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원대로 주신 분

이창무 2015. 4. 30.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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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봄학기 요한복음 제 5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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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 요한복음 6:1 - 15 

▣ 요절 / 요한복음 6:11




원대로 주신 분



오병이어의 표적은 사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유일한 기적입니다. 그만큼 오병이어 사건이 중요한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많은 설교학자들이 오병이어는 설교하지 말라는 권고를 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오병이어 사건을 왜 설교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이는 오병이어 사건이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청중이 말씀을 듣기 전에 이미 각자 나름대로 결론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오병이어 사건은 그저 "빌립이 되지 말고 안드레가 되자" 또는 "나의 오병이어를 찾아 주님께 드리자" 하는 말씀이라고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그런 내용이 오병이어 사건에서 꼭 다루어야 할 중요한 주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할 대상은 빌립도 안드레도 아니고 오병이어도 아니라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오병이어의 표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자신을 어떤 분으로 나타내셨는가를 깊이 묵상하며 은혜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오병이어를 축사하신 예수님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 혼자 건너가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과 함께 건너가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을까요? 마가복음 6장 31절에 보면 배를 타고 떠나기 직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기록이 있습니다. "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그 동안 제자들은 복음 역사를 섬기느라 눈 코 뜰 새 없는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의 이 한 마디는 가뭄 끝에 찾아 온 단비 같았습니다. 한적한 곳에서 보내는 꿀맛 같은 휴가를 기대하며 제자들의 가슴은 벌써부터 설레었습니다. 목적지는 갈릴리 바다 건너편 용문산 기슭에 자리 잡은 용문산 밸리 팬션이었습니다. 배 안에서 제자들은 1박 2일 MT 프로그램으로 짜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저녁 식사 메뉴는 무엇으로 할까?" "역시 숯불 바베큐가 최고지" "마피아 게임을 하면서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 보자구!" 


드디어 배가 육지에 닿아 내리려는 순간 제자들은 자기들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웰컴! 지저스" 거기에는 이미 큰 무리가 모여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수가 무려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10)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 수를 카운트할 때 오직 성인 남자만 세었으므로 실제로 전체 무리의 수는 그보다는 훨씬 많은 최소 만 명에서 이만 명 사이였을 것입니다. 흔히 고대생을 이만 학우라고 표현합니다. 고대생 전체가 한 자리에 다 모인 정도 되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이야기입니다. 2절에 보면 이 큰 무리는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따라 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 왕의 신하의 아들을 말씀으로 고치신 사건들이 갈릴리에까지 널리 알려 졌던 것 같습니다. 이 무리들 중엔 몸이 성치 못해 예수님께 고침을 받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대다수였을 것입니다. 멀리 베데스다 못가에서는 관광 버스를 대절하여 단체로 올라 왔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습니다.(4) 지금 이 무리들은 유대 풍습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어야 마땅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웅장한 성전이 있었고, 거기에는 백성들의 목자로 공식 임명장을 받은 제사장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왜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 바다 건너 편 예수님께로 몰려 왔을까요? 백성들은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누리기에만 정신이 팔려 있을 뿐, 백성들을 돌보는 목자로서의 직분은 이미 던져 버린 지 오래였습니다.  꿀벌이 꽃이 있는 곳으로 모여들듯이 본능적으로 무리들은 예수님에게서 선한 목자의 향기를 맡고 벌떼처럼 모여 들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큰 무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산에 오르셨습니다. 또 산 아래에는 무리들이 있게 하시고, 산 위에는 제자들이 앉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무리와 제자 그룹을 서로 분리하도록 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이를 통해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무리를 돕고 섬겨야 할 책임을 맡은 목자요 영적 지도자라는 것을 인식하도록 도와 주신 것입니다. 산 아래 무리가 있는 곳에는 문제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 아파요. 마이 아파요." "예수님, 배도 고파요" "예수님, 전 귀신에 들렸나 봐요" 무리들의 간절한 호소와 외침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습니다. 제자들의 눈에 끊임없이 밀려드는 저 큰 무리가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무리들은 마치 방금 무덤에서 일어난 좀비들처럼 보였습니다. 모처럼 만의 휴식을 방해한 훼방꾼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무리들을 보자마자 짜증이 확 밀려 왔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무리를 어떻게 바라 보셨을까요? 