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도행전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노라

이창무 2016. 5. 29.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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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사도행전 제 24 강 (406장)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노라


말씀; 사도행전 27:1-44

요절; 사도행전 27: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우리는 지금까지 사도행전 말씀을 통해 이름 없는 시골 갈릴리에서 시작된 복음 역사가 어떻게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까지 확장되어 갔는가를 보았습니다. 이제 제국의 수도이며 심장인 로마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로마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지리한 2년간의 법정 공방을 겪으며 인간의 궤계와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 속에서는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거대한 위력을 뚫고 지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확장과 복음의 승리를 위해 그의 종들의 행로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인간의 권력이든 자연의 힘이든 바울의 로마행을 막아설 수 없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말씀과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만이 자신뿐 아니라 위기에 빠진 세상을 끌어올릴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그렇게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귀하게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다른 죄수 몇 사람과 함께 백부장 율리오에게 넘겨지게 되었습니다. 다른 몇 사람의 죄수들은 중죄인으로서 로마의 원형극장에서 처형될 죄수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가이샤라에서 출발하여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는 연안여객선인 아드라뭇데노 배를 탔습니다. 이 배는 원래 시돈을 거쳐 구브로 남서 해안을 지나 아드라뭇데노로 가고자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강한 서풍 때문에 길리기아와 밤빌리아의 해안선을 따라 우회하여 소아시아 남단의 무라 시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여기서 로마로 가는 곡물운반선인 알렉산드리아 배로 갈아탔습니다. 무라를 떠난 배는 또 강풍을 만나 더디 가서 여러 날 만에 간신히 그레데 섬 남쪽 중간에 있는 미항에 도착했습니다. 이처럼 미항까지 오는 도중에 계속 강풍을 만나 일정이 지연되었습니다. 9절에 보면 금식하는 절기가 지나서 행선하기가 위태하였다고 했습니다. 금식하는 절기는 유대의 대속죄일을 가리킵니다. 태양력으로 9월말이나 10월 초순이었습니다. 지중해는 9월 중순이 지나면 항해가 위험해집니다. 11월 중순 이후에는 모든 항해가 금지되었습니다. 바울은 세 차례의 전도 여행 덕분에 나름 항해 경험이 많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5절에 따르면 이미 세 차례나 파선을 당해 본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항해를 계속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선원들에게 권했습니다.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10) 아무리 봐도 여기서 더 움직이지 말고 미항에서 겨울을 보낸 후에 항해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바울의 권고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습니다. 선장과 선주도 월동을 한 후 이듬해 봄에 지중해를 횡단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견해가 같았습니다. 그러나 미항은 너무 작은 항구라 많은 사람들이 겨울을 나기에 불편하다고 했습니다. 미항을 떠나 보다 크고 쾌적한 환경을 갖춘 뵈닉스 항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고 했습니다. 뵈닉스는 미항에서 약 65 Km 정도 떨어진 가까운 항구였습니다. 선장은 그 정도 거리라면 아무 문제 없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했습니다. 그 동안 쌓인 자기의 경험과 기술을 믿었습니다. 다수의 승객들도 어차피 겨울을 나야한다면 목욕탕과 영화관도 있는 뵈닉스 항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바울을 향해 '당신이 바다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알겠소?', '죄수이면 죄수답게 닥치고 구석에 찌그러져 있으시오'하면서 대놓고 면박을 주었습니다. 때마침 남풍이 순하게 불었습니다. 그들은 뜻을 이룬 줄 알고 의기양양하게 뵈닉스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배가 바다 가운데로 나가자마자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이 광풍은 그레데 섬의 지형 때문에 생겨난 강력한 북동풍이었습니다. 맑은 하늘이 갑자기 시커먼 먹구름으로 뒤덮어 버렸습니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은 어느새 장대비가 되어 쏟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잔잔하던 물결이 집채만 한 파도가 되어 뱃머리를 후려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선장이 아무리 키를 조종하며 배의 중심을 잡고자 노력을 해 보았지만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배가 기우는 쪽으로 이리 밀렸다 저리 밀렸다 짐짝처럼 굴러 다녔습니다. 이때 선원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선원들은 거룻배가 배를 상하게 하지 않도록 배 안으로 끌어 올리고 밧줄로 선체를 둘러 감아 배를 보호했습니다. ‘스르디스’라 불리는 악명 높은 모래톱에 걸리지 않기 위해 급히 닻을 내렸습니다. 풍랑이 더욱 심해지자 수송 중이었던 곡물도 버리고 배 안에 있는 기구들도 바다에 내버렸습니다. 아깝지만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선장과 선원들은 항해 전문가로서 실력과 경험을 살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계속 되는 악천후 속에서 그들의 지식이나 기술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짙은 구름이 낮의 해를 덮었고 밤에는 별빛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해와 별이 보이지 않으니 지금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배는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이리 저리 나뭇잎처럼 떠돌았습니다. 이러다가 언제 어디서 암초와 부딪쳐 침몰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구원의 여망마저 모두 다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절망과 탄식으로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 절망에 빠져 입맛도 잃어 버렸습니다. 