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시편

여호와께 감사하라

이창무 2017. 11. 20.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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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추수감사절


여호와께 감사하라


말씀 / 시편 136:1-26

요절 / 시편 136: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3대 절기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초막절은 조상들이 광야에서 장막생활을 할 때 함께 하시고 인도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이 초막절이 오늘날 추수 감사절에 해당하는 절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중요 절기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모여서 시편 136편을 읊으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은 우리도 오늘 시편 말씀을 통해 진정으로 감사해야 할 제목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충만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 감사하라” “Give thanks to the Lord!” 시인은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감사는 감정의 표현이 아닐까요? 어떻게 감사가 명령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도 제 자녀들에게 감사를 명령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 딸이 세뱃돈을 받고도 아무 말을 안 하고 있으면 저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어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야지.” 감사란 한편으로 감정의 문제이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윤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감사해야 할 상황에서 감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감사하라’ 명령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 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감사해야 마땅한데 감사가 없으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러면 여호와께 감사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1절 하반절은 말합니다.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인이 제시한 감사의 이유는 우리에게 좀 낯설어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감사의 이유를 주로 상대방에 나에게 베푼 특별한 호의나 친절한 행동에서 찾습니다. 길을 묻었더니 자세하게 알려주었다든지 맛있는 식사 대접을 받았다든지 하는 경우입니다. 물론 이런 일들은 감사를 표현해야 마땅한 일들입니다. 하지만 이런 눈에 띄는 호의나 친절에 기초해서 감사를 생각하다 보면 빠지기 쉬운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평소에 늘 가까이서 호의와 친절을 베풀어 준 대상에게는 막상 감사를 놓치기 쉽다는 점입니다. 사실 어쩌다 한 번 밥을 사준 사람보다는 매일 거르지 않고 끼니를 챙겨 준 어머니나 아내에게 더 감사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어머니나 아내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인색한 경우가 많습니다. 감사하기는커녕 조그만 일 하나 안 해 줬다고 마구 불평하고 섭섭해 하는 때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감사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한두 가지 일에 기초해서 감사할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에게 어떤 분인지에 기초해야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 제목을 찾는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무슨 특별한 사건이 있었는가를 먼저 생각하기 쉽습니다. 별 일이 없었다면 감사할 일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도리어 내게 일어났던 몇 가지 안 좋은 일들이 먼저 떠오르고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게 일어났던 어떤 특정한 사건들보다 하나님은 내게 어떤 분이신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첫 번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신 것이 무슨 감사한 일이냐 그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말은 마치 좋은 부모를 둔 자녀에게 부모라면 당연히 자식을 위하는 거니까 감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는 좋은 부모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금니 아빠 이영학 씨를 아시죠? 그는 장애가 있는 딸을 이용해서 거액의 후원금을 착복하고 그것으로 호화생활을 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자녀를 범행의 도구로 이용했습니다. 이처럼 사악한 부모, 나쁜 부모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이 좋으신 분이라는 것 그 자체로 크게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가끔씩 선한 일도 하지만 못된 짓도 많이 저지릅니다. 인간에게 장난을 치기도 하고 시기와 질투에 사로 잡혀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그 와중에 인간들이 희생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쁜 일을 하려고 해도 아예 나쁜 일을 행하실 수가 없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성품 자체가 선하시기 때문에 언제나 선한 생각만 하시며 선한 일만 행하십니다. 만약 우리 하나님이 다른 우상들이나 잡신들과 같으셨다면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늘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일하신 참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십니다! God is good, all the time! All the time, God is Good! 우리는 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선하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감사의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허연 수염이 수북이 난 할아버지가 한 분 앉아계십니다. 그런데 한 꼬마 녀석이 할아버지 수염을 잡아당기면서 놉니다. 이때 할아버지는 ‘허허’ 하고 웃기만 할 뿐 아이를 혼내지 않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할아버지가 참 인자하시다’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인자하시다고 할 때 인자하심은 단순히 이런 너그러움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자하심이란 단어가 원어로 헤세드입니다. 이 헤세드라는 말은 우리말로 딱 떨어지게 번역할만한 적당한 말이 없습니다. 굳이 번역을 하자면 ‘언약적 사랑’이라는 말이 가장 적당할 것 같습니다. 한참 전에 유행했던 이동통신사 광고 카피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왜 사랑이 움직이는 것이겠습니까? 이 사랑은 감정에 기초해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감정이 있으면 사랑하고 그 감정이 식으면 떠나가는 식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약속에 기초하고 있는 언약적 사랑입니다. 마치 결혼 서약을 한 부부가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진작 콩깍지가 벗겨졌어도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변함없이 서로 사랑을 할 때의 그런 사랑과 같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일시적인 감정에 의해 뜨거워졌다가 이내 사라지는 그런 얄팍한 사랑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감정이 아니라 자기 백성과 맺으신 언약에 기초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세월이 지나도 면면히 흘러 영원까지 이어지는 사랑입니다. 산 위에 우뚝 선 커다란 바위처럼 변함이 없는 견고한 사랑입니다.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바다처럼 끝이 없는 사랑입니다. 시인은 오늘 26행의 시에서 26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삶의 모든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함께 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숨 쉬는 공기처럼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속에서 그것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시인은 2절부터 3절까지 하나님을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 주들 중에 뛰어난 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감히 그 누구도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인 분이시고 압도적인 분이시며 유일하신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종합해 보면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며 홀로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라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면 그 가운데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일들 가운데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일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의 천지창조입니다. 4절부터 9절까지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우상도 감히 도전장을 내밀 수 없고 어떤 위대한 인간도 흉내 낼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을 홀로 행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천지창조입니다. 인간도 창조 활동을 하지만 인간은 이미 있는 것을 조금 더 개량하거나 발전시키는 정도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없는 무로부터 이 세상을 창조해 내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지혜로 하늘을 지으셨습니다. 지혜로 지으셨다는 것은 빼어난 솜씨로 정교하게 지으셨다는 뜻입니다. 우주의 신비는 알면 알수록 정말 놀랍습니다. 물리학계에서는 누구든지 우주의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의 정체를 밝혀내기만 하면 노벨 물리학상은 따 놓은 당상이고 아인슈타인에 버금가는 물리학자가 될 수 있다고들 말합니다. 왜 여기에 암흑(Dark)이란 말이 붙었느냐 하면 아직까지 있다는 것만 알 뿐이지 아무도 관측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우주는 그 스케일이 엄청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런 우주가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항성과 행성들이 일정한 궤도를 돌지 않고 제 마음대로 좌충우돌 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다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대 희랍인들은 이 우주를 가리켜 질서라는 뜻을 가진 코스모스라고 이름을 붙였고 그 반대를 카오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땅을 물 위에 펴시어 땅과 바다의 경계를 세우셨습니다. 지난 수요일 포항에서 진도 5.4의 지진이 일어난 바람에 수능이 연기되고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런데 만약 지진과 쓰나미가 수시로 일어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땅과 바다의 경계가 허물어져서 바다가 땅 위로 넘쳐나고 땅이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다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각자 제 자리를 지키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해를 만드셔서 낮을 주관하게 하셨습니다. 태양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태양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에게 에너지를 공급합니다. 빛을 내기 때문에 우리가 낮에 여기 저기 돌아다니고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4시간 태양이 비추고 낮만 계속 되어도 곤란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감사하게도 밤이 있습니다. 밤에는 달과 별들이 떠올라서 낭만적인 시와 이야기와 노래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줍니다. 이 낮과 밤의 순환은 한 치도 어김이 없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계속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앞일을 계획하고 준비해 가면서 살 수 있습니다.


