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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설교/사도행전 2016.05.08 15:20

    2016년 사도행전 제 21 강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말씀/ 사도행전 24:1-27

    요절/ 사도행전 24:15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사도행전 23장부터 26장까지는 예루살렘에서 잡힌 사도 바울이 재판을 받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3장에서는 공회에서, 24장에서는 총독 벨릭스에게 재판을 받고, 25장에서는 총독 베스도에게, 그리고 26장에서는 아그립바 왕에게 심문 받는 이야기입니다. 재판에 관한 기록이기 때문에 자칫 지루하고 딱딱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제가 좋아하는 소설가 중에 존 그리샴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법정 스릴러 전문 작가입니다. 재판정에서 벌어지는 공격과 방어가 소설의 주된 내용인데 얼마나 손에 땀을 쥐게 하는지 모릅니다. 흥미가 넘칠 뿐더러 여러 가지 깊이 생각해 볼 주제들을 묵직하게 던져주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도 꼼꼼히 들여다보면 우리에게 묵상해 볼만한 주제들을 몇 가지 던져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때처럼 사방에서 기독교가 공격받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변증하고 기독교의 진리들을 방어할 수 있을지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천부장이 바울을 총독에게 보낸 지 닷새가 지난 후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장로들과 변호사 더둘로가 바울을 고발하기 위해 왔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총독 관저가 있는 가이사랴까지는 백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입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이 얼마나 미우면 이렇게 먼 곳까지 직접 행차를 했겠습니까? 아무래도 바울이 자기더러 ‘회칠한 담’이라고 불렀다고 깊이 앙심을 품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아나니아는 유능한 변호사 한 명을 스카우트해 왔습니다. 그의 이름은 더둘로였습니다. 더둘로는 로마법에 정통하고 대단한 달변가로서 최근 소송에서 진 적이 없었습니다. 최소한 억 대의 수임료를 주지 않으면 데려올 수 없는 특급 변호사였습니다. 이를 볼 때 대제사장이 바울을 보내버리려고 작정을 하고 단단히 벼르고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바울은 혈혈단신이었습니다.


    그러면 더둘로는 무슨 죄목으로 바울을 고발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더둘로은 고발에 앞서 총독 벨릭스에게 아부하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았습니다. 정말로 유대인들이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벨릭스에게 크게 감사하고 있었을까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실제로 유대인들은 벨릭스가 소요 진압을 명분으로 시민들을 탄압하고 이리저리 뇌물을 받아 챙기고 있는 것에 불만을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감사는커녕 하루라도 빨리 내쫓을 궁리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더둘로가 이런 사탕발림을 줄줄이 늘어놓는 이유는 총독 벨릭스의 환심을 사서 재판을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둘로는 바울의 죄목을 세 가지로 들어 고발했습니다. 


    첫째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소요를 일으키게 했다는 죄목이었습니다. 더둘로는 로마 총독인 벨릭스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인 죄목을 가장 먼저 언급했습니다. 바울을 반로마 폭동의 주범으로 몰고 가려했습니다. 


    둘째는 나사렛 이단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그 수장을 맡고 있다는 죄목이었습니다. 여기서 나사렛 이단이란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를 폄하하고 조롱하는 의미에서 유대인들이 쓰던 말이었습니다. 더둘로의 말은 기독교가 공인된 종교가 아닌 이단 사이비이기 때문에 박멸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셋째는 성전을 모독하려 했다는 죄목이었습니다. 사실 더둘로에겐 바울이 성전을 모독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성전을 모독하는 행위를 하지는 않았더라도 마음속에 모독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죄목으로 고발했습니다. 모두 다 말이 안 되는 억지요 궤변이었습니다. 그러나 방청을 온 유대인들이 더둘로의 말이 끝날 때마다 '옳소. 옳소'를 외치며 분위기를 점점 유죄 쪽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런데 더둘로의 엉터리 고발 내용 중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5절 상반절입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더둘로는 바울을 가리켜 전염병 같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전염병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작년에 우리나라는 메르스 바이러스 때문에 큰 홍역을 치렀습니다. 공기로도 전염이 될 수 있다고 해서 다들 집밖으로 나서길 두려워했었습니다. 제러드 다이아몬드라는 인류학자는 '총, 균, 쇠'라는 책에서 인간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균' 곧 전염병이라고 했습니다. 중세 말에 유럽에 페스트가 창궐하여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었습니다. 이 페스트가 유럽 역사를 중세에서 근대로 바꾸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여기서 더둘로가 바울을 전염병이라고 한 것은 역설적으로 당대에 바울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 전파는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에베소라는 한 도시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우상과 마술의 도시가 예수를 높이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소아시아 전역과, 마게도냐, 아가야까지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순식간에 퍼져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 사도 바울의 무서운 전파력에 깜짝 놀라서 마치 전염병 같다는 말이 나온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전염병은 결과적으로 사람을 죽이지만 바울이 전한 것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과 구원의 복음이었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않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졌는데도 나음을 받고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만지자마자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 바이러스와 접촉한 사람은 고침을 받고 회복되고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누구든지 바울을 만나면 예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생명을 살리는 예수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슈퍼 감염자였습니다.


