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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사도행전

이방의 빛 바울

by 목자 이창무 2025.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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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사도행전 제 18 강 / 이창무

이방의 빛 바울

말씀 / 사도행전 13:13-52
요절 / 사도행전 13:47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오늘도 수많은 강단에서 설교가 울려 퍼집니다. 한국 교회만 해도 매주 수십만 편의 설교가 전해진다고 하지요. 방송과 유튜브, 팟캐스트까지 합치면 수없이 많은 설교에 파묻힐 지경입니다. 하지만 정작 제 마음을 오래 붙든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그 많은 설교 가운데, 복음을 듣는 설교는 과연 얼마나 될까?”

어느 날, 저도 한 방송 설교를 듣다 문득 한숨이 저절로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본문은 성경이었지만, 말씀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자취를 감추고, 설교자의 무용담과 위로의 수사만이 빈 자리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날 제 안에 하나의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복음적인 설교란 무엇인가? 나는 그런 설교를 하고 있는가?”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속 사도 바울의 첫 설교를 마주하려 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바울이 전한 이 메시지는 복음이 어떻게 전해져야 하는지, 그리고 복음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 선명한 대답을 줍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영혼에 좋은 말씀을 분별할 수 있는 감각을 익히고, 더 나아가 복음적인 메시지를 가르치고 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준비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복음적인 메시지, 청중의 상황에 귀를 기울일 때 들리게 됩니다

구브로를 떠난 사도 바울은  다음 행선지로 소아시아 지역의 비시디아 안디옥을 찾아갑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식일이 되자 회당에 들어가 자리에 앉습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모여 말씀을 듣고 예배하던 장소였습니다. 당시 회당에서는 그 지역을 여행 중인 랍비가 말씀을 전하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바울은 그 기회를 얻자마자 메시지를 시작합니다.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16)

바울은 청중을 ‘이스라엘 사람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로 구분해 부르며, 모두가 이 메시지가 향하는 대상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어 17절부터 22절까지 그는 이스라엘의 족장들, 애굽 탈출, 광야 생활, 가나안 정복, 사사 시대, 그리고 사울과 다윗에 이르는 구약의 핵심 역사를 요약합니다. 이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자랑스러워하는 역사입니다.

국사 시간도 아닌데 바울이 왜 이 이야기를 꺼냈을까요? 그 이유는 복음이라는 골문에 도달하기 위해 일종의 빌드업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 귀 기울이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의 손길을 지금까지 이어오셨는지를 조심스럽고도 단단하게 짚어갑니다. 그리고 곧이어 핵심을 밝힙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23)

 그 모든 역사의 정점에 ‘다윗의 자손에서 구주를 세우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암시하면서, 청중을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합니다.

이어 바울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언급합니다. 요한은 유대 사회에서 선지자적 권위를 지닌 인물이었으며, 그의 이름은 모든 유대인들의 기억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요한이 자신의 사역을 예수님께로 향하게 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를 통해 유대인 청중이 갖고 있는 신앙의 지형 속에서 복음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도록 메시지의 흐름을 인도합니다.

바울의 메시지는 매우 전략적입니다. 그는 청중인 유대인의 사고방식, 기억, 배경을 존중하며, 그 안에 복음의 씨앗을 심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정보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과 신앙 안으로 복음을 끌어들여, 복음이 마음에 닿도록 정교하게 설계합니다.

복음은 시대를 초월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메신저의 입에서 흘러나올 때,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에게는 은혜로 다가오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적인 메시지란 단순히 ‘복음을 말하는 것’을 넘어서 ‘복음을 들리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복음을 들리게 하려면, 먼저 그 메시지가 누구에게 전해지고 있는지를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청중의 상황에 귀 기울이는 것이 메시지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각 사람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그녀가 숨기고 싶었던 인생의 갈증을 언급하셨고, 니고데모에게는 새롭게 태어나는 영적 출생을 말씀하셨습니다. 세리에게는 잔치 자리를 통해 용서를, 병든 자에게는 고침과 위로를 전하셨습니다. 모두 복음의 진리였지만, 각기 다른 형태와 언어로 전해졌습니다. 그 맞춤형 복음은 사람들의 귀에 들렸고, 삶을 바꾸는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오늘날의 메신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청중의 언어를 모르고, 그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 채 전해지는 메시지는 공허한 메아리처럼 스쳐 지나가기 쉽습니다. 아무리 진리라 하더라도 청중이 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한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복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말할까’가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어떻게 들릴까’도 중요한 법입니다.

특히 오늘처럼 다양한 세대와 배경을 가진 성도들이 함께 예배하는 시대에는, 한 마디의 말도 무심히 전할 수 없습니다. 젊은 세대는 공감과 진정성을 갈망하고, 중장년 세대는 삶의 무게 속에서 위로와 지혜를 구합니다. 세속 문화에 익숙한 이들은 복음의 깊은 은혜를 아직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단번에 복음을 전하려 하기보다, 먼저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의 문이 열릴 때, 복음은 비로소 그 마음 깊이 심기우며 열매를 맺습니다.

