 모든 스펙의 종결자였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왜 하필 밤에 왔을까요?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낮에는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웠을까요? 아니면 밤에 조용한 시간에 예수님과 깊은 대화를 하고 싶어서였을까요?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밤은 종종 내면의 어둠을 암시하는 말로 쓰입니다. 니고데모처럼 모든 것을 이룬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마음이 어두웠을까요?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인 줄 알고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이를 보면 니고데모는 무엇인가 그 동안 풀리지 않았던 문제를 예수님께 질문하고 ‘신의 한 수’를 얻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도대체 남모르는 니고데모만의 깊은 고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3절에 예수님의 대답을 보면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나라 문제를 고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 하나님의 통치를 뜻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아주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문제들의 뿌리에 죄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가 무엇입니까? 죄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부하는 반역입니다. 반역의 결과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성의 파괴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고 하나님을 느낄 수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구원이란 이 파괴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고, 다시 하나님의 다스리심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을 때의 모습을 한 마디로 샬롬 즉 평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아 모든 것이 다 본래 있어야 할 곳에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갔을 때 진정한 평안이 임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간절한 소망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니고데모도 그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철저한 율법 준수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배웠고 또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평생에 걸쳐 율법을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모세 오경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달달 외우고 있었습니다. 매주 안식일이 되면 숨만 쉬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야한 옷차림의 자매를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고 다니다가 전봇대에 부딪쳐 늘 이마에 혹을 달고 다녔습니다. 이런 처절한 노력이 헛되지 않아 바리새파의 대표 자격으로 산헤드린 공회원이 되었고 이스라엘의 선생으로까지 불리게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면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있어야 할 사람은 바로 니고데모였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전혀 하나님 나라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에 평안과 안식이 없었습니다. 니고데모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저 멀리 계신 분 같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행복에 관한 성경 말씀이 다 추상적으로만 들릴 뿐 도무지 경험되어지질 않았습니다. 하지만 명색이 선생으로서 자기 자신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이 말씀들을 가르쳐야 하니 더욱 괴로워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아무리 고민을 해 봐도 도대체 이 길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에 길이 있을지 답을 찾을 수 없어 답답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그 해답을 얻기 위해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이었습니다.


니고데모의 깊은 고민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첫째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성령님을 통해 거듭나야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는 이유가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셨습니다. 거듭남이 무엇입니까? 본문에 쓰인 거듭남이란 단어는 다시 태어남 또는 위로부터의 태어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 육체의 생명을 부모님으로부터 부여받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출생이 또 있습니다. 이 두 번째 출생을 통해서는 육체의 생명이 아닌 영적인 생명을, 위로부터 곧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그러면 거듭남으로 주어지는 영적 생명에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적 생명은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킵니다. 거듭남이란 말은 근본적인 변화,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을 내포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듭난 사람을 가리켜 새로운 피조물, 새사람이라 부릅니다. 그러면 거듭남은 어떤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까요? 예수님은 거듭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인 시각이 새롭게 열린다는 말입니다. 생명의 특징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거듭나면 전에 없었던 영적인 감각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하고 은혜에 대한 목마름이 생겨나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예전에는 별 감흥 없이 부르던 찬송의 가사가 다 지금 내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 주는 것 같아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생명의 또 다른 특징은 반응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거듭난 사람에게는 회개와 감사와 찬양의 반응들이 나타납니다. 이는 억지로 쥐어짜낸 형식적인 반응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영적인 생명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반응들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합니다. 인간 중심, 내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신 삶으로 변화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 나라에서만 맛볼 수 있는 참된 평안과 기쁨과 만족을 충만히 누리게 됩니다.


