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여름수양회 준비특강
네 믿음이 크도다
말씀 / 마태복음 15:21-28
요절 / 마태복음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영어에 ‘메가(Mega)’라는 접두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메가바이트(Megabyte) 또는 메가톤(Megaton)처럼 단위를 나타내는 명사 앞에 붙는데 이때 메가는 백만을 의미합니다. 이 메가라는 말은 헬라어 ‘메가스(μέγας)'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방금 읽은 요절 말씀에서 ‘네 믿음이 크도다’할 때 ‘크다’는 말이 바로 ‘메가스’입니다. 그러므로 ‘네 믿음이 크도다’하는 말은 ‘네 믿음이 메가톤급이다’하는 말과 같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 이처럼 큰 믿음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본문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이 유일합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핵폭탄급의 위력을 지닌 믿음이었습니다. 이제 여름수양회가 2주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 인정받은 큰 믿음을 배워 믿음으로 수양회 역사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여인은 자신의 믿음을 무엇으로 나타내었습니까? 본문을 보면 여인이 특별히 무슨 일을 행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여인은 세 번에 걸쳐서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 이를 보면 믿음이란 기도로 나타남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과 기도는 바늘과 실처럼 늘 함께 다닙니다. 믿음은 기도를 일으키고 기도는 믿음을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름수양회를 믿음으로 섬긴다 하는 말은 곧 기도로 섬긴다는 말과 같습니다. 제가 수양회 준비를 위해 할 일은 잔뜩 적어 놓았는데 정작 기도를 별로 하지 않은 것을 보니 제게 믿음이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도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여인에게서 믿음의 기도를 배울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러면 여인이 드린 세 번의 믿음의 기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21,22). 2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유대 땅을 떠나셔서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이스라엘 땅 북쪽 페니키아 지역에 있는 주요 항구 도시들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 아합 왕의 아내로 악명이 높았던 이세벨이 바로 이 지역 출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곳에 오신 까닭은 바리새인들과 소모적인 논쟁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잠시 몸을 피하고자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조차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이방 땅인 두로와 시돈 지역에까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쫙 퍼져 있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소문을 듣고 찾아 온 어떤 가나안 여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인으로 소개된 바로 그 여인이었습니다. 여자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소리쳤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주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당시 메시아에 대한 가장 대중적인 호칭이었습니다. 이방인이 이 여인이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까요? 참 놀라운 일입니다. 단지 아는 정도가 아니라 공적으로 신앙 고백을 했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길래 예수님께 이렇게 큰 관심을 두고 몸소 찾아 왔을까요? 그녀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추성훈 선수의 딸 추사랑을 능가하는 애교 만점의 귀엽고 예쁜 딸이었습니다. 엄마는 사랑스런 딸에게 백화점에서 사 온 메이커 있는 옷만 입혔습니다. 방에는 사방으로 커튼이 드리워진 공주 침대도 있었습니다. 엄마의 생일날 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서툴게 쓴 감사 편지를 가져다주었을 때 엄마는 눈물이 날 정도로 행복했습니다. 그러던 아이가 어느새 부쩍 성장해서 중학교 2학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아이가 흉악한 귀신에 들리고 말았습니다. 그 귀신의 정체는 북한의 김정은도 두려워한다는 중2병 귀신이었습니다. 딸아이는 점점 반항적이 되더니 생전 안 하던 욕설도 내뱉기 시작했습니다. 엄마가 묻는 말에는 대답도 안 하고 종일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렸습니다. 짧은 치마에 짙은 화장을 하는 모습을 보니 틀림없이 오빠가 생긴 듯 했습니다. 학교에 한 두 번씩 빠지기 시작하더니 아예 집에도 들어오지 않는 날도 있었습니다. 이 딸 때문에 엄마까지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통사정을 해 봐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한 번 꾸짖기라도 하면 아이는 눈이 하얗게 뒤집어지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습니다. 여인은 단 하루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 그냥 보낸 날이 없었습니다. 그때 유대 땅에서부터 올라오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딸처럼 병들거나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주셨다는 소문, 그분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기로 약속되어 있던 그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소문들이었습니다. 여인에게 드디어 희망이 생겼습니다. 이제껏 아무도 손 쓸 수 도리가 없었던 자기 딸을 예수님이라면 고칠 수 있겠다는 희망이었습니다. 