현재 이 지구 위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로부터 은총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 은총이 없이는 그 누구도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없습니다. 이 은총을 가리켜 일반은총이라고 부릅니다. 말 그대로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은총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차별도 없고 예외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은총으로 여기지 않을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남들도 다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은총이 아니라 그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것이 실제로는 당연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2007년 칸 영화제와 2008년 골든 글로브에서 수상한 ‘잠수종과 나비’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의 실제 주인공은 프랑스의 유명 패션잡지 ‘엘르’의 편집장을 지냈던 장 도미니크 보비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43살 되던 해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집니다. 3주 만에 의식을 회복했지만 사지가 마비되고 오직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왼쪽 눈꺼풀뿐이었습니다. 왼쪽 눈꺼풀을 깜박여서 의사표시를 했습니다. 이 사람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15개월 동안 무려 20만 번 이상 눈꺼풀을 깜박거려서 의사표시를 하고 옆에서 사람이 대필해서 완성한 책이 ‘잠수종과 나비’라는 책입니다. 몸은 완전히 잠수복을 입고 물속에 갇혀있는 사람 같지만, 영혼은 나비처럼 날아다닌다 해서 제목이 잠수종과 나비입니다. 이 책의 머리말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간절한 소원은 고이다 못해 흘러내리는 침을 삼키는 일입니다. 내가 만일 내 힘으로 흘러나오는 침을 삼킬 수만 있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혹시 침을 못 삼키는 사람 계십니까? 우리는 너무나 침을 많이 삼켜서 문제입니다. 먹을 것을 생각만 해도 침이 꿀꺽꿀꺽 하고, 남이 먹는 거 봐도 침이 꿀떡꿀떡 넘어갑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어떤 사람은 침만 삼키는 일만 가능해도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고백했는데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다 받고 누리게 되었으니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조금이라도 부족하다 싶으면 입이 한 자나 나와서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우리가 대단한 일이 있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소한 것, 작은 것, 하찮은 것도 귀하게 여기고 감사합시다.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땅을 물 위에 펴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해와 달과 별들을 지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쌀 한 톨, 물 한 모금 주신 것에도 감사하고, 단 잠을 주신 것에게 감사하고, 잘 먹고, 잘 싸고, 숨 잘 쉬고, 침 잘 삼키게 하신 것에 감사합시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행하신 두 번째 일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입니다. 10절부터 22절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시고 광야를 통과하여 마침내 가나안 땅에서 기업을 얻게 하신 내용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애굽은 당대에 가장 앞서 가는 문물과 강력한 군대를 가진 대제국이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힘없고 무지한 노예 백성이었습니다. 날마다 채찍질 세례를 받으며 강제 노역으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 고난과 압제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으로 특별히 마지막 장자 재앙으로 애굽을 치심으로 바로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곧이어 홍해라는 거대한 장애물을 만났지만 이 또한 하나님께서 바닷물을 가르심으로 육지처럼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사십년 동안 광야를 돌아다녔지만 굶어죽지도 목말라 죽지도 않았습니다. 신발이 닿아 맨발로 다니지도 않았고 의복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지도 않았습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는 아모리왕 시혼과 바산왕 옥이라는 강력한 적군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전쟁에 능숙한 싸움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앞장 서 싸우심으로 그들을 다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의 기업으로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노예 백성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허물 많은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입니다. 이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두 번째 은총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기 백성에게 임한 특별한 은총입니다. 그래서 이 은총을 가리켜 특별은총이라고 부릅니다. 일반은총만으로도 감사가 넘치지만 특별은총을 받은 자들은 더더욱 감사가 넘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권투에 비유하면 일반은총은 가볍게 들어오는 잽과 같다면 특별은총은 온 몸의 체중이 실린 묵직한 오른손 훅 한 방과 같습니다. 그 은혜에 압도되어서 우리는 KO를 선언하고 항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임한 특별은총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이루신 구원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죄의 노예, 죽음의 노예, 사탄의 노예였습니다. 일생 불의의 종노릇하면서 죄가 주는 곤고함과 비참함, 죽음이 주는 허무와 슬픔에 매여 신음할 수밖에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은혜로 우리를 택하여 주시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특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받게 되리라는 약속도 주셨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허물 많고 죄악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죄의 노예 되어 신음하던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아들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