    그런데 오직 바울뿐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다 예수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과거 우리는 자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이 죄를 짓도록 부추기는 죄의 전파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든지 바로 그곳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파하는 의의 전파자가 되었습니다. 병을 옮기는 나쁜 세균이 아니라 김치를 숙성시키고 우유를 요구르트로 만드는 유산균과 같은 존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제가 과거 군생활할 때 부대에서 기독교인을 '환자'라고 불렀습니다. 저도 성경책을 갖고 들어가자 '너도 환자냐'는 말을 바로 들었습니다. 왜 이런 말이 생겼느냐 하면 아무리 갈구고 못살게 굴어도 예배에 가고 침낭 속에서 군용 랜턴을 켜고 성경을 읽기 때문에 마치 불치병 환자 같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습니다. 또 환자가 또 다른 환자를 만들어 내는 전염성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물어보니 요즘엔 군대에서 환자라는 말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있는데 그곳에서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잘못 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유산균이 죽으면 더 이상 발효가 일어나지 않듯이 영적 생명이 점점 죽어가고 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살아있는 한 우리는 세상과 다른 삶을 살고 예수님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꽃가루가 날리는 5월의 캠퍼스에 예수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이번 세계 선교 보고 대회는 우리 모임이 세계 곳곳에서 어떻게 예수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수퍼 감염자 역할을 했는지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 선교 보고 대회를 통해 먼 나라에까지 나아가 예수님을 전파하고자 하는 세계 선교 비전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총독이 바울에게 고개를 까딱하며 신호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더불로의 고발에 대한 바울의 변론이 시작되었습니다. 바울 역시 더둘로와 마찬가지로 총독 벨릭스부터 언급하였습니다.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 바울은 더둘로와는 달리 일체 아첨하는 말이 없이 간결하게  말했습니다. 바울은 더둘로처럼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고발된 죄목에 대해서 하나하나씩 반박을 해나갔습니다.


    첫째로 소요죄에 대한 반론입니다(11-13). 바울은 예루살렘에 온 지 열이틀 밖에 안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오랫동안 외국에 나가 있던 사람이 단 12일 만에 조직을 만들고 사람을 동원해서 소요를 일으킨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요즘처럼 방송도 없고 SNS에도 없던 시대에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물리적으로 말이 안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무리를 선동하거나 소요를 부추기는 행위를 한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둘째로 이단죄에 대한 반론입니다(14-16). 바울은 유대인들이 나사렛 이단이라 부르는 도를 따랐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이 유죄를 인정한다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결코 이단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모든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었습니다. 또한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소망을 가졌습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같은 성경을 믿으며 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이단이 될 수 있습니까? 만약 바울이 이단이면 바리새인은 삼단이고 사두개인은 사단쯤은 되어야 마땅했습니다.


