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예레미야

요나답과 레갑 족속

이창무 2015. 4. 30.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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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답과 레갑 족속


말씀 / 예레미야 35장

요절 / 예레미야 35장 14, 15절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그의 자손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 한 그 명령은 실행되도다 그들은 그 선조의 명령을 순종하여 오늘까지 마시지 아니하거늘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끊임없이 말하여도 너희는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도다 내가 내 종 모든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고 끊임없이 보내며 이르기를 너희는 이제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켜 행위를 고치고 다른 신을 따라 그를 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가 너희와 너희 선조에게 준 이 땅에 살리라 하여도 너희가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일본에는 ‘곤고구미’라고 하는 목조건축공사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가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회사의 창립년도가 578년입니다. 무려 1437년이 된 회사입니다. 조상 대대로 물려 준 가업을 이어 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조상에게 물려 받은 경건을 가업으로 이은 한 가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믿음의 장인 가문을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레미야 35장은 남유다 왕국의 왕 여호야김 때의 이야기입니다. 여호야김 왕 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1차 침공이 있었습니다. 이때 다니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시대는 나라가 점점 멸망을 향해 기울어져 가는 시대였습니다. 2절부터 4절을 보십시오. 예레미야는 레갑 족속의 모든 사람들을 여호와의 전의 방 한 곳에 모아 그들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 때 레갑 족속의 사람들은 선지자 예레미야의 권유를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레갑 족속은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우리들의 조상 요나답이 포도주를 금했고 집도 짓지 않고 포도나무도 심지 말고 오직 장막에 거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길이 살게 하실 것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나실인의 서약을 한 자들은 그 규정을 따라서 포도주를 마시면 안 되었고 포도나무를 심어서도 안 되었습니다(민 6:1~21). 집을 짓지 말고 장막에 계속 거하라는 율법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나실인 규례는 나실인으로 서원한 사람의 인생에게 적용되는 규례입니다. 그의 가족과 후손이 다 그런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성경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레갑 족속의 조상이었던 요나답이 왜 후손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을까요? 요나답이 이런 명령을 후손들에게 준 것은, 경건을 지키고 살아가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포도주를 피하라는 명령은 어떤 뜻이었겠습니까? 한 마디로 매사에 절제하며 살라는 말이었습니다. 나실인에게 포도주를 먹지 말도록 규례를 정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지만 나중에는 물이 사람을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 무한도전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여섯 번째 멤버를 찾는다는 식스맨 프로젝트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프로젝트를 하게 된 이유는 전 멤버였던 노홍철씨와 길씨가 음주운전을 하다가 적발을 당해 프로그램에서 하차했기 때문입니다. 술을 적당히 즐기는 것은 죄가 아니겠지만 술을 마시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한계를 넘게 되고 그 결과 경건한 삶에서 멀어지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집과 소유물을 가지지 말도록 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탐욕을 멀리하도록 한 이유가 가장 컸습니다. 자기 집이 있으면 자꾸만 집에 대해서 욕심이 나기 마련입니다. 20평에 살명 30평에 살고 싶고 30평에 살면 40평에 살고 싶고 점점 끝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돈 욕심에 눈이 멀어 경건한 삶을 살기 보다는 돈 버는 일에만 집중하게 되기 쉽습니다. 요나답은 북이스라엘 왕 예후 때 사람입니다. 예후가 오므리 왕조를 멸망시킨 후 바울 숭배를 뿌리 뽑는 일에 동역했던 사람이 바로 요나답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열심과 경건이 있었던 요나답은 자기 후손들이 이렇게 절제하면서 탐욕에 빠지지 않고 경건하게 살기를 바라고 금주와 장막 생활이라는 두 규례를 후손들에게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그리고 나서 수백 년이 지났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다고 했고 30년이 한 세대라고 보면 족히 열 세대 이상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지금부터 300년에 우리 나라는 장희빈으로 유명한 숙종 임금이 통치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때와 지금은 얼마나 많이 달라졌습니까? 그런데  레갑 족속은 놀랍게도 이때까지 그들의 경건한 조상 요나답의 말대로 행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포도주를 권하는데도 불구하고 레갑 족속들은 단칼에 거절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원래는 광야에서 천막을 치고 살고 있었는데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오자 이때는 보다 안전한 곳인 예루살렘으로 잠시 이주해 왔을 뿐입니다. 수백년을 한결같이 조상인 요나답의 말을 한 치도 흐트러짐 없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 레갑 족속과 비슷한 사람이 현대에도 있습니다. 혹시 아미쉬 공동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미국에 가면 아미쉬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이 지역에는 재세례파의 후예들이 한곳에 모여 살고 있습니다. 재세례파란 종교 개혁 당시 좀 더 급진적이고 과격한 종교 개혁을 지향했던 사람들입니다. 재세례파는 신약의 본문들을 문자적으로 곧이곧대로 지켜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미국에 건나와 정착한 곳이 아미쉬입니다. 아미쉬 사람들은 전혀 전기를 쓰지 않습니다. 전등이 없고 램프로 불을 켜고 당연히 티브이도 없고 스마트폰도 쓰지 않습니다. 자동차를 이용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마차를 타고 다닙니다. 