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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설교/사도행전 2016.05.22 15:25

    2016년 사도행전 제 23 강 (찬488장)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말씀/ 사도행전 26:1-32

    요절/ 사도행전 26: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재판정에서 판결이 내려지기 직전에 피고 측에서 마지막으로 하는 변론을 최후 변론이라고 부릅니다.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마지막 변론인만큼 변론의 클라이맥스이자 엑기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붙잡힌 후 총 다섯 번의 심문을 받고 다섯 번의 변론을 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이 마지막 변론입니다. 곧 바울의 최후 변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변론 속에는 바울의 소망과 인생과 사상이 농축되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바울의 소망과 인생과 사상을 배워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 25장 마지막 부분과 계속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총독 베스도는 황제에게 보고할 바울의 죄목을 찾기 위해 아그립바 왕에게 자문을 요청했습니다. 이를 기꺼이 수락한 아그립바는 바울을 직접 심문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의 증언을 청취하기 위한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아그립바가 바울의 발언을 허락하자 그의 변명이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는 말로 서두를 시작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동안 로마에서 파견한 총독인 벨릭스와 베스도 앞에서 변론을 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이방인이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즉시 깨닫기 어려웠습니다. 바울은 할 수 없이 복음 전파보다는 자신의 무죄를 변론하는데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그립바는 헤롯 가문의 왕이라서 총독들과 달리 유대인의 풍속과 문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듣고서 이해할 수 있는 밑바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너무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이번에 잘 하면 아그립바 왕이 회심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생겼습니다. 오늘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변론을 가장하여 아예 작심하고 복음의 진수를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선택한 구체적인 복음 증거의 방법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5절부터 23절까지에 나타나 있듯이 바울 자신의 인생 소감을 발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인생 소감의 원조는 UBF가 아니라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앞서 22장에서도 성전 앞에서 유대인들을 향해 인생 소감을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다. 진솔한 인생 소감은 듣는 사람에게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매우 훌륭한 복음 증거의 도구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름 수양회 때 인생 소감을 통해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일어나는 것을 매년 확인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아그립바 왕이 그랬듯이 우리 주변에는 복음을 꼭 한 번 듣게 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대상은 우리들의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양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세계 선교 보고 대회 때 다섯 분의 인생 소감 발표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 가족과 친구와 양들이 오기만 한다면 이 베스트의 인생 소감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분들이 복음을 접할 수 있는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5년을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설령 그분들이 복음을 즉시 영접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우리들이 하는 일들이 얼마나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인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 세계 선교 보고 대회에 주변에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을 힘써 초청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감동이 있는 인생 소감을 통해 오신 분들의 마음속에 성령의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바울의 인생 소감은 나도 여느 유대인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다는 내용으로 시작하였습니다. 바울의 고향은 길리기아 다소였습니다. 하지만 어릴 적에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와서 당대의 석학 가말리엘에게서 배웠습니다. 함께 공부한 동기들을 물론이고 이 사실을 입증해 줄 사람은 널려 있었습니다. 이는 가수 타블로가 스탠포드 대학을 졸업한 사실보다 훨씬 더 확실한 사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유대교 중에서도 율법을 지키는 일에 가장 엄격한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바울은 누가 봐도 정통 골수파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자기 민족을 배신한 변절자입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6절과 7절을 보십시오.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바울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한 것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던 바였습니다. 현재 바울이 가진 소망은 온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소망이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소망이 무엇일까요? 그 소망이 무엇인지에 대해 바울의 증언 속에서 명확하게 ‘이것이다!’ 라고 설명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가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 중에 너희를 구원할 메시아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공의와 자비로 다스리시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 것이 이스라엘의 꿈이요 기대이며 소망이었습니다.


    어두운 이 땅 위에 빛이 비추고 자유와 평화를 가져 올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소망! 바울은 바로 이 소망 때문에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말입니다. 바울의 말에 따르면 자기나 유대인들이나 같은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서로 싸울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왜 고발하고 죽이려고 난리를 쳤겠습니까? 이는 같은 소망을 공유하는 것 같으면서도 분명 다른 부분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바울과 유대인은 서로 어떤 점에서 달랐을까요?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메시아가 이미 오셨고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증언했습니다. 또한 메시아의 통치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까지 온 세계에 이르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메시아는 아직 오지 않았고 예수는 절대 메시아일 리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메시아는 수많은 민족 중에서 오직 유대인들만을 구원하신다고 믿었습니다. 현재까지도 유대인들은 여전히 이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아가 맞습니까? 아닙니까? 하나님은 오직 유대인만 구원하십니까? 아니면 이방인도 구원하십니까? 과연 누구의 말이 맞고 누가 오해를 하고 있을까요? 그 판단은 사람이 다수결 투표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목소리가 크다고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므로 하나님이 결정하실 일입니다. 중요한 관건은 '하나님께서 주신 확실한 증거가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라는 증거로 무엇을 내세웠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메시야일리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고 저주를 받아 죽은 자가 어떻게 메시야가 될 수 있냐고 반문했습니다. 메시아라면 로마를 상대로 통쾌한 승리를 거두어야지 예수 같은 실패자는 결코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제시한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는 증거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답변은 8절에 있습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아라는 증거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유대인들의 말처럼 예수님이 정말로 버림받고 저주 받은 실패자라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셔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조상들과 온 이스라엘 민족이 그토록 오래 기다리며 소망했던 바를 이루실 메시야가 되신다는 사실을 입증하셨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회개하는 사람은 죄사함을 받고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장차 부활 영생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미움을 사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는 메시아 예수님이 이미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영접하지 않는 유대인들이 안타까웠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데 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기며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지 답답할 뿐이었습니다.


