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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창세기

소돔과 약속의 땅

by 목자 이창무 2026.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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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중심잡기 제1강 / 이창무

소돔과 약속의 땅

말씀 / 창세기 13:1-18

요절 / 창세기 13:14,15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 우리의 선택이 영원한 운명을 결정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무엇을 먹을까 하는 소소한 고민부터, 어떤 직업을 가질지, 누구와 평생을 함께할지를 결정하는 중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1980년대, 금성사(지금의 LG전자) 가전 광고에 이런 유명한 문구가 있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겁니다. 이 말처럼 선택 하나하나가 쌓여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훨씬 더 무거운 진실을 말합니다. 우리의 선택이 단지 10년이 아니라 평생을, 나아가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내리는 모든 선택의 이면에는 그 사람의 숨겨진 '가치관'과 삶의 '중심'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위기나 기회의 순간이 오면 그 사람이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지, 누구를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지가 여실히 나타납니다.

오늘 함께 나눌 창세기 13장에서 아브람과 롯은 같은 상황에서 전혀 다른 길을 택합니다. 이들의 선택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나의 선택은 무엇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오늘 말씀을 통해 그 답을 발견하고, 삶의 중심을 바로 세우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 때로는 축복이 위기와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1,2)

애굽에서의 뼈아픈 실패를 겪은 아브람은, 자신의 인간적인 꾀가 얼마나 무력한지를 절감하고 신앙의 원점으로 돌아옵니다. 그가 돌아온 곳은 '벧엘', 가나안 땅에 처음 들어와 하나님께 첫 제단을 쌓고 그분의 이름을 불렀던 바로 그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예배를 회복하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풍성한 복을 부어주셨습니다. 성경은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금이 심히 많았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5,6)

'풍부하다'는 단어가 원어로는 '무겁다'는 뜻입니다. 축복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워진 것입니다. 작은 배에 물고기를 가득 실으면 풍어의 기쁨도 잠시, 배가 기울기 시작합니다. 소유가 너무 많아져 수용 한계를 넘어섰고, 결국 아브람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7b)

하나님을 믿는 언약의 가족이 물질 때문에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이방인들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집안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수 있는 심각한 영적 위기였습니다. 축복이 시험이 되어버린 이 상황 속에서, 아브람과 롯은 각자 다른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3. 하나님께 인생을 맡긴 사람은 거룩한 여유를 가집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8,9)

아브람의 제안은 매우 파격적이었습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 연장자는 절대적인 선택권을 가졌습니다. 당연히 아브람이 먼저 좋은 땅을 고를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그 권리를 통째로 롯에게 넘긴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것을 '선의의 양보'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잠깐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수백, 수천 마리의 가축을 먹여 살릴 목초지, 그리고 수십 년 동안 가문의 미래를 좌우할 경제적 기반을 상대에게 먼저 고르라고 내어준 것입니다. 옆에 있던 사래가 “당신, 미쳤어!”하면서 아브람을 꼬집을 상황입니다. 이 놀라운 여유와 관대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먼저 아브람은 물질보다 관계를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롯을 향해 "우리는 한 친족이라"고 말합니다. 같은 피가 흐르는 가족이요,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언약의 식구인데, 풀밭 몇 뙈기 때문에 등을 돌리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양보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숨겨진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애굽에서의 실패를 통해, 자기 머리로 궁리하고 자기 손으로 움켜쥐는 방식으로는 결국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내가 애써 좋은 땅을 차지하지 않아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내 삶을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 이 확신이 아브람을 움켜쥐는 사람이 아니라 내어주는 사람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4. 눈 앞의 이익을 쫓는 선택은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그러면 롯은 이 파격적인 제안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빈말이라도 "아닙니다, 삼촌. 제가 어떻게 감히 먼저 고릅니까? 삼촌부터 고르셔야죠"라고 한마디 하는 것이 도리 아닙니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삼촌 밑에서 보호받으며 자란 조카로서, 아브람의 덕분에 지금의 부를 이룬 것을 누구보다 잘 알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롯의 반응은 놀랍도록 냉정했습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10,11)

롯은 감사의 말 한마디 없이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요단 평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물이 넉넉하고,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 같았습니다. 역세권에 학군 좋고 향후 상승 잠재력이 놓은 곳이었습니다. 롯은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좋은 땅을 골라 떠났습니다.

