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생명의 떡을 먹으라

이창무 2015. 5. 17.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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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떡을 먹으라


말씀 / 요한복음 6:22-71

요절 / 요한복음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지난 주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에 대해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 오병이어 사건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그런데 60절을 보면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우리 중에도 이 말씀이 어렵다고 느껴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은 어려운 말씀이 아닙니다. 믿고 영접하려는 사람에는 쉬운 말씀입니다. 다만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니까 점점 복잡해지고 어려워질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진리를 단순하게 믿고 영접함으로 오늘 말씀이 주리고 갈급한 우리 영혼에 생명의 양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 일어난 이튿날이었습니다. 밤 사이에 예수님은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타고 있던 배에 합류하셨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이 사실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배는 한 척 밖에 없었고 제자들 끼리 그 배를 타고 갔으니 예수님은 여기에 계셔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예수님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무리들은 혹시나 해서 다른 배들을 빌려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왔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는 바이블 아카데미를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이렇게 외쳤습니다.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이 말 속에는 배도 없이 예수님이 어떻게 여기까지 건너오셨는지에 대한 의아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또한 드디어 예수님을 찾아냈다는 반가움도 담겨져 있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몰려든 무리들 때문에 회당 안에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의 이 몹쓸 인기는 도무지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럽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은 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을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 예수님은 무리들의 동기가 비뚤어져 있음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겉보기에 무리들은 예수님을 열심히 찾고 있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주실 떡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리들이 이렇게 떡에 목을 매는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할만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에 한 끼 밖에 먹지 못했습니다. 그 정도로 로마 식민 치하의 시대 형편이 말이 아니게 어려웠던 것입니다. 무리들은 늘 배가 고팠습니다. 예수님도 이런 무리들의 처지를 깊이 이해하시고 동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배고픈 무리들을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리들이 그 지점에서 멈추어 버렸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병이어 사건이라는 표적을 통해서 무리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믿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표적을 보여주신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표적의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 한번 더 배불리 먹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이들을 향해 예수님은 분명한 방향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27절을 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여기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는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이 육의 양식을 아예 구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직업을 갖거나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해야 함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여기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는 말씀은 육의 양식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육의 양식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입니다. 무엇을 위한 수단입니까? 바로 영의 양식을 먹고 누리는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무리들이 처음부터 영의 양식에 대한 갈급함으로 주님께 나아오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반드시 육의 양식에서 영의 양식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할 시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방향 전환을 이끌어 내시기 위해 무리들에게 도전하셨습니다. 사실 이 도전은 위험한 도전이었습니다. 자칫하면 사람들이 다 떠나가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이 무모한 도전을 더 이상 뒤로 미루실 수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영의 양식을 전혀 모르고 육의 한계에 갇혀 사는 무리들을 보실 때 주님은 너무나 안타까워 마음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만 먹고 사는 문제가 심각했을까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먹고 살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등바등 살아도 좀처럼 살림살이가 펴지지 않습니다. 요즘엔 청년 실업 문제가 특히 심각합니다. 지난 달 통계청이 발표한 청년 실업률은 10.7 %로 통계에 정비된 2000년 이후 15년만의 최대수치라고 합니다. 겨우겨우 취업을 하더라도 대부분의 일자리가 비정규직입니다. 임금도 적고 언제 잘릴지 몰라 불안합니다. 거기에다가 요즘엔 노년층의 빈곤 문제가 새로운 사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제기동 주변만 보아도 하루 종일 폐지를 주워 몇 천원을 벌어서 하루하루 생활하시는 노인 분들을 종종 만날 수 있습니다. 그마저도 정부가 고물상을 모두 시 외곽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추진 중이라 앞으로 어려워질 듯 하다고 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선거를 할 때마다 항상 경제 문제가 핫이슈가 됩니다. 누가 더 정의로운가? 어떻게 양심적인 나라를 만들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이 이슈가 되는 선거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무상급식을 해야 하는가? 받을 사람은 많아지고 낼 사람은 줄어드는 공무원 연금, 국민 연금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등 모두 이슈가 다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예수님이 먹고 살 걱정 없게 해 주시고 부자 되게 해 주신다는 확실한 보장만 있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교회에 사람들이 차고 넘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말씀이 지금 우리들보다 더 가난하고 더 삶이 팍팍했던 사람들을 향해 주셨던 말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다 해도 적어도 우리는 하루에 세 끼를 먹고 살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해서 먹고 살기는 해야 하지만 그보다도 더 갈급하게 구해야 할 것은 하늘의 양식입니다. 지금보다 더 열렬히 영의 양식을 사모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주시는 영의 양식을 먹어야 우리가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가진 인간은 영의 양식이 없이는 진정으로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영의 양식을 먹으면 아무리 현실이 어려워도 힘이 나고 만족이 있고 기쁨이 생깁니다. 남들이 다 그렇게 산다고 해서 나까지 썩을 양식만을 추구한다면 결국 내 삶을 허무한 것에 굴복시켜 스스로 망치는 일입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썩을 양식만을 추구하는 이 땅의 현실에 매몰되지 말고 여기에 도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를 돌아볼 때 제가 맨날 나 힘들다 너 힘들겠구나 하는 소리만 했지 영의 양식을 먼저 추구하도록 도전하려는 의지가 너무나 약했음을 발견합니다. 자녀들에게 앞으로 먹고 살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소리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면서 네가 살려면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말은 그에 미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또 학생 제자들을 도우면서도 바쁘겠지 힘들겠지 어렵겠지 하면서 정작 이 시기에 꼭 받아야할 믿음의 훈련, 제자 훈련에 감히 도전해 볼 엄두를 내지 못한 적이 참 많았습니다. 이래가지고 내가 과연 그리스도의 정예 군사를 낳고 키우는 목자로 쓰임 받을 수 있을까 싶습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정신 차려서 새롭게 도전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가장 먼저 도전할 상대는 제 자신입니다. 그 동안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는 이 주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현실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자 했던 자신에게 도전을 해야겠습니다. 또 자녀들을 키우거나 양들을 섬길 때도 힘들고 척박한 현실을 깊이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영의 양식을 간절히 찾고 구할 수 있도록 도전을 해야겠습니다. 


