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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요한복음 2015. 4. 30. 09:48


    2010년 봄학기 요한복음 제 15강

    말씀 / 요한복음 13:36 - 14:14

    요절 / 요한복음 14:6



    아름답고 깨끗한 새 센터에서 첫 예배를 드리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센터를 가리켜 성전이라고 부르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신약 시대에 성전은 건물이 아닙니다. 이제 성전은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여기에 모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고 우리의 모임이 곧 성전입니다. 아무리 센터 건물이 좋고 아름답다 해도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좋은 건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이곳에서 우리 모임이 하나님을 온전히 높이며 예배하는 공동체, 섬김과 사랑이 살아 있는 공동체, 복음을 전파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힘쓰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새 센터가 무엇보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3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친히 씻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런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은 예수님이 계속 가신다고 말씀하시는데 과연 어디로 가실까 하는 문제였습니다.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자신이 가는 곳을 지금은 따라올 수 없지만 나중에는 따라올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길은 오직 예수님만이 가실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 베드로도 예수님처럼 양들을 위한 희생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게 될 것이었습니다.


    지금 따라올 수 없다는 말씀에 섭섭해진 베드로는 다시 한 번 물었습니다. “주님, 지금은 왜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저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제 목숨이라도 내놓겠습니다.” 과연 베드로는 의리와 충성심이 있었고 스승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습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베드로야. 나 감동 먹었다. 역시 너 밖에는 없다.” 이렇게 말씀하셨나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장차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고, 지금 예수님은 베드로의 말을 부인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그의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목숨에 집착하는 겁 많고 소심한 사람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베드로의 호를 ‘허당’이라고 지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만 허당입니까? 알고보면 우리도 다 허당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우리 자신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 의지와 성실과 능력을 믿고 까불다가 낭패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큰소리치기보다는 자신의 연약함을 깊이 인정하고 먼저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4:1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말씀을 볼 때 현재 제자들의 마음은 근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왜 근심하고 있었을까요?


