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예레미야

온전한 개혁을 이루려면

이창무 2015. 4. 30.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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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개혁을 이루려면



본문))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렘 4:1-4)”


여러분은 12월 말일에 헬스 클럽에 가 보신 적이 있습니까? 거의 없으시겠지만 만약 가 보셨다면 거의 사람이 없어 텅 빈 모습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1월 첫날에 헬스 클럽에 가 보신 분은 적지 않게 있을 것입니다. 1월 1일은 헬스 클럽은 북적이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연말이 되면 기존의 삶에 대해 문제 의식을 느낍니다. 그리고 새해에는 다르게 살아야지 결심을 합니다. 습관을 바꾸고 새로운 삶, 멋진 삶을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또 다시 그 해 연말이 되고 보면 지난 해와 별로 달라진 것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데자뷰’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시감’이라고도 번역되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 언제가 한 번 본 듯한 장면이라는 뜻입니다. 매해 연말과 연초에 우리는 데자뷰를 경험합니다. 작년의 그 모습 그대로 어김 없이 올해도 재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올해만큼은 달라질 줄 알았는데 변하지 않은 모습에 실망감을 감출 수 없습니다.

몸무게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새해가 되면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새로운 결단을 많이 합니다. 안 나오던 새벽 기도를 꼬박 꼬박 나오겠다고 결심합니다. 매일 아침 마다 큐티를 하겠다고 작정하고 큐티 교재를 주문합니다. 한 동안은 잘 합니다. 그러나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말이 아닙니다. 짧게는 삼 일 길게는 삼 주를 넘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늘 실패하고 마는 것일까요? 우리의 삶은 왜 이렇게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 것일까요? 나름 애를 써 보는데 왜 내 삶에는 열매가 맺히지 않는 것일까요? 답답하고 한숨만 나올 뿐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


