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이창무 2015. 5. 25.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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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말씀 / 요한복음 7:14-39

요절 / 요한복음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에 보면 저자가 어떻게 예수님을 처음 믿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영문학자인 루이스는 복음서를 정독한 후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아니면 미치광이이거나 아니면 사기꾼이거나 이 세 가지 중 하나이다.” 사실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얼마나 엄청난 말씀들을 많이 하셨습니까? 오늘 말씀에서도 내가 하늘에서부터 내려 왔고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엄청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미치광이거나 사기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루이스는 복음서를 더 꼼꼼하게 읽어 본 후에 이렇게 최종 결론을 얻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예수님은 미치광이는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도저히 미친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더더욱 사기꾼도 아니다. 그가 자기가 한 말로 얻을 유익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단 하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틀림없다.” 누구나 복음서를 정직하게 읽는다면 C.S. 루이스와 똑같은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 안에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것이 우리 모두의 생생한 고백과 경험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유대의 명절인 초막절이 중반을 지날 무렵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셔서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을 들은 유대인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그들은 크게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막1:22). 당시 서기관들이 가르칠 때는 유명 랍비의 말을 줄줄이 인용하여 나열하는 방식이 정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방식은 전혀 달랐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6:35)” 예수님이 아니고서야 누가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무리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참 의아했습니다.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15)" 예수님에게는 대학 졸업장도 없었고 자격증도 없었습니다. 이력서에 적을만한 스펙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런 권위 있게 말씀을 전할 수 있으신지 잘 납득이 되질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16)."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었던 이유는 그 교훈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할 뿐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자기 말을 늘어놓고 자기 영광을 구했기 때문에 그들의 말에서는 진정성이나 권위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을 앞세우는 유대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율법을 어기고 있었습니다. 율법 중에서도 특히 십계명 그 중 제 6 계명인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지 않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이려는 모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삼실팔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는데 그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치료 행위를 하여 안식일 법을 범했다’하며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실 스스로 모순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아이가 태어나면 난지 8일만에 할례를 주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날이 안식일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상황일 때 유대인들은 안식일이라도 할례를 시행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할례를 받아야 비로소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도 38년 된 병자에게 똑같은 일을 하셨습니다. 병들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을 온전하게 하셨으니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하는 취지와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안달이 나 있습니까?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입니까? 스스로 모순에 빠져 헤매고 있는 유대인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예수님은 그들에게 한 가지 지침을 주셨습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24)" 여기서 외모란 얼굴이 잘 생겼나 못 생겼나가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올바른 판단을 하려면 겉모습에 연연하지 말고 본질과 핵심을 놓치지 말아야 함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시대를 가리켜 말씀의 홍수 시대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방송이나 인터넷에서 수많은 설교들, 강연들을 클릭 한번만으로 접할 수 있습니다. 또 서점에 가면 엄청나게 많은 책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홍수처럼 많은 말들이 다 가치 있는 말들이겠습니까? 이 중에서 진정성이 있는 말씀, 권위 있는 교훈도 있지만 또 건강하지 못하고 잘못된 가르침도 있습니다. 심지어 이단의 가르침도 섞여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바르고 건강한 말씀을 분별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말씀의 홍수 속에 자칫 길을 잃고 영적으로 표류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에 대한 진정성과 참된 권위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해주셨습니다.


첫째로,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이 가진 외적인 인간 조건에 속기 쉽습니다. 인간 조건이 좋은 사람의 말은 왠지 다 맞는 말 같이 느껴집니다.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이 가진 배경 때문에 더 신뢰를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 조건이 참고는 될 수 있겠지만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황우석 박사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설마 그 유명한 서울대 교수가 온 국민을 감쪽같이 속였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동안 하도 스펙에 속아서인지 요즘 기업들은 이력서를 보지 않고 보는 블라인드 면접을 많이 시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지성과 영성이 탁월한 신학자들의 책을 통해 신앙생활에 많은 유익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외국의 신학 교수, 신학 박사들 중에 예수님의 말씀이 그저 한 인간의 지혜였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특히 유럽에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왜 자기가 믿지도 않는 성경을 가르치고 연구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유럽의 교회들이 왜 점점 쇠퇴하고 있는지를 알 것 같았습니다. 반면 우리 UBF 목자님들에게 외적인 타이틀은 별로 없습니다. 목사도 아니고 목자는 누가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성경을 사랑하는 마음,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본적인 학자가 하는 백 마디 말보다 우리 목자님들이 일대일로 전하는 말씀 한 마디가 더 진정성이 있고 한 사람의 영혼에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성경 선생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말씀 사랑이지 무슨 학위나 자격증이 먼저가 아닙니다. 