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창무 2015. 4. 30.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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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말씀 / 마가복음 2:1-17

요절 / 마가복음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세상 모든 것을 얻어도 건강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온 몸이 건강하고 멀쩡한 사람인데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한 삶을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조건을 다 갖추었지만 내면은 허무와 고독으로 신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물으면 나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해답은 오늘 본문 말씀 속에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삶에서 벗어나 늘 생명력이 넘치는 건강한 인생을 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I.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1-12)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셔서 천보산 아래에 계시다는 소식이 자유 게시판에 떴습니다. 이를 클릭해 본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계신 집으로 모여들어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야후 국어사전에 따르면 용신이란 한 몸이나 겨우 넣는다는 뜻으로 방이나 장소가 몹시 비좁음을 이르는 말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용신도 못할 정도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밤낮 컴퓨터게임만 하다가 학사경고를 받은 사람, 여자친구에게 채인 뒤 날마다 술로 지새는 사람, 카드 빚이 쌓여 숟가락까지 차압당한 사람 등등 갖가지 종류의 문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셨습니다. 도(道)라고 하면 우리는 "인상이 참 좋으십니다. 혹시 도에 관심 있으십니까?"하면서 종로에서 피싱하는 도인들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여기서 도란 "The word",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생들이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참된 길을 제시해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문제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당장의 현실적인 도움보다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절실히 필요함을 보시고 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이 때 어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상에 누인 채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님께로 데려왔습니다. 중풍병은 현대의학용어로는 뇌졸증이라 부릅니다. 뇌졸증은 뇌소동맥이 파열되어 뇌 속에 출혈을 일어나거나 뇌의 동맥 속에 핏덩어리가 막혀서 혈액이 거기서 더 흘러갈 수 없게 되었을 때 발병합니다. 그 증세는 처음에 혼수상태가 따르다가 요행히 깨어난다 해도 후유증으로 반신불수가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일단 마비가 오면 얼굴이 수축되어 흉하게 일그러지고, 혀는 마비가 온 쪽으로 굽어져서 언어가 명확하지 못하게 됩니다. 관절은 굽고 늘어나 뒤틀리고, 심하면 온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가버나움 대학에는 유명한 5인조 댄스 동아리, 즉 University Dance Fellowship이 있었습니다. 본문의 중풍병자는 본래 이 동아리의 리더로서 헤드스핀 같은 고난도의 동작이 탁월해 인간 팽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갑자기 풍을 맞아 쓰러져 반신불수의 신세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 의원인 허 준 선생에게 진맥을 받아 우황청심원, 지보단, 성향정기산으로 처방받고 침구요법도 병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음이온 원적외선 자기초점방사시스템 영구자석치료기 일명 신비의 제니센으로 치료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는 화려한 댄스는커녕 걸을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날마다 눈물과 한숨으로 지내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다른 네 명의 멤버들은 어느 날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시라면 이 친구를 온전케 하실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서둘러 중풍병자를 침상에 뉘었습니다. 그들은 무더운 날씨에 비지땀을 흘려가며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이 계신 곳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중풍병자는 친구들에게 말했습니다. "느그들 고생시켜서 정말 미안하데이"네 친구는 말했습니다. "친구끼린 미안한 거 엄따"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가까스로 도착해 보니 인산인해를 이룬 무리들로 인하여 도저히 예수님께 데려갈 수 없었습니다. 침상을 준비하느라 시간을 지체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그들은 여기서 포기하고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후일을 기약하고 3보 전진을 위해 2보 후퇴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었습니다. 당시 가옥구조를 보면 옥외에는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붙어 있었고, 지붕에는 막대기를 걸친 후에 나뭇가지나 갈대 같은 것을 깔았습니다. 따라서 약간의 도구만 있으면 집안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게 구멍을 뚫을 수가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중풍병자의 누운 상의 네 귀퉁이에 끈을 달아 구멍을 통해 예수님의 머리 위로  침상 채로 내렸습니다. 집 안에서는 사람들이 숨소리도 죽여가며 예수님의 말씀에 귀기울여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위로부터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잠시 후 사각사각 밧줄이 긁히는 소리가 나면서 침상 하나가 공중에서부터 내려왔습니다. 이 얼마나 황당하고 엽기적인 광경입니까? 