오늘의 본문인 예레미야서 4장 1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은 요시야 왕 통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요시야 왕은 남유다의 전무후무한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유명한 왕입니다. 요시야 왕이 즉위한 지 18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왕의 명령으로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되어 쇠락해진 성전의 수리를 진행합니다. 그 와중에 성전 깊숙한 곳에서 책 한 권이 발견됩니다. 그 책은 율법책 중의 하나였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 책이 모세 오경 중 ‘신명기’이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왕은 그 율법책을 왕의 앞에서 읽도록 명령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신명기 28장에는 복과 저주에 대한 선포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 전에 이스라엘이 복 받을 길과 저주를 받게 될 길에 대해 알려 주셨던 것입니다. 저주에 대한 선포를 듣고 있던 왕의 낯빛이 변하였습니다. 그 얼굴이 마치 죽은 이의 얼굴처럼 굳고 창백해져 버린 왕은 온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신명기에 경고한 저주 받을 행위를 지금까지 남유다 왕국이 하나도 빠짐 없이 다 저질러 버렸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다가 그야말로 성실하고도 꼼꼼하게 저주 받을 짓을 골라서 했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남유다가 참 남편되시는 하나님을 떠나서 더러운 창기처럼 우상 숭배를 한 죄악이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깨달았습니다. 패닉 상태에서 간신히 회복된 요시야 왕은 이제라도 저주의 운명에서 나라를 돌이켜 보고자 했습니다. 그는 온 나라에 걸쳐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성전에 있는 우상들을 끄집어내어 예루살렘 바깥으로 가져가서 불사르고, 심지어 그것을 가루로 만들어 시냇가에 뿌리기도 했습니다.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산당을 제거하고 우상숭배를 행하던 제사장들을 모조리 죽여 그 해골들을 제단 위에서 불사르는 등 서슬 퍼런 개혁을 시행하였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다가올 저주와 심판을 피해보고자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유다는 심판을 면했습니까? 정말 안타깝고 슬프게도 요시야 왕의 30년간의 개혁 정책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구원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요시야 왕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분명 진정한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요시야 왕이 죽고 나자 나라는 다시 우상숭배로 돌아갔습니다. 모든 것이 원점으로 되돌아 오고 말았습니다. 결국 남유다는 기원전 586년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유다 백성들의 길고 긴 타향살이가 시작되었습니다. 신명기의 저주가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다 역사상 요시야 왕만큼 철저한 개혁을 한 인물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절박하고 간절한 심정을 개혁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의 개혁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을까요? 왜 유다는 제 자리로 돌아오고 말았을까요? 우리가 정말로 변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집 나간 아들이 집에 돌아 왔습니다. 아들이 집에 돌아 온 이유는 두 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부모님과 화해하고 함께 살기 위해 돌아왔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호주머니에 돈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후자가 이유라면 이 아들은 곧 다시 집을 나갈 가능성이 큽니다. 그가 돌아 온 것은 집 생활이지 부모에게 돌아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돌아 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돌아가려면 하나님께 돌아가야지 하나님 집의 문화와 생활로 돌아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교회에는 교회만의 독특한 문화와 스타일이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말들도 있습니다. 처음에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면 이러한 모든 것들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마치 못 올 자리에 온 것 같아서 영 불편합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멀뚱멀뚱하게 지켜 보면서 눈치를 봅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닌 연수가 쌓이기 시작하면 적응이 되어 어느 순간이 되면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어떻게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는지 교회에서 힘 있는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일 수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교회 생활에 자신을 완벽하게 적응시켜서 싱크로 율이 백 퍼센트에 이를 정도가 됩니다. 그는 누가 봐도 모범 신자입니다. 그는 모든 예배와 모임에 참석합니다. 기도를 시키면 청산 유수처럼 술술 기도가 나옵니다. 성경 지식도 상당합니다. 전도도 열심히 해서 여럿을 데려 왔으며 항상 웃는 얼굴에 상냥하고 긍정적인 말을 합니다. 자기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우리 교회에서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사람을 꼽는다면 열손가락에 들 것임을 자부합니다. 그런데 그가 정말로 하나님께 돌아 온 사람일까요? 혹은 교회 생활과 문화에 가장 적응이 잘 된 사람이 아닐까요? 우리들은 신앙 생활의 겉모양들만 갖추고는 하나님께로 돌아왔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예배와 모임에 나오고 기도하고 성경 읽고 전도하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그저 좋은 일 정도가 아니라 꼭 필요합니다. 우리 선배들은 이런 것들을 은혜의 방편이라고 불렀습니다. 은혜의 방편을 통해 은혜가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은혜의 방편들을 열심히 의지하는 듯이 보이지만 정작 그 목적이 되는 은혜는 전혀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밖에서 보는 모습과는 달리 얼마든지 하나님이 그 마음에 없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대신 자기 만족을 양식으로 삼아 신앙 생활의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완벽해 보이는 신앙 생활을 껍데기로 하여 그 속에는 얼마든지 추악하고 더러운 죄악의 찌끼들을 감추어 놓을 수 있습니다. 신앙의 형식이 회복되었다고 온전한 회복이 이루어졌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회복은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로 돌이키는 것이 아닙니다.

요시야 왕의 개혁이 가진 한계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요시야 왕의 개혁은 위로부터의 개혁의 전형이었습니다. 왕 한 사람이 가장 절박합니다. 신하들은 왕이 저토록 절박하게 개혁을 추진하는데 반대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왕에게 충성하고 인정 받기 위해 왕을 따라 개혁을 추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정부가 추진하는데 백성들이 반기를 들기는 어렵습니다. 왕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사실이 자명한데 여기에 따르는 시늉이라도 해야 합니다. 물론 모든 이런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왕의 개혁 정책에 마음으로부터 지지하고 열렬히 추종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였습니다. 다수는 그들의 겉모습과 생활을 하나님을 따르는 삶의 모습으로 바꾸었으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사례뿐 아니라 역사에 있어서 위로부터 개혁이 가진 한계는 자명합니다. 위로부터 개혁은 단기간을 보면 가시적인 개혁의 성과물이 나타나는 듯 보이지만 곧 구심점을 상실한 후에는 반동 개혁의 위협에 직면하고 맙니다. 전 시대의 개혁의 성과물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마치 전혀 개혁이 없었다는 듯이 과거로 회귀하고 맙니다. 우리 본성에 뿌리 박고 있는 죄의 영향력은 이렇게 강력합니다.

