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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
    설교/마태복음 2015.05.02 23:56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




    말씀 : 마태복음 12장 9절에서 21절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사람들은 흔히 세상에는 꼭 필요한 사람,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차라리 없는 편이 나은 사람 이렇게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들 말합니다. 이 중 첫번째 종류의 사람은 어딜 가나 환영을 받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와 세 번째 종류의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은 정리 해고를 당해 백수 신세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매트릭스를 능가하는 거대한 기계와 같고 한 인간은 그 기계의 부속품 취급을 받습니다. 만약 그 부속품이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당장 폐기처분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기계의 부속품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한 영혼의 목자이신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이 시간 긍휼이 풍성하신 예수님께 나아가 우리의 어그러진 마음을 고침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회당에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나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편 손 마른 사람이 그의 마른 손을 호주머니에 숨기고 회당 구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6장 6절에 보면 그는 오른손이 말랐습니다. 외경에 따르면 그는 본래 직업이 석공이었다고 합니다. 고대 응원가 석탑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을 향해 불쑥 솟아오른 거대한 돌덩이 이름모를 석공의 땀과 눈물이 이 흘러내리는 은은한 너의 모습 은은한 너의 모습(빰빰빰빠빠)” 여기에 나오는 이름 모를 석공이 바로 이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땀과 눈물을 흘리며 열심히 석공일에 매진한 결과 작은 전세집도 얻고 결혼하여 귀여운 자식도 얻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갑자기 그의 오른손이 말을 잘 듣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오른손에 든 쇠망치로 정을 내리 쳐야하는데 엉뚱하게 왼손등을 내리치기가 일쑤였습니다.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아 보니 오른손의 신경이 완전히 마비되었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더 이상 석공으로서 생계를 있기가 불가능해진 그는 결국 다른 직업을 찾아 나서야 했습니다. 그러나 평생 할 줄 아는 일이라고는 석공일 밖에 없는 그가 다른 일자리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오른손 마비 장애인이라는 걸 알고도 그를 고용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내는 무능하게 된 남편을 끝내 참지 못하고 자식을 버려 두고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배고파 우는 자식의 분유값이라도 벌기 위해 그는 하는 수 없이 한 대학교 앞에서 구걸 행각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대학교 본관 건물에는 그 자신의 손때가 묻어 있는 대리석 벽면이 아침 햇살을 받으며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날마다 수치심을 무릅쓰고 지나가는 행인들을 향해 왼쪽 손을 내어 밀었습니다. 처음에는 차라리 그냥 죽어 버릴까 하는 생각을 수없이 해 보았습니다. 그래도 집에서 아빠를 기다리고 있을 자식을 생각하면 아무 희망이 없는 삶이나마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 전 행인 한 사람이 그에게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라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어 병인들을 고쳐 주시는데 안식일에 가버나움에 있는 회당에 가면 만날 수 있으니 한번 가보라는 말이었습니다. 회당에 도착해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바리새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평소 그를 향해 죄를 많이 지어 저주를 받은 자라는 낙인을 찍고 근처에 오려고 하지도 않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본 그의 얼굴이 일순 일그러졌습니다. 그러나 반대편에는 제자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많은 병자들이 몰려 와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한 편 손 마른 사람은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나아와 간청하였습니다. “나를 고쳐 주사 빌어 먹는 수치를 당치 않게 해 주소서”