여인은 믿음으로 이 희망을 꽉 붙들고 예수님께 외쳤습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기서 여인이 불쌍히 여겨달라는 이 간구 외에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인을 이 자리까지 나오게 한 힘은 딸을 향한 한없는 긍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이제 여인이 기대고 의지할 곳도 인생들을 향한 예수님의 한없는 긍휼, 불쌍히 여기는 마음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수양회를 앞두고 드릴 첫 번째 기도도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임에 맡겨 주신 양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겉으로 보기에는 선남선녀에 다들 멀쩡해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하나같이 내면이 죄로 인해 병든 사람들입니다. 저보다 키도 크고 잘 생기고 능력도 많은 한 목자님이 있는데 저는 처음에 이 분은 별 문제가 없는 사람인 줄 알았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알면 알수록 두려움과 시기심으로 깊이 병든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한 형제님은 모든 면에서 뛰어나서 흠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일대일 목자인 저는 그도 별 수 없는 병든 죄인이라는 것을 압니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을 돕고 있는 나도 병든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제게는 이 병을 치유할 능력이 없습니다. 아무리 도와주고 싶어도 내가 손 쓸 수 없는 영역이 있고 한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너나 나나 별 수 없는 인생이니 그냥 이렇게 살자’하면서 포기해야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능력의 이름, 구원의 이름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 예수님께 나아가 이렇게 기도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죄로 깊이 병든 저 양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그 양을 돕는다고는 하지만 맨날 헛발 짓만 하고 있는 이 목자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가 이렇게 수양회에 초청할 양들의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 부르면서 주님의 긍휼을 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주여 저를 도우소서(23-25). 불쌍히 여겨달라는 여인의 간구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시고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이 침묵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아무리 봐도 거절의 의사표시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소리를 지르며 간청했습니다. 보다 못한 제자들까지 나서서 대충 고쳐 주셔서 여인이 집에 가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고쳐주셨을까요? 2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의 범위가 이스라엘 땅에 한정될 뿐 두로와 시돈 지역은 해당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이 또한 거절의 의사표시로 해석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인 입장에서는 얼마나 낙담이 되겠습니까? ‘아니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아예 오시질 마시지 왜 오셔가지고 날 희망으로 고문하셨냐’고 화가 날 법도 했습니다. 그래서 여인이 풀이 죽어서 그냥 집으로 돌아갔을까요? 25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이번에는 예수님께 더 가까이 여인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엎드려 절하며 더 간절히 구했습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주님! 망가진 제 딸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저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제발 도와주시옵소서”
우리가 수양회를 앞두고 드릴 두 번째 기도는 “주여 저를 도우소서”입니다. 이 기도는 특별히 즉각적인 기도의 응답이 없을 때라 할지라도 계속해서 드려야 하는 기도입니다. 기도를 했다고 해서 항상 즉시 응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주님께서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소원 없는 양에게 소원을 주시도록 기도를 했지만 여전히 소원이 없습니다. 때로는 기도를 한 후에 상황이 더 악화되는 때도 있습니다. 분명히 수양회 가기로 약속했던 양이었는데 있던 소원마저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가 더 괴롭습니다. 희망이란 풍선에서 ‘쉬익’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납니다. 이때 우리는 무척 혼란스럽습니다. 이것이 마치 주님께서 "No"하시는 Sign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제목표에서 이름을 뺄 것인가 남길 것인가 고민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한두 번 노력해 보고 쉽게 포기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께서 기도에 침묵하시거나 'No'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 오히려 이 여인처럼 더 가까이 더 간절히 기도하러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때 우리가 무슨 말로 기도해야겠습니까? “주님! 왜 이러십니까? 도대체 들어주실 것입니까? 말 것입니까?” 이렇게 따지고 싶지만 이때 해야 할 바른 기도는 바로 이것입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한두 번의 실패에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상황은 언제나 반전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믿음으로 끝까지 끈질기게 도전하고 주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주여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옵소서(26-28). 엎드려 간구하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보통 때라면 “딸아 평안히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니었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자녀는 유대인, 떡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개들은 이방인을 뜻합니다. 실제로 당시 유대인들은 조롱과 경멸의 의미를 담아 이방인들을 개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예수님께서 이방인을 개에 비유하시다니 충격입니다. 이 사실이 인터넷에 알려지면 악플이 백만 개는 달릴만한 일입니다. 안 고쳐주시려면 그냥 곱게 거절하실 것이지 굳이 이렇게까지 말씀하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우리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우리야 그렇다 쳐도 졸지에 개 취급을 당한 당사자인 이 여인은 어떻겠습니까? 