    첫째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따라갈 수 없는 곳으로 가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배와 부친을 버렸고, 마태는 돈 많이 버는 세리 직업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삶의 모든 것, 미래의 안전한 보장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패한 헤롯 정권을 무너뜨리고 친히 왕이 되어 다윗과 같은 부강한 나라를 세울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새 정부 각료들로서 등용될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위장 전입을 한 적도 없고 부동산 투기를 한 적도 없기 때문에 인사 청문회에서 걸릴 일도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백성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런 제자들의 속도 모르시는지 갑자기 자신들을 남겨두고 어디론가 가신다고 했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가시다니요? 게다가 따라올 수도 없다고 하시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제자들의 얼굴은 굳어지고 마음은 근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 없이 우리끼리 무엇을 하란 말인가? 아! 이제 나의 미래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둘째로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부인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며 의리가 있고 충성스러운 수제자가 아닙니까? 그런 베드로마저도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다면 다른 제자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너희 중에 나를 팔 자가 있다’고 하셨는데 ‘혹시 그 사람이 내가 아닌가? 제자들은 점점 불안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꿈과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이 두 가지가 지금까지 제자들의 삶을 받쳐 왔던 두 기둥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기둥이 한꺼번에 뿌리부터 흔들리자 제자들은 곧 근심에 휩싸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도 나름대로 미래에 대한 꿈이 다 있습니다. 이미래 목자님은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교사가 되고자 하는 미래의 꿈을 가지고 센터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한 목자님은 작더라도 내 집을 한 채 빨리 장만하는 것이 꿈이라고 하였습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분들이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이 꿈이고, 이미 결혼한 분들은 자녀가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주는 것이 꿈입니다. 목자는 캠퍼스에 부흥이 일어나고 나의 목장에 양들이 바글바글하게 될 것을 꿈꿉니다. 그리고 그런 꿈들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을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열심히 안 해서 그렇지 열심히만 하면 언젠가는 꼭 이루어지지 않겠나?’ 기대하면서 아침부터 밤까지 뛰어 다닙니다. 그러나 어느 날 공부는 해야 하는데 공부는 지지리도 안 되고, 통장의 잔고는 마이너스이며, 자녀들은 죽어라 말을 안 듣고, 심혈을 기울여 도왔던 그 양은 지금 핸드폰도 받지 않고 문자도 씹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 동안 나이만 먹었지 이루어 놓은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열심히 하기도 어려운데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이때 우리 표정은 경직되고 어두워집니다. 센터 전문 용어로 얼굴이 시커매 집니다. 그리고 말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어집니다. 신경이 예민해 져서 사소한 일에도 상처를 받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밤늦게까지 잠을 안 자고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합니다. 이 모두가 근심 증후군의 증상들입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많은 것을 버리고 달려 왔건만 아직도 미래에 보장된 것이 하나도 없을 때, 나의 능력과 의지와 성실이 바닥을 드러내게 될 때, 세상에 나를 도와주는 사람 한 사람 없고 혼자가 된 것 같이 느껴질 때, 내 삶의 기반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바로 이 때 우리는 근심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1절 상반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예수님은 근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누구인들 근심하고 싶어서 근심하겠습니까? 아무리 근심하지 말라고 해도 이 상황에서 어떻게 근심을 안 할 수 있겠습니까? 근심을 하지 않으려면 근심을 멈추게 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근거로 근심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제자들에게 적금 통장을 보여 주시며 ‘이것 봐라. 0이 몇 개니? 내가 통장을 주고 갈 테니 아무 근심하지 마라’ 이렇게 하셨나요? 아니면 가슴에서 땅문서를 꺼내시며 ‘봐라. 이것이 등기부등본이란다. 부동산 불패라 하였으니 이것  갖고 근심하지 마라’ 하셨습니까? 그러나 통장이나 땅문서가 있으면 근심이 사라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때부터는 가진 것을 잃어 버릴까봐 근심하기 시작합니다. 요즘 ‘House Poor’ 즉 ‘집 있는 거지’라는 말이 새로 생겼습니다. 은행 빚을 내어 집을 샀는데 집값은 계속 떨어지고 팔리지도 않아서 대출금 상환하느라 거지처럼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없어도 근심, 있어도 근심이니 근심에는 답이 없는 것일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근심에는 답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존재에 대한 불안, 미래에 대한 불안은 믿음으로만 해결됩니다. 믿음과 불안은 반비례 관계에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불안이 없어지고, 믿음이 없으면 불안이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합니까? 영어로 보면 본문의 믿으라는 말은 "Trust in"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신뢰하고 예수님을 신뢰하여 모든 것을 맡기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독생자를 보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맡기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자녀된 우리가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염려하지 않고 우리의 장래와 인생 전체를 얼마든지 다 맡길 수 있는 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십자가에서 자기 피를 흘려 그 피 값으로 우리를 사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택하신 자기 사람들을 광야 같은 세상에 고아와 같이 그냥 버려두시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를 의뢰하는 자를 안전히 지키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근심하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의지할 대상을 의지하지 않고 헛된 것을 의지해 왔기 때문입니다. 근심은 우리가 돈을 의지해 왔고 다른 사람을 의지해 왔고 자기 자신을 의지해 왔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근심은 죄입니다. 우리는 근심을 가져 온 불신앙의 죄를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토록 근심의 노예가 되어 인생을 낭비하게 될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결산할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 때 “주님! 제가 인생의 1/3은 잠을 잤고 나머지 깨어 있던 대부분의 시간을 근심 걱정하고 염려하면서 다 보낸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시겠습니까? 아니면 “주님! 잠깐 근심하고 걱정하던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하고 믿음으로 도전하여 이렇게 열매를 남겼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시겠습니까? 우리가 근심 대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도전하고 열매 맺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근심하는 대신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합니까?


    첫째, 예수님께서 영원한 거처를 예비해 놓으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2-3). 2,3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 아버지 집’은 어디일까요?


