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및 나눔/단상

전염병 같은 자

이창무 2017. 12. 29.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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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러드 다이아몬드라는 인류학자는 '총, 균, 쇠'라는 책에서 인간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균' 곧 전염병이라고 했습니다. 중세 말에 유럽에 페스트가 창궐하여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었습니다. 이 페스트가 유럽 역사를 중세에서 근대로 바꾸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몇 해 전 우리나라도 메르스 바이러스 때문에 큰 홍역을 치렀습니다. 전염병의 전파력과 영향력은 정말 무시무시합니다.


사도행전 24장에 보면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장로들과 변호사 더둘로가 총독 벨릭스에게 바울을 고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더둘로는 억 대의 수임료를 주지 않으면 데려올 수 없는 특급 변호사였습니다. 대제사장이 바울을 보내버리려고 작정을 하고 단단히 벼르고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둘로는 대제사장의 사주를 받고 얼토당토하지 않은 죄목들로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그런데 더둘로의 엉터리 고발 내용 중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더둘로는 바울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우리 말에도 '염병 같은 X'라고 하면 아주 큰 욕설입니다. 더둘로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바울을 일종의 사회악으로 취급했음을 말해 줍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더둘로가 바울을 전염병이라고 한 것은 역설적으로 당대에 바울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 전파는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에베소라는 한 도시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우상과 마술의 도시가 예수를 높이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소아시아 전역과, 마게도냐, 아가야까지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순식간에 퍼져나갔습니다. 사도 바울의 무서운 전파력에 깜짝 놀라서 마치 전염병 같다는 말이 나온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  


과연 바울은 정말 전염병과 같은 사람이었을까요?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바울의 영향력과 전파력 측면에서 보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전파한 내용은 전염병과는 거리가 멀어도 아주 멀었습니다. 전염병은 결과적으로 사람을 죽이지만 바울이 전한 것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과 구원의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것은 병균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치료약이었습니다. 이런 표현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바울이 전파한 것은 생명의 바이러스였습니다. 생명의 바이러스는 곧 예수 바이러스였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않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졌는데도 나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만지자마자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 바이러스와 접촉한 사람은 고침을 받고 회복되고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누구든지 바울을 만나면 이 예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생명을 살리는 예수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슈퍼 감염자였습니다.


그런데 오직 바울뿐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다 예수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사람입니다. 한때 우리는 주위 사람들이 죄를 짓도록 부추기는 죄의 전파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든지 바로 그곳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파하는 의의 전파자가 되었습니다. 병을 옮기는 나쁜 세균이 아니라 김치를 숙성시키고 우유를 요구르트로 만드는 유산균과 같은 존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부르심의 영광이고 소망입니다.


제가 군생활할 때 부대에서 기독교인을 '환자'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이 전염병과 같은 자라 하는 말을 들었던 것과 비슷합니다. 저도 성경책을 갖고 들어가자 '너도 환자냐'는 말을 바로 들었습니다. 왜 이런 말이 생겼느냐 하면 아무리 갈구고 못살게 굴어도 예배에 가고 침낭 속에서 군용 랜턴을 켜고 성경을 읽기 때문에 마치 불치병 환자 같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습니다. 또 환자가 또 다른 환자를 만들어 내는 전염성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물어보니 요즘엔 군대에서 환자라는 말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많이 아쉽습니다. 한국 교회의 선배들은 예수쟁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이 말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비하하기 위해서 쓰여진 말입니다. 그렇지만 얼마나 예수 예수 하고 다녔으면 예수쟁이라는 말이 생겼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도 그 유래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허구헌날 그리스도를 말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조롱하는 이름이었지만 그 말을 들었던 사람들이 그만큼 그리스도 중심적이었음을 말해주는 반증입니다. 유산균이 죽으면 더 이상 발효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이 있는데 그곳에서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잘못 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영적 생명이 점점 죽어가고 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중심 복음 중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얻게 된 오명이 있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때로는 전염병 같은 자, 예수쟁이, 환자라는 말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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