사람들은 위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이런 예의도 법도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나" 하며 비난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저들의 행위가 주거 침입죄인지 재물 손괴죄인지 논쟁을 벌였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나타난 그들의 행위만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을 보셨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저희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내면의 동기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모든 역경을 뚫고 중풍병자의 상을 달아 내릴 수 있었던 원동력이 믿음임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심히 기뻐하시고 그 믿음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소자란 스승이 제자가 귀여워서 친근하게 부르는 말입니다. 온 몸이 뒤틀린 채 침을 흘리며 침상에 누워있는 중풍병자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호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자야!" 하시며 중풍병자의 병든 모습을 있는 모습 그대로 따뜻하게 영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의 병을 치료하시기 전에 먼저 죄 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이 말씀은 얼핏 보아서는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중풍병자에게는 병을 낫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중풍병자에게 더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는 병이 낫는 것 보다 죄 사함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몇 가지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사람을 못쓰게 만드는 것은 중풍병이 아니라 죄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중풍병과 같은 장애인들은 틀림없이 불행할 것이라 믿지만 이는 편견과 선입감에 불과합니다. 지난 5월 25일 등반 성공률이 10%에 불과한 세계최고봉 에베레스트산이 한치 앞도 못 보는 맹인인 에릭 웨이언메이어에 의해 정복되었습니다. 에릭은 유아기에 안질을 앓아 13세 때 완전히 시력을 잃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시각장애인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를 찾는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코네티컷주 레슬링 고교대표에 발탁된 데 이어 장거리 사이클·마라톤·스카이다이빙·스킨스쿠버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습니다. 마침내 에베레스트를 정복함으로써 아직도 시각장애인의 한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정말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중풍병과 같은 장애가 아니라 중풍병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고대 여학생과 미팅하는 남학생은 3대 바보 중에 하나라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다 옛말입니다. 요즘 고대 여학생들은 연예인 빰칠 정도의 미모를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남학생들도 대부분 잘 생기고 키가 크고 매너도 좋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는 이들이지만 실상은 중풍병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중풍병적인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중풍병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매사를 부정적으로 봅니다. 해도 안 돼, 하나마나야, 아예 포기하는게 좋아 이런 말들을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는 잘 안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제대로 못한다고 불평과 원망을 잘 합니다. 공부는 쥐꼬리만큼 하고 학점이 안 나오면 자유게시판에 익명으로 교수님을 헐뜯습니다. 더 나아가 학점이 잘 안 나온 건 돌 머리로 낳아주신 부모탓이고, 취직을 못하는 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라며 자기도 모르는 말을 합니다.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을 땐 애매한 조상 탓을 합니다. 밤새도록 게임을 하고 해가 중천에 떠서야 겨우 일어나기도 합니다. 게임 속에서는 어떤 적도 물리치는 초고수급이지만, 현실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인생을 삽니다. 레포트를 내도 자기 힘으로 내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잘하는 사람에게 빌붙어서 베께서 낼 궁리만 합니다. 요즘 남자 중에는 어떻게 하면 잘 나가는 누나를 꼬셔서 안정된 백수 생활을 할 수 없을까 궁리하는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남자도 아닙니다. 이렇게 중풍병적인 삶을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내면에 역사하는 죄 때문입니다. 죄는 마치 혈관 속에 쌓이는 노폐물과 같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할 때마다 쌓이고 쌓인 죄가 마침내 혈관을 터지게 하고 온 몸을 마비시킵니다. 일단 죄로 인해 중풍병적인 삶을 살게 되면 도저히 우리 힘으로는 일어설 수 없게 됩니다. 때로 술에 취하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깨어나면 변한 건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는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마음속으로 다짐을 해 보지만 팔다리는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다짐을 하고 맹세를 하고 혈서를 쓴다고 해서 죄가 없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개척적이고 생명력이 넘치는 건강한 인생을 살기를 원하다면 반드시 먼저 죄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사죄의 권세자가 되십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실로 놀라운 사죄의 선포입니다. 이는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아 온 중풍병자에게 무죄를 선고하심으로 그를 얽어매고 있던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 나가면서 알게 모르게 많은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죄의식에 시달리며 고통합니다. 사람들은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몰래 많은 노력을 합니다. 