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니고데모씨! 거듭나야겠습니다.

이창무 2015. 4. 30. 10:05
반응형

니고데모씨! 거듭나야겠습니다.


말씀 : 요한복음 3장 1절부터 15절까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요즘 세상은 돈만 있으면 뭐든지 다 살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최근 고대에서 한바탕 일어난 소동을 보면서 철학 박사 학위를 논문 한 편 없을지라도 480억을 대학교에 기부하면 받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인생 역전의 신기루를 부여 잡고 로또 복권에 칠할 여섯 숫자를 두고 고민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우리 삶에 가장 소중한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사랑과 행복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를 살 수는 없습니다. 거듭나야만 즉 우리의 존재 자체가 변화되어야만 우리는 삶에서 있어서 진정으로 소중한 것들을 느끼고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니고데모씨와 예수님께서 나눈 대화를 통해 거듭남의 비밀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사람이 왜 거듭나야 하는가?


1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이었으며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란 분리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바리새인의 기원은 알렉산더가 일으킨 헬라제국이 유대 지역을 식민화하여 다스리던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식민지 지배자였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대대적인 헬라화 정책을 펴서 헬라 종교와 문화를 유대인들에게 강요하였습니다. 이때 헬라화를 분연히 거부하고 유대교 신앙과 문화를 지키고자 일어난 일련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유대 율법의 철저한 준수를 생명보다 더 중하게 여기고 이를 실천에 옮긴 사람들이었습니다. 니고데모 역시 바리새인의 한 사람으로서 율법을 연구하고 율법에 따라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유대인의 관원이란 입법과 사법, 행정의 최고 의결기구였던 산헤드린의 공회원을 말합니다. 정원이 70명인 산헤드린의 공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명망있는 가문 출신인데다 최고의 학벌과 상당한 수준의 재산을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 곧 랍비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란 직업이 교사라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을 만한 높은 인격과 덕성을 갖춘 사람에게 붙여지는 특별한 호칭이었습니다. 종합해 보면 니고데모는 지식과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다 소유하고 게다가 사람들로부터 존경까지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그의 이름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니고란 중학교 때 제가 그토록 신고 싶어하던 나이키와 같은 어원으로 승리자, 정복자란 뜻입니다. 데모란 민중 혹은 백성이란 뜻입니다. 결국 니고데모는 백성의 정복자란 뜻입니다. 부모들에게 실시한 자녀가 자라서 어떤 사람처럼 되면 좋겠는가라는 설문 조사에 단연 늘 1위에 오르는 이름은 니고데모였습니다. 정치권에서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 없이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 후보로 늘 거론이 되었습니다. 당시 서점가 부동의 베스트셀러는 니고데모 자서전 ‘나는 이렇게 승리했다’ 였습니다. 타임지와 뉴스위크지 유대판의 표지 인물이 된 지는 이미 오래 전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대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요 삶의 목표였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저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한밤 중에 최신형 롤스로이스 사두마차를 타고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 왔습니다. 왜 그가 낮에 오지 않고 밤에 왔을까요? 낮에는 너무 바쁘기 때문이었을까요? 워낙 거물이었기 때문에 기자들을 따돌리기 위해서일까요? 물론 이런 이유들도 있었겠지만, 요한복음에서 밤은 곧 어두움을 상징합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왔다는 것은 그의 내면이 밤과 같이 어두웠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세상 사람들은 니고데모의 반 만이라도 아니 십분의 일만이라도 소유하고 있다면 행복해 질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니고데모의 내면은 왜 밤처럼 어두웠을까요? 너무 가난하여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예수님에게서 그는 무엇을 구하러 왔을까요? 백성의 정복자가 정복하지 못한 문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니고데모가 오늘날의 위치에 오르기까지는 피땀 어린 노력이 있었습니다. 뼈대있는 가문에서 태어난 니고데모는 어릴 적 큰 사람이 되라는 할아버지의 유훈을 가슴 속에 깊이 새겼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과목별 과외에 네 시간 씩만 자고 공부하여 바라는 대로 예루살렘 대학 법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하였습니다. 합격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고 말함으로 모든 수험생을 허탈하게 만들었습니다. 남들은 다 미팅이다 번개다 하며 놀러 다닐 때 그는 도서관에 앉아 육법 전서와 씨름하였습니다. 마침내 젊은 나이에 고시에 합격한 그는 이후로 승승 장구 출세 가도를 달렸습니다. 미스 예루살렘 출신 미모의 탈렌트와 결혼하여 세간에 큰 화제를 뿌렸습니다. 투자한 주식마다 대박이 나서 큰 돈도 벌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일체의 유혹을 뿌리치고 부정과 비리에 연루된 적이 없어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제 원하던 모든 것을 다 성취하였습니다.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었습니다. 분명 행복의 모든 조건을 다 갖춘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뭔가 가슴 한 구석이 뻥 뚫려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 곳에 무엇을 채워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진수성찬이 차려진 식탁과 호화로운 집도 이젠 진부하고 권태로울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이 다 가식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가 가진 소유와 성취가 그를 행복하지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는 세계는 그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더 이상 탈출구가 없었습니다. 