롯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롯에게도 부양해야 할 딸들이 있었고, 생계를 책임져야 할 수많은 종과 가축이 있었습니다. 거친 광야에서 장막을 옮기며 사는 유목민의 삶은 언제나 불안정했습니다. 기근이 오면 온 가족이 굶주림의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런 롯의 눈에 비친 요단 평지는, '가장으로서 내 식구들을 안전하게 키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가지 불길한 암시를 조용히 심어둡니다. 롯이 요단 지역을 택해 '동으로 옮겼다'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동쪽으로의 이동'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방향을 암시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쫓겨난 방향이 동쪽이었고, 가인이 하나님 앞을 떠나 간 곳도 에덴 동쪽의 놋 땅이었습니다. 롯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의 언약적 울타리를 넘어, 풍요로워 보이지만 하나님의 다스림이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 것입니다. 롯은 풍요를 얻기 위해 공동체의 보호와 영적 경계선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롯의 이동 경로를 마치 슬로모션으로 보여주듯 기록합니다. 처음에는 요단 평지를 '택했고'(11절), 그다음에는 소돔 근처에 '장막을 쳤으며'(12절), 나중에는 소돔 '성문에 앉게' 됩니다(19:1). 소돔을 향해 눈을 돌린 것을 시작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깊이 빠져들어 간 것입니다.

이것이 타협의 무서움입니다. 한 번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발짝, 또 한 발짝, 마치 따뜻한 물에 들어간 개구리처럼 서서히,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이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롯은 소돔에 가서 그곳 사람들과 똑같이 타락하며 즐겁게 살았을까요? 베드로후서 2장은 우리가 몰랐던 롯의 내면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그를 '의로운 롯'이라 부르며, 그가 소돔의 불법을 보고 들으며 "날마다 그의 의로운 심령이 상했다"고 기록합니다.

이 한 구절이 롯의 비극 전체를 요약합니다. 롯은 소돔 안에서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안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희미하게라도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밖으로는 소돔 시민으로 살았지만, 안으로는 매일 영혼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세상 사람처럼 살고 싶은데 영혼은 거부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은데 몸은 소돔의 안락함에 묶여 움직이지 않는 상태. 진퇴양난, 이것이 롯의 매일이었습니다. 롯의 선택이 무서운 이유는 신앙과 세상을 동시에 잡으려다가, 어디에도 온전히 발붙이지 못한 채 영혼이 서서히 시들어갔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중요한 선택 앞에서 내리는 판단은 대개 지극히 합리적이고 상식적입니다. "이 회사는 연봉이 높고 커리어에 도움이 돼. 다만 주일 근무가 잦긴 한데, 몇 년만 참으면 되겠지." "이 동네로 이사 가면 아이 교육에 최고야. 교회는 좀 멀어지지만, 온라인 예배로 대체하면 되잖아." "이 사람과 결혼하면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야. 신앙관이 좀 다르긴 한데, 결혼하면 바뀌겠지." 더 높은 연봉, 자녀를 위한 좋은 학군, 안정적인 미래를 따지는 것은 책임감 있는 사회인으로서 당연한 고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대놓고 죄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풍요'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선택한다는 점입니다. 겉으로는 예배의 자리를 지키지만 실제 삶의 말뚝은 조금씩 세상의 안락함 쪽으로 옮겨 박는 이 '회색지대'의 삶은, 결국 세상의 쾌락도 하나님의 평강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찢겨진 심령만을 남깁니다.

이제는 눈에 보이는 조건이 내 인생을 책임질 것이라는 환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내가 움켜쥐려는 손을 놓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손이 우리 인생을 경영하시는 진짜 복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삶의 중심을 다시 하나님께로 고정해야 합니다.

5. 나의 손을 비울 때 하나님의 비전이 채워집니다

롯이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난 뒤, 척박한 땅에 홀로 남은 아브람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자식처럼 여기던 조카에게 배신당한 듯한 서운함, 주변 사람들의 "왜 그렇게 바보같이 양보했소?" 하는 수군거림, 그리고 앞날에 대한 막막함이 한꺼번에 밀려왔을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아브람은 좋은 것은 다 내주고 쓸모없는 것만 남은 어리석은 패배자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 아브람이 가장 외롭고 연약하다고 느꼈을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14,15)

롯도 눈을 들었고, 아브람도 눈을 들었습니다. 같은 행동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본 것은 하늘과 땅만큼 달랐습니다. 롯은 자기 욕심을 따라 눈을 들어 요단 평지를 보았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눈을 들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롯은 요단 평지라는 일부분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보여주신 것은 북쪽, 남쪽, 동쪽, 서쪽 — 360도 전 방위였습니다. 약속의 땅 전체가 아브람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같은 눈이지만, 무엇이 그 눈을 인도하느냐에 따라 보이는 세계가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16)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땅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손까지 약속하십니다. 자식 하나 없는 늙은 부부에게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많을 것이다"라니, 인간적으로는 황당하기까지 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일반적인 상식과 예상을 넘어서는 곳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17)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직접 그 땅을 걸어다녀 보라 하십니다. 이것은 관광을 다녀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집을 계약한 뒤 열쇠를 받고 처음으로 빈 방을 걸어다니며 '이제 여기가 내 집이구나' 하고 확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약속을 소유하는 행위였습니다. 아직 눈에 보이는 것은 황량한 들판뿐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위를 걷는 것. 이것이 믿음의 발걸음입니다.

