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창무 2015. 4. 30.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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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마태복음 제 12 강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말씀/ 마태복음 9:1-17

요절/ 마태복음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고인이 되신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라는 유명한 시가 있습니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저는 천상병 시인과 같은 순수한 마음이 없어서 그런지 아직은 이 시에 전적으로 공감하기가 힘듭니다. 과연 세상이 그렇게 아름답기만 한 것일까요? 또한 죄와 질병과 죽음, 슬픔이 있는 땅이 아닙니까? 사람들이 하나같이 다 병들었고 사회도 깊숙이 병들었다는 사실을 더욱 더 절감하는 요즘입니다. 아무래도 이 땅은 소풍을 가듯이 그렇게 가볍게 왔다 갈만한 땅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늘에서 누군가 내려오신다면 이 세상의 얼룩진 죄악들을 깨끗하게 씻겨낼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하늘에서 누군가 내려오신다면 이리 저리 나누어지고 미워하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내실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하늘에서 누군가 내려오신다면 천국의 기쁨을 주시고 생명의 바람이 불어오게 하실 분이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이미 그런 분이 오셨고 앞으로 한 번 더 오셔서 그 분의 목적을 완성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메시아이자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말씀에 나타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세 가지를 묵상하면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죄사함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 가셨다가 본 동네인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을 때였습니다.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 한 사람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가 침상에 누운 채 온 것을 보면 전신 마비이고 또 작은 자라고 한 것을 보면 젊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신마비를 앓고 있는 청년이라니 너무 딱하지 않습니까? 파릇파릇한 새 가지가 꽃도 피워 보지 못한 채 꺾인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중풍병자의 친구들도 이 사람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고 동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어떤 몹쓸 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예수님께서 다 낫게 해 주신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영화배우 김보성만 의리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도 의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침상과 함께 어깨에 메고 예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그 다음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입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들어갈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지붕에 구멍을 뚫어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침상 채로 달아 내렸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마가나 누가와는 달리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마태가 생각하기에 너무 기가 막힌 일이라 혹시 듣고서 감당 못할 사람이 생길까 봐 생략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기막힌 행동을 비난하거나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2절 하반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때라도 믿음을 만나면 오직 믿음만 보이시고 그 외에는 눈이 멀어 버리시는 분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다음에 예수님이 늘 하시던 대로 즉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을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갑자기 죄사함이라니요?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 많이 들어서 아무도 놀라지 않겠지만 당시 이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첫째는 기대치 않았던 말씀이라 놀랐고, 둘째는 죄사함의 선포 그 자체 때문에 놀랐습니다. 이스라엘 땅에서 죄사함은 본래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린 후에 제사장을 통해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전도 아니고 제물도 없고 제사장도 없는 이 곳에서 울려 퍼진 죄사함의 선포는 모두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사함을 선포할 수 있느냐! 이는 신성 모독죄로 사형감이다.’하면서 수군거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어느 것이 쉬울까요? 정답은 '둘 다 불가능하다. 그러나 둘 다 오직 하나님께는 가능하다' 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 하심으로 자신이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심을 입증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중풍병자는 이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리를 벌떡 일어나 자기가 누웠던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무리들은 크게 놀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치유에 앞서 왜 먼저 죄사함을 선포하셨을까요? 너무 뜬금없는 말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죄가 근본 원인이라면 중풍병과 같은 질병은 그 증상이기 때문입니다. 해열제로 열을 내리게 할 수는 있지만 열병을 치유할 수는 없습니다. 병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를 없애 버려야 완치가 될 수 있듯이 질병과 죽음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죽음의 증상을 완화시키려고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원인을 해결하시기 위해 곧 죄사함을 주시기 위해 오신 메시아, 천사가 탄생 때 예언했던 그대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할 자이십니다. 