    소망의 문제는 바울과 유대인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안암 홈피 '나는 독서왕' 코너에 보면 'Jesuslove'라는 닉네임을 가진 사모님이 올린 '빅터 프랑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빅터 프랑클은 2차 대전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다가 살아남은 분입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어떤 사람이 견디지 못하고 죽고 어떤 사람이 살아남는지를 관찰했습니다. 이때 얻은 통찰을 전후에 정리하여 쓴 책이 '죽음의 수용소에서'입니다. 저자는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른 것은 누가 더 건강하고 머리가 좋은가가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누가 희망을 끝까지 붙들었느냐에 달려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처럼 희망은 우리에게 현실의 어려움을 이길 힘을 줍니다. 얼마 전 이요한과 김사무엘 형제님이 군에 입대했습니다. 앞으로 21개월이 남았으니 정말 까마득합니다. 하지만 군인은 ‘거꾸로 매달아 놔도 국방부 시계는 흘러간다.’는 말을 굳게 믿으며, 전역이라는 희망이 있기에 버틸 수 있습니다. 부모들은 내 자식이 잘 되리라는 희망이 있을 때 아무리 고생을 해도 고생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희망이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오늘의 고통을 참을 수 있는 것은 내일의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희망이 어떤 희망이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희망이 우리를 배신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던 그 희망이 잘못된 희망이었다면 어떻게 됩니까? 헛된 희망을 부여잡고 인생을 거기에 올인했다면 어떻게 됩니까? 희망은 순식간에 절망으로 바뀌고 말 것입니다. 가장 강력했던 희망이란 무기가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차라리 아무 희망 없이 사는 편을 택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철학자 니체는 심지어 '희망은 모든 악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고통을 연장시키기 때문이다.'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인간의 딜레마는 희망 없이 살 수 없지만 내가 붙들고 있는 희망이 제대로 된 희망일까를 놓고 늘 고민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를 배신하거나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희망, 삶과 죽음을 뛰어넘을 수 있는 절대적인 희망이 어디에 없을까요? 네, 여기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셔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소망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있는 부활과 영생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이 소망은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사실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소망을 가슴에 품은 것만으로도 우리는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소망에서 힘겨운 현실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나옵니다. 이 소망에서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고 찬송할 수 있는 힘이 나옵니다. 이 소망에서 죄악의 탁류가 거세게 흐르는 세상 속에서 거룩한 순례자의 삶을 살게 하는 힘이 나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 소망을 가리켜서 산 소망, living hope 라고 말하였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 썩고 더러워지고 쇠하게 될 이 세상에 둔 소망은 죽은 소망일뿐입니다. 잘 먹고 잘 살고 성공하고 출세하여 부자 되는 것이 참된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소망은 죽은 소망입니까? 산 소망입니까? 우리가 바울처럼 예수님의 부활에 기초한 산 소망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산 소망을 붙들고 고난을 견디며 죄악을 이기는 세상이 감당 못할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산 소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과거 바울도 역시 다른 유대인들처럼 영적으로 무지하여 어둠 속에 있던 자였습니다. 앞장서서 성도들을 옥에 가두고 죽이고자 했었습니다. 성도들을 고문하여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도록 강요하기까지 했습니다. 그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아 제사장이 내준 완장을 차고 외국에까지 원정 박해를 하러 다녔습니다. 뒷발질하는 거친 황소처럼 혈기와 자기 의에 사로 잡혀 예수님을 마구 대적하던 복음의 원수였습니다. 이런 바울이 어떻게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고 복음의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까?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길 위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은 이미 사도행전 9장과 22장에 나왔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전 증언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던 부분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부분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라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가시채는 짐승의 뒷발질을 막기 위해서 수레 앞에 달아 놓은 가시를 말합니다. 짐승이 성질을 부려서 뒷발질을 하면 여기에 찔려 고통을 받습니다. 결국에는 포기하고 주인에게 순종하게 됩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나름대로 혈기를 부려보아야 다 소용없다는 의미입니다. 둘째로 바울이 주님께 받은 사명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받은 사명은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가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죄사함과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19절에서 바울은 이 사명을 가리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바울이 유대 온 땅과 이방에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파한 것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주신 사명을 순종하여 감당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자신이 행한 모든 일은 나름대로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섬기기 위해서였음을 변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의 증언을 듣는 아그립바 왕을 비롯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제 더 이상 주님께 저항하지 말고 복음을 영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이 바울의 간증을 보면서 저항할 수 없는 은혜, Irresistible Grace 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이 말은 칼빈주의 5대 교리 중에 하나로 나오는 말입니다. 이 말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란 하나님이 택하시면 하나님은 은혜의 능력으로 어떤 저항도 다 이기시고 굴복시키신다는 말입니다. 과거 바울은 가시채를 뒷발질하듯이 완강히 저항하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저항하면 할수록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이끌어갈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주님께서 정오의 태양보다 더 밝은 빛으로 그를 사로잡으셨습니다. 마침내 바울을 은혜로 굴복시키셔서 부활의 증인, 복음의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저항을 하지만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이길 수 없습니다. 과거 저는 예수님을 믿고 싶지 않았었습니다. 