숱한 번민으로 밤을 지새던 니고데모는 마침내 예수님을 찾아 와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어떤 기적이 일어나서 순식간에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3절을 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는 자기의 외부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니고네모에게 네 자신이 먼저 획기적으로 변화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에게 지금 시급한 것은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더 높은 지위나 명예가 아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나야만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직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의 근본 문제는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니고데모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 중에 한 사람으로서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날카로운 지성과 통찰력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영적 소경이요 불구자였습니다. 뻥 뚤린 그의 가슴을 채울 수 있는 길은 그곳에 하나님 나라로 채우는 길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는 사자들이 어린 양과 뛰어 놀고 독사굴에 어린 아이가 손을 넣는 아무 해됨도 상함도 없는 평화의 나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하나님 나라를 생명수가 흐르는 생명의 나라요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열리는 기쁨의 나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 나라를 체험할 때 누릴 수 있습니다. 소유가 주는 행복은 잠시 동안의 만족감을 줄 수 있지만 곧 사라져 버리고 필연적으로 더 많이 더 크게 소유하기 위한 다툼과 갈망을 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행복은 영원하며 사랑와 생명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누리려면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원어를 기초로 볼 때 born from above,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부여 받아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상황을 개선하거나 진보를 이룬다거나 개혁을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근본적인 변화이며 재창조의 역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되 새 것이 되었도다.” 저는 직업이 프로그래머라 주위 사람들로부터 컴퓨터가 심각한 문제가 생겼을 때 문의를 종종 받습니다. 그 때마다 거의 제 대답은 동일합니다. “하드를 포맷하고 윈도우를 다시 깔아 보세요.” 조금씩 손을 봐서 해결하려고 하다보면 해결된 듯 보이나 오히려 이로 인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육에 기초한 나의 존재를 송두리채 포맷하고 영적인 존재로 다시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소유의 변화는 있으되 존재의 변화가 없는 삶은 참으로 불행한 삶입니다. 요즘은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기능과 세련된 디자인으로 무장한 신제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핸드폰, Mp3 player, 디지탈 카메라, 노트북, PDA, 최근에 인기를 얻고 있는 PSP까지 다양한 종류의 첨단 제품들이 현란한 광고 공세를 퍼부으며 우리를 유혹합니다. 문근영이 광고하는 최신형 블루투스 내장 핸드폰을 사기만 하면 내 삶이 변화되고 행복해질 것만 같습니다. 요즘 네티즌들은 이런 상태를 두고 지름신이 강림하셨다는 표현을 씁니다. 과감하게 물건을 사는 행위를 지른다고 표현하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일단 지름신에게 사로 잡히면 눈에는 오직 그 물건 밖에 보이지 않게 되고 결국에는 카드를 써서라도 사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지르고 나면 잠시 동안 만족감과 행복감을 주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곧 시장에는 내 것보다 더 업그레이드된 신제품이 나온다는 소식이 들리고 또다시 지름신이 강림하고 맙니다. 나중에 나이를 더 먹으면 그 대상이 자동차가 되기도 하고 집이 되기도 하면서 스케일이 좀 더 커질 뿐 양상은 동일합니다. 소유물이 늘어 나고 업그레이드도 되었지만 내 존재는 일년전이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그대로입니다. 반면 남들보다 더 좋은 것을 가지지 못했을지라도 날다마 어제와 다른 새로운 존재로 아침을 맞이하며 눈을 뜨는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존재의 충만감을 느끼며 사는 삶입니다. 과연 어느 쪽이 더 행복한 삶이며 의미있는 삶입니까? 성 프란체스코는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시절 마음껏 쾌락을 누렸으며, 부친의 상속자가 되어 일생 편안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는 예수님 안에서 거듭남을 체험한 후 소유가 결코 행복을 줄 수 없음을 깨닫고 모든 소유 심지어 입고 있던 옷까지 다 버리고 예수님을 닮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충만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와의 깊은 교제를 통해 누구보다도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니고데모같이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하는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으로 그 존재가 변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은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니고데모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4) 그는 예수님이 표적을 통해 자기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랬는데 ‘거듭나야 한다니, 또 한번 태어나야 하다니! 이제까지의 나의 살인적인 노력과 엄청난 성취가 하나님 나라를 보는데 아무 상관이 없다니! ’그는 억울했고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기득권을 잃어 버릴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늙은 이 나이에 돌아가신 모친의 태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와야 하냐며 예수님의 말씀에 반사적으로 반발하였습니다. 그에게는 거듭난다는 개념이 전혀 없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종교지도자였고 많은 제자을 거느린 선생이었지만 이처럼 영적 세계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진리조차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육에 속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육의 사람은 영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고전2:14). 그래서 그는 이런 거듭남의 진리 앞에서 반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인내심을 가지시고 거듭남의 진리에 대해 조근조근 설명해 주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 여기서 물은 물세례로서 회개를 의미합니다. 회개는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자신의 죄인됨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식하고 고백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성령은 회개하는 자에게 새 생명을 주십니다. 이 새 생명을 받은 자는 영적으로 다시 태어납게 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6,7) 육으로 난 것은 아무리 교육을 많이 시켜 교화시켜도 여전히 육입니다. 육이라고서 해서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같은 근육질의 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련된 육일 수도 있고, 이성적인 육일 수도 있고, 종교적인 육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구도자는 동굴에서 눕지 않고 8년 면벽하며 수행을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육입니다. 육은 아무리 고상하게 보일지라도 근본적으로 성령을 거스르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그 내면에 영생을 얻고 점점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하며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게 됩니다(벧후1:4).