지금까지 시인은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서두를 시작한 다음에 하나님이 행하신 창조와 구원을 기억하도록 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감사는 기억하는 것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감사가 사라져 버릴까요? 왜 창조주이자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합당한 감사를 드리지 않게 될까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기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다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살아 있었습니다. 눈물 흘리며 주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을 고백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그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삶에 치여 이리 저리 뛰어다니다 보면 어느새 십자가 구원의 은혜는 오래 전 추억처럼 멀어져 갑니다. 마음에 점점 굳은살이 박여 돌처럼 단단해 지고 감사는 건성으로 드리는 의례적인 감사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감사가 내 안에 생생하게 살아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시인이 노래하듯이 끊임없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들을 상기시키며 그 은혜를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기억이 사라지면 감사도 사라집니다. 기억하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들이 기록된 책인 성경을 날마다 가까이 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크고 기이한 일들이 담긴 보물창고입니다. 그 보물들에게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라는 찬란한 빛을 반짝반짝 발산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날마다 기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새롭게 발견하며 감사의 제단을 쌓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과거에만 유효했고 현재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인자하셨을 뿐 아니라 현재 우리에게 인자하시고 미래에도 인자하실 것입니다. 그 인자하심으로 부모가 자녀를 돌봄과 같이 그의 자녀 된 우리들을 돌보아 주고 계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십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장 비참한 시기 중 하나였던 사사 시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기억하사 사사를 보내주셨습니다. 또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갔을 때 그들을 잊지 않으시고 칠십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비천해진 사람을 애써 기억에서 지워버립니다. 아무도 찾지 않고 투명인간 취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시어 낮은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4절에서는 하나님을 우리의 대적에서 건지신 이라고 표현합니다. 에돔, 모압, 암몬, 블레셋, 아람, 앗수르, 바벨론 등등 이스라엘 역사에서 대적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수많은 대적들 가운데 자기 백성을 건져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대적의 손에서 건지시는 분이십니다. 살아가면서 많은 위기를 만나고 때로는 여기서 끝장인가 싶은 정도로 극심한 좌절을 맛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갖가지 위기 속에서 건져내어 주셨습니다. 25절에서는 하나님을 가리켜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질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떡으로만 살 수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 우리는 영의 양식인 말씀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의 양식 뿐 아니라 영의 양식도 신실하게 우리에게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 인자하심으로 목자처럼 부모처럼 다방면의 삶의 필요를 채우시고 우리를 돌보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