구체적으로 날마다 일용할 양식 먹기에 도전을 하고자 합니다. 그 동안 우리에게 영의 양식을 날마다 먹는 통로 역할을 해온 것이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 삼시 세끼를 챙겨 먹듯이 양식 말씀을 매일 먹으면서 거기에서 힘을 얻었고 삶의 방향을 발견해 왔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잘 먹고 있는 것입니까? 실상을 서로 다 알지만 감히 드러내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먹고 사느라 바쁘고 힘들고 지쳐서 그럴만한 여유가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들어 양식 먹기에 도전하지 않고 지나쳐 버리는 동안 우리 영혼은 점점 비쩍 말라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당장은 눈에 띄는 변화가 없을지 몰라도 영의 양식을 먹지 못한 영혼은 언젠가는 깊은 영적 침체를 피해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밥이 보약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보약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계기로 날마다 일용할 양식 먹기에 다시 한 번 도전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한동안 제가 먹은 일용할 양식 말씀을 매일 요회 카톡방에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만 올리고 별 반응이 없길래 한참 쉬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반응이 있거나 없거나 계속 양식 말씀을 카톡으로 나누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 저도 안 먹으면 바로 티가 나서 어떻게 하든 먹게 되고 또 요회 식구들과 함께 말씀을 나눌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닌가 합니다. 우리가 하루 세끼 밥만 챙겨 먹을 것이 아니라 날마다 일용할 양식 말씀을 꾸준히 챙겨 먹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서 썩을 양식에만 매달려 있는 이 시대에 도전하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 주는 만족과 기쁨을 날마다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무리들은 어떻게 응답하였습니까? 무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어제는 공짜였지만 오늘은 일을 해야 양식을 준다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해야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얻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2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니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는 영의 양식은 사람이 행한 어떤 일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영의 양식은 사람이 예수님을 신뢰하는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이런 깊은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보고 당신을 믿으라고요? 그러면 우리가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증거를 보여 주세요. 모세가 조상들에게 만나를 주어 먹였듯이 당신이 우리에게 먹을 것을 준다면 함 믿어 볼게요. 아시겠죠? 먹을 것!" 이 무리들은 정말 집요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결국에는 먹을 것으로 골인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도 만만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무리들이 갖고 있는 두 가지 오해를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는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셨다는 사실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만나는 장차 세상에 생명을 주려고 하늘에서 내려올 참 떡에 대한 그림자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만나는 일종의 에피타이저였습니다. 에피타이저를 먹었으면 그 다음에 메인 디쉬를 먹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무리들은 어떤 요구를 했습니까?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34)" 메인 디쉬는 다 필요없으니 에피타이저나 항상 끊이지 않게 해달라고 계속 투정을 부렸습니다. 만나나 오병이어가 에피타이져라면 그럼 메인 디쉬는 무엇이겠습니까? 