우리 사회는 아픈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특히 청년들이 많이 아픕니다. 오죽하면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겠습니까? 죽어라 공부해서 대학교에 왔지만 현실의 벽은 더욱 암담합니다. 스펙 쌓기 전쟁의 시대에 뒤쳐지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다보니 캠퍼스의 낭만이나 학문의 즐거움 따위는 사치에 불과합니다. 학교를 졸업해도 안정된 직장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대표하듯이 일생 비정규직으로 이리저리 전전하다가 끝날 것만 같은 공포가 있습니다. 기성 세대가 내놓는 대책이란 것은 ‘아프니까 계속 아파라. 가만히 있어라’ 이것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기성 세대가 멀쩡한 것도 아닙니다. 요즘 뜨는 베스트셀러는 ‘아파할 수도 없는 마흔이다’입니다. 사십대는 주위 가족들이 불안해 할까봐 아파도 아픈 티를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럼 삼십대는 어떻습니까? 삼십대는 아프거나 말거나 아예 관심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힐링 콘서트, 힐링 캠프, 여기도 힐링, 저기도 힐링, 힐링이 대세입니다. 이 시대에는 힐링을 얻기 위해 찾아가는 21세기의 성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영화관에서 감동적인 영화를 보면서, 맛집에서 맛난 것을 먹으면서, 자연 속에서 보내는 주말 여행을 통해서 힐링을 추구합니다. 효과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증상의 완화에 불과합니다. 진통제를 맞은 것 뿐입니다. 잠시 덜 아플 뿐이지 아픔의 원인은 해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 청년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죄사함의 복음입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죄사함의 복음만이 눈에 보이는 증상 넘어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대마다 고통의 증상의 다 다릅니다. 제가 학생 때 들은 인생 소감의 단골 주제는 가난으로 슬픈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대학생들은 그때와는 다릅니다. 지금은 열등감이라든지 인간 관계에서 실패와 같은 문제들이 대다수입니다. 증상은 변했지만 근본 원인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근본 원인은 여전히 죄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해답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해답은 죄사함의 복음뿐입니다. 우리가 왜 해마다 여름 수양회를 하고자 합니까? 죄사함의 복음을 들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고통하는 시대를 향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사함의 권세자라는 사실을 알고 믿는 우리들이 선포하지 않으면 누가 감히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 여름 수양회가 아픈 청춘들과 아플 수도 없는 세대들에게 죄사함의 복음이 선포되고 치유가 일어나는 수양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당시 세리는 지금처럼 공무원이 아니라 세금 징수를 대행하는 자영업자였습니다. 세리들은 자기 몫을 크게 남기기 위해 인정 사정 보지 않고 백성들을 쥐어 짰습니다. 게다가 유대인 입장에서는 로마 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세리들은 나라를 팔아 먹은 매국노이자 민족의 배신자들이었습니다. 그 대가로 동족들이 굶어 죽을 때 세리는 호화로운 집에서 배불리 먹었습니다. 누구인들 이 세리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상종해서는 안 될 사람, 공공의 적, 인간 말종, 사회의 암적 존재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마태는 그런 세리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마태를 보시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고개를 돌리셨습니까? 침 한 번 뱉고 지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를 주목해서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은 제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어떤 스승이 이런 사람을 제자로 삼는다는 말입니까? 스승의 이름에 먹칠을 할 것이 뻔한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가슴에 칼을 품고 매국노를 암살하러 다니던 열혈당원 시몬도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어떻게 한솥밥을 먹게 한다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사건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스캔들을 일으키셨습니다. 이 부르심에 대한 마태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저 같은 놈이 당신의 제자라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하면서 뒤로 물러섰습니까? '이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욕을 바가지로 먹고 칼침 맞아가며 겨우 얻은 자리인데 절대 포기 못합니다.'하면서 거절했습니까? 아닙니다. 마태는 그 자리에서 세리 직업을 박차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마태는 이 부르심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알았습니다. 그 은혜가 한량 없는 은혜, 갚을 수 없는 은혜이기에 주저하거나 뒤돌아서지 않았습니다. 마태는 은혜에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예수님을 집으로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였습니다. 이 자리에는 마태의 동업자였던 많은 세리들과 그 외에 세리처럼 공인된 죄인으로 취급 받던 사람들이 함께 했습니다. 10절에 '집에서 앉아'라는 말에서 '앉는다‘는 말은 본래 '비스듬히 기대어 눕다'라는 뜻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친구나 가족끼리 친밀한 식사 자리에서의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은 마음이 몹시 불편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을 붙들고 따지듯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죄인들의 친구가 되었으니 당신들의 선생도 죄인이 되는 것 아니오?" 그러자 바리새인들의 이의제기를 들으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12, 13)" 예수님은 자신을 의사에 비유하셨습니다. 의사가 빛을 발할 때가 언제입니까? 병든 사람을 만났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의사는 병든 사람을 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병든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아갑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건강한 사람, 의로운 사람을 부르러 오지 않으셨습니다. 세리 마태와 같이 죄로 인해 깊이 병든 사람을 부르기 위해 오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죄인들, 병든 자를 향해서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 때문이었습니다. 


