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와서 보라

이창무 2015. 4. 30.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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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요한복음 제 2 강

 

와서 보라

 

말씀 / 요한복음 1:29-51

요절 / 요한복음 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생전에 한국 코미디의 황제라고 불렸고 지금은 고인이 되신 코미디언 이주일씨를 기억하십니까? 그런데 80년대 초반 이주일씨가 너무 못생겼고 저질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방송 금지를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에도 TV 광고에서는 이주일씨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때 이주일씨가 광고를 통해 유행시킨 유행어가 있었으니 “일단 한번 와 보시래니깐요~!”가 그것입니다. 도대체 어디로 오라는 말일까요? 무랑루즈, 초원의 집 등의 밤무대로 오라는 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주일씨의 초청에 이끌려 밤무대 술집에 갔다가 몸도 축나고 돈도 축났습니다. 반면 우리를 구원과 영생으로 이끌어 주는 초청의 음성이 오늘 말씀 안에 있습니다. ‘와서 보라’하시는 예수님의 초청입니다. 이 초청에 응답하면 죄를 용서받고 변화된 새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일단 한번 와 보시래니까요~!” 이제 우리가 이주일씨보다 더 열심히 예수님을 증거하고 초청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이 자기에게 나아오신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증언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29절 하반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례 요한은 다음날 자기 제자들에게 또 다시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 두 번이나 반복되었던 요한의 증언은 어떤 뜻이었을까요? 이 말은 당시 구약 성경에 익숙했던 유대인들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은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하면 먼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고자 했던 사건을 떠오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드리고자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번제에 필요한 어린 양을 직접 준비하셨습니다. 또한 출애굽기 유월절 어린 양도 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또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말은 레위기에 나오는 속죄의 염소 일명 아사셀 염소와 관련이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대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은 한 염소에 손을 얹어 안수하였습니다. 이 안수는 백성들의 죄를 염소에게 전가시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 염소를 사람의 발길이 닿은 적이 없는 멀고 먼 광야로 데려갑니다. 이로써 백성들의 죄가 멀리 치워졌습니다. 결정적으로 이사야 53장에 등장하는 어린 양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53장 6절과 7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에 두 종류의 양이 나옵니다. 먼저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가는 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살고자 하는 우리 인생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양이 있습니다. 그 어린 양은 인생들의 죄악을 대신 짊어진 채 묵묵히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메시야가 대속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져내실 분이심을 예언하였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실 바로 그 메시야께서 자기 눈앞에 나타나셨을 때 세례 요한은 가슴 속에서 벅차 오르는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렇게 소리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둘째,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요한이 주는 물세례는 죄를 깨닫고 고백하게 하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성령 세례는 사람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이전에 하나님을 거역하던 마음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남으로써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세례 요한은 이런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감에 설레는 마음으로 이렇게 증거하였습니다.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세례 요한이 증언한 이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보라'라는 말로 증언의 서두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럴 때 죄 문제가 해결되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이 시대를 바라보고 있자니 참 힘들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경제 위기의 소식들과 청년 실업, 전세 값 폭등, 자연 재해의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최근 IS라는 희대의 극렬 테러 단체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소식이 자주 외신을 타고 들어옵니다. 얼마 전 IS가 이집트에서 예수님을 믿는 콥트교인 21명을 참수했다고 합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또 엊그제 주한 미국 대사가 공격을 받아 상처를 입었다는 소식까지 세상을 보면 참 답답하고 좋은 소식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 나 자신을 바라보면 어떻습니까? 내 안에 여전히 똬리를 틀고 있는 죄의 세력을 생각하면 탄식이 나옵니다. 아직도 과거의 나태한 행실이 그대로 남아 있고, 음란과 정욕, 교만과 시기의 죄악들이 나를 넘어뜨리려 하고 또 때때로 넘어지기도 합니다. 목자로서 세움을 받고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겠다는 열망은 있지만,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 내 모습을 보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요한의 입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이인줄 알라.” “세상과 너 자신만을 바라보던 눈을 들어라! 예수님께 집중하고 그 분께 날마다 나아가라!” 세상 죄를 예수님께서 지고 가셨습니다.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어린 양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를 정결하게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시키실 것이고, 또 이 어려운 환난 가운데서도 넉넉히 세상을 이길 힘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힘이 나고 희망이 생깁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긴급하고 필요한 일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새 봄 학기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5절부터 51절까지는 본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두 사람, 시몬, 빌립, 나다나엘 이렇게 다섯 명이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 중 한 사람은 안드레였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만났습니까? 안드레는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거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향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표현은 이렇게 서로 다르지만 사실은 모두 한 가지 동일한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 곧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구원자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고백하는 일은 알면 좋고 모르면 그만인 그런 시시콜콜한 일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은 말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예수님을 아느냐 알지 못하느냐가 구원과 심판을 가르는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고 고백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아무리 좋은 머리를 타고 난 천재적인 사람이라도 이 사실을 자기 힘만으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셔서 깨닫게 해 주셔야만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일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처음 알게 된 지 만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서 그리스도로 알고 고백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어떻게 처음 제자들이 이렇게 빨리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핵심에 접근할 수 있었을까요? 그 비밀은 여기 있습니다. "와서 보라" 예수님께서 안드레에게 하신 말씀이 '와서 보라'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초청한 말도 '와서 보라'입니다. '와서 보라'하는 이 말은 곧 '예수님를 따르고 예수님과 함께 거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과 함께 거해야만 합니까?