    바리새인들은 종교 지도자들로서 마땅히 도움이 필요한 한 편 손마른 사람을 도와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편 손마른 사람을 보자마자 그를 예수님을 안식일법 위반 혐의로 즉시 검찰에 형사고발할 미끼로 이용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틀림없이 그를 고쳐 주실 것을 알고 물었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예수님께서 그들의 속셈을 모르실 리 없었습니다. 정말 맘 상하고,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들마저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깨우쳐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11절과 12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11,12a). 이 비유는 많은 양 중에서 양 한마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양 한마리를 전 재산으로 소유하고 있는 어떤 사람의 경우를 말합니다. 양 한마리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그 양을 자식처럼 지극히 아끼고 사랑할 것입니다. 그런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안식일에 꺼내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조건 꺼내고 볼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양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얼마나 더 귀한 존재입니까? 사람은 천하보다 더 귀한 존재입니다. 그 사람이 부유하든 가난하든, 신분이 높든지 낮든지 상관없이, 한 편 손이 온전하든 온전치 못하든, 하나님의 형상 대로 지음받은 모든 인간은 지극히 존귀한 존재입니다. 이토록 소중한 한 인간이 눈 앞에서 고통하며 신음하고 있는데 안식일이라 하여 모른 척 지나치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이겠습니까?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한 편 손 마른 사람은 사람 구실 제대로 못하는 저주받은 인생으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송사할 구실로서의 쓸모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편 손 마른 사람을 그 사람의 존재 자체로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한 편 손 마른 사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시고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한 영혼을 향해 흘러 넘치는 예수님의 뜨거운 긍휼의 심정은 어떤 인간의 법도, 송사할 구실을 찾기에 혈안이 된 바리새인들의 매서운 눈초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율법사회였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이윤을 내기 위한 도구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인간을 볼 때 그 사람 자체를 귀히 여기기보다는 생산을 위해 얼마나 쓸모있는가를 따집니다. 최근 들어 신자유주의 물결이 세계를 덮치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에서 자유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자유가 아니라 이윤추구의 자유를 말합니다. 이윤 추구의 자유를 제한하는 모든 제도가 철폐되고 무한 경쟁,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윈리가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도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물결이 거침없이 들어 와 빈부 간의 격차 심화, 비정규직 증가, 청년 실업 등의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상을 비추어 주는 이태백(이십세 태반이 백수다), 삼팔선(삼십팔세가 버틸 수 있는 한계선이다), 사오정(사십오세가 정년이다), 오륙도(오십육세에도 회사다니면 도둑이다)라는 은어들이 생겨났습니다. 한 탈옥수가 외친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에 많은 이들이 공감을 하였습니다. 돈을 못버는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무시당하고 버림을 받게 됩니다. 세상에는 이런 전도된 가치관으로 인해 버림받고 소외당하고 상처입은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번 주 KBS 추적 60분에서는 은둔형 외톨이 일명 히키코모리에 대한 충격적인 르포를 방영하였습니다. 은둔형 외톨이들은 일체의 사회적인 관계를 거부하고 방안이나 집에서 거의 나오지 않고 지내며 다른 사람과 대화하지 않고, 주로 낮에는 자고 밤에 일어나 TV나 비디오를 보며 인터넷에 탐닉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 중에는 놀랍게도 십년이 넘도록 방 밖으로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 했습니다. 이들이 방 안에서만 은둔하는 이유는 바깥 세상이 너무 무섭기 때문입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낙오하여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은 이들은 다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하여 자기만의 세계로 도피하여 결코 나오려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만도 이런 은둔형 외톨이들이 최소 10만명이 넘으며, 이웃 나라 일본은 인구 100명 당 한 명이 히키코모리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은둔형 외톨이들은 밖으로 나가 정상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온전한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있지만, 마음이 말라버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은 도움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꽃을 피울 수 없는 메마른 영혼들과 청년의 열정과 박력을 잃어버린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살벌한 시대에 살아 남기 위해 미래를 준비하다 보면 주위를 돌아 볼 여유가 없고 서로에게 무관심하게 됩니다. 심지어 그들을 왕따시키고 무시하며 상처를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예수님은 물질보다 사람이 귀하다는 분명한 가치관을 심으신 후 한 편 손 마른 사람을 도와 주셨습니다. “손을 내밀라.”수 많은 사람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보기 흉하게 일그러진 그의 마른 손을 내어 보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은밀하게 그의 손을 고쳐 주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굳이 마른 손을 내어밀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그가 믿음으로 자의식과 수치심을 극복하고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마른 손 뿐만 아니라 마른 마음도 고침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손을 내밀자 그의 손이 곧 회복되었습니다. 그의 마른 손에는 생기가 돌고 힘이 생겼습니다. 그의 메마른 심령에도 생명력이 감돌았습니다. 예수님의 목자의 사랑은 그의 마른 손과 마른 심령을 회복시켜 새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는 더 이상 구걸하지 않고 두 손으로 열심히 일하여 그의 가족을 부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하나님의 긍휼의 역사였습니다. 