마가복음 6장 34절은 말합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은 큰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들고 굶주린 백성들을 보시고 몹시도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을 더욱 더 아프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 곧 영적인 지도자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5절 하반절과 6절을 보십시오.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이 말씀을 보면 이미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 온 무리들을 보신 후 그들을 친히 먹이시고자 작정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르는 척 하시며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질문하셨습니다. 이 질문은 빌립의 반응을 떠 보시려고 시험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왕 먹이실 것이면 빨리 먹이시지 왜 빌립을 시험하시며 뜸을 들이실까요? 이는 예수님이 무리를 먹이시되 그냥 먹이시기보다는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그들이 믿음이 배울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시험 대상이 많은 제자 중에 하필이면 빌립이었을까요? 그는 예수님께 찍힌 제자일까요? 추측하건대 빌립이 평상시에도 부정적인 사람이었던 듯합니다. 제자들 중에서 ‘안 될 거야’ ‘절대 못 할 거야’ 이런 말을 가장 많이 했던 사람이 빌립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제자들에게 비슷한 문제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빌립을 대표로 시험하셨습니다. 우리 중에도 어디를 가나 유난히 부정적인 말을 잘 하는 사람이 한 명 쯤은 꼭 있습니다. 점점 고조되어 가던 분위기에 한 마디 말로 찬물을 쫙 끼얹는 사람입니다. 빌립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빌립의 대답은 어떠했습니까?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이 대답을 보면 빌립이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계산을 하려면 먼저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우선 현재 모인 큰 무리의 숫자를 카운트해야 하는데, 쉽지 않은 일입니다. 경찰은 집회 참석 인원을 산정할 때 샘플링이란 통계적 기법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전체를 균등한 작은 셀로 나눈 후 한 셀에 있는 사람의 숫자를 셉니다. 그 숫자에 셀의 갯수를 곱하면 전체 인원을 대략 추정할 수 있게 됩니다. 빌립도 아마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대략적인 인원을 추정했을 것입니다. 이 숫자에 가벼운 한 끼 식사의 단가를 곱하여 이백 데나리온을 계산해 내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서 이백 데나리온은 현재 건설일용직 평균일당 10만원을 적용하면 약 2천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무리가 만 명이라면 한 사람 당 식비가 이천 원 꼴입니다. 이천 원이면 김밥 한 줄에 우유 하나, 한솥 도시락 메뉴 중 가장 저렴한 새댁 도시락 하나에 물 하나 정도 살 수 있습니다. 이 정도는 새댁이나 요기가 될까 건장한 청년들에게는 많이 부족한 식사입니다. 아무튼 빌립은 단숨에 이런 계산을 해 정확한 견적을 뽑아내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계산을 하려면 마이크로소프트 엑셀을 이용하거나 적어도 계산기는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빌립은 인텔 듀얼 코어 CPU를 능가하는 자신의 머리를 써서 여러 개의 계산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숫자에 밝고 계산에 능한 이런 사람은 특히 회사 생활을 할 때 상사로부터 인정을 많이 받습니다. 회의를 할 때 프로젝트 소요 예산을 즉석에서 정확히 계산해서 발표할 수 있다면 부장님이 얼마나 이뻐해 주시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이것입니다. 빌립의 대답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늘 하던 대로 이번에도 부정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빌립은 시험 볼 때 가장 중요한 포인트 즉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와중에 빌립에게 수학 문제를 내셨겠습니까? 예수님은 빌립의 계산 능력을 테스트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빌립의 믿음, 목자의 심정과 책임감을 테스트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은 믿음 없는 부정적인 말을 함으로써 시험에서 실패했습니다. 사실 가난한 제자들에게 이백 데나리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직업이 목수가 아니라 검사였다면 스폰서에게 받은 떡값이라도 있었을 텐데 스폰서도 떡값도 없었습니다. 굳이 계산해 보지 않아도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무리를 먹일 돈이 없다는 것은 제자들이 다 알고 예수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사실 빌립의 방식대로 하면 설령 이백 데나리온의 돈이 있었다 할지라도 무리를 먹일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이 있어도 만 명 분의 식사를 어디서 갑자기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러한 빌립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빌립의 문제는 첫째로 예수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던지신 질문의 주어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을 먹이겠느냐?" 주어가 우리입니다. 우리 속에는 제자들과 예수님이 포함됩니다. 그는 계산은 잘 하였지만 가장 중요한 변수인 예수님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무리를 먹일 수 없는 무능한 분, 한계에 갇힌 분으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빌립은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는 것과 같은 그런 목자의 심정과 책임감이 없었습니다. 엄마에게 아들이 배고프다고 울며 보챌 때, 빈 지갑은 보여주면 네가 먹을 것은 네가 알아서 해라하면서 내버려둘 엄마가 있겠습니까? 엄마는 어디서 돈을 빌리든 막노동이라도 해서라도 어찌하든 아들을 먹이려고 할 것입니다. 빌립이 만약 목자의 심정이 있어 무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면 계산만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붙들고 해결 방법을 찾아 구하고 또 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은 나는 나고 무리는 무리일 뿐, 내 코가 석자인데 누구를 돌아보겠느냐며 양 무리를 외면했습니다.