오래 동안 먹지 못하고 오직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21절 바울의 말처럼 애초에 미항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피할 수 있는 재난이었는데 선장이 만용과 과욕을 부려 무리한 항해를 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조금 더 편하게 지내보려다가 엄청난 재앙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탔던 배가 표류하게 된 과정을 보면 인간 세상의 축소판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소에 순풍이 불 때 사람들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사람들은 머리와 능력과 경험과 상식을 의지합니다. 이런 것들을 믿고 인생길을 어떻게 가야할지 판단합니다. 이리 가는 것이 위험해 보이면 저쪽으로 핸들을 돌리면 되고, 저쪽으로 가다가 실패할 것 같으면 이쪽으로 키를 꺾을 수가 있습니다. 몇 차례 성공도 거두고 미래의 진로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감이 생깁니다. 설령 위험하다 해도 나정도 되는 베테랑에게는 그 정도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기게 됩니다. 곧 자신감이 지나쳐서 자만이 되고 과욕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주변에서 그건 너무 무리라고 아무리 말해 주어도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 순풍만 있지는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갑작스럽게 광풍이 불어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인생의 항해 속에서 광풍이 불어 닥칠 때가 되면 사람의 지혜와 지식과 능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때부터 우리의 인생은 내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리 저리 떠밀려가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물론 처음부터 속수무책으로 손 놓고 당하고만 있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광풍을 헤쳐 나가려고 애를 씁니다. 사방으로 해결책을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뜁니다. 그래도 안 되면 자기 뼈를 깎는 출혈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한다 해도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구원의 여망마저 모두 다 사라져 버리고 아예 인생을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얼마 전 금요 소감 발표 모임에서 본 영상이 하나 있습니다. 소호대라는 혼성 그룹의 멤버로서 한 때 큰 인기를 얻었던 에스더라는 가수의 인터뷰 영상이었습니다. 에스더는 너무 어린 시절 꿈을 이루다 보니 현실이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방송도 싫고 음악도 싫어져서 세상과 담을 쌓고 낮에는 스타크래프트 게임만 하고 밤에는 술만 마셨습니다. 그러다가 자살 시도도 여러 번 했습니다. 하루는 죽으려고 바다에 뛰어 들었는데 그 때 한 노숙자가 그녀를 건져주었습니다. 그 노숙자는 나 같은 사람도 사는데 왜 젊은 사람이 죽으려 하느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 때 에스더는 정신이 번쩍 나서 다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교회에서 찬양도 하고 희망을 잃지 말라는 뜻을 담은 자선 공연을 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인생은 순풍과 광풍이 교차되는 사이클 곡선과도 같습니다. 인생에 있어 영원한 순풍은 없습니다. 한번 잘 나가던 사람이 영원히 잘나가란 법이 없습니다. 1965년도 우리나라 100대 기업 중에서 현재까지 살아남은 기업은 겨우 10개가 조금 넘습니다. 제가 경영대학원을 다니면서 접한 대부분의 케이스 스터디의 약 70%가 이렇게 잘 나가다 망한 기업 이야기였습니다. 광풍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 인간들의 지혜와 능력과 재주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광풍은 이 세상이 사람의 힘으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권세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이 자기 능력과 재주로만 모든 일이 잘 되고 잘 풀리면 얼마나 우쭐대고 뻐기고 교만하겠습니까? 자기보다 능력 없는 사람은 무시하고 득의만만하고,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콧대가 높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평소에는 가만히 놔두고 계시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으면 그때에 광풍으로 내리치십니다. 그때에는 아무도 그 광풍을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풍에게 속아서는 안 됩니다. 자신에게 속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자신의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하고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자기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만 듣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이 절망의 순간에 일어선 사람이 누구입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바울은 이 배에 탄 모든 이의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을 것이요, 오직 배만 좀 상하게 될 것이니 안심하라고 했습니다. 만약 이 말이 바울의 자기 확신에서 나온 말이라면 희망 고문 밖에는 되지 않을 말입니다. 어떻게 이 말을 믿을 수 있습니까? 바로 지난밤에 바울이 섬기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그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천사는 바울에게 “네가 죽지 않고 살 것이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바울의 생명이 그의 사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명은 로마 황제에게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그 사명을 위해서 배를 탔습니다. 그리고 지금 죽음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아직 그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죽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죽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자가 그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그의 생명을 지켜주십니다. 그러면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게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바울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도 보호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요나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배를 타고 도망을 쳤습니다. 그 배는 요나 한 사람 때문에 큰 풍랑을 만나 침몰할 뻔한 위기를 겪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로마로 향하는 바울이 탔습니다. 