마음에 씻기 어려운 큰 상처를 받지 않았을까요? 한을 품고 겨울 왕국의 엘사 여왕처럼 오뉴월에 서리가 내리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이번 월드컵에서 상대 수비수의 어깨를 깨물어버린 핵이빨 수아레즈 선수처럼 ‘그래. 저 개에요. 어디 개 맛 좀 보실래요?’ 하면서 예수님을 꽉 물어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여인은 먼저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고 인정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에 틀린 점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땅에서만 공생애를 펼치시고 이방인 선교는 그 후에 사도들이 맡는 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속 역사의 플랜이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 22절에 회개치 않는 유대 마을들을 향해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두로와 시돈은 극심한 영적 도덕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향해 치달아 가는 이방 땅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개’라는 말이 좀 거칠기는 하지만 현실을 가감 없이 나타내주는 적확한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안다 하더라도 정작 ‘옳소이다’라고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 자존심이 용납하질 않기 때문입니다. 자존심이 꺾이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자존심 때문에 자기를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한국이 월드컵 우승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그 자존심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에 반발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인은 어리석은 자존심을 내려 놓았습니다. 그 동안 우상 숭배하며 죄악 중에서 짐승처럼 살아왔던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개들도 주인의 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을 수 있지 않느냐’며 부스러기 은혜를 구했습니다. 참으로 재치 있는 대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쯤 되면 이것이 혹시 예수님과 여인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여인의 믿음이었습니다. 작은 부스러기를 구하는 큰 믿음이었습니다. 세 번의 거절이라는 시험을 통과한 검증된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에 예수님께서는 크게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믿음에 감동 받으신 예수님은 스스로 세우셨던 원칙도 잠시 접으시고 여인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집에 가보니 청순하고 발랄하고 상냥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 온 딸이 엄마를 맞이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꼭 껴안았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인 결말입니까?
우리가 수양회를 앞두고 드릴 세 번째 기도는 “주여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옵소서”입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모든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요구할 자격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빚진 것이 있어서 우리가 청구만 하면 내놓으실 의무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 것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주고자 하시는 자에게 주실만한 때에 주실 것입니다. 지금 당장 주시지 않는다고 해서 이의를 제기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혹시 수양회에 가도록 우리가 기도하고 있는 양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다’라고 작정하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정에 대해서 우리는 항상 이 여인처럼 ‘주여 옳소이다’라고 인정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결론을 내리신 듯 보이는 순간에서도 부스러기와 같은 은혜를 구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출애굽 당시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신 하나님은 그들을 모두 멸하시고 모세로부터 새로 시작하시겠다고 선언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모세가 어떻게 했습니까? “아멘! 그것 참 잘 되었습니다. 저도 이 백성들과 함께 하는 것이 이제는 아주 지긋지긋합니다.”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이 백성이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모세는 이렇게 배수진까지 치고 하나님께 오직 은혜만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받으시고 백성들을 멸하지 않기로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웬만해서는 계획을 바꾸시는 법이 없지만 단 한 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겸비한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 믿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 기도를 받으셔서 얼마든지 계획을 바꾸시기도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구원의 가능성은 모든 양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다함께 믿음으로 이번 여름수양회 역사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긍휼과 자비가 많으신 주님께서 우리가 합심해서 드리는 기도를 받으시고 여름수양회 가운데 깊이 병들었던 마음이 치유되는 역사, 죄로 인해 영적으로 죽었던 영혼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역사, 어그러졌던 관계들이 회복되는 역사가 메가톤급으로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2014.6.29, 이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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