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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년 누가복음 제8강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성경공부/2017누가복음 2017.08.30 10:06
    2017년 누가복음 제 8 강(찬송가 289장)
    말씀/ 누가복음 5:17-39
    요절/ 누가복음 5:32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 중풍병자와 세리의 이야기로 우리에게 익숙한 본문이다. 한 때 여름수양회 단골 메뉴였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믿음의 이야기. 중풍병자가 죄사함 받는 이야기, 레위에게 임한 부르심의 은혜 등등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을 다양한 관점에서 풀어가는 것이 가능하다. 오늘 두 사람의 이야기 속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일군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 본문을 보는 또 다른 관점 하는 예수님과 이들과의 충돌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이 관점은 마지막에 있는 새 포도주 비유와 잘 매칭이 된다.
    • 기존의 관점을 흡수하면서 동시에 새 시대와 옛 시대를 대비하면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면 좋겠다. 우리는 새 시대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옛 시대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1.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 누가 앉아 있었습니까(17)? 사람들이 어떤 병자를 예수님 앞에 들여놓고자 했습니까(18)?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하자 어떻게 했습니까(19)?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 바리새인과 율법교사가 처음으로 등장. 당시 유대교의 중심 세력. 전통과 유전을 중시하는 낡은 가죽부대의 대표격인 사람들. 왜 왔을까? ? 예수님을 감시하고 검증하려고 왔다. 필연적인 충돌을 예감하지 않을 수 없다.
    • 예수님의 사역이 위축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감시자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으니... 그러나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 했다. 예수님의 사역은 위축되지 않았다.
    • 한 중풍병자. 중풍병은 보통 노년에 걸리기 마련이나 다른 복음서에서 소자야 라고 한 것을 보면 나이가 많지 않은 사람이었던 듯. 청년이 사지가 마비되었으니 얼마나 큰 비극인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고침을 받기 위해 집에 계신 예수님 앞으로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문제가 있었다. 너무 많은 무리가 모여 있어 길을 얻을 수 없었다. 아마 침상을 메고 오느라고 남들보다 지체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 사람이라면? 포기하고 돌아가거나 무작정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 그러나 이 사람들은 달랐다. 지붕에 올라기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 예수님 앞으로 달아내렸다. 당시 집의 구조는 건물 옆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또한 슬레이트 지붕 같은 구조로 지붕을 덮고 있었기 때문에 뜯어내기가 쉬웠다고 한다. 천정에 구멍이 나고 햇빛이 방 한 가운데로 쏟아져들어오기 시작했다. 네 귀퉁이에 줄을 매단 침상 하나가 서서히 천정으로부터 내려왔다. 얼마나 기이한 장면인가? 웅성웅성대기 시작했다.
    • 이들의 행동은 일종의 새치기라고 할 수 있었다. 무단 가택 칩입에 재물손괴죄이다. 집주인에게 미리 허락을 받았을 것 같지도 않다. 너무 무례하고 저돌적이고 불법적이지 않은가?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왜 이렇게 했는가?? 중풍병자에 대한 사랑이 먼저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가장 큰 것은 믿음이다. 비난을 감수할 정도로 믿음이 있었다. 예수님이 고쳐주실 수 있다. 예수님이라면 내치지 않으시고 영접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 믿음이 지붕을 뜯고 침상을 내리는 행위로 나타났다. ... 미움 받을 용기....   
    • 어찌 보면 우리는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과 같은 세상 사람들에 의해 감시를 받고 있다. 뭐 조금만 하면 SNS에 바로 올라온다. 신문에 나오고 티브이에 나올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의 트라우마 속에 한국 교회가 빠져 있다. 우리도 위축이 되기 쉽다. 맥락에 상관 없이 무조건 비난을 듣기 십상이다. 여차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 받는다. 어느새 눈치를 많이 보기 시작했다. 이건 너무 무례하게 보이질 않을까? 괜히 비난을 자초할 일 아닌가? 물론 무례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쓸데 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믿음의 행위들이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전도와 선교는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 일정 부분 욕 먹는 부분은 감내할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세월호 사건 일어났을 때 규정 따지고 절차 따졌다면 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겠는가? 규정과 절차는 나중 문제이고 일단 아이들을 살리고 보았어야 하지 않는가? 많은 국민들이 답답해 했다. 마찬 가지다. 한 영혼을 구해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 사랑으로 믿음으로 하면 결국 오해는 풀리고 비난은 사그러들게 된다. 나중에 중풍병자의 친구들이 비난 받았다는 말은 없다. 사람을 온전케 하면 과정 상에 있었던 모든 일들은 용서가 되기 마련이다. 이제 우리도 믿음의 야성을 회복하자. 호랑이는 굶어도 풀을 먹지 않는다.