지은 죄를 씻기 위해 선행을 베풀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죄는 밥먹듯이 짓고 선행은 가뭄에 콩나듯이 하기 때문에 도로아미타불이 됩니다. 노력을 해도 안되니까 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비슷한 상황을 만나면 죄의식이 되살아나 미칠 것만 같습니다. 요즘 '인터넷 고해소'라는 고해성사 사이트가 화제입니다. 이 사이트에서는 죄를 용서받으려면 '용서해 줘'메뉴를 클릭하고 자기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또 용서받기 원하는 사람의 수를 입력해야 합니다. 이 글을 읽고 용서하기 메뉴를 클릭한 네티즌의 수가 용서받기 원했던 사람의 수를 넘기면 죄사함을 받고 용서받은 글로 등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천만이 하나같이 '용서하기'를 클릭한다 해도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되지 않습니다. 죄는 사람들이 용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내가 비록 사람들에게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 범죄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51:4절에서 "내가 주께만 범죄하였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불행한 인생을 살고 나중에는 죄의 삯으로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죄 문제는 우리 인간의 힘이나 노력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는 오직 사죄의 권세자 되시는 예수님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기 때문에 유일한 사죄의 권세자가 되십니다. 내가 할 일은 다만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 진실된 고백을 통해 죄의 짐을 내려놓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과거 어떤 죄를 지었든지 예수님은 소자야 하시며 영접하시고 죄사함을 선포해 주십니다.

 셋째로, 죄사함을 받을 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 졸고 있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 잠이 깨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의논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참람이란 신성모독죄를 범했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서기관들의 생각은 틀린 생각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본체가 하나님으로서 능히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님께서 곧 관심법으로 다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사실 이 둘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모두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인자란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신 호칭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증명하시기 위해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이 말씀이 떨어지자 마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좀 전까지 꼼짝도 못하던 중풍병자가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는 자기가 누웠던 상을 들고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당당히 자기발로 걸어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감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시자 중풍병자의 팔다리에 힘이 생기고 스스로 일어섰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예수님께 죄를 사함 받으면 전혀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나병환자에다 맹인이기도 한 양재평이란 분이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남달리 총명하여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중학교 1학년 때 판검사의 꿈을 안고 열심히 공부하던 중 나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다 그는 나균의 시신경 침투로 26세 때에는 실명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의 꿈이 깨어짐은 물론,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저주스러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환자들만이 사는 여천 애양원에서 예수님을 만나 죄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나병은 '저주받은 천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임을 굳게 믿고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문둥병으로 인한 구부러진 손가락 때문에 점자를 해독할 수 없어 동료들이 들려주는 성경을 외우는 일에 몰두하여 지금은 신약 성경 27권을 모두 외우게 되었습니다. 또 장님으로서 신학교에 입학하여 수석 졸업과 함께 전도사 시험에 합격하여 지금은 전도사로서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내면의 죄 문제가 해결되면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죄사함의 은혜가 임할 때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깊은 운명주의의 삶을 살던 자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열등감과 비교의식 가운데 살던 자가 자존감을 회복하고 활기찬 삶을 살게 됩니다. 무기력한 삶을 살던 자가 도전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어두운 생각으로 인해 얼굴이 시커멓던 자가 환한 미소를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피 공로를 의지하여 나오기만 하면 죄사함을 받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통해 죄사함받고 변화된 새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중학교 때 제 별명은 쿤타킨테였습니다. 쿤타킨테는 당시 유명했던 미니시리즈 '뿌리'에 흑인 노예로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이었습니다. 이는 제 피부가 유달리 까무잡잡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에 상처를 받아 얼굴까지 컴컴해지고 지극히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담임선생님은 단지 연합고사 성적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저를 반장에 임명하셨습니다. 