3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하늘에서 내려 온 생명의 떡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떡타령은 이제 그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로 나아오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와서 예수님을 믿으면 만족과 기쁨과 풍성함이 있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현재 무리들의 상태를 보면 과연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 올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지 정말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낙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비록 많지는 않더라도 반드시 있을 것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역시나 무리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믿는 대신 '저 양반이 요셉의 아들인줄 우리가 다 아는데 하늘에서 왔다는 게 말이 돼?'하면서 궁시렁궁시렁 거렸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무리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43)" 예수님도 이제 좀 지쳐 보이셨습니다. 그들은 믿지 않기로 굳은 결심을 한 사람들 같았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최후의 수단을 동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 최후의 수단은 다름 아니라 십자가였습니다. 


51절을 보십시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은 세상에 생명을 주시려고 자신의 몸을 찢어 그 살을 내어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이 일이 바로 주님이 달려 죽으실 십자가에 일어날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이 십자가 사랑으로 무리들의 마음이 녹아 예수님을 믿고 영생 얻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우리가 무슨 식인종이냐?'하면서 또 믿기를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번 더 호소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는 내가 그들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53-55)"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고자 하셨지만 무리들은 떡을 원했습니다. 결국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한 무리들은 뿔뿔이 다 흩어졌습니다. 곧 무리들의 카톡방에는 이런 글들이 줄줄이 올라왔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진짜 실망했다.' '말씀을 들어보니 예수님은 제 정신이 아니신 것이 틀림없더라.' 이렇게 무리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제자들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니 오늘 예수님의 표현이 너무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살짝 그로테스크하다는 느낌까지 들게 합니다. 그냥 무난하게 예수님을 영접한다 또는 예수님과 함께 한다 이 정도로 해도 될 것 같은데 굳이 왜 먹고 마신다는 표현을 사용하셨을까요? 그런데 이 표현 속에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진실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먼저 음식을 입 안에서 꼭꼭 씹습니다. 그리고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들어갑니다. 위장에 들어간 음식물은 곧 각종 소화 효소에 의해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에너지원이나 성분으로 분해됩니다. 이것들이 피를 타고 온 몸 구석구석 안 가는 곳이 없이 다 전달이 됩니다. 이때 우리가 먹었던 음식은 우리 몸의 일부가 된 셈입니다. 어디까지가 음식이고 어디까지가 원래 나였는지 구분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렇게 음식이 완전히 분해되고 소화되고 나서야 우리가 움직이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습니다. 또 아이들은 밥을 잘 먹어야 쑥쑥 크고 건강해집니다. 반면에 우리는 음식을 가지고 먹지는 않고 살짝 맛만 볼 수도 있습니다. 간에 기별도 안 가게 아주 조금만 먹어 보거나 삼키지 않고 맛만 보고 뱉기도 합니다. 맛보기만 해서는 즐길 수는 있을지 몰라도 힘을 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맛만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과 피상적인 관계만을 맺고 그리고 거기서 멈추어 버립니다. 예배에 와서는 예배를 감상하고 갑니다. 오늘은 메시지가 어떠했고 특주는 어떠했고 맛을 품평하고 끝납니다. 소감을 쓰지만 말씀이 내 심령에 와서 부딪쳐 나를 뒤집어 놓고 변화시키는 경험은 잘 없습니다. 세상에는 이 정도만 해도 신앙생활을 꽤 잘 하고 있다고 만족해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을 예수님을 먹고 마셨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와 이런 관계 맺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하실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와서 나의 살을 먹고 나의 피를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있는 다른 표현으로 나타내면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관계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시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님과의 피상적인 관계에 머무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의 하나됨을 추구합니다. 예배에 나올 때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하늘 양식에 대한 갈급함으로 나아옵니다. 그리고 말씀을 스폰지처럼 흡수하고 빨아들여서 예배가 끝난 후에는 영혼이 배부른 상태로 돌아갑니다. 소감을 쓸 때 내 심령이 말씀에 사로 잡힐 때까지 투쟁합니다. 영의 양식을 내게 풍성히 내려 주시도록 수시로 기도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영적인 파워가 생깁니다. 사탄의 시험과 유혹을 이길 힘이 생기고 환란을 극복할 능력을 얻습니다. 위로부터 임하는 하늘의 복을 풍성하게 누리기 때문에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있고 만족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볼 때 그 모든 풍성한 은혜와 복 중에서 특별히 더 간절히 사모해야 할 것이 바로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살과 내 피을 먹고 마시라고 하신 것은 우리 십자가를 붙들어야 함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가 얼마나 메마르게 되는지 경험해 봐서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의 은혜를 내려주시길 구해야 합니다. 