    2. 예수님은 그들의 어떤 점을 보셨습니까(20a)?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어떤 은혜를 선포하셨습니까(20b)? 왜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주셨을까요?

    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 믿음이라는 것이 눈에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굉장히 추상적이고 내면적인 것이라 볼 수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볼 수 있다. 어떻게 볼 수 있는가? 믿음이 만들어내고 불러일으킨 행위를 보고 그 믿음을 볼 수 있다. 믿음이 있다고 하는데 전혀 믿음의 행위가 나타나 보이질 않는다면 믿음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행위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여기서는 지붕을 뜯고 침상을 내리는 행위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음 믿음이라고 한 것이다.
    • 믿음을 보신 예수님의 다음 말씀으로는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24절)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뜻 밖의 말씀을 하신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사람아 라는 표현은 상당히 정감이 가는 표현이다. 연약하고 죄 많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긍휼이 배어나오는 듯한 호칭이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왜 치유를 베푸시기 전에 죄 사함을 먼저 선포하셨을까? 결국 이 말씀은 이 사람에게 있어서 치유보다도 죄사함이 시급한 문제임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모든 질병은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죄 문제로부터 파생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에덴 동산에는 질병이 없었다. 그러나 죄를 범한 후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오면서부터 질병도 함께 들어왔다. 사람은 병들고 그러다가 죽는다. 질병은 죽음의 그림자이다. 그러므로 질병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여기서 이 중풍병의 직접적인 원인이 이 사람의 특정한 죄 때문인지 여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예수님이 굳이 죄사함을 먼저 선포하신 것으로 볼 때 둘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을 개연성이 상당히 높다. 죄에 빠져 살다보면 육체를 소홀히 하기 쉽다. 그러다 보면 젊은 나이에 중풍병에 걸릴 수도 있다. 이 중풍병자는 육체의 고통 못지 않게 죄의식으로 인해 자신은 저주 받은 자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 받고 있었을지 모른다. (또는 바리새인 서기관들에게 도전을 하기 위해서일수 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시며 자유와 해방을 선물로 주시고자 하셨다. 
    • 무기력한 삶의 원인에는 죄 문제가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이 죄다. 믿음이 있으면 지붕도 뚫을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행함도 없다. 불신은 무기력하게 만든다. 죄에 탐닉하다 보면 무기력하게 된다. 삶의 모든 에너지를 죄가 다 빨아들이기 때문이다. 죄의식이 우리를 또한 무기력하게 한다. 죄의 짐이 우리 영혼을 누르기 때문이다. 영혼이 새처럼 자유로워 저야 훨훨 날 수 있다. 비상할 수 있다.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야 하늘을 날며 청년의 꿈을 펼쳐 보일 수 있다.


    3.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21)? 예수님은 자신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어떻게 보여주셨습니까(22-25)?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26)?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죄사함 선포에 깜놀했다. 신성 모독이라 여겼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수 있는데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과 동격으로 여긴 셈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의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는 말이다. 하나님만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예수님의 발언이 신성모독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맞기 때문이다. 사실 이 순간에 신성 모독을 하고 있는 자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폄하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로 하진 않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만 하고 있었다. 속으로 부글부글했지만 예수님께 호의적인 분위기 때문에 눈치를 보고 있느라 말을 못했던 것 같다... "녹음했어? 나중에 고발해야지".... 
    •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다 아셨다. 안봐도 비디오... 평소 잘 아셨기 때문이기도 하고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이 나타났다고 할 수도 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도전하셨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 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은 말만 하면 되니까 쉬울 것 같지만 감히 할 엄두를 못내는 말씀이라서 어렵고 일어나 걸어 가라 하는 말은 할 수는 있지만 보여주어야 하기 떄문에 어렵다. 둘 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하실 수 없는 말이다. 결국 일어나 걷게 하심으로서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선포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실 수 있다. 인자가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가 있음을 보이시고자 하셨다. 인자라는 표현은 다니엘서에 나오는 표현으로 말세에 오실 메시아를 뜻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마자  실제로 중풍병자는 일어나 걷게 되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집으로 갔다. 목격자들 역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심은 누가 봐도 그 자체만 보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요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다.
    • 여기서 옛길과 새 길의 첨예한 대립을 볼 수 있다. 옛길은 무엇인가? 사람이 죄사함을 받는 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제사장이 집도하는 제사를 통해서 가능했다. 그러나 여기는 예루살렘도 아니고 제사장도 없고 제물도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사함을 선포하신다. 딱 하나 믿음만 보시고 바로 네 죄사함을 받았다고 하신다. 이것이 새 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성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제사장 곧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옛길은 이제 필요하지 않다. 옛길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옛길의 한계 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새 길이신 예수님의 방식을 도저히 이해하지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치유 사건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셨다.