내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낯이 뜨겁고 소름 끼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예수님만을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목자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너무 싫어서 잠적한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지금 풀타임 목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누구의 강요나 억압으로 된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저를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완악한 양들이 변화될 수 있을지, 고집불통의 자녀가 변화될 수 있을지, 반복해서 죄에 넘어지는 내가 과연 변화될 수 있을지 의심이 들고 더 이상 소망을 둘 수 없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은혜가 임하면 박해자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되듯이 어떤 사람이라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고 그리고 끈질기게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가시채를 뒷발질하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요 목자로 변화시키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가 이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능력을 믿고 2세 신앙 교육과 캠퍼스 제자 양성 역사를 힘차게 이루어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바울의 변명을 들은 총독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24절을 보십시오. 베스도 총독은 크게 소리 지르며 말하였습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을 만났다니 베스도는 바울이 미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베스도 총독에겐 아직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을 귀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 대신 아그립바 왕에게 집중적으로 전도하고자 했습니다. 아그립바 왕은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바울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을 아나이다." 만약 아그립바가 선지자를 믿는다면 선지자들이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를 당연히 믿어야 했습니다. 눈치 빠른 아그립바 왕은 바울이 변명을 빙자하여 자신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죄수인 주제에 감히 왕을 변화시키려 하다니 괘씸했습니다. 아그립바는 바울을 째려보며 말하였습니다. "어험! 무엄하구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그러나 바울은 기죽지 않고 당차게 맞받아쳤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지금 바울 앞에 있는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가 어떻습니까? 높아도 보통 높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귀족, 총독, 그리고 왕입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바울은 초라하고 별 볼일 없는 죄수에 불과합니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처럼 되고 싶다 아그립바 왕이 부럽다’ 이렇게 해야 정상 아닐까요? 그러나 바울은 모두가 다 나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요? 자기 아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아버지들이 많습니다. '앞으로 너는 나처럼 되지 마라' 또 어머니들은 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앞으로 너는 나처럼 결혼하지 마라' 이처럼 대부분 사람들이 자존감이 매우 낮습니다. 나보다 잘 나가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부러워하고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두가 다 나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바울이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바울에게 사람들의 겉모습만 보지 않고 그 속을 꿰뚫어 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그립바 왕이 겉으로는 화려해 보였지만 그 내면은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마음대로 살며 자유로워 보였지만 실상은 사탄의 노예였습니다. 아그립바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유대가 멸망하는 AD 70년까지 이제 10년 정도 후에 지도에서 사라질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할 때의 '나'는 어떤 '나'입니까? 영적인 눈을 떠서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온 '나'입니다. 죄를 용서받고 믿음으로 거룩하게 되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은 나입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이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는 목자인 나입니다. 바울에게는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나’에 대한 자긍심이 있었습니다. 또한 아그립바 왕이 어서 빨리 자기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고 복음의 전파자의 복된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목자의 심정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혹시 돈도 없고 권세도 없어서 너무 초라해 보입니까? 목자로 사는 것이 너무 고생이 많고 힘들어 보입니까? 만약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우리의 자녀들이나 양들을 향해서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라 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신 너는 나처럼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제자 양성도 믿음의 계승 역사도 다 물 건너가고 맙니다. 나를 너무 과소평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예수님의 자기 피 값으로 사신 존재입니다. 나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사명자이며 복음으로 양들을 살리는 목자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 백성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아그립바 왕 열 명을 갖다 놓아도 전혀 부럽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이 존귀하고 거룩한 신분을 당연히 사랑하는 자녀들과 양들에게도 물려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서 내 안에 이루신 선하고 아름다운 일들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누구 앞에서든지 당당히 당신도 나처럼 주의 은혜를 입은 자요 목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바울에 대한 모든 재판과 심문이 끝났습니다. 아그립바 왕의 결론은 바울에게 죄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만약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지만 않았더라면 즉시 석방될 수 있었을 텐데 미련한 짓을 했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를 몰라서 가이사에게 상소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부활과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고난을 회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자기를 구원하시고 목자 삼으신 주를 섬기기 위해 어찌하든지 로마에 가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비록 신분이 죄수일지라도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자신에 대한 자긍심이 넘쳤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산 소망을 가지고 우리에게 닥친 고난을 이기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내게 임한 크신 은혜를 증언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하나님 안에 있는 나의 존귀함을 깨닫고 이를 당당히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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