둘째, 거듭남으로 주어진 이 영적 생명은 다시 잃어버릴 수 없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첫 번째 출생으로 얻은 육적인 생명은 때가 되면 언젠가는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한시적인 생명입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는 각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모두가 다 죽을 운명이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주어진 영적 생명은 영원합니다. 한 번 얻은 영적 생명을 다시 잃어버릴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 번 거듭난 사람이 또 다시 거듭나는 일은 없습니다. 거듭나는 순간 이미 사망의 나라에서 생명의 나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살면서 약해질 때가 있듯이 거듭난 사람도 영적으로도 연약해질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연약한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깊은 영적 침체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혹시 나는 거듭나지 못한 것이 아닐까?’하는 고민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민을 한다는 자체가 그 사람이 거듭났다는 증거입니다.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았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알기 때문에 혹시 잃어버리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아예 거듭남에 대해 별 고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침체에 빠졌을 때는 내가 거듭났을까를 고민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시작하신 구원을 반드시 끝까지 이루실 줄을 믿고 신뢰하는 편이 훨씬 유익합니다. 한때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이라는 책이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은 없습니다. 다만 크리스천인 듯 보였으나 사실은 거듭난 적이 없는 사이비 크리스천이 있을 뿐입니다. 한 번 거듭나게 하신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다시 버리지 않습니다.


거듭남이 없으면 영적으로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거듭남은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역사입니다. 성령은 본래 생명을 주시는 영이십니다. 창조 때에 혼돈하고 공허한 땅을 암탉이 알을 품듯이 품으시고 생명을 낳게 하신 분이 성령이십니다. 또 처녀 마리아에게 예수님을 잉태케 한 분도 성령이십니다. 새로운 영적 생명을 탄생시키는 거듭남 역시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영역은 딱 여기까지입니다. 8절에서 예수님은 성령의 역사를 바람에 비유하셨습니다. 사실 원어로 보면 성령과 바람은 똑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만큼 성령과 바람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바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바람은 자기 마음대로 이리 저리 불어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도 자기 뜻대로 역사하십니다. 거듭남은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일방적으로 행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참으로 놀랍고도 신비한 역사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태어나는 순간에 말할 수 없는 신비와 경이를 느끼곤 합니다. 육적 탄생이 이런데 하물며 한 사람이 영적인 탄생을 하는 일은 더욱 신비하고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니고데모는 자기의 지식과 경험의 잣대로만 신비한 거듭남의 역사를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와야 하느냐고 묻기도 하고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반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스라엘의 선생인데도 어째서 이 기초적인 진리조차 깨닫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무지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증언을 고의적으로 받지 않으려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니고데모가 거듭남의 진리에 반발했을까요? 예수님의 답변이 니고데모가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지금까지 자기가 쌓아왔던 것을 바탕으로 하여 여기에 무언가를 하나 더 얹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 무언가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지금까지 늘 그래왔던 것처럼 나의 의지와 성실과 노력으로 감당할 용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새 출발을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니고데모의 모든 삶은 아무리 그 성취가 탁월하다 할지라도 모두 자신을 중심으로 한 육에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 전혀 유익이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니고데모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 되었겠습니까? 더 나아가 니고데모가 알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성령의 일하심에 자신을 활짝 열어 놓으라는 말씀에 두려움마저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익숙한 세계를 좋아합니다. 익숙한 세계는 내가 통제할 수 있고 내가 예측 가능한 세계입니다. 이 세계 속에서는 노력과 보상이라는 율법의 원리가 작동됩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다 내가 하기 나름입니다. 그러나 영의 세계에서는 은혜의 원리가 작동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는 세계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머리로는 다 파악할 수 없는 신비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꿈의 나라 같은 것이 아니라 거듭난 사람에게는 생생하게 경험되어지는 실재하는 세계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영의 세계로,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려면 자기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고 말씀 앞에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현대 물리학이 왜 어려운 줄 아십니까?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너무 큰 세계 혹은 너무 작은 세계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가르치는 교수님들이 흔히 하는 말로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려면 머리가 한번 개조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실험으로 완벽하게 검증이 된 양자 역학도 우리가 들어보면 너무 이상합니다. 하물며 온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의 세계를 우리가 어떻게 다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겐 내가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하면 될 것을 없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 내 생각만을 고집하고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한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이룬 것이 많거나 많으리라고 자신하는 사람일수록 또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기 세계가 더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깨져야 합니다. 자기 세계가 깨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내가 경험한 육의 세계, 자기 세계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진리의 말씀 앞에 마음을 활짝 열고 영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에 깊이 들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좀처럼 거듭남의 진리 앞에 마음을 열지 못하는 니고데모를 보시고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니고데모도 잘 아는 민수기 21장 모세의 놋뱀 사건을 통해 구원의 도리를 설명해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돔 광야를 지나갈 때였습니다. 