    이를 본 바리새인들은 마음의 악함을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완악해져서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일꼬 의논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양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아니하시는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은 줄을 아시고 그들과 정면충돌을 피하시고 거기를 떠나 가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계속해서 선을 행하시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주목 받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만 열중하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저자 마태는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야의 모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발견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마태가 발견한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갈대는 약한 것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상한 갈대는 얼마나 연약하겠습니까?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였고, 세익스피어는 여자, 그대 이름은 갈대라고 하였습니다. 세익스피어가 오늘날 살았더라면 남자, 그대 이름은 갈대라고 했을 것입니다. 세상은 갈수록 각박해져서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듭니다. 이로 인해 세상에는 경쟁에서 패배하여 상한 갈대와 같은 자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경쟁에서 이긴 사람은 위로 올라 갈수록 극소수에 불과하고 거의 대부분이 경쟁에서 패배하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특히 인간은 내면에서 활화산과 솟아나는 죄의 소욕으로 인해 죄를 짓고 상한 갈대가 되었습니다. 상한 갈대는 상처를 많이 받아서 아픔이 많습니다. 꺼져가는 심지는 기름이 다하여 소망이 없습니다. 또 꺼져가는 심지는 곱게 꺼지지 않고 연기를 많이 내고 또 심지를 태우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고 해를 끼칩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또 스스로의 힘으로는 회복될 수 없기 때문에 소망이 없습니다. 


    프랑스 시인 랭보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오 계절이여! 오오 성이여! 상처 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 정말 상처 받지 않은 영혼은 한 사람도 없어 보입니다. 사람들의 겉 모습은 호랑이와 같고 사자와 같이 보이지만 내면은 한없이 무기력하고 연약하여 쉽게 상처를 받고 쉽게 유혹에 흔들립니다. 어떤 사람은 내면이 너무 연약하여서 농담에도 상처를 받기 때문에 농담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마음에 상처가 있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상처는 먼 사람보다 오히려 가장 사랑하고 가까운 사람에게 주고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습니다. 동생은 오빠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친구는 친구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는 것은 부모가 내면의 상처를 치유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지 못하고 상처를 안고 살다가 때가 되어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자식들에게 상처를 물려주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마음의 상처는 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을 위해서도 반드시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어디서도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으려면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치유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와 같은 사마리아 여인을 섬세한 사랑으로 치유하심으로 병든 영혼을 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꺼져 가는 심지와 같은 38년 된 병자를 찾아 오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질문하심으로 낫고자 하는 영적 소원을 심어 주시고 새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사 3년 동안 함께 하심으로 그의 병든 내면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그가 세상의 빛이 되어 세상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우리 죄를 그 몸으로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통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함을 받고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 2:24). 


    세상에서는 상한 갈대와 같은 자들을 치료하여 쓰고자 하지 않습니다. 상한 갈대와 같은 자들은 무자비하게 꺾어 버리고 꺼져가는 심지는 무정하게 꺼 버립니다. 세상에는 긍휼과 자비가 없습니다. 세상은 냉혹합니다. 이로 인해 세상에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고 우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쓸모없다고 잘라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와 같은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깊이 동정하십니다(히 4:15). 그리고 크신 권능으로 치료하사 건강한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쓸모없는 자들을 치료하사 쓸모있는 자들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구원의 역사를 복음이 최후의 심판에서 승리할 그 날까지 계속하십니다. 이 예수님은 온 인류의 소망이 되십니다(21).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함을 받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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