우리가 외적인 타이틀이 없다고 괜히 위축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계속해서 말씀을 더욱 사랑하고 더욱 힘 있게 가르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교훈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스스로 하는 말인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최근에 동성애 문제가 계속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찬반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찬성하는 쪽의 비중이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동성 간의 결혼하는 공식 커플도 있다는데 조만간 한국에도 상륙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찬성하는 쪽에서는 “동성애 성향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조금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주장을 합니다. 계속 듣다보면 설득력이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보면 동성애가 정당성을 가질 수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말이 그럴듯해 보여도 하나님의 교훈인 성경과 어긋날 때 우리는 이를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런 자세는 동성애 뿐 아니라 동거나 혼전 순결의 문제, 생명 윤리 문제 등등 모든 영역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훈이 아니라 자기 말을 합니다. 한동안 이런 말들이 꽤 많은 주목과 지지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말은 일시적인 유행처럼 곧 지나버리고 말 것입니다. 오직 영원한 주의 말씀만이 우리 인생의 기준점이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24, 2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셋째로, 말하는 사람의 동기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인지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인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는 신천지를 비롯해서 여러 이단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말만 가지고서 이단인지 아닌지 여부를 판단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도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성경을 가지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단을 판별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냐 자기 영광이냐’입니다. 이단의 특징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자기 영광을 추구한다는 점입니다. 이단이 큰 문제지만 사실 이단에 넘어가는 사람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고자 하는 동기와 목적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별을 못하고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분별력이 흐려지고 오판하고 실수하는 이유는 자기 영광을 구하고 자기중심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직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참과 거짓을 분별해 낼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또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말을 할 때 그 말에 진정성과 권위가 따라오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자기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자기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의 홍수 속에서 거짓에 속지 말고 참되신 주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 주민들은 당국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이 성전이란 공개 장소에서 당당하게 말씀을 전하실 수 있을까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무슨 든든한 빽이 있는지 몰라도 우리만큼은 결코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갈릴리 나사렛이란 촌동네에서 오지 않았는가?" 당시 유대인들은 만약 메시아가 온다면 아무도 어디서 온 줄 모르는 미스테리한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이런 신비주의 컨셉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절대 메시아일리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바로 조금 전에 예수님께서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전혀 듣지를 않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28,29)" 무리들이 이미 알고 있던 대로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신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반쪽짜리 진실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에게는 그 이상의 진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오신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앞으로 어디로 가십니까? 33,34절을 함께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이때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아니, 저 양반이 어디로 간다는 거야? 혹시 외국으로 이민을 간다는 말인가?” 예수님은 내가 하늘에서 내려오셨으니 다시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땅에 속한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저 땅으로 움직이시는 분으로만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으로 믿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주저함 없이 ‘아멘’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밖에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질 않고 그저 사람의 아들로 보려고만 합니다. 사람들 중에 뛰어난 인물로 보는 것이 그들이 가진 최대치입니다. 예수님을 그저 한 인간으로 보려 하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모든 기적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기적을 인정하면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오셨다는 것도 함께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얼마 전 우리가 배운 오병이어 사건도 다르게 해석합니다. 본래 오천명이 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왔었는데 한 아이가 용감하게 자기 도시락을 꺼내자 모두가 자기 도시락을 열어 나누어 먹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도 부정합니다.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했다가 일어나서 스스로 무덤 문을 열고 나왔다고 주장합니다. 그 후에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서 유럽에 정착해서 살았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 유명한 ‘다빈치 코드’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려고 하다보니 이런 억지를 부립니다. 그 외에도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스라엘 주변의 다른 종교에서 따온 것이라니 심지어 예수님이 인도 가서 불교를 배워왔다는 설까지 별의 별 말이 다 있습니다. 기발하기는 하지만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만 나올 뿐입니다. 이런 현실을 두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번 웃어 주면 끝인가요? 어차피 안 받아들일 텐데 침묵하고 내버려 두어야 할까요? 오늘 28절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늘로부터 오셨음을 선포하실 때 외쳐 이르셨다고 표현하였습니다. 메시지 성경에는 이 부분이 ‘격앙되어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아닌 것이 진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에 심령이 상하셨고 그래서 평소보다 더 큰 소리로 진리를 외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을 땅에 속한 분으로 왜곡하는 세상을 향해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라고 큰 소리로 외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아무 말 하지 가만히 있으면 사람들은 역시 내 말이 맞으니까 아무 말도 못하는군 이렇게 해석해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진리를 드러내어 말해야만 합니다. 물론 그런다고 사람들이 다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조롱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핍박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처럼 진리를 영접하고 예수님을 믿을 사람들도 또한 있을 것입니다. 