백성들은 길이 험하다고 투덜대며 하나님께 그 길보다 더 험한 말로 불평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뱀에 물린 고통이 얼마나 심했기에 불뱀이라고 했을까요? 이제 백성들은 불뱀에 물려 다 죽게 생겼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받아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았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불뱀에 물린 자들은 이 놋뱀을 바라보면 낫는다고 선포했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놋뱀을 바라보면 나을 수 있느냐’며 믿지 못했습니다. 위로 고개를 들어 놋뱀을 보느니 차라리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불뱀을 피하는 편이 더 살 확률이 높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다만 말씀을 믿고 높이 들린 놋뱀을 바라본 사람은 다 나음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불뱀은 죄의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성격을 드러내줍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죄는 불같은 고통과 죽음을 가져옵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어떤 사람도 거듭나 영생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놋뱀처럼 십자가에 달려 높이 들리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볼 때 영생을 얻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에서 우리 죄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린 자가 되셨습니다.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에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는 이제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차라리 율법을 지키는 길이 더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율법의 의를 이미 다 이루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만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거듭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그러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 단 하나뿐인 유일한 아들이십니다. 부모에게 자식만큼 귀한 존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물며 외아들이라면 얼마나 더 귀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장 귀한 독생자를 세상에 주셨습니다.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하나님께 반역을 저지른 죄악된 세상입니다. 멸망 받아 마땅한 세상입니다. 사랑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을 멸망에서 건져내시고 영생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주시되 저주 받은 형틀인 십자가에까지 내어주셨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비합리적이고 무모한 사랑입니다. 우리의 상식과 경험을 초월하는 놀라운 사랑입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가 다 기록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더 이상 무슨 다른 증거가 필요하겠습니까? 로마서 5장 8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제 남은 것은 우리의 응답 뿐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냐 영원한 멸망이냐는 독생자 예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를 거절하는 것은 스스로 영생을 거절하는 것이요 심판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하나님이 보이신 사랑의 증거를 믿지 않고 빛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빛으로 나오면 자기 죄가 드러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빛으로 나오면 어두운 곳에서 더 이상 죄를 즐길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면 어차피 모든 것이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가서 죄 문제를 해결 받으려 하면 너무 늦습니다. 바로 지금 빛 가운데로 나와야 합니다. 일시적으로 자신의 추한 모습이 드러나는 아픔이 있겠지만 그 후에는 놀라운 사죄의 은혜가 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영생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제가 딱 10년 전에 썼던 ‘고슴도치 스토리’라는 시가 있습니다. 시의 제목에 나오는 고슴도치가 누구였을까요? 바로 과거의 제 모습이었습니다. 살다보니 가시로 찌르듯이 저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나를 보호하려고 가시를 박아 넣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보니 제 모습이 꼭 고슴도치 같았습니다. 이제 누구를 사랑할 수도 누구의 사랑을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런 저를 하나님은 대학생 때 목자님을 통해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을 가장 무섭고 큰 가시로 죄인을 심판하는 고슴도치의 대왕쯤으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누구의 사랑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를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제게 사랑의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증거는 단 하나 뿐인 당신의 외아들이었습니다. 이 명백한 증거 앞에 저는 무장 해제하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내 안에 있던 날카로운 가시가 떨어져 나가고 두터운 가죽을 벗겨졌습니다. 저는 고슴도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거듭났습니다. 용서가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되었고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지금까지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은 제 영혼에 새겨진 가장 귀한 말씀이 되었습니다. 저를 고슴도치에서 사람이 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들은 니고데모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거듭나서 영생을 얻었을까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요한복음 7장에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했을 때 니고데모가 등장하여 예수님을 변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 요한복음 19장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그 시신을 장사하는데 필요한 몰약과 침향을 들고 니고데모가 다시 한 번 더 등장합니다. 두 번 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혀서 왕따를 당할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행동들이었습니다. 이런 용기가 어디에서 났겠습니까? 니고데모가 거듭나지 하나님 나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높이 들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과 나누었던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리스도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마침내 니고데모를 항복시켰습니다. 이 사랑 앞에 저도 항복했고 우리 모두가 항복했습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아무 자격 없는 우리에게 가장 귀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부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일생 이 은혜와 사랑의 증인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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