미국 네비게이토 선교회를 맡고 있는 제리 브리지스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이 쓴 여러 권의 책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권면이 하나 있습니다. “날마다 자기 자신에게 복음을 전하라”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기에 앞서 날마다 자기 자신에게 먼저 복음을 특별히 십자가 복음을 전해 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분은 아침마다 면도를 하려고 거울 앞에 섰을 때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향해 복음을 전한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십자가 은혜를 붙들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자신의 경건의 비결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한 번 따라 해 보면 참 좋지 않을까요?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가 피상적인 관계를 넘어서 온전한 연합에까지 이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특별히 날마다 십자가의 은혜를 붙들어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에게 주는 생명을 풍성히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60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떠난 후 남아 있던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예수님이 무슨 어려운 단어나 현학적인 표현을 쓰셨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왜 그들에게 어려웠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이유를 일러주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니라(63)" 예수님은 영의 세계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 제자들은 육의 세계에 계속 머물러 있으려고 하니 이해할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을 경험하려면 새롭게 영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떠야했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주여. 지금까지 저희는 영적인 소경이었습니다. 우리가 눈을 떠서 생명과 영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66절을 보십시오. 그 때부터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망했네" "그러게 살살 좀 말씀하시지 아까부터 너무 세게 나오시더라구" 그러나 예수님은 떠나는 제자들을 붙잡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진리를 타협하고 적당히 육신에서 나온 요구들을 들어주셨다면 그들은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들었던 제자들을 떠나 보내는 아픔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진리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결코 한 치라도 타협할 마음이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남아있던 열두 제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 말씀 속에서는 왠지 모를 쓸쓸함이 묻어나오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때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대답을 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제가 보기에 이 말은 베드로가 한 모든 말 중에 최고로 멋진 말이었습니다. 그러면 떠나간 제자들과 남아 있는 제자들의 결정적 차이가 무엇입니까? 바로 영생의 말씀을 경험해 보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차이였습니다. 열두 제자들이 떠나간 제자들에 비해 인간적으로 딱히 더 훌륭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 안에는 영생의 말씀이 계시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경험하였습니다. 비록 밥이 나오지도 떡이 나오지도 않는다 하여도 영생의 말씀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영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Born once die twice, born twice die once.” “한 번 태어난 사람은 두 번 죽고, 두 번 태어난 사람은 한 번 죽는다.”는 말입니다. 육의 탄생은 한 번 경험했지만 거듭남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결국 육신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이라는 두 번의 죽음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거듭나서 영의 세계에 눈을 뜬 사람은 육신의 죽음을 한 번 경험할 뿐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다시 죽음이 없습니다. 


우리 안암 1부의 목자님들을 둘러 보십시오. 이 분들 중에는 썩을 양식을 위해서 살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사실 수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제 경영학과 동기들 중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씩 좀 씁쓸할 때는 있어도 예수님을 따르고 배우고자 했던 지나온 길에 대해 후회는 없습니다. 또한 앞으로 이 길 외에 다른 길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생전에 제 어머니께서 저에게 늘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언제까지 맨날 성경만 보고 그럴 거냐? 그런다고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그렇습니다. 밥도 안 나오고 떡도 안 나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 길을 계속 갈 것입니다. 왜입니까?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영생의 말씀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잘 나서 똑똑해서 알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은혜로 우리를 택하셔서 거듭나게 하시고 말씀의 세계 , 영적 생명의 세계를 알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알지 못했던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따르면 밥도 나오고 떡도 나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썩을 양식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주시는 이 생명의 양식을 풍성히 먹고 새 힘을 얻고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복지에 대한 말들을 참 많이 합니다. 우리가 복지 국가를 이루는 것은 필요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또 이번에 지진 피해를 입은 네팔에 구호 물품을 보내어 돕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여기에 구제 헌금으로 동참할 예정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주님께서 교회에 주신 제 일의 사명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영생의 말씀을 나누도록 부르셨지 복지 기구나 구호 단체를 운영하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도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세상에 나누어 주도록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영의 양식을 모르고 여전히 육의 양식에 매여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는 이 시대 캠퍼스 양들에게 생명의 떡 예수님을 널리 증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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