저는 대걸레자루, 슬리퍼, 부러진 의자 등 갖가지 생활 속의 도구로 체벌을 아끼지 않으시는 선생님들, 가방에 회칼을 넣어가지고 다니는 조폭 같은 친구들 모두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급우들이 화장실에 담배를 피울 때는 밖에서 망을 봐주었습니다. 그 후엔 몰래 교무실로 가서 흡연자 리스트를 담임에게 고해바쳤습니다. 저는 무능반장, 어용반장으로 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한심한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이 지경이 된 원인이 머리가 든 것이 없어 판단기준도 없고 소신도 없기 때문이라 여겨졌습니다. 이때부터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열심히 철학과 사상 서적을 탐독했습니다. 그러다 대학교에 와서 사회주의사상을 접하고 이것이야말로 진리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습니다. 밤새워 사회주의 투사들의 전기를 읽으며 진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시위 대열에 함께 할 때는 나도 투사가 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90년대 들면서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고 사회주의 실험은 실패였으며 거대한 허구였음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꿈과 이상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리는 큰 충격을 받고 허탈감에 빠졌습니다. 애초부터 삶에는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다 허무했습니다. 의미 없는 학교수업은 자진 폐강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학사경고를 두 번 연속으로 먹고 학교를 휴학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일어나고 싶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빨리 죽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달리는 자동차를 보면 그 앞으로 뛰어들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습니다. 저는 살았으나 이미 죽은 자와 같았습니다. 목자님들은 이런 저를 침상 채로 메어 95년 부활절 수양회에 데리고 갔습니다. 이상하게도 그해 부활절 수양회는 부활보다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수양회 주제였습니다. 거기서 저는 세상과 자기만 바라보던 눈을 들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인본주의 사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대적했던 저의 교만의 죄 때문에 피흘리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실까 의심했던 저의 죄를 대신 지시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무서운 형벌을 받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죄사함의 음성은 일순간 저의 내면에 역사하던 모든 죽음과 허무의 세력, 어두움의 그림자를 말끔히 몰아내었습니다. 죄사함을 받자 저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수양회 얼마 후 군에 입대하였습니다. 주의의 모든 사람들은 제가 무기력하게 군생활하다가 맞아 죽거나 굶어 죽지 않을까 매우 염려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맞아 죽지도 굶어 죽지도 않았을 뿐 만 아니라 오히려 여단장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그냥 용사도 아닌 왕용사라고 새겨진 금메달과 표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99년 2학기에는 3년 8개월 간의 안정된 직장생활을 접고 선교사의 길을 개척하고자 고대 컴퓨터 학과 3학년에 편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름만 3학년이었지 저는 인문계 출신인데다 프로그래밍 기초가 전혀 없어서 1학년보다도 실력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2년 내 졸업하기 위해서는 모든 과목을 다 전공과목을 꽉꽉 채워서 들어야 했습니다. 저는 학과 공부 앞에서 저의 현실이 중풍병자보다도 더 무기력하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께서는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저는 이 말씀을 단순히 믿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정말로 팔다리에 힘이 생기고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일어난 정도가 아니라 뛰어다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전학년 평균평점 4.3을 받게 되었고, 입학금만 한 번 내고 모두 성적 최우수 장학금 받고 졸업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공부 뿐 아니라 꾸준히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에스라 요회의 요회 목자로서 목자 생활에서도 승리케 하셨습니다. 죄사함의 은혜는 폐인과 같은 인생을 살던 저를 변화시켜서 믿음의 왕용사가 되게 하였습니다. 사죄의 권세자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제가 고대와 전 세계 캠퍼스 가운데 과거 저와 같이 허무로 병들어 무기력한 인생을 사는 자들의 목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II. 세리 레위를 부르신 예수님 (13-17)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셨습니다. 많은 무리가 또다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레위는 마태복음의 저자인 마태의 본명입니다. 레위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세무직 공무원이지만 당시 세리는 공무원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제국은 방대한 제국에 세금 징수 업무를 일일이 공무원을 파견해서 맡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각 지역에서 입찰을 실시해 가장 큰 금액을 제시한 사람을 세리로 선정하여 세금 징수권을 맡겼습니다. 세리는 약속한 금액을 먼저 바친 다음 세금을 걷었기 때문에 이보다 적게 걷으면 손해를 보고 더 많이 거두어들이면 들일수록 더 큰 이익이 돌아왔습니다. 따라서 세리들은 세법을 멋대로 해석해서 혹독하고 무자비한 갈취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피지배민족인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세리들은 로마에 빌붙어 동족의 고혈을 빨아 제 잇속이나 챙기는 매국노요 민족 반역자였습니다. 때문에 당시 세리들은 이방인이나 창기와 한 통속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이들은 재판정에서 증언할 자격도 없었으며 회당에 입장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고 세리의 돈은 연보로 받아주지도 않았습니다. 