이 배는 큰 광풍을 만났지만 바울 한 사람 때문에 276명의 승객 전원이 생명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다섯 명이 없어서 불 심판을 받았지만 이 배에는 바울이라는 의인 한 사람이 있었던 덕분에 구원을 얻었습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죄수라고, 이렇게 바람이 좋은데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고 무시를 당했던 바울이 이제는 무리들 가운데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절망 속에 주저앉아 있던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하고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이런 리더십과 위기관리능력이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바울이 이전에 세 번이나 파선한 경험이 있어서 이제는 익숙해져서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천사가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것을 볼 때 바울 역시 떨고 있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바울 자신이 위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죽지 않고 살아날 것이라는 계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바울은 다만 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든 것뿐입니다. 출렁거리는 큰 파도와 거센 바람 너머 온 천지 만물을 주관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역경의 순간에 빛이 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께 대한 바울의 믿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평소에는 말합니다. ‘믿음을 가져서 뭐에 쓰느냐’고. ‘예수 믿으면 밥이 나오느냐? 떡이 나오느냐?’ 그러나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그래서 그 누구도 아무 손을 쓸 수 없을 때에 그때 정말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노아시대에 홍수가 오기 전 사람들은 다 노아를 비웃었습니다. 그의 방주는 해외 토픽에 나올만한 희대의 엽기행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홍수가 왔을 때에 가장 요긴한 것은 바로 노아가 120년이라는 세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만들고 있던 방주였습니다. 그때에 노아와 방주를 비웃던 사람들은 다 물에 잠겼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노아는 그때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비가 더 많이 오면 올수록 세상은 물속으로 점점 더 깊이 잠겨 가는데 노아의 방주는 점점 더 높이 올라갔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역경의 순간에 그 빛을 발하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그 리더십을 발휘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평소에는 우리를 무시할 수 있습니다. 지금 같은 무한경쟁의 시대에 너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 공부해야지, 취직 준비해야지, 실력을 쌓아야지. 맞습니다. 우리는 공부해야 합니다. 무한경쟁의 시대에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실력이 무엇입니까? 학점만이 실력이 아닙니다. 토익점수만이 실력이 아닙니다. 진정한 실력은 어떤 위기상황이 닥쳐와도 이를 뚫고 나갈 수 있는 내공을 키우는 것이 실력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모세가 학문이 부족해서, 외국어실력이 부족해서 하나님께서 광야훈련을 시키셨겠습니까? 바울이 아는 것이 부족해서 지금까지 수많은 역경과 환란의 터널을 거쳐 왔겠습니까? 아닙니다. 모세나 바울이나 많은 연단을 통해서 믿음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했습니다. 이론으로가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 광풍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실제적인 믿음을 키워왔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실력을 쌓은 것입니다. 그랬을 때에 그들은 위기가운데서 구원의 역사를 이룬 위대한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래를 대비해서 준비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진정한 실력인 믿음을 배워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위기의 때에 반드시 들어 쓰실 것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배가 미항을 떠나온 지 열 나흘째 되는 날 밤이었습니다. 아직도 여전히 아드리아 바다에 이리저리 쫓겨 가고 있었습니다. 자정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물을 재어보니 스무 길이었습니다.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 되었습니다. 이는 육지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동시에 암초에 부딪칠 위험성도 높아진 것입니다. 그래서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닻을 네 개나 내리고 거기에 머물러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 때 사공들이 닻을 내리는 척 하면서 구명정을 내려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선원들을 승객들을 버려두고 자기들만 살려고 했습니다. 선원들이 사라지면 누가 배를 육지 가까이 댈 수 있겠습니까? 다행스럽게도 이 모습을 바울이 목격했습니다. 즉시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이 그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거루 줄을 끊어 버렸습니다. 분명 11절에서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바울의 말에 권위가 생겼습니다. 이제 사실상 이 배의 선장은 사도 바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승객들은 2주간 동안 심한 배 멀미와 풍랑과 싸우느라 먹지 못하고, 굶주렸습니다.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구원의 기회가 주어져도 헤엄쳐 나올 힘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음식을 먹도록 권했습니다.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34) 바울은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 안심을 시켰습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떡을 떼어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안심하고 받아먹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말을 신뢰하고 절망에서 벗어나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배불리 먹게 한 후, 남은 곡식을 바다에 버려 최대한 배를 가볍게 했습니다. 날이 새자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하지만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선원들은 키 줄을 풀어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을 받아 해안을 향하여 돌진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예상하지 못했던 난관에 부딪쳤습니다. 두 물이 합쳐 흐르는 곳을 만나 배 앞머리가 모래와 진흙에 박혀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충돌했을 때의 충격과 뒤에서 내려치는 파도에 의해서 고물이 깨어졌습니다. 