    • 우리는 지금 새 시대를 살고 있다. 새 시대는 단지 믿음만으로 죄사함을 받는 시대이다. 그러나 당연하게까지 들리기까지 하지만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다. 놀라운 일이다.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일이다. 성자 예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시지 않으셨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할례를 해서 개종을 하고 예루살렘에 비행기를 타고 가서 양과 소를 잡고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걸어다시는 성전이셨다. 유일하고 완전한 중보자셨다. 우리는 이분을 믿고 영접해야 한다. 그때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4. 예수님은 레위를 어떤 말씀으로 부르셨습니까(27)? ‘나를 따르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레위는 어떻게 응답했습니까(28,29)?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 레위는 마태라고도 불린다. 레위는 유대식 이름이고 마태는 로마식 이름이다. 직업은 세리였다. 세관에 앉은 것을 보면 통행세나 관세를 징수하던 세리였다. 세례 요한의 책망에서도 들러나듯이 정한 세 이외에 늑징하는 것이 당시 세리들의 삶이었다.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힘들게 했다. 게다가 로마 부역자였다. 돈을 벌기 위해 동족을 팔아 버린 더럽고 추한 민족 반역자였다. 당시 공인된 죄인이었다. 불가촉이 당연시되었다. 회당에 들어갈 자격을 박탈되었다. 산에는 이리 산 아래는 세리가 있다. 라임이 맞음... 사채업자 같음... 레위는 어쩌다 세리가 되었을까? 사회적 배척과 모멸을 감수하면서까지 세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돈이 너무 좋아였을까? 아니면 돈에 한 맺힌 사연이 있을까? 어찌되었든 돈 때문에 굶주리지는 않았으나 인정과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는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다. 이제 이런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탈출구가 없었다.  
    • 그런데 예수님께서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다. 나를 따르라. 아마도 길을 가시면서 오랜 시간 동안 지켜 보셨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날 결정적으로 부르신 것이다. 세리를 제자 삼는 것은 율법 시대에 정말 파격적인 일이었다. 당시 랍비들 중에는 누구도 이런 사람이 없었다.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을 일이었다. 예수님은 레위를 부르심으로 어떤 반응과 오해가 일어날지 충분히 잘 알고 계셨을 것이다. 로마 부역자...인정하는거야?.. 이미 불렀던 제자들의 반발도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다. 어부들은 그래도 당시 사회에서 무난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열혈당원 출신도 있었다. 둘이 얼마나 서로 미워할지 생각하면 이건 너무 위험한 선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로 부르셨다. 예수님이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다는 것 자체가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 이에 대한 레위의 반응도 놀랍다.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나름 수입이 쏠쏠한 세리직을 다 버렸다. 그냥 얻은 직업도 아니고 욕먹으면서까지 얻은 직업이므로 버리기 더 어려울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정말 예수님의 불가항력적 부르심인지 모르겠다(디트리히 본회퍼). 부르심에는 신비함이 여전히 남아 있다. 다만 레위 입장에서는 아무도 찾지 않는 자신과 같은 자를 제자로 부르시는 분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꼈을 수 있다. 전혀 기대하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왔기 때문에 오히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가 실감나게 다가왔을 것이다. 누가 봐도 그리고 스스로 생각해도 레위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었다. 오히려 스승의 명성에 먹칠을 하고 누를 끼칠 수 밖에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불러 주셨다는 사실에 감격했을 것이다.
    • 레위는 감사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다. 역시 부자는 클래스가 다르다. 그런데 다른 세리와 죄인들을 이 식사 자리에 초대했다. 시종일관 화기애애 기쁨이 넘치는 분위기였을 것이다. 희년이 이 집에 도래한 것이다.
    • 어떤 공동체가 정말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인가 아닌가 결정하는 지표가 무엇일까? 저 사람은 전혀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닌데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동질적인 사람들만 끼리 끼리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한 솥밥을 먹는 사이가 되는 것이 예수님 공동체의 표지가 아닐까? 대체로 무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모인 제자공동체 속에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레위를 제자 삼으신 것이 아닐까? 우리가 이런 양들을 불러서 제자 삼는 역사를 이루자.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있어야 전도가 된다. 원래 전도는 회심하고 일이년 사이에 많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년 이십년 되면 믿는 친구들만 안 남아서 전도가 안 된다고 한다. 한 사람이 중요하다. 한 사람을 통해서 그 주위 사람들을 다 변화시킬 수 있다.

    5.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왜 제자들을 비방했습니까(30)? 예수님은 죄인을 어떤 사람으로 보십니까(31)?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32)?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제자들을 비방하였다. 어찌해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가? 사실 이 비방은 좀 비겁한 비방이었다. 예수님께 대한 비방인데 예수님보다는 만만한 제자들을 타겟으로 삼은 것이다.