예수님은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고 있는 니고데모에게 바람을 비유로 들어 성령의 역사를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성령의 역사는 바람과도 같습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바람이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불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바람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보고 내 얼굴에 서늘함을 느끼며 바람이 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도 바람과 같이 눈으로 볼 수 없고 이성으로 분석할 수 없고 또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정은 알지 못하지만 거듭난 자의 말과 행동과 삶에서 나타난 결과를 통해 성령의 역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저는 과거 웃는 것은 적에게 약점을 보이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늘 포커페이스를 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대학교 2학년 때 여름수양회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거듭나자 저도 모르고 자꾸만 웃게 되었습니다. 웃음만할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도 계속 웃었습니다. 이런 저에게 같은 과 친구 하나가 정말 진지한 표정으로 심각하게 사람이 이유없이 너무 갑자기 변하면 문제가 있는 것이라면서 정신과에 가서 한 번 진찰을 받아보면 어떻겠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서도 웃음이 터져 나와 배꼽을 잡고 웃는 바람에 그 친구를 심히 무안하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작사자 존 뉴턴은 한 때 무자비한 노예선 선장이었으나 거듭난 후 과거를 청산하고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식민지 백성의 고혈을 짜내 재산을 축적했던 세리 삭개오는 거듭난 후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기부하고 부정축재한 재물을 네 배로 보상하겠다고 공표하였습니다. 내면에 성렁의 역사가 있으면 이렇게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니고데모도 잘 알고 있는 광야의 뱀 사건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 길을 여행하다가 거친 길을 원망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불 뱀을 보내 물려 죽게 하셨습니다. 이 때 백성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구원을 요청하자 하나님은 구원의 방법을 허락하셨습니다. 모세로 하여금 놋뱀을 만들고, 이를 지팡이 위에 높이 들도록 하셨는데 이를 쳐다보는 자는 뱀의 독으로 죽지 않고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뱀에 물렸다면 물린 부위 위를 묶고 독을 빼내는 것이 합리적인 방법입니다. 독이 퍼져 있는데 놋뱀을 보기만 하면 살아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를 믿지 못하고 쳐다보지 않은 사람은 결국 다 죽었고, 믿고 쳐다 본 사람만 살아났습니다. 놋뱀을 쳐다보면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거듭남의 길도 이와 같습니다. 복잡한 이론을 연구해서 되는 길도 아니요 극기 수행을 통해서 되는 길도 아닙니다. 그저 단순하게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길입니다. 믿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참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아니하고 존재의 근본적인 변화 곧 거듭 나 하나님 나라를 보는 데 있음을 배웠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이 뜨여져서 날마다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단순한 믿음으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05, 이창무)

반응형

'설교 > 요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  (0) 2015.04.30
물을 포도주로  (0) 2015.04.30
와서 보라  (0) 2015.04.30
원대로 주신 분  (0) 2015.04.30
  (0) 2015.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