 당신은 교회로 돌아왔습니까?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까?

 당신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신앙 생활하고 있습니까? 마음 속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신앙 생활하고 있습니까?

 당신은 개혁 당할 것입니까? 개혁할 것입니까?


묵은 땅을 갈아 엎어라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농부는 날마다 땀 흘려 일해야 하는 농사일을 더 이상 하기 싫었습니다. 마침 도시에 갔던 친구로부터 도시에 좋은 일 자리가 있으니 와 보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농부는 그 즉시 자기 밭을 내팽개쳐 두고 부푼 꿈을 안고 도시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도시에서 삶은 생각만큼 녹녹하지 않았습니다. 살인적인 물가에 주택난에 아무리 일을 해도 좀처럼 살림은 펴지지 않았습니다. 마침낸 그는 도시를 떠나 귀향을 결심했습니다. 오랜 만에 돌아와서 보니 방치되었던 밭이 엉망이 되어 있었습니다. 밭에는 가시덤불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흙의 상태는 최악이었습니다. 단단해질 대로 단단해 져서 씨앗을 뿌려 봐야 자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농부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당연히 먼저 가시 덤불을 제거하고 딱딱해진 밭을 쟁기로 갈아 엎어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그 후에야 파종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주시는 두 번째 말씀입니다. “나 여호와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3)”

성경에서 우리 마음은 종종 밭에 비유되곤 합니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비유는 바로 예수님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일 것입니다. 그 비유에서도 가시덤불과 돌밭이 등장합니다. 이 역시 씨가 자랄 수 없는 밭, 열매 맺을 없는 밭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 밭은 처음부터 좋지 않은 밭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애초부터 밭이라고 불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전에는 분명 좋은 밭이었을 것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어 농부에게 수고한 보람을 느끼게 해 주었던 고마운 밭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생명을 탄생시킬 능력을 상실한 죽음의 밭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밭이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된 묵은 밭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도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면 묵은 마음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과거에 우리 마음에서 좋은 열매를 맺었던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첫 사랑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때 우리 마음은 살처럼 부드러웠고 예수님과의 사랑의 꽃이 피었었습니다. 성경이 깨달아지고 영안이 열리는 경험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사모하여 성경 읽기를 즐거워하고 설교 시간과 사경회를 사모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지도록 기도하는 가운데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 듯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군대에 갔던 때였을까요? 직장 생활을 시작했던 때였을까요? 결혼 한 이후부터일까요? 이제는 언제부터인지 잘 기억나지도 않는 그 때부터였습니다. 마음이 방치되기 시작했습니다. 첫 사랑이 식었습니다. 신앙 생활이 매너리즘에 빠졌습니다. 성장이 멈추었습니다. 삶에 변화가 사라졌습니다. 성숙도 없고 열매도 없습니다. 이제 가장 큰 관심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집 장만, 자녀 교육, 노후 보장, 건강 등이 최대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가시덤불은 소리 없이 들어 와서 자랍니다. 어느 날 갑자기 땅이 단단해지지 않습니다. 관리를 안 하고 내버려 둔 매일 매일 조금씩 조금씩 상태가 안 좋아집니다. 당장 큰 일이 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무심하게 지나치기 쉽습니다. 다만 문득 문득 이것은 아닌데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들 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교회에서 이리 저리 돌리는 프로그램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아버지 학교에 개근을 하면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요? 제자 훈련을 받으면 달라질 수 있을까요? 그러나 묵은 땅을 갈아 엎고 가시 덤불을 제거하기 전에는 파종하는 일이 아무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프로그램이 없어서가 문제가 아닙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묵은 땅이 된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이 묵은 땅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은 우리에게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례는 살을 베어내는 일입니다. 당연히 아프고 피가 납니다. 아파도 매우 아픕니다. 그래도 베어내야 합니다.  신약 성경 사도 행전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 말은 당시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입니다. 이방인 중에서 유대교에 관심을 가지고 회당 예배에 나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일부는 정식으로 할례를 받고 개종을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심정적으로는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에 공감하면서도 차마 할례를 행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만큼 할례가 고통스럽고 위험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선교 여행에서 가장 열렬하게 바울의 복음 전파에 반응한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할례가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 이전에 이미 예레미야서에서 바울과 동일한 선언이 있음을 확인합니다. 이미 구약 시대에도 살가죽을 베는 할례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마음의 할례입니다. 생살을 베는 듯한 아픔이 있을지라도 마음에서 잘라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분수를 넘어 무한대로 확장하고자 하는 탐욕이 그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고 경배하기 보다는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야망이 그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없으면 내가 꼭 죽을 것만 같습니다. 잘라내고 나면 나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잘라내야 합니다. 잘라내지 않고서는 묵은 땅은 갈아 엎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시덤불을 방치하고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영역 속에서 할례가 먼저 행하여지지 않고서는 백약이 다 무효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시야 왕의 개혁이 왜 결국 열매 맺지 못했는지 그 원인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요시야 왕은 백성들 앞에서 율법서를 낭독하게 하고 그들의 우상 숭배 관행을 척결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요시야는 이 일을 하기에 앞서 먼저 백성들의 마음을 갈고 부수어야 했습니다. 오랜 시간 우상 숭배적인 사고 방식과 반응 체계로 굳어진 백성들의 마음에 할례를 행해야 했습니다. 아마도 요시야 왕은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임박한 진노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우선 당장 눈에 보이는 모습이라도 바꾸어야 한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누구도 이런 요시야에게 함부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댈 자격은 없습니다. 요시야는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어찌할 수 없던 한계가 있었던 사실 또한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새 언약


