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예레미야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이창무 2015. 11. 12.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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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말씀 : 예레미야 12:1-6

요절 : 예레미야 12:5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정복한 몽골 제국의 창립자인 칭기즈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집안을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었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내게는 그림자 말고는 친구가 없었고, 병사는 10만 명, 백성은 어린아이와 노인까지 합쳐 200만 명도 되지 않았다. 배운 게 없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으나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순간 나는 칭기즈칸이 되었다." 세상의 정복자도 이런 정도의 고백을 합니다. 하물며 장차 주와 함께 왕노릇할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정도 고백을 못해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고난에 감당하는 역량을 갖춘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소원을 덧입길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기 전에 앞장인 11장의 18절 이하 내용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이 부분에 보면 예레미야의 고향인 아스돗 사람들이 예레미야와 그 자식까지 같이 죽여 일족을 멸하고자 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8절에 하나님께서 기도 중에 알게 하셨습니다. 이를 알고 나서 예레미야는 배신감에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그가 더 아프게 배신감을 느낄 수 에 없는 것은 그들과 단지 친분이 있었던 정도가 아니라 동지라고 느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나돗 사람들은 솔로몬 때 중앙에서 밀려 낙향한 아비아달 제사장의 후손들이어서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종교 지도자들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비슷한 입장에 서 있던 예레미야를 이해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제 내 등 뒤에서 칼을 꽂으려 하다니 예레미야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왜 그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음모를 세운 것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2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취하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었기’ 때문에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처음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을 때 말씀의 종으로 살다보면 어느 정도 고난이 있을 것을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겪어보니 너무 힘들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힘들고 답답한 마음을 안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1절과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형식은 질문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사실 예레미야는 지금 하나님의 불공평에 대해 항의하고 있습니다. 입은 주께 가까우나 마음이 멀다고 한 것을 볼 때 악인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마음은 딴 곳에 가 있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위선자들이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입을 막아서라도 거짓 평안을 계속 누리고자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생각할 때 이런 악인은 심판을 받고 선한 이는 그에 해당하는 보상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젼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현실에서는 악인들이 뿌리를 내리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아주 잘 먹고 잘 살고 있었습니다. 어찌나 잘 사는지 예레미야가 보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땅에 심으신 것 같아 보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연이어 질문을 하나님께 퍼붓습니다.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언제까지(How long) 하나님이 인내하시겠습니까?” “언제까지 악인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내버려두시겠습니까?” “악인들의 죄로 인해 의인들과 짐승들이 왜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그리고 예레미야는 질문과 함께 한 가지 간구를 했습니다. 3절 후반절에서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양을 도살하듯이 악인들을 죽여달라는 기도입니다. 참 기도가 끔찍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선지자가 이런 끔찍한 기도를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해가 됩니다. 오죽 분하고 억울하고 답답했으면 이런 기도가 나왔겠습니까? 그들이 자기 목숨 뿐아니라 아내와 아이들까지 전부 다 살해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데 이런 상황이라면 저라도 아마 피가 거꾸로 솟구칠 것 같습니다. 다른 일도 아니고 말씀을 전한다는 이유 때문에 이런 위협을 받는 현실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어떤 응답을 주셔야 할까요? 먼저는 속 시원한 해답을 주시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왜 하나님은 공의로우신데 악인들이 번창하는지에 대해 납득할만한 설명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아하 그렇구나 하고 무릎을 치면서 깨닫게 되면 가슴이 뻥 뚤릴 것 같습니다. 아니면 '아이구 예레미야야. 내가 당장 가서 저 못된 놈들을 그냥그냥 뗏찌 뗏찌 해 줄께' 이런 다짐을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말이라도 이렇게 해 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위로를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내 니 맘 안다.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이리 오렴. 내가 한 번 안아 줄께. 나의 소중한 예레미야야! 사랑한다.'