 레위는 왜 천대받는 세리가 되었을까요? 그도 젊은 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이웃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존경받고 사랑받는 삶을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IMF 때 아버지가 실직한 후 레위는 등록금을 낼 수 없어 휴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외도 하고 밤새워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했지만 월세를 내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습니다. 레위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안정된 장래를 확실하게 보장해줄 수 있을 것 같았던 '돈'을 택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는 이왕 돈을 벌기로 한 만큼 양심이나 명예심는 땅에 묻어버리기로 했습니다. 악질적인 세리가 되어 허기진 동족의 피를 빨았습니다. 이렇게 번 돈으로 다시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하여 최적의 포트폴리오를 구성 거액의 현금을 벌어 들였습니다. 이 돈으로 넓은 정원이 딸린 대저택을 구입하고 벤츠승용차도 굴렸습니다. 이제 행복의 조건은 다 갖추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레위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레위는 마음 한 구석이 마치 뻥 뚫린 것 같았습니다.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산해 진미를 먹어도 별로 맛이 나지 않았습니다. 점점 자기 자신이 알맹이 없는 껍데기가 되어 가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웃으면서 재미난 이야기를 하다가도 레위만 나타나면 하던 말을 멈추고 표정이 굳어졌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레위의 집 담장에는 빨간 스프레이로 "매국노 레위를 처단하라"란 글씨와 함께 목 매달린 사람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레위의 가슴속은 분노와 한숨, 처절한 고독으로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누구도 그런 레위의 가슴속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해 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레위와 같은 세리를 돈만 아는 이기주의자로 손가락질했지만 오늘날은 어떠할까요? 오히려 재테크의 귀재로 인정받지 않을까요? 과거에는 누구나 흥부는 좋은 사람, 놀부는 나쁜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흥부보다 놀부를 더 좋아합니다. 흥부는 대책없는 사람이요 놀부는 못된 짓은 좀 했지만 그래도 능력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습니다. 그래서 흥부식당은 없어도 놀부식당은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내가 나를 챙기지 않으면 누가 날 챙기겠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내 이웃이 어떻게 살든지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가치관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지난 5월 3일자 주간 동아 커버스토리도 "현명한 이기주의자가 되자, 체면을 버리고 나를 위해 살자"였습니다.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자기를 위해 열심히 사는 대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시합격을 위해 엉덩이에 땀띠가 나도록 공부하는 사람도 있고, 벤처 동아리를 만들어 벌써 창업준비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미래의 행복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나만을 위한 삶이 진정으로 행복할까요? 오늘날 이기주의가 장려되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외로운 섬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물론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그 관계라는 것은 이익에 기초한 주고받기 식의 만남일 뿐입니다. 마음과 마음의 만남은 희귀해져 갑니다. 이 가운데 사람들은 점점 피곤해지고 쓸쓸해집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답답함과 두통, 우울증, 허무감으로 고통받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런 증상의 원인이 심리적인 요인에 있다고 보고 많은 사람들이 정신과 의사의 상담을 받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치유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다만 노력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얻을 뿐이라고 합니다. 이는 심리학적인 문제이거나 처세술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죄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 교제하며 이웃과 나누며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창조목적에서 벗어난 이기적인 삶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입니다. 지리산 깊은 산골 광천수라 할지라도 고여 있으면 썩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나누지 않으면 집착이 되고 집착은 병을 낳습니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돈으로 병든 마음, 병든 영혼을 고칠 수 없고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습니다.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죄문제를 해결하고 영적 의사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날도 레위는 습관적으로 계산기와 장부를 옆구리에 끼고 세관에 나와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멀리서 요즘 장안에 소문이 자자한 예수님과 일행이 오는 것을 보았지만 설마 나 같은 놈에게 무슨 볼 일이 있겠나며 모른 척하고 계속 앉아 있었습니다. 과거 어부시절 레위에게 세금을 실컷 뜯겼을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그를 보자 흠칫 놀라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레위를 주목하여 보시며 그에게 이르셨습니다. "나를 좇으라." 순간 다른 제자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세리 레위는 제자감이 못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레위가 제자가 되면 제자들 전체의 품격이 떨어지고 결국 자기들의 격도 떨어지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레위를 향해 "나를 좇으라" 말씀하셨을까요? 