강균성이란 젊은 가수가 있습니다. 이 친구가 크리스천인데 요즘 TV 예능 프로그램에 대세남으로 뜨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강균성을 가리켜서 곱게 미친 자라고 부릅니다. 얼마나 끼가 넘치고 재미있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에게 이런 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방송 중에도 갑자기 진지 모드로 바뀌면서 왜 청년들이 동거를 해서는 안 되고 혼전 순결을 지켜야 하는지를 설득하고 나를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삶이 힘들더라도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사람들이 이런 말들을 싫어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공감이 간다 묘하게 설득이 된다 하는 반응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의 용기를 높이 평가해 주고 싶습니다. 또한 기독교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소통이 되는 방식으로 설파하는 지혜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들도 각자가 서있는 자리에서 이 강균성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오해 받고 왜곡되고 축소되고 있는 이런 현실 속에서 큰 소리로 진리를 외칠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37, 3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이 말씀을 하신 때는 초막절이 절정에 이르는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장막생활 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였습니다. 특별히 메마른 땅을 지날 때 생수를 주셨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초막절의 마지막 날 제사장은 기혼 샘에서 뜬 물을 금주전자에 담아서 제단에 쏟았습니다. 물을 부으며 그해 풍성한 비가 내려 풍년 들기를 기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의식을 배경으로 삼아 백성들을 생수의 강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여기서 ‘배’는 마음의 깊은 곳, 영혼을 의미합니다. 농사가 풍년이 되려면 물이 풍부해야 하듯이 인간의 삶이 풍성해지려면 그 영혼에 흘러넘치는 생수같은 충만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백성들의 영혼에는 건조 경보가 발령 중이었습니다. 마치 가뭄에 쩍쩍 갈라지는 논처럼 메말라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례미야 선지자는 백성들이 목마른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는데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2:13)”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영광을 추구하다가 그들은 황폐하고 메마른 심령의 소유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은혜의 통로가 꽉 막혀 버렸습니다. 누가 이 통로를 다시 열 수 있습니까? 하늘에서 오신 분만이 이 통로를 열어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의 강이 무엇입니까? 3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았다는 말은 십자가 사건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성소 휘장이 찢어졌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이로서 하늘과 땅을 가르던 장막이 찢어지고 성령님이 폭포수처럼 임하시게 될 것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잘 지켜 의에 이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실패한 결과 그들은 이방 땅에 끌려가 비참한 포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왜 실패했습니까? 내면에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죄의 소욕과 부패한 심령을 자신들도 어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죄를 극복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율법으로도 안 되는데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가 오실 것이다.’ ‘그가 오시면 각 사람의 마음속에 성령이 거하게 하실 것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 은혜가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실 것이다.’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 하늘에서 내려오신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승천하신 이후 오순절 날에 하늘로부터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의 마음 깊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그곳에서부터 생수의 강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영혼에 생수의 강이 흐를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성령님은 유혹을 뿌리치고 죄를 이길 힘을 주십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깨닫게 도와주십니다. 성령님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힘들 때 위로해 주시고 갈 길을 모를 때 인도해 주십니다. 이렇게 내면에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상태를 가리켜 성령 충만이라고 합니다. 성령 충만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복이며 선물입니다. 율법으로 할 수 없었던 모든 의를 이루게 하는 원동력이 바로 성령 충만함에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에 대해서 냉소적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생수의 강이 그 배에서 흘러나온다구? 그게 가능해?’ 이런 식으로 말을 합니다. 패배주의에 빠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죄를 어떻게 이겨? 우리는 부패하고 타락해서 안 된다고. 어차피 안 될 것 쓸데 없는 짓 하지 말자구.”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령 충만이란 아주 특별한 사람에게만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몇몇 사람들은 성령 충만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나 같이 평범한 사람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예수님께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말씀하실 때에 단지 그랬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결코 빈 말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정말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수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미리 패배주의에 빠져 버려야 합니까? 시도해 보지도 않고 냉소적인 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성령 충만해 질 수 있습니다. 내 영혼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 나아가서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또한 예수님은 특별한 사람만 나오라고 하지 않으시고 누구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누구든지 성령 충만해 질 수 있습니다. 잘 난 것이 없는 사람, 인간 조건이 부족한 사람이 오히려 더 성령 충만해질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밖에 믿을 구석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패를 많이 해 본 사람이 오히려 더 성령 충만해질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실패를 많이 한 만큼 주님이 주실 은혜에 목마르기 때문입니다. 목마름이 크면 클수록 그 은혜의 풍성함도 더 크게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 시대를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약 시대의 성도들입니다. 신약 시대 성도들의 가장 큰 특권은 성령이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령의 생수를 내가 먼저 풍성하게 누려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캠퍼스와 직장, 가정을 변화시키는 생수의 샘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진리를 수호하고 증거하는 성경 선생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로서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세상을 편만케 하는 역사에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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