    • 여기서 옛 시대 경건의 전형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경건한 사람은 죄인들과 가까이 하면 안 된다가 그것이다. 왜냐하면 물들기 때문이다. 근묵자흑 근주자적이 그들의 표어이다. 분리만이 오직 답이다. 바리새인이라는 말 자체가 분리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대 새 시대는 다르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것이 문제....
    •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쓸 데 있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건강한 자는 실제로 건강한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반면 병든 자는 스스로 병든 자로 여기는 세리 같은 자이다. 다른 말로 하면 바로 다음 절에 나오는 의인과 죄인이다. 사실 의인이 어디 있나? 의인인줄 착각하는 죄인이 있을 뿐이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병든 자를 고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의사가 되신다. 의사는 병자를 피하지 않는다.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 도리어 병든 자가 있음으로 인해 존재의미를 느끼고 가까이 다가간다. 예수님은 의사로 세상에 오셨지 검사로 오시지 않았다. 죄인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
    • 엣 시대에는 접촉을 하면 그 대상으로부터 죄와 더러움이 내게로 옮겨온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예수님의 새 시대에는 정반대이다. 예수님의 거룩함이 접촉한 사람에게 흘러들어가 그를 거룩하게 하고 치유하고 회복시킨다.  죄인을 만나 부저아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하게 만든다... 이것이 신약 시대의 경건이다. 그래서 신약의 교회는 끊임없이 병든자 죄인들을 향해 찾아가는 교회이다.
    • 죄악된 세상에서 죄에 물들지 말고 경건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죄악된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 병든 자를 고치고 죄인을 구원하는 일이다. 우리는 선교회다. 우리 모임의 자랑이고 정체성이다. 파라처치에서 시작한 우리 모임의 이 아름다운 정신을 잘 계승해 나가자.


    6.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33-35)? 새 옷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지 않고,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36,37)?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38,39)?

    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 중풍병자를 통해서 촉발되고 세리 레위를 부르심으로 심화된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충돌은 본격적인 논쟁으로 들어간다. 이번에는 금식이 문제가 되었다. 금식은 죄에 대한 슬픔과 은혜에 대한 갈급함을 표현하는 경건의 표지였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했다.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은 통 금식을 하지 않았다. 바리새인들의 말은 경건의 표지인 금식을 왜 하지 않느냐면서 힐난한 것이다.
    • 그러나 예수님은 혼인집 신랑의 비유로 이들을 반박하신다. 혼인 잔치날 금식하는 사람은 없다. 여기서 신랑은 예수님, 신랑 친구들은 제자들을 가리킨다. 종종 구약에서 하나님과 백성과의 관계를 혼인 관계로 비유하곤 한다. 즉 하나님이 직접 자기 백성과 결혼하기 위해 오셨다. 이 즐거운 날에 금식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럴 때는 즐거워하고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 오히려 경건한 것이다. 예수님은 경건의 의미를 폄훼하거나 축소한 것은 아니다. 신랑을 빼앗기는 날 즉 십자가에 죽으시고 묻히신 그 날에 금식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다. 우리도 금식이 경건의 표지가 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을 잃어버렸을 때 예수님을 다시 찾기 위해 개인적으로 금식하는 것은 얼마든지 권장할만하고 필요하다 하겠다. 아무튼 옛 시대의 경건은 금식이 표지라면 새 시대 경건은 잔치라고 할 수 있다.
    • 유명한 새 옷, 새 포도주 비유를 덧붙이셨다. 새 옷을 헌 옷에 붙이면 헌 옷이 찢어진다. 새 포도주는 가스가 나와 팽창한다. 이 포도주를 탄력을 잃은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와 부대까지 모두 버리게 된다. 여기서 새 옷이나 새 포도주는 모두 예수님의 사역을 뜻한다. 헌 옷이나 낡은 가죽 부대는 유대교의 낡은 방식과 전통을 뜻한다. 한마디로 이 둘은 서로 어울리지도 않고 섞일 수도 없다는 뜻이다. 억지로 섞어봐야 서로를 망칠 뿐이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유대교를 살짝 뜯어고쳐서 쓰실려고 오신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대가 왔다. 눈에 보이는 외적인 형식보다는 내적인 동기와 마음이 중요시되는 시대이다. 믿음만으로 사죄가 선포되는 시대이다. 세리도 제자가 되는 시대이다.
    • 우리는 유대교 신자인가 신약 교회의 성도인가? 당연히 우리는 신약의 제자들이다. 우리 모임이 생긴 지 올해로 56년이 되었다.안암골만 해도 40년이 넘었다. 묵은 것이 좋다 하면서 새 것을 배척하게 되기 쉽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본질이고 내면이고 정신이지 외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 스타일로 살아간다. 형식과 외면을 중요시 여기지 않다. 내면과 본질이 중요하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죄의 복음이 전파되고 사람이 살아나고 죄인이 용서를 받고 회개하고 예수님과 함께 기쁨의 잔치를 벌이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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