많은 개혁자들이 개혁을 시스템의 문제나 제도의 문제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시스템이나 제도를 바꾸면 세상이 달라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분명 그들의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시스템도 바꾸고 제도도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나 시스템이나 제도가 만능은 아닙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마음의 변화 없이는 그 어떤 제도나 시스템의 개혁도 결국 제 자리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신앙의 개혁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개혁, 교회의 개혁을 외치지만 왜 항상 제자리만 맴도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요? 마음의 변화가 없이 겉모습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묵은 땅을 내버려 둔 채 씨를 뿌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마음의 변화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지만 마음 먹은 대로 마음이 따라주지 않은 큰 일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마음 먹으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 먹은 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요시야의 실패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요시야 왕의 개혁이 가진 한계는 예레미야로 하여금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친히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일하실 것이라는 비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옛 언약을 계승하면서도 그 한계를 뛰어 넘는 새 언약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31:31-34)”

 옛 언약은 주의 법을 돌판에 기록했으나 새 언약은 마음 속에 기록합니다.

 옛 언약은 주를 아는 자가 희귀했으나 새 언약은 큰 자부터 작은 자까지 다 주를 알게 됩니다.

 옛 언약은 심판과 유배라는 결말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으나 새 언약은 용서와 회복을 가져다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언약이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 속에 기록합니다. 이 일을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내주하시면 우리 마음의 변화를 이끄십니다. 성령님은 말씀이라는 쟁기를 통해 우리 묵은 마음을 새롭게 엎으시고 가시덤불과 같은 죄악들을 깨끗하게 제거하십니다. 우리는 너무 지나치게 패배주의에 함몰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 번 실패와 좌절을 겪다 보니 이제는 아마 해도 안 될거야 라고 지레 겁을 먹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마음의 변화는 없어. 사람은 변하지 않아. 괜히 희망 고문을 당하느니보다는 시도를 하지 않는 편이 더 속 편해. 이렇게 스스로에게 속삭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예레미야가 그토록 성취를 갈망했던 새 언약의 시대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한 사람은 날마다 죽고 날마다 새롭게 다시 태어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현존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에게 묵은 땅과 가시덤불은 더 이상 없습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아 새 살이 돋아 나는 놀라운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서 맺으시는 열매들이 우리 앞에 때를 기다리면서 익어가고 있습니다. 이 일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바로 당신에게서 주님께서 이루시고자 계획하신 일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의지하면서 성령님을 통해 마음의 변화를 받아 우리들의 삶 속에 풍성한 열매를 맺는 복된 인생을 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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