잠시 후면 물이 차올라 배가 침몰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이 죄수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로마법에 따르면 만약 죄수들이 도망치면 그들을 지키던 군인이 죄수들이 받을 형벌을 대신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지금 죽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군사들을 막아 죄수들을 죽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백부장이 왜 바울을 구원하려 했겠습니까? 바울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믿음으로 칭찬 받은 백부장도 그렇고 백부장 고넬료도 그렇고 신기하게도 성경에 나오는 백부장들은 하나 같이 다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백부장은 헤엄을 칠 줄 아는 사람을 먼저 뛰어내리게 하여 육지에 헤엄쳐가도록 했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과 배 물건을 의지하여 나가에 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육지에 상륙하여 구조되었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그들은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지 않고 다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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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11절과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우리는 본문의 선원들을 보면서 2년 전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도 선원들은 어린 학생들을 배 안에 버려두고 가장 먼저 배를 탈출했습니다. 구출된 선장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머니 속에서 젖은 지폐를 말리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나오는 삯꾼과 같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삯꾼과 같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고 박지영 승무원은 4층에서 구명조끼를 구해 3층으로 내려가 학생들에게 건네며 가슴에 물이 차오를 때까지 학생들을 구했습니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너희들 다 구하고 난 나중에 나갈게. 선원이 마지막이야” 선원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매점에서 물건을 파는 비정규직 직원일 뿐이었습니다. 바울 역시 어쩌다 이 배에 타게 된 일개 죄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배에 탄 모든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이 사람들을 다 너에게 주셨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자기 생명을 구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면 선원들이 몰래 구명정을 내릴 때 거래를 했어야 했습니다. "나도 태워 주시오. 그러면 못 본 걸로 해 주겠소." 하지만 바울은 그런 이기적이고 치사한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목적은 배에 탄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를 살려서 안전하게 섬에 도착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원들의 탈주를 목격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바울이 잠도 안자고 배의 구석구석을 살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사실상 배의 지휘부가 붕괴된 상태에서 앞장서서 승객들을 먹이고 안심시킨 사람도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닮은 양들의 선한 목자였습니다. 위기의 때가 오자 승객들은 누가 진짜 목자인지 누가 삯꾼인지, 누가 진정을 나를 위하는 사람이고 누가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 배에 바울이 없었다면 얼마나 끔찍한 비극이 일어났겠습니까? 그러나 목자 바울이 있었기 때문에 모두의 생명을 건질 수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 이후 매년마다 언론에 단골로 등장하는 기사 제목이 있습니다. 바로 “침몰하는 대한민국 호. 선장이 없다!‘라는 제목입니다. 최근 경제 여건이 매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특히 조선업이 직격탄을 맞아 대량 해고가 코앞에 와 있습니다. 그 와중에 양극화 현상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갈등의 골이 깊어 가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치열한 경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심음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 강남역 살인 사건에서 보듯이 ’묻지마‘ 살인, 증오 범죄가 나날이 늘고 있습니다. 북한은 언제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물라 불안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 지도자들은 정쟁만 일삼고 차기 대권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과연 대한민국 호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러다가 침몰하는 것은 아닌지 국민 모두가 걱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고 따를 수 있는 선장이 잘 보이질 않습니다. 이럴 때 우리도 손 놓고 탄식만 하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에게 외적인 타이틀은 없습니다. 대통령도 아니고 국회의원도 아닙니다. 그러나 표류하고 침몰하는 대한민국 호에는 사도 바울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요 목자가 필요합니다.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절망 중에서 희망을 제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하나님의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바로 우리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제가 우연히 우리 모임의 초창기부터 참여하셨던 분의 이야기를 듣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처음 우리 모임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끓어오르는 피를 가진 청년들이 많이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임 시작할 때 애국가를 부르고 시작할 때도 많았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임의 뿌리에는 말씀과 신앙만이 우리 민족이 살 길임을 알고 이 나라를 성서 위에 세우고자 하는 정신이 있습니다. 우리도 이 정신을 계승하여 정처 없이 표류하는 캠퍼스 영혼들에게 믿음을 심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선한 목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를 통해서 역경에 처한 이 나라에 새로운 희망을 제시할 수 있는 지도자들을 세워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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