    셋째로 성전모독죄에 대한 반론입니다(17-20). 바울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모독하러 왔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큰 기근을 맞아 고통 받는 동족들에게 구제헌금을 전달하기 위해 왔습니다.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결례를 행했고 성전에서 조용히 참배를 하려했을 뿐이었습니다. 도리어 소동을 일으킨 쪽은 바울이 아니라 아시아 각지에서 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고발하도록 무리들을 선동한 장본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법정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유죄를 받아낼 증거가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칫하면 그들이 무고죄 또는 폭행교사죄로 도리어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꽁무니를 감추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상에서 보듯이 바울은 로마법에 저축될만한 위법한 행위를 한 적인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큰 소란이 일어났습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바울이 심문을 받는 것은 죽은 자의 부활을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만이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을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유대인에게 거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았기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고서는 의인으로 부활할 수 없습니다. 악인으로 부활하여 영원한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지금 당장 여기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증언한 내용의 핵심입니다. 바울이 심문 받는 이유는 이 증언과 신앙 고백 때문이지 다른 무슨 정치적 문제나 윤리적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로마법 체계 아래에서는 단지 증언과 신앙 고백만으로 사람을 처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무죄였습니다. 바울을 비교적 자유로운 가택 연금 상태에 두도록 한 것을 볼 때 벨릭스는 바울이 아무 죄가 없는 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벨릭스는 천부장의 증언을 기다리겠다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판결을 연기했습니다. 그가 바울을 선뜻 풀어주지 않은 것은 예루살렘에서 온 거물급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재판정에 선 바울의 모습을 보면 권세자들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의를 갖추면서도 언제나 당당하고 떳떳합니다. 심지어는 바울이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재판장과 고소인들을 재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바울이 어떻게 이처럼 수많은 대적자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을까요? 16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사도 바울이 누구 앞에서나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써왔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소원하며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탈탈 털어봐야 아무 것도 나올 것이 없는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누가 고발을 해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의연하게 변론하고 끝까지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신앙 고백을 문제 삼을 수는 있을지언정 누구도 그의 삶을 문제 삼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깨끗한 양심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1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바울은 의인과 악인이 모두 다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 날에 평생 동안 선악 간에 행한 모든 일들이 낱낱이 다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이를 생각할 때 함부로 살 수 없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부활과 최후의 심판을 믿었기 때문에 바울은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살려했고 그래서 어느 누구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교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점점 악화되고 있습니다. 2014년 종교별 신뢰도 조사에서 개신교는 카톨릭, 불교에 이어 꼴찌를 했고 열 명 중 단 두 명만이 신뢰한다는 응답을 했습니다. 바울처럼 정식으로 법정에 서지는 않더라도 이미 여론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 맞서서 바울처럼 당당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써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만약 우리가 우리의 신앙 고백 때문에 뭇매를 받는 것이라면 부끄러울 일이 아닙니다. 도리어 자랑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자이신 것을 고백한다고 해서 비난받는다면 감수해야 합니다. 동성애가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는 죄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돌이 날아온다면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정치적인 일에 개입해서 특정 정파에 ‘묻지마’ 지지를 한다든지 이리저리 부도덕한 추문에 휩싸여서 지탄을 받는다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자꾸 이런 일이 벌어지면 기독교의 진리성을 변증하기가 힘들어집니다. 스스로도 위축이 되고 또 변증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누구보다도 높은 도덕성을 가지고 양심대로 깨끗하게 살려 노력하지 않으면 기독교에 대한 공격을 막아내기 어렵게 됩니다. 그러나 양심에 따라 살아야 할 더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다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일 예배 때마다 사도 신경을 외우면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부활을 믿고 최후의 심판을 정말 진지하게 믿는다면 우리가 결코 인생을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진지하게 믿지 않는 것을 어떻게 전하고 증언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한국 교회가 부활과 최후의 심판을 정말 믿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살아간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시금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차 주님과 함께 세상을 심판할 우리가 도리어 세상이 우리를 심판할 빌미를 주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가 의인과 악인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을 믿으며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삶을 살고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판단 앞에 기죽지 않고 누구 앞에서나 당당하게 진리를 변증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들었습니다. 