빌립의 대답을 들은 다른 제자들도 고객을 푹 숙이고 가진 것 없는 자신들의 신세를 속으로 한탄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자기에게 묻지도 않았는데 불쑥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혼자 나오지 않고 처음 보는 한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아이의 손에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들려 있었습니다. 이를 줄여서 오병이어라 부릅니다. 보리떡은 당시 가난한 사람의 식량이었습니다. 부자는 부드러운 밀떡을 먹지 보리떡을 먹지 않았습니다. 물고기는 소금에 절인 작은 생선입니다. 원어에 보면 떡과 물고기에 작다는 의미를 가진 접미사가 붙어 있습니다. 작은 소년이 가진 작은 떡과 작은 물고기입니다. 정말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입니다.


먹여야 할 사람은 만 명인데 안드레는 한 소년이 가진 도시락 하나를 들고 나왔습니다. 도대체 안드레는 어쩌자고 이 아이를 데리고 나온 것입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오병이어를 들고 나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피하기 때문입니다. 웃음거리, 조롱거리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 심정의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빌립식으로 끝난다면 보통 사람들과 예수님의 제자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목자가 양과 생각이 똑 같고 지도자가 무리와 다를 바가 없다면 어떻게 그들을 돌보고 이끌어 갈 수 있겠습니까? 안드레는 인간적으로 보면 빌립보다는 못난 사람이었을지 모릅니다. 빌립만큼 똑똑하지도 계산을 잘 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상황과 조건을 보기 보다는 먼저 예수님을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안드레는 이성보다는 감수성이 더 발달했던 사람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눈빛 속에서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상한 목자의 심정을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굳게 다문 입술에서 어찌하든 무리를 먹이고자 하시는 강한 의지를 읽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드릴만한 것이라면 뭐라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는 먼저 자기 주머니를 뒤져 보았습니다. 나오는 것은 먼지 밖에 없었습니다. 형 베드로에게 가서 '형님! 뭐 좀 없수?'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역시 주머니가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안드레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무리 속으로 뛰어 들어가 기어이 한 아이가 갖고 있는 오병이어를 들고 예수님께 가져 왔습니다. 안드레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것이 문제 해결의 키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문제 해결의 꼬투리라도 찾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문제 해결의 키는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시다는 믿음으로 그것을 들고 나아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안드레가 오병이어를 드린 그 믿음마저도 오병이어와 같이 작은 믿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안드레는 마지막에 덧붙인 말이 무엇입니까? 9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이 말을 보면 안드레의 믿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이거나 완전한 믿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으려면 흔들리지 않는 강철 같은 믿음과 화산같이 불타오르는 심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나는 돈도 없고 능력도 없는데 결정적으로 믿음까지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안드레를 보십시오. 안드레의 믿음에도 일말의 회의와 불신이 섞여 있습니다. 그의 믿음은 강철 같은 확신과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 마음속에도 될까 안 될까 하는 갈등이 늘 있습니다. 믿으려는 마음과 불신과 회의가 뒤죽박죽 섞여 있어 과연 주님께서 이런 나도 받아 주실까 두렵습니다. 그런데 믿음이란 이렇게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서도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어딘지 어설프고 자신이 없고 두려운 가운데서도 드리는 것이 바로 오병이어입니다. 정말 믿음이 없는 사람은 믿음 없다고 한탄하지도 않습니다. 탄식하며 믿음을 달라고 구하는 기도도 역시 우리의 오병이어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7장 6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눈에 보일락 말락 한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이렇게 큰 역사가 일어나는데 오병이어 같은 믿음은 결코 작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병이어 같은 작은 믿음, 아니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들고 용기를 내어 주님께 들고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안드레가 가져 온 오병이어를 보시고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그래서, 어쩌라고?" "되었다. 그냥 가져가라" 하셨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예수님은 놀랍게도 오병이어를 가져다가 앞에 두시고 축사하셨습니다. 축사하셨다는 말은 축복하시고 감사하셨다는 뜻입니다. 기껏해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인데... 