첫째,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려면 예수님과의 친밀하고 인격적인 사귐과 순종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2월 학사 엠티 때 '팬인가? 제자인가?'라는 책으로 세미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예수님 주변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관중석에 앉아서 선수들을 향해서 환호하고 목청껏 응원하는 팬이 있습니다. 팬은 얼핏 보면 제자처럼 보이지만 제자가 아닙니다. 아무리 열성적이라 하더라도 팬은 선수들과 함께 그라운드에서 함께 뛰거나 구르지 않습니다. 팬이 경기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 보여도 그 지식은 체험이 결여된 피상적인 지식에 불과합니다. 반면 제자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은 어디든 함께 하고 기꺼이 그에 따르는 대가를 지불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제자만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르게 알고 배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말씀 공부를 했는데 성장이나 변화가 거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과의 더 깊은 인격적인 사귐과 순종의 관계 속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하고 자기가 정한 선 밖에서만 빙빙 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팬으로 살려 하지 제자가 되려고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해결책은 ‘와서 보라’입니다. 와서 보지 않고는 예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은 머리로만 알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머리와 가슴과 손과 발로 전인격적으로 알 수 있는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께 대한 편견이나 선입관을 깨고 실체를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지역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힌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나다나엘이었습니다.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증거한 사람은 빌립입니다. 빌립은 헬라식 이름입니다. 이름이 말해 주듯이 빌립은 비록 갈릴리 지역에 살았지만 열린 마음을 가진 상당히 국제화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시라는 사실이 빌립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반면 나다나엘은 유대식 이름인데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나다나엘을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이런 정통파 유대인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나다나엘에게 나사렛은 구약 성경에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근본 없는 동네였습니다. 만약 빌립의 말대로 예수님께서 정말로 메시야시라면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 태생이어야 한다고 나다나엘은 생각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나다나엘은 사실 관계를 확인해 보지도 않고 무조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냐'며 튕겼습니다. 이때 나다나엘을 초청했던 빌립은 어떻게 대응하였습니까? 빌립은 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구구절절이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한 마디 말만 했습니다. '와서 보라' 선입관을 잠시 내려놓고 와서 직접 경험해 보라는 말입니다. 주변에서 하는 이런 저런 말에 휘둘리지 말고 과연 정말로 그런지 아닌지 두 눈으로 확인해 보라는 말입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권유에 마지못해 따라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나다나엘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꿰뚫고 계셨습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직접 경험해 보니 예수님을 신적인 지혜를 가지신 메시야로 깊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다나엘이 편견과 선입관을 깨고 예수님의 참 모습을 알게 된 것은 와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기독교니 교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말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말만 듣다 보면 성경은 거짓말투성이고, 교회는 비리와 위선이 가득 찬 곳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워낙 신문이나 방송에서 부정적인 사건만을 선정적으로 보도하기 때문입니다. 