    지금까지 우리는 ‘내 아버지 집’은 ‘천국’이라고 배워 왔습니다. 또 ‘거할 곳’은 킹제임스 번역에 ‘mansion'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대저택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 가면 제기동 바닥의 이 코딱지만 한 전셋집에서 살지 않고, 정문에서부터 현관까지 차를 타고 들어가는 대저택에 살게 되겠구나 하면서 위로 받고 소망에 불타올랐습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이 틀린 해석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단순화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전체의 맥락 가운데 살펴보면 본문에서 ‘내 아버지 집’은 어떤 장소를 가리키기보다는 ‘교회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2:1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예수님은 성전을 ‘내 아버지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성전을 헐라 사흘 만에 내가 일으키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버지 집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이루실 새로운 성전 곧 ‘교회 공동체’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약의 성전의 기능이 중단되고 새로운 성전의 기능을 감당하는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 집의 거할 곳’ 혹은 ‘거처’는 무엇을 말할까요? 거할 곳이란 하나님께서 새 성전에 참여한 각 사람 안에 머무르시며 교제하시는 자리를 말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성전 건물 안에 거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는 이제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거하십니다. 제 안에 저하시고, 손 건수 목자님 안에도 거하십니다. 크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인간 안에 거하시다니! 그런 신비한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 곁을 떠나가는 것 같지만,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해 성령을 예비하러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시공간의 제약을 받으셨지만, 성령님께서는 무소부재 하셔서 언제 어디서든지 우리와 늘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내가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셔서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제자들을 섬기고 돌보아 주셨던 것과 똑같이 이제는 보혜사 성령님께서 곁에서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성령님께서는 근심 대신 우리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선물로 주십니다. 나는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나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나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나를 대신하여 탄식하며 기도하십니다. 나는 할 수 없으나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능력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를 영원한 거처로 삼으시고 성령으로 도우시는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둘째,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믿어야 합니다(4-6). 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제까지 여러 번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가실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마가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목적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느냐는 뜻입니다.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이는 참된 길을 알지 못해 방황할 수밖에 없는 답답하고 고뇌에 찬 인간들의 질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이 가는 목적지가 어디이고 또한 어떻게 갈 수 있는가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자신이 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성인들이 인생의 참 길을 찾고자 몸부림쳤습니다. 도(道)를 가르치신 공자님도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 즉 ‘아침에 길을 찾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겠다’며 참된 길을 찾아 방황하였습니다. 석가모니도 백팔번뇌 인생길에서 참된 길을 찾기 위해 고뇌하였습니다. 그들은 구도자였지 결코 길 자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는 바로 그 길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의 길은 'a way'가 아니라 'the way'입니다. 유일한 길이란 뜻입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란 말씀이 이를 지지해 줍니다. 그러면 어째서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 되십니까?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 되시는 이유는 예수님만이 인생의 근본문제인 죄와 죽음문제를 해결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이르는 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죄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는 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쫓아내시고 동편에 그룹들과 화염검을 두시어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차단하셨습니다(창3:24). 이제 인간들은 그 길을 갈 수도 찾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벧전2:25a)" 길을 잃었기에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사53:6). 내가 보기에 선해 보이고 내가 보기에 올바르다 싶으면 그 길을 갔습니다. 그러니 인본적이고 상대주의적인 생각이 판을 쳤습니다. 절대 진리의 개념이 사라졌습니다. 도덕과 윤리도 상대화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 세상은 음란과 무자비와 강포로 충만한 세상, 한마디로 죄와 죽음의 고통뿐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후 인류 역사는 에덴으로 돌아갈 길을 찾는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에덴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유토피아니 극락이니 이상적 세계를 찾고자 끊임없이 노력해 왔습니다. 사람들은 때로는 경제나 정치 제도로, 때로는 과학과 의학 같은 기술로, 때로는 종교와 도덕을 통해 낙원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쳐 보아도 세상은 점점 더 구렁텅이로 빠져들어 갈 뿐 낙원에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캄보디아에는 킬링필드라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해골들이 묻힌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프랑스 유학까지 갔던 지성인인 폴 포트라는 사람이 캄보디아를 낙원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악습에 물든 기성세대를 몰아내야 한다며 무차별 살육을 벌인 곳입니다. 인간 스스로 낙원으로 가는 길을 만들어 보겠다고 나선 결과 캄보디아는 낙원이 아니라 생지옥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길을 찾고 찾아도 도무지 나오질 않으니 현대 사상은 니체의 허무주의, 자크 데리다의 해체주의까지 이르러 이제 ‘길은 원래 없었다.’라고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다. 내가 곧 에덴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내가 곧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이다.” 길이 왜 없습니까? 예수님이 길이십니다. 하나님께 가는 길이란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 길은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이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만들어진 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려면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 범한 인간이 감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죄 문제 해결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에덴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다 거짓입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우리의 죄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죄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해결됩니다. 히 10:19,20절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에서 숲 속에 버려진 두 아이는 오빠가 표시해 두었던 조약돌 덕분에 집으로 무사히 돌아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에도 표식이 있습니다. 그 표식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핏방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피를 따라가면 하나님을 만나고 에덴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를 놓쳐 버리면 아무도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상대주의, 다원주의 시대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산에 오르는 길이 한 가지만이 아니듯이 절대자에게 가는 길도 하나가 아니라 얼마든지 여러 갈래 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종교들은 다 여기에 동조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독선적이고 배타적으로 보이는 기독교를 싫어합니다. 아니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혐오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 되신다는 진리는 변할 수 없습니다. 이 길 저 길로 산에는 올라갈 수 있을지 몰라도 하늘로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늘에서 내려오신 그 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다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이끌어 주실 분이십니다.