 첫째로, 예수님은 그를 강한 죄의 세력에서 끌어내어 구원하시고자 하셨습니다. 레위는 자기 욕심을 위해서 세리의 삶을 사는 것이 참 행복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또한 그런 삶에서 떠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족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아가면서, 양심과 인간성을 포기해 가면서 살아온 그 삶 전체를 쉽게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돈쓰는 재미와 죄의 쾌락을 쉽게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가 예수님 안에서의 영광스러운 제자의 삶을 목표로 붙들고 세리의 삶에서 탈출하도록 돕기 위해서 제자로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또 죄로 깊이 병든 그와 함께 하시면서 집중적으로 도우셔서 치료해 주기 위해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그를 영적 지도자로 키우시고자 소망하셨습니다. 이기심으로 깊이 병든 사람을 제자로 키우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내면의 병이 치료되고 인생의 방향만 잘 잡아주면 위대한 지도자가 될 것을 보셨습니다. 사실 레위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레위는 능력이 많았지만 이 능력을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그의 능력을 주와 복음 역사에 쓰면 뛰어난 성경 저술가가 될 비전을 보셨습니다. 악착같이 돈을 긁어모으는 열심을 생명을 살리는데 드리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놀라운 소망과 비전을 가지고 부르십니다. 나도 나를 잘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은 나를 잘 아십니다. 나의 약점과 장점 숨겨진 달란트를 아십니다. 그리고 약점은 감춰주시고 달란트는 개발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키워주십니다. 팍팍 밀어 주십니다. 소망의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누구나 위대한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에 레위는 두말없이 일어나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레위는 예수님의 눈과 딱 마주치는 순간 예수님의 눈 속에서 비천한 자신을 아무런 조건없이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자비와 긍휼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레위는 너무 기뻐서 예수님을 모시고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아는 사람들은 다 초청해서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했습니다. 나눈다는 것은 레위 사전에 없던 단어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자 나눌수록 배가 되는 영적 세계의 오묘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동료 세리들과 죄인들뿐이었습니다. 여기서 죄인은 당시 세리와 함께 가장 천하다고 여김 받았던 몸 파는 여인들을 의미합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레위가 초청을 다 하다니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며 그의 집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때로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웃기도 하며 때로는 주르르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예수님과 식탁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레위는 예수님과 이웃을 위해 섬기고 베푸는 것이 이토록 기쁘고 즐거운 일인 줄 과거에는 왜 몰랐는지 모르겠다며 소감 발표를 하였습니다. 이 잔치는 천국 잔치였습니다. 이 때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기가 차다는 듯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님께서 이를 들으시고 저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의사로 오셨습니다. 죄로 병든 영혼들을 치료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이 죄로 인해 병들었기 때문에 중풍병자와 같이 때로는 세리와 같은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의사는 결코 자기에게 오는 환자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병만 나으면 얼마든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과 소원을 불어넣습니다. 이 예수님은 누구도 가까이 하기 힘든 세리레위도 "나를 좇으라" 하심으로 영접하시고 제자로까지 소망 두시고 키우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아무리 부담스럽고 몹쓸 죄인이라도 믿음으로 나아갈 때 사랑스러운 자녀로 영접해 주시고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영적 의사요 참 목자이십니다.


 결론적으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받는 길은 조건개선이 아니요, 죄를 사함 받는 것입니다. 중풍병자와 세리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관계성이 파괴되어 각각의 죄로 인하여 고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영적환자인 죄인을 불러 치료하러 오신 영적 의사이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께 나아가 병든 내면을 고침받고 건강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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