돈으로 환산하면 오천원 값어치도 안 될 텐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감사하실 수 있었을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속에 담긴 믿음의 가치와 진심의 가치를 크게 보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안드레의 믿음과 진심에 감사를 넘어 거의 감동까지 받으시고 이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비싼 선물을 주고받았다고 꼭 감동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 동역자와 약혼 기간에 저는 동역자에게 많은 선물과 맛있는 음식을 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이 있습니다. 어느 날 제가 편지지에다가 동역자에 대한 저의 사랑과 애정을 담은 시를 한편 써서 선물을 해 주었습니다. 이 선물을 받고 제 동역자가 어떤 선물을 받았을 때보다도 더 기뻐하고 감동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제 동역자가 저를 보자고 하더니 음악실로 데려갔습니다. 그러더니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불러 주었습니다. 가만히 노래의 가사를 들어 보니 바로 어제 제가 써준 시였습니다. 동역자가 밤사이 그 시에 선율을 입혀 작곡을 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내 감동의 도가니탕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감동의 도가니탕에 빠뜨리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이백 데나리온 정도는 드려야 주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의 작은 진심입니다. 좀 엉뚱해 보이고 말이 안 되더라도 괜찮습니다. 우리의 전체 기도 제목 중에 ‘김정일이 변화되어 쿠바 선교사로 나가게 해 주소서’ 하는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김정일이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합니다. 여기에는 세계 선교를 향한 우리의 믿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남들이 보면 황당한 기도 제목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주님께서 이 믿음을 아주 귀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어떤 사모님은 캠퍼스 피싱을 나갈 때 유모차를 끌고 나갑니다. 도대체 그래서 어쩌자는 것이냐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여기 담긴 작은 믿음을 보시고 이를 받으시고 감사하시고 노래를 지으시고 기뻐하시며 축복하십니다. 센터건축을 위해 드리는 작은 진심으로 벽돌이 쌓여가고 마침내 건물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잘은 못써도 밤새워 쓴 새벽 기도 메시지, 이 말씀을 듣고 누가 변화하겠는가, 하며 부끄러운 마음으로 발표하고 전하는데 하나님이 이를 기뻐 받으시고 이 메시지를 통해 사람이 은혜 받고 변하게 하십니다. 공부하는 양을 위해 사들고 간 김밥 한 줄로 주님을 역사하십니다. 매주 월요일마다 철도대에서는 미니 바이블 까페가 열리고 있습니다. 이 까페를 위해 분위기 메이킹의 달인 영 블레싱 목자님이 매주마다 철도대로 달려가서 섬긴다고 합니다. 블레싱 목자님이 대학원 공부하느라 정신 없이 바쁜 중에도 주께 드리는 이 작은 진심에 주님이 어찌 감동받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믿음과 정성을 받으시고 크게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 믿음과 진심을 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또 이렇게 우리 진심을 받아주시고 축복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주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떡을 가지고 감사기도를 하신 후, 제자들을 통해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셨습니다. 11절 하반절이 킹제임스 성경에는 보면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he distributed to the disciples, and the disciples to them that were set down.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눠주시고, 제자들이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이 번역이 헬라어 원문의 내용과 좀 더 가까운 번역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그 후에 먹을 것을 직접 무리들에게 전달한 사람은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두 단계를 거쳐서 무리를 먹이셨을까요?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양들을 먹이는 일에 동역해야 할 존재라는 점을 분명히 알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떡과 물고기를 무리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하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나눠 주고 또 나눠 주어도 떡과 물고기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병이어는 샘솟는 물과 같았습니다. 퍼내도 다시 솟아나고, 줘도 다함이 없었습니다. 본래 이 만큼만 하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해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극히 큰 것이 되었습니다. 요만큼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을 뛰어 넘는 큰 능력이 되었습니다. 산 아래는 모든 음식이 무한 리필로 제공되는 거대한 레스토랑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원하는 대로 주셨고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실컷 먹었습니다. 그래서 만 명이 넘는 대식구가 모두 다 배불리 먹게 되었습니다. 그저 배불리 먹는데 그치지 않고 먹고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찰 정도였습니다. 이 장관을 지켜보는 안드레는 얼마나 가슴이 뿌듯했겠습니까? 한편 빌립은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렸을까요? 