또 새내기들이 우리의 초대를 받게 되면 먼저 인터넷 검색창에 우리 모임에 대해 검색을 해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몇몇 부정적인 글들이 꼭 있습니다. 이런 글들만 읽어 보면 우리 모임이 어떤 비밀스럽고 무시무시한 조직처럼 보입니다. 이런 글들을 읽어 본 새내기들은 목자의 전화를 피하고 잠수를 타게 됩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들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이런 선입관이 없이 일단 와서 경험해 본 사람은 다릅니다. 나중에 무슨 말을 들어도 '에이... 그건 아니던데 뭘!' 하면서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해 줄 말이 있습니다. ‘일단 한번 와 보시래니깐요!’ 선한 것이 있는지 없는지는 와서 보면 압니다. 세상에는 와서 보라고 해 놓고서 막상 가서 보면 우리를 실망시키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맛집이라고 해서 가보면 우리 동네 '국수 사랑'만 못하면서 값만 비싼 집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단 하루만 함께 해도 아니 단 한 시간만이라도 대화를 하고 나면 한 사람의 인생을 얼마든지 송두리째 뒤엎어 버리시고 변화시키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저는 지난겨울 목자 학교를 섬기며 한 분 한 분이 예수님 안에서 변화된 인생을 살게 된 사실을 보고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중에서 구수향 자매님의 변화가 참 놀랍습니다. 목자의 삶을 열렬히 사모하고 전국학생수양회에서 궂은일까지 도맡아 섬기는 모습을 보니 제가 알던 그 예전의 구수향 자매님이 아니었습니다. 멕시코에 갔을 때 선교사님들과 교제하고 장막 생활을 하면서 목자 예수님,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또 최근에 형제 장막이 거듭났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지저분하던 것들이 다 깨끗하게 청소와 정리가 되어서 이동호 목자님의 부모님께서 장막에 왔다가 만족하시고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또 장막 형제들이 요즘 새벽 기도에 열심히 나오고 있습니다. 이 모든 변화의 중심에 손건수 목자님이 계십니다. 제가 그래서 손건수 목자님을 요즘 히스기야라고 종종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건수 목자님을 변화시키셨고 손건수 목자님이 장막과 장막 형제들을 변화시키고 계십니다. 누구든 예수님을 만나면 이처럼 변화됩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과 빛이 있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기 때문입니다(요 1장).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골 2:3)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들은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빌 3:8). 한 시인은 예수 그 이름은 그 풍부함을 다 표현할 수 없어서 비밀이 되었다고 노래하였습니다. 그 비밀은 와서 보는 사람에게 열릴 것입니다. 그러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저 팬으로 머물러 있거나 선입관에 사로 잡혀 와서 보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계속 닫혀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와서 보라' 하시는 이 초청의 음성에 응답하여 예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발견하는 감격과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와서 보라'고 초청한 사람은 예수님만이 아니었습니다. 세례 요한, 안드레, 빌립도 ‘와서 보라’ 초청하였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과 함께 하는 다섯 명의 제자 그룹이 형성되었습니다. 이 몇 사람들의 초청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초청했기에 이런 역사가 일어났을까요? 그들의 초청에는 어떤 특징이 있었습니까?