하나님께서는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안암 1부도 인자하신 사랑으로 돌보아 주셨습니다. 먼저 캠퍼스 제자 양성을 이루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올해 초 목자 학교를 통해 이지영 학사님을 비롯해서 다섯 명의 자매 목자가 섰습니다. 한 분 한 분이 능력도 많고 믿음의 어미가 될 잠재력이 큰 분들이어서 참 감사합니다. 봄 학기에는 캠퍼스 런치 미팅에 놀라운 역사가 있었습니다. 몇 년 전 두 명과 함께 런치 미팅을 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이번 학기에는 이십 여명이 함께 런치미팅을 했습니다. 또 고대뿐 아니라 새롭게 경희대 외대로 런치미팅이 상설화되었습니다. 런치 미팅을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토크 콘서트라는 새로운 컨셉을 도입해서 실험을 해보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한 해였습니다. 올해 여름수양회는 역사적이고 획기적인 수양회였습니다. 창세기 전체를 수양회에서 소화한다는 야심찬 계획이 너무 무리가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수양회를 통해 오늘 말씀에 나온 대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시고 언약에 기초한 신실하신 사랑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가을 제자 수양회도 은혜가 넘치는 수양회였습니다. 갔다 온 후에 세 팀이 서로 자기 수양회가 가장 은혜로웠다고 경쟁적으로 소감 발표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수양회를 통해서 교제의 은혜, 말씀의 은혜를 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올해는 자녀들 가운데 여러 가지 새로운 은혜의 역사가 시작된 해입니다. 수요 어린이 예배가 생겼습니다. 매주 부모와 자녀가 함께 와서 부모님은 기도회로 가고 자녀는 예배로 가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양 센터에서 우리가 이렇게 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해 간 후 우리를 따라서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름에 강원도로 JBF 수양회를 간 것도 새로운 역사였습니다. 한 MBF 형제님은 이 수양회가 너무 좋아서 겨울에도 또 가자고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런 특별한 일들만 감사한 것은 아닙니다.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에스라, 느헤미야, 누가복음, 다니엘서 말씀으로 매주 저희들에게 풍성한 영의 양식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아픈 분들을 위해 기도했을 때 주님께서 치유의 손길로 함께 해 주셨습니다. 어려운 경제 현실 속에서 각 가정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이 외에도 올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다 말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저는 오늘 26절로 끝나는 이 시편에 27절을 하나 덧붙이고 싶습니다. “2017년 안암1부에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또한 하나님은 작년 국정 농단 사태로 촉발된 우리나라의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고 안정을 찾아가게 하셨습니다. 북핵 위기 속에서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켜주셨습니다. 짬짬이 5월과 10월에 두 번씩이나 긴 연휴 기간도 주셨습니다.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참 좋으신 우리의 하나님, 아무리 감사하다 말해도 그 인자하심을 다 표현할 수 없으신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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