옷도 16세기, 17세기 풍의 옷을 입고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반드시 성경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미쉬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조상들이 남겨 준 전통을 수 세기 동안 고수해 오고 있습니다. 이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순종이 철저합니다. 아미쉬 공동체에 외부에서 온 한 남자가 총기를 난사하여 5명의 아이들이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때 아이의 부모들이 범인을 용서하고 자살한 범위의 가족을 위로해 주었던 사건은 매우 유명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레갑 족속의 이야기를 드러내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듣지도 않고 불순종하는 유대의 백성들의 악함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예레미야에게 레갑 족속의 순종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레갑 족속과는 대조적으로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할 생각이 없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레갑 족속은 인간 조상의 말도 수백 년 동안 어김없이 지키고 살아왔는데 유다 백성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들로서 이토록 지속적으로 불순종할 수 있습니까? 바로 앞 장인 34장에서 보여준 유다 백성의 순종의 수준을 생각해 보면 참 답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레갑 족속의 조상인 요나답은 역대기에서 여호나답이라고도 불리는 사람입니다. 요나답은 본래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겐 족속 사람입니다. 겐 족속은 모세의 장인인 이드로와 관련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었지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이드로로 함께 들어온 족속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했던 잡족이라는 불리는 부류에 넓게 보면 속하는 민족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도 아닌 겐 족속 출신 레갑 족속 사람들은 이처럼 신실한데 정작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레갑 족속 사람들을 부각시키신 것입니다. 18절과 1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조상의 경건한 명령을 지키고 살아가는 레갑 족속을 축복하시면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축복하십니다.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나라의 멸망이 코 앞에 닥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레갑 족속에게 특별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순종이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신실한 순종이었습니다. 레갑 족속이 그 조상 요나답에게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신실한 순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은 실패했습니다. 실패한 결과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칠십년 동안 이방 땅에서 유배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같이 여긴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레갑 족속에 대해서 이 본문 외에 특별히 성경에 언급된 적이 없습니다. 레갑 족속은 겐 족 출신이라 수도 적고 사회적 영향력도 미미했습니다. 또 광야에서 이동 생활을 했기 때문에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알지 못했을 이 경건한 믿음의 가문을 하나님은 보고 계셨습니다. 레갑 족속의 경건을 깊이 인정하고 계셨습니다. 우리의 경건도 그렇습니다. 불경건한 시대의 사람들은 신자의 경건함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경건함을 귀한 가치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웃을 뿐입니다. 요즘 캠퍼스는 너도 나도 남친 여친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성 친구가 없는 사람은 모태 솔로라고 부르면서 놀림감이 됩니다. 어디엔가 문제가 있는 사람 취급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임은 정혼을 하기 전까지 이성 교제를 하지 않고 제자로 훈련 받고 성장하는 일에 집중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제가 관찰해 보니 우리 뿐 아니라 청년 사역 캠퍼스 사역을 하는 곳은 어디에나 이런 원칙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학생 리더들이 학교 생활 하다보면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시대가 많이 변했으니 이제는 변한 시대에 맞추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롭게 이성을 사귀고 연애하면서 과연 제자로서 훈련 받고 성장할 수 있으며 또한 영적인 분위기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임의 조상들은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이성 간 교제를 하지 않도록 당부를 했었던 것이고 이후 지금까지 우리는 잘 지켜 오고 있습니다. 이런 몸부림에 대해 세상은 이해할 수 없고 인정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불경건한 시대에 사람들의 기준으로 믿음 생활을 한다는 것은 악한 움직임 속에 묻혀서 흘러가는 것이 될 뿐입니다. 레갑 족속을 기억하고 그들의 경건한 조상 요나답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레갑 족속의 조상 요나답이 경건의 기준을 높이 세우고 자신 만이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그것을 요구한 것은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오늘날에도 그런 경건의 열망과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 믿음의 가문, 믿음의 순종을 하나님은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는 어떤 순종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이 불경건한 시대에 레갑 족속과 같이 되고 싶고 그런 교회와 가문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우리는 요나답과 같은 조상이 될 수 있을까요? 본문은 불경건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이름을 기억하라고 도전합니다.


우리가 그 때 그 때 마지못해 하는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시대를 거슬러 갈 수 있는 믿음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순종하게 하시고 인생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같이 여기고 살게 하여주시길 기도합니다. 레갑 족속의 조상인 요나답처럼 경건을 최상의 가치로 알고 자녀들을 가르치며 그런 가문을 이루는 은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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