드루실라는 헤롯 아그립바Ⅰ세의 딸이었습니다. 15살 때 에메사 왕 아지주스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벨릭스가 그녀의 미모에 반해서 남편과 이혼하게 하고, 세 번째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가 60이었고, 드루실라는 18살이었습니다. 드루실라는 개인적으로 기독교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불러내어 예수 믿는 도를 들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무엇을 전했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했습니다. 의에 대해서 강론한 것은 벨릭스가 불의하고, 잔인하고 포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절제에 대해 강론했습니다. 그가 남의 아내를 빼앗아 세 번째 아내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또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한 것은 그의 불의와 무절제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덧입도록 도와주고자 함이었습니다. 바울은 늘 같은 방식으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이처럼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맞춤형 복음을 전했습니다. 듣는 사람의 문제를 잘 알고, 그 내면의 문제에 도전하고, 그 삶이 변하도록 강력한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벨릭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25)” 벨릭스는 바울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모든 말씀이 자기를 두고 하는 말 같았습니다. 자신의 추한 모습이 벌거벗은 것처럼 다 드러났습니다. 얼굴이 뜨거워지고, 양심이 찔렸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그 심령에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의 양심을 일깨워 회개하도록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겠다.’하고선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그에게 한 줄기 생명의 빛이 비취었지만 그는 마음을 닫고 어둠 속으로 숨어버렸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 회개를 촉구하실 때 회개하지 않고 미루게 되면 결국 마귀의 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벨릭스는 회개는커녕 바울에게서 뇌물을 기대했습니다. 바울이 구제 헌금을 가지고 왔다는 말을 듣고 돈이 많은 줄로 알았던 모양입니다. 또 벨릭스는 바울을 석방하면 유대인들의 비난과 비협조로 통치가 어려워질까 하여 2년이 넘도록 바울을 가두어놓았습니다. 벨릭스에게는 돈과 권력과 쾌락이 우상이었습니다. 회개를 미루다가 끝내 우상에게 잡아먹히고 말았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벨릭스를 가리켜 “노예의 정신을 가지고 왕의 특권을 행사한 사람”이라고 평했습니다. 마침내 유대인들 그의 부패와 폭정을 황제에게 고발했습니다. 이후 벨릭스는 해임되어 로마로 소환되었다가 어느 시골로 좌천되었다고 합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탄이 어느 날 부하 셋을 불러 사람들을 미혹해서 구원받지 못하게 할 방도에 대해 물었습니다. 첫째 부하가 일어나 대답했습니다. ‘나는 세상에 가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러자 사탄이 ‘주위를 둘러보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데 네가 그렇게 말한다고 믿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둘째 부하가 손을 번쩍 들더니 ‘저는 가서 사람들에게 천국이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외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사람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다 천국에 가기 원하는데 천국이 없다고 하면 믿겠느냐?’라고 대꾸했습니다. 그러자 침묵을 지키고 있던 셋째 부하가 음흉한 미소를 띠며 말했습니다. ‘저는 가서 사람들에게 급히 서두를 필요 없어, 좀 더 생각을 해봐야지. 내일이 있잖아 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러자 사탄이 그를 칭찬하고 모두 나가서 뒤로 미루는 작전을 쓰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결정적인 순간에 회개를 미루도록 유혹하는 작전으로 대 성공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사탄이 유혹하는 가장 간교한 방법 중 하나는 뒤로 미루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회개하지 말고 좀 더 고민해 보라. 언젠가는 기회가 있을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차일피일 계속 회개를 미루다가 결국 마귀의 올무에 빠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고 한 벨릭스의 말은 우리가 양들에게서 참 자주 듣는 말입니다. 전도할 때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한 번 성경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 지금은 틈이 없네요'라고 하는 양들이 많습니다. 생각이 나서 다음에 연락을 해 보면 여전히 틈이 없습니다. 도대체 틈이 언제 날 예정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또 일용할 양식은 내일부터 먹고 소감은 다음 주부터 쓰려고 합니다. 그냥 오늘부터 먹고 이번 주부터 쓰면 안 됩니까? 왜 꼭 내일이고 다음 주이어야 합니까?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 지체 말고 바로 해야 합니다. 마음에 찔림이 있을 때 바로 회개해야 합니다. 뒤로 미루면 결국 안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소원을 불러일으키시는 그 때를 마지막 기회로 여겨야 합니다. 혹시 여태껏 미루어 놓은 결단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당장 결단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혹시 조금만 더 즐긴 다음에 회개하려고 했던 죄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당장 회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일은 나의 시간이 아닙니다. 내일 내가 어떻게 될지 나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내일이면 늦습니다. 복음을 듣고 말씀을 듣는 그 순간이 회개해야 할 때요 구원의 때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총독 벨릭스에게 자신의 무죄를 납득시켰을 뿐 아니라 그의 일대일 목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모로 불리한 재판 환경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라는 점에서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런 결과는 바울이 그동안 부활과 최후 심판을 믿으며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또한 전염병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예수님을 강력하게 전파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삶을 살고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가는 곳마다 예수 바이러스를 전파하여 그곳을 변화시키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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