그런데 예레미야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어떠했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 구절에 대한 메시지 성경의 번역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레미야야, 네가 사람들과의 경주에서도 이렇게 피곤해하면, 앞으로 말들과는 어떻게 경주하겠느냐? 평온한 시절에도 정신을 가누지 못하면 앞으로 고난이 홍수 때의 요단강처럼 물밀 듯 닥쳐올 때는 어떻게 하려느냐?”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은 사람들과의 경주에, 이후에 당할 어려움은 말과 경주하는 것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고향인 살해 위협을 하고 있는 아나돗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말은 장차 유다를 침략해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키고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가게 될 바벨론을 가리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고난이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처럼 몰려 올 때를 생각하면 현재 시기는 평안한 시기라고 불릴만 하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질문에 대해서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뿐 아니라 하박국 선지자도 물었고 시편 기자도 물었던 이런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속시원한 해답을 주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또한 이제는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는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제부터 고생의 시작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례미야를 위로하거나 보듬어 주시는 말씀 역시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이것도 못 이기면 앞으로 당할 어려움은 어떻게 이기겠느냐 책망하셨습니다. 지금 이 정도로 어렵다 힘들다고 투덜거리면 이 후에는 어찌하려고 하느냐며 오히려 반문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대답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어찌 보면 동문서답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참 매정하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꼭 훈련소 조교의 말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조교는 훈련병들에게 가끔 한 마디씩 물어 봅니다. "힘듭니까?" 여기서 '네 힘듭니다" 이러면 큰 일 납니다. 무조건 "힘들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신음 소리 내는 훈련병들에게 조교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번 코스는 여러분이 다음에 받을 훈련 코스에 비해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힘들다는 소리 하지 않습니다. 알겠습니까?" 우리에게는 훈련소 조교 같은 하나님은 별로 반기지 않는 마음이 있습니다. 훈련, 사명, 제자, 고난, 십자가, 자기 부인 이런 말들은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이런 메시지를 전하는 교회는 인기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달달한 하나님을 원합니다. 일주일 동안 지지고 볶고 힘든 세상살이에 지쳐서 예배에 오면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너는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이란다." 이렇게 입안에서 살살 녹는 생크림 케이크 같은 메시지를 원합니다. 그러나 계속 단 것만 먹으면 우리 몸이 망가지듯이 이런 달콤한 메시지만 받아 먹은 성도는 영적인 건강함을 잃어 버립니다. 아무 변화도 없고 성장도 없습니다. 다니엘 킴 선교사란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생긴 안 좋은 버릇이 있다.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불쌍한 사람인 줄 아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할 때도 죄를 지은 내 모습이 불쌍해서 울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슬퍼서 우는 법이 별로 없다. '하나님 제가 연약해서 이럴 수 밖에 없었어요.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이런 말을 하느라 바쁘다. 그래서 신앙 생활한 지 십년 이십년이 지나도 아무리 회개를 해도 삶이 바뀌지 않는다' '힘듭니다. 어렵습니다. 지쳤습니다' 우리가 이런 말들을 너무 쉽게 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지금이 내 인생 최고로 힘든 때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실지 모릅니다. "네가 사람들과의 경주에서도 이렇게 피곤해하면, 앞으로 말들과는 어떻게 경주하겠느냐? 평온한 시절에도 정신을 가누지 못하면 앞으로 고난이 홍수 때의 요단강처럼 물밀 듯 닥쳐올 때는 어떻게 하려느냐?”


앞에서 제가 훈련소 조교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28사단 신병교육대를 나왔는데 퇴소식을 하는 날 우리 중대를 담당했던 조교와 헤어질 때 눈물을 흘렸습니다. 너무 아쉽고 고마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조교가 원망스럽고 매정하게 보였습니다. 불평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훈련 과정을 통해 그때까지 가졌던 내 한계는 여기까지야 그 이상은 할 수 없어 라고 규정 지었던 것들이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조금씩 바뀌게 되었습니다. 조교가 만약 궁딩치 팍팍 쳐주면서 힘들지 힘드니까 그만해 했다면 결코 해 낼 수 없었던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해 내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참 놀랍고 신기했습니다. 조교가 제게 위로와 동정을 주지는 않지만 나를 성장시키고 변화시킨 사람이라는 점에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도 역시 우리가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훈련소 조교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는 군인이 되도록 훈련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고난이라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길 원하십니다. 사랑 깡통을 차고 구걸하는 우리에게 값싼 위로나 동정 따위를 주어서 자기 연민에 빠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성장하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의 사람은 쉽게 흔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당장의 일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을 비축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연민에 빠져 동정심을 구걸하는 모습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사람이란 절망의 땅 한복판 천릿길을 단숨에 내달리고도 그 이상을 견딜 수 있는 숨이 여전히 남아 있는 사람입니다.


요즘 우리 나라에는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헬조선은 Hell + 조선의 합성어로, 마치 지옥과도 같은 한국이라는 뜻을 담은 신조어입니다. 현대 대한민국이 옛 조선이나 큰 차이 없이 비슷비슷하게 형편없기에 헬조선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한국 사회가 근본적인 사회 문제로 인해서 너무 살기 어렵고 삶을 유지하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헬조선이라는 표현에 공감하기 시작하면서 널리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헬조선에서 탈출구는 이민 밖에 없다고들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저는 어떤 부분에서는 공감을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것은 너무 엄살을 떠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표현들이 너무 쉽게 현실에 절망하고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표현에 따르면 지금은 사람과 경주할 뿐인데 여기가 헬조선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나중에 우리 나라가 말과 함께 경주하는 더 힘든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2015년 그때가 천국이었지 응답하라 2015 이렇게 말하는 날이 올 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 떄가 오면 헬헬조선이라고 해야 합니까? 한국 교회의 상황이 어렵다 캠퍼스 선교가 너무 힘들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최악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최윤식 박사님이 쓴 한국 교회 미래 지도라는 책에 보면 앞으로 10년 안에 성도의 수가 400만명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이 분의 강연을 들었는데 이것도 많이 낙관적으로 본 수치라고 했습니다. 지금부터 힘들다는 소리를 많이 하면 앞으로 더 힘든 때가 왔을 때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나약해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더 강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공동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앞으로 지금보다 더 혹독한 고난의 시기를 겪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염려할 것이 없는 것은 우리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어떤 고통과 아픔이 와도 견딜 역량을 갖춘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함께 이렇게 고백해 봅시다. "하나님, 힘들다는 말은 그만 하겠습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끝까지 견뎌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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