    2005년에 미국의 유명한 토크쇼인 래리 킹 쇼에 ‘긍정의 힘’으로 널리 알려진 조엘 오스틴 목사님이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사회자가 조엘 오스틴에게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무슬림이나 유대인도 천국에 갈 수 있나요?”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조엘 오스틴은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사회자가 끝까지 집요하게 대답을 요구했지만 그는 끝까지 잘 모르겠다며 대답을 회피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도 이 문제에 대해 알 듯 말 듯 애매모호하게 기술되어 있나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요10:8).”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성경은 모호한 점이 전혀 없습니다. 만약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에게 “나는 예수님을 안 믿는데 그럼 난 지옥으로 가는 거냐?” 이렇게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잘 모르겠는데” 이렇게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 문제에 대해서라면 여러 가지 논쟁과 관점이 존재하지”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저라면 “물론이지. 그렇지만 나는 네가 지금 당장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길 간절히 원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이 말이 좀 촌스러워 보이긴 하지만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인간의 죄인됨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죄인을 구원할 복음도 역시 변하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모임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새 센터를 자랑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자랑스러운 이유는 우리 모임 가운데는 십자가 복음이 살아 있고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분명한 복음 신앙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변하면 바뀌어야 할 것이 있고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바뀌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19세기 영국과 미국에서 학생 자원 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이 일어나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 수많은 선교사들이 파송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현대 인본주의 사상과 적당히 타협하기 시작하면서 복음 신앙이 변질되었습니다. 그러자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이 급속히 식어 버리고 더 이상 세계 선교에 쓰임 받지 못한 채 이내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는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자 경고입니다. 센터가 바뀌고 사람도 바뀌고 백년이 가고 천년이 가더라도 성경적인 복음 진리만큼은 결코 변질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세대와 세대를 이어 주님 오실 그날까지 우리 모임을 통해 살아 있는 진리로 보존되고 전달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 기도를 통해 예수님 보다 큰일을 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7-14).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을 진정으로 안다면 하나님도 알 수 있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빌립은 하나님을 눈앞에 보여주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빌립에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며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계시입니다. 요한복음 1:18절은 말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또한 골로새서 1:15절을 보십시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에 기원을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는 더 큰 일들도 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자 한 날에 삼천 명, 오천 명이 회개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예수님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회심시켰고, 더 많은 지역을 찾아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라는 막강한 무기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시행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응답하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신 위대한 사람들은 인간적인 능력이나 학벌이 좋거나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의 사람들,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도해도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 없이 기도한 것 자체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시행하겠다고 약속한 예수님의 말씀을 믿어야겠습니다.


    우리는 앞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심으로써 제자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이렇게 성전이 된 자들의 근본이 되는 기능과 역할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 정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하시려는 놀라운 일들을 성전 된 우리들의 기도를 통해 이루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될 때 우리들은 예수님의 하셨던 일보다 더 큰 일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많이 기도하라고 더 간절히 기도하라고 더 뜨겁게 기도하라고 새 센터를 주셨습니다. 더 넓어지고 높아진 이 예배 홀을 믿음으로 드리는 우리들의 기도 소리로 가득 채울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 인생길의 목적지는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거해야 할 곳은 아버지 집입니다. 아버지 집은 하늘에 있는 천국이요, 이 땅에 있는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여셨습니다. 길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 집에 거하며 근심 대신 감사하며 찬송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위대한 일을 성취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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