 

첫째, 관계를 통해 초청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과 사제 관계를 맺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안드레는 자기의 형제였던 시몬에게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빌립은 친구인 나다나엘을 초청했습니다. 이렇게 이미 알고 있던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을 가리켜 관계 전도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길에서 사람을 만나 전도하는 것을 노방 전도라고 부릅니다. 기독교에 대한 호감이 높고 한국 교회가 성장하던 시기에는 노방 전도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기차역, 광장, 캠퍼스 등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종종 복음 성가를 부르며 노방 전도를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런 모습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얼마 전 김선일 교수라는 분이 지난 10년 이내 회심한 사람 267명에 대한 설문 조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에 따르면 모르는 사람에게 전도를 받아 회심에 이르게 된 사람은 267명 중 단 한 명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아는 사람, 주로 가족이나 친구의 권유로 시작하여 회심에 이르게 되었다고 답변했습니다. 이를 보면 이제는 관계 전도의 시대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관계 전도만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천하보다 귀한 단 한 영혼을 위해서라도 계속 노방에서든 어디든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관계를 통한 초청 역사에 좀 더 힘을 실어 줄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캠퍼스를 섬기는 우리에게 학생 목자님들의 역할이 아주 중요합니다. 학생 목자님들이 캠퍼스 안에 있으면서 캠퍼스 양들과 친구와 선후배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학생 목자님들이 그 관계성을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초청해야 학생들이 올 수 있습니다. 학생 제자 양성은 학생 목자님들에게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학생 목자님들이 너무 부담을 느끼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그러나 너무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혼자 다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늘의 키워드 '와서 보라'고 초청만 하면 됩니다. 지난 주 새내기 환영회 때 류하나 자매님이 자기 친구 한 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 친구가 다음 날 주일 예배도 참석했습니다. 1 학년도 얼마든지 초청할 수 있습니다. 양을 섬길 모든 준비가 되어 있는 목자님들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 뒤는 아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학사 목자님들은 학생 목자님들이 양을 소개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학사 목자님들은 캠퍼스 양들과 먼저 좋은 선배이자 친구로서 관계성을 맺으면 됩니다. 밥 사주고 고민을 들어주고 상담도 해 주고 이모저모로 도와주는 선배가 '와서 보라'하는 말을 끝내 마다할 후배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캠퍼스 분위기가 좋지 않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학생은 학생대로 학사는 학사대로 이모저모 방법으로 캠퍼스 양들과 관계성을 형성하고 그 가운데 ‘와서 보라’ 초청하는 역사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단순하면서 고백적인 증거를 통한 초청입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모세와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만났다" "와서 보라" 오늘 말씀에 나타난 초청의 말들입니다. 얼마나 심플합니까? 복잡하지 않습니다. 현학적이지 않습니다. 또한 이 말들은 초청의 말들이기도 하면서 자신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내가 내 인생의 구원자를 만났다 하는 그 감격이 살아 있는 증언들입니다. 어떤 정해진 공식에 따라 기계적으로 전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 벅차오르는 감동을 주체할 수 없어서 누군가를 붙들고 증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잘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감격이 살아 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잘 전합니다. 사도 바울은 글은 잘 쓰지만 말은 어눌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말 잘 하는 후배인 아볼로와 비교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만큼 일생을 복음 전파자로서 헌신하고 열매 맺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 서신 중에 그의 노년에 쓰여진 디모데전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딤전 1:15)" 이 문장은 순서가 서로 뒤바뀌어 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니 저절로 찬송이 먼저 터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일생 감옥의 갇혀서까지도 복음의 증거자로 살 수 있었던 힘은 식을 줄 모르는 구원의 감격 때문이었습니다.

 

저도 돌이켜 보니 구원의 감격이 제 안에 있을 때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지독하게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저마저도 2학년 여름에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 감격하여 6개월 후 기다렸다는 듯 캠퍼스에 나가 새내기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영접하면 영접하는 대로 신기하고 놀라워서 기쁘고, 거절하면 거절하는 대로 과거 완악했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구원의 은혜에 감사해서 기뻤습니다. 지난 주 목자 학교 졸업식 및 목자 선서식을 보면서 그 때가 다시 생각이 났습니다. 한 선서자께서 지금이라도 당장 여기를 나가서 세상에 예수님을 증거하고 싶다고 소감 발표를 했을 때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내가 잃어버린 것이 바로 이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은 경험도 많이 쌓였고 노하우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감격과 예수님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은 오히려 그 때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구원의 감격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겠습니다. 제가 기쁨과 확신에 차서 캠퍼스에 나아가 ‘와서 보라’ 초청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캠퍼스에 봄이 오고 있습니다. 파릇파릇한 새내기들이 몰려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봄은 예수님을 만나야 찾아옵니다. 캠퍼스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새내기를 위한 바이블 카페가 준비하고 있습니다. 많은 새내기들을 와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구원의 감격이 담긴 ‘와서 보라’는 메시지로 캠퍼스 양들을 초청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15.3.8, 이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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