이는 하나님 역사의 위대함과 풍성함은 이렇게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역사는 많이 가진 자를 통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가운데 드린 진심과 믿음을 통해 일어납니다. 우리가 크고 위대한 일을 이루기 위해 먼저 많이 가져야한다는 생각을 할 필요 없습니다. 풍성한 역사를 위해 내가 풍성히 드려야만 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으시는 것은 오병이어고 또 이를 통해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원대로 주며 남기는 역사를 위해 우리가 부족해도 오병이어를 드릴 수 있는 믿음 갖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으로 오병이어를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 안암골을 ‘온 세계를 먹이고 섬기는 안암골’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학생 제자 100명 양성은 경한 일이요, 안암골에서 위대한 목자, 위대한 선교사, 위대한 말씀의 종이 수도 없이 일어나는 하나님 역사의 위대함과 풍성함을 체험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II. 오병이어가 되신 예수님


  이 오병이어 사건은 예수님이 표적으로 우리에 주신 것입니다. 표적이란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있는 기적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표적을 볼 때 이 사건에는 어떤 의미와 목적이 있는지를 반드시 생각해야 합니다. 이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일차적으로 드러내시고 싶으셨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큰 무리를 먹이신 사건은 하나님은 아무 것도 아닌 것, 보잘 것 없는 것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방법이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세상은 그분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에게서조차 이 사람은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는 빈정거림을 당하셨습니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아무런 학위도 타이틀도 없는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아무도 이 분이 만민의 구주이신 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병이어는 누구를 상징할까요?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오병이어는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나뉘고 부서지고 찢어 졌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찢고 부수시고, 온 몸이 으깨어지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이렇게 찢겨진 예수님의 몸은 그를 믿는 모든 자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자기의 몸을 나누어 주십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를 앞에 두고 하신 말씀은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서 하신 말씀과 놀랍도록 일치합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11)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마26:26) 예수님의 몸은 한 사람의 몸이었지만 그 몸을 드려 이루신 십자가의 은혜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족케 하기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몸을 받아먹는 자는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이 주시는 이 생명의 떡을 먹는 자는 원하는 대로 먹고 만족하며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찢고 부수고 나누어 우리를 위한 영생의 양식으로 내어 주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오병이어로 드린 예수님을 통해 참으로 우리는 풍성한 생명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영혼의 만족을 위해 무엇을 구합니까? 세상 명예가 우리 영혼을 만족시켜줍니까? 돈이 많으면 행복합니까? 권세가 있으면 그렇게 될까요? 아름다운 이성친구가 있으면 그렇게 될까요? 어떤 사람은 어떤 특정한 사람이 자기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오직 그 사람만을 사모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그런 것들은 우리 영혼을 복되게 하고 만족케 하는 오병이어가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의 떡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령한 은혜로 복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 나가는 것이 바로 행복의 비결입니다. 영생을 누릴 수 있는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예수님께 부지런히 나가 주님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며 그 안에서 감사하고 복된 삶을 누릴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두 가지 귀중한 진리를 배웠습니다. 정리하자면 첫째는 우리가 드리는 작은 진심을 주님을 기뻐 받으시고 축복해주시며 생명 구원 역사에 귀하게 사용해주신 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바로 우리 모두의 구원과 생명을 위한 오병이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번 봄 학기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께 작은 진심을 드리고 또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누리는 삶을 통해 은혜가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10.5.9. 이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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