이 긍휼이 많으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한 마디로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 없는 친구이십니다. 예수님이 왜 세상에 오셨습니까? 죄 많은 우리와 한 식탁에서 먹고 마시는 친구가 되기 위해 오셨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스스로 죄 없다 하는 사람들, 수준 있는 사람들은 죄인을 친구로 삼지 않습니다.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고 죄인은 버림 받고 병든 자는 소외됩니다. 그래서 죄인들의 친구는 죄인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친구들은 같은 죄인이라서 그 사람을 죄에서 건져낼 수 없습니다. 죄인들의 유일한 희망은 죄인들의 죄없는 친구이신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특별히 친구가 되기 위해 함께 밥을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발견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싫은 사람하고는 같이 밥 먹기가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환영하고 친구 삼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그렇게 밥을 같이 먹다 보면 없던 사랑도 생기고 정이 들게 마련입니다. 주일 예배가 끝난 후 대개 요회에서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식사를 준비하는 일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식사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 형제 자매들이 모여 함께 식사하는 모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교회는 무엇이냐? 밥상 공동체다’라고까지 정의하셨습니다. 우리 모임은 본래 무얼 하든지 일단 먹고 시작하는 모임입니다. 일대일을 할 때도 GBS를 할 때도 서빙이 빠지질 않았습니다. 큰 행사를 치러도 먹는 것이 빠지질 않아서 이제는 웬만한 곳에서는 우리 모임에 행사 장소를 빌려주려고 하질 않습니다. 우리가 먹기는 잘 먹는데 잘 치우질 않아서 문제입니다. 요즘 양들 보면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어서 혼자 밥 먹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혼자 밥 먹는 것을 남이 볼까 하여 화장실에 숨어서 밥을 먹는다는 신문 기사가 난 적도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양 치는 일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같이 밥만 잘 먹어도 양의 좋은 친구가 되고 좋은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를 만드는 일도 어렵지 않습니다. 같이 자주 밥을 먹으면 됩니다. 원수 같은 인간과 화해하는 법 어렵지 않습니다. 눈을 딱 감고 열 번만 같이 밥을 먹으면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밥을 먹는 그 자리에 죄인들의 죄 없는 친구이신 예수님께서 임재하십니다. 우리가 양들과 또한 동역자들과 기꺼이 식탁의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가 넘치는 공동체를 이루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생명과 기쁨을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금식은 본래 죄에 대한 뉘우침과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이 당시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금식을 하였습니다. 세례의 요한의 제자들 역시 정기적으로 금식한 것으로 보입니다. 금식은 당시 경건의 대표적인 표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도무지 금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금식은커녕 너무 잘 드셔서 바리새인들로부터 먹기를 탐하는 자라고 하는 별명까지 얻으실 정도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스승이 인정하는 더 위대하신 예수님께서 금식을 하시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15)" 결혼식에 가서 금식하는 법은 없습니다. 당시에도 일주일 간 계속되는 결혼식 기간 동안에는 금식 의무에서 면제되었다고 합니다. 결혼식은 축제의 날입니다. 기쁨의 날입니다. 만약 결혼식에서 기뻐하지 않는 손님이 있다면 그는 과거 신부에게 흑심을 품고 짝사랑했던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 비유에서 신랑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또한 혼인집 손님들은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은 마치 혼인 잔치와 같습니다. 이 날은 하늘과 땅이 만나서 새 언약이 맺어지는 날입니다. 마땅히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날입니다. 그 날에는 금식을 해야 마땅합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문제는 금식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진정한 문제는 새로운 시대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 시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기운 것이 그 낡은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신 이후의 시대가 그 이전 시대와 같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새 언약의 시대입니다. 복음이라는 새 포도주가 부어졌습니다. 새 포도주는 그 안에 생명이 있어서 팽창하는 힘이 있습니다. 복음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활력을 가져다 줍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구 시대에 속한 전통과 관습으로 억제할 수 없습니다. 경직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자칫하면 못쓰게 되어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유연하고 탄력 있는 사람만이 생명과 기쁨이 충만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온전히 담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모든 가치 판단과 의사 결정의 기준이 예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기계적으로 습관적으로 하는 신앙 생활은 신약 시대의 성도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냥 지금까지 늘 그렇게 해 왔으니까 이번에도' 혹은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우리도' 이런 자세가 바로 낡은 가죽 부대가 되는 길입니다. 이런 관습적인 신앙 생활은 기쁨도 없고 생명력도 없습니다. 신앙 생활이 내용이 없고 형식화됩니다. 알맹이는 다 빠져나가고 껍데기만 남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이 일이 예수님과의 맺은 언약 관계 속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고 해야 합니다. 찬양 한 소절을 불러도 기도 한 마디를 하더라도 말씀을 한 구절을 읽을 때에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맥이 닿아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확인했듯이 예수님은 죄사함을 주시기 위해, 죄인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 영원히 시들지 않을 기쁨과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리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고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무엇이든지 다 버리고 다 바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이라 고발하였고 바리새인들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예수님을 공격하고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신앙 연수가 오래될수록 신앙의 열심이 있을수록 더욱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우리 모임도 설립된 지 벌써 반세기가 지났습니다. 이미 수십년 이상 목자 생활하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자칫하면 우리도 낡은 가죽부대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날 때 우리 영혼은 항상 새롭고 또 새롭습니다. 우리가 기쁨과 생명이 충만한 공동체를 이루고 병든 자, 죄인들을 찾아 죄사함의 복음을 힘입게 전파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죄사함과 기쁨, 생명을 주시기 위해 저 높고 높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오신 죄인들의 죄 없는 친구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아멘.


(2014년 5월 25일, 이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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