하나님의 이 거창한 약속은 결코 허공에 흩어지는 메아리가 아니었습니다. 역사가 증명하듯, 아브람이 믿음으로 밟았던 그 거친 땅은 훗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곧 하나님의 백성이 거하는 축복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또한 '티끌 같이 많게 하리라'던 말씀대로, 불임의 고통 속에 있던 노부부를 통해 이삭이 태어났고, 그 핏줄은 큰 민족을 이루었으며, 마침내 전 세계에 흩어진 수많은 믿음의 자손들로 이어졌습니다. 롯이 눈에 보이는 화려함을 좇아 잡았던 것들은 연기처럼 사라졌지만, 아브람이 빈손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며 붙잡았던 약속은 영원한 기업이 되어 오늘날까지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6. 예배의 중심이 바로 서야 인생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후 어떻게 했습니까?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18)

아브람은 헤브론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헤브론'은 '연합' 또는 '교제'라는 뜻을 가진 곳입니다. 아브람은 롯과의 관계가 멀어진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욱 깊이 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두 사람의 종착지를 비교해 보십시오. 롯은 소돔 — 화려하지만 날마다 영혼이 상하는 도시로 갔습니다. 아브람은 헤브론 — 조용하지만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곳에 머물렀습니다. 소돔은 눈을 즐겁게 했지만 영혼을 병들게 했고, 헤브론은 눈에 볼것 없었지만 영혼을 살찌우는 곳이었습니다.

제단을 쌓는다는 것은 곧 예배를 드린는 뜻입니다. 롯은 어디에서도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반면 아브람은 가는 곳마다 가장 먼저 예배를 드렸습니다. 물질적으로는 손해를 본 것처럼 보였지만, 영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새롭게 받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한층 더 깊어졌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세상이 던지는 수많은 선택지와 마주합니다. 연봉, 집값, 아이들의 성적, 그리고 보장되지 않은 노후까지.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은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우리를 덮쳐오고,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계산기를 두드립니다. "어디로 가야 안전할까?", "무엇을 잡아야 손해 보지 않을까?" 고민하며 내 힘으로 완벽한 성벽을 쌓으려 애씁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스스로를 지키려고 움켜쥐면 쥘수록, 우리 영혼은 평안을 잃고 갈급함에 시달립니다. 불안은 더 커지고, 조급함은 깊어지고, 결국 번아웃이 찾아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예배는 우리 삶의 '영적 기준점'을 다시 세우는 결정적인 통로가 됩니다. 예배는 분주한 손길을 잠시 멈추고, 내 인생의 진정한 주권이 내가 아닌 하나님께 있음을 겸손히 인정하는 항복 선언입니다. 세상의 소음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에 주파수를 맞출 때, 비로소 우리는 무엇이 진짜 복이고 무엇이 신기루인지를 구분할 수 있는 맑은 영적 시야를 회복하게 됩니다.

예배가 우리 삶의 중심에 견고히 자리 잡을 때, 우리는 비로소 환경에 압도당하지 않는 '거룩한 여유'를 갖게 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지금 당장 좋은 것을 차지하지 않으면 영영 뒤처질 것"이라며 우리를 조급함의 벼랑 끝으로 몰아세웁니다. 하지만 공동체 안에서 예배 드리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그분의 변함없는 약속을 확인한 사람은 그 조급함에서 자유로워집니다. 내 미래를 책임지시는 분이 내 통장 잔고나 사회적 스펙이 아니라,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영혼 깊숙이 새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배의 감격이 살아있는 사람은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평강을 유지하며, 남들이 보지 못하는 소망의 땅을 바라보며 묵묵히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드리는 주일 예배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사실 그것은 거친 세상 속에서 흔들리는 인생의 배를 붙들어 주는 가장 견고한 닻입니다.

7. 시선을 주님께 드립시다

오늘 본문에서 롯과 아브람은 똑같이 '눈을 들어'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롯은 '욕망의 렌즈'로 현실의 이익만을 보았고, 아브람은 '믿음의 렌즈'로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시력은 온전합니까? 혹시 당장 눈앞의 좁은 현실에 갇혀, 하나님이 예비하신 크고 비밀한 일을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내 시야에 갇히지 마십시오. 내 계산에 인생을 가두지 마십시오. 현실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니며 믿음으로 밟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가 밟는 그 땅을,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미래를 반드시 영원한 기업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 약속을 믿고 담대히 나아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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