다음달 24일부터 우리 여름 수양회가 있습니다. 이 시대, 말씀을 들을 귀가 점점 닫혀가는 듯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 가운데 ‘청중의 상황에 귀 기울이는 복음의 통역자’가 될 메신저들을 세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 메시지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기를 기도합니다.

2. 복음적인 메시지, 그 중심에는 언제나 십자가와 부활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점점 더 복음의 핵심으로 나아갑니다.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28, 29a)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조리 있고 담담하게 서술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거절당하셨고,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대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고난을 단순한 불의한 재판의 결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하나님의 철저한 구속 계획의 정점임을 선포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복음적인 메시지가 반드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정면으로 다루어야 함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러나 복음은 십자가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30절에 이르러 복음의 전환점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30)

이 짧은 한 문장은, 모든 복음적인 메시지가 향해 가야 할 중심이자 정점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일 뿐 아니라, 구약의 약속을 이루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임을 선포합니다. 그는 시편과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며, 십자가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구원의 길이 하나님의 오래전 계획이었음을 증언합니다.

설교는 다양한 형태와 주제로 전해질 수 있습니다. 삶의 지혜를 전하기도 하고, 위로와 소망을 건네기도 하지요. 그러나 아무리 감동적이고 유려한 말이라 하더라도,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없다면, 그것은 복음적인 메시지라 부를 수 없습니다. 앙꼬 없는 찐빵이고 감자 없는 감자탕, 단무지 없는 김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복음적인 메시지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며,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결정적 사건을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복음의 심장부는 바로 십자가와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린도전서 2:2)

세상의 지혜와 철학, 탁월한 수사나 감정적 호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을 살리고, 죄를 용서하며,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황태자라 불렸던 찰스 스펄전은 어느 날 강단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설교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리 아름다워 보여도 설교가 아닙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시작해 십자가로 끝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새 생명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 바로 이 두 기둥이 복음의 토대이며, 모든 메시지의 심장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적인 메시지는 청중에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죄인이며,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합니다. 동시에 복음적인 메시지는 정죄에 머무르지 않고, 회복의 길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깨끗해지고, 그 부활의 능력으로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적인 메시지는 죄와 죽음의 자리에서 새로운 생명의 자리로 우리를 이끄는 다리가 됩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가 세상의 흐름에 편승하여 심리적 안정이나 도덕적 격려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그런 설교를 해야 힙하고 트렌디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복음의 중심을 잃게 된다면, 설교는 교양 강연이나 TED 토크와 다를 바 없어집니다. 분명 유익함도 있고, 잠깐의 감동은 받을 수 있지만, 결코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의 변화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의 입술에 복음의 중심을 새기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언제나 낡지 않는 복음의 심장입니다. 이 복음이 우리의 메시지 안에서 계속해서 뛰고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메시지는 생명을 낳고, 무너진 심령을 일으키며, 죽어가는 영혼에게 참된 소망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년 전국청년대학생 수양회 전체 주제를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이대로 채택이 되어 지난 주에 요한복음 19장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연구 발표를 했습니다. 당연히 다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 나눌 예정입니다. 2026년 전국청년대학생수양회 가운데 복음의 심장인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가 힘 있게 역사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 복음적인 메시지, 청중의 결단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구속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차근히 설명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단순한 설명과 증거를 넘어, 청중의 마음을 향한 직접적인 호소와 요청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38)

바울은 복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분명히 밝힙니다. 바로 ‘죄 사함’입니다. 그는 단지 “죄 사함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을 힘입어…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복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삶으로 응답하라는 강력한 요청입니다.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39)

이 구절에서 바울은 복음이 율법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구원의 길임을 선포합니다. 율법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었던 ‘의로움’의 문제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 완전히 해결될 수 있음을 선언합니다.

주목할 점은, 바울이 “믿는 자마다”라고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그 복음의 효력은 믿는 자에게만 유효합니다. 복음은 결단을 요청합니다. 듣는 이의 마음에 방향을 묻고, 삶의 응답을 요구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하박국 1장 5절을 인용하며, 심판의 경고를 덧붙입니다.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41)

이 말씀은 듣고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경고장입니다. 이것은 겁주려는 것이 아니라, 결단을 미루거나 거부하는 자들에게 닥칠 결과를 진실하게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청중이 단지 “은혜로웠다”고 느끼고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마음에 찔림을 받고, 믿음으로 응답하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경고하지 않을 수 었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초대이며, 요청이며, 도전입니다. 그렇기에 복음적인 메시지는 청중의 마음과 삶에 결단을 요구하는 메시지여야 합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을 돌리고, 삶의 태도를 바꾸며, 존재의 중심을 주님께로 옮기게 하는 것—이것이 복음적인 메시지의 진정한 목표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하셨던 말씀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나를 따라오너라.”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이 말씀들은 모두 결단을 요청하는 부르심이었습니다. 단순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삶의 방향 전체를 바꾸라는 요구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말씀을 듣고 배를 버렸고, 세관을 떠났으며, 죄악을 끊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런 찔림과 고백, 그리고 새 출발이 복음에 대한 합당한 반응입니다.

이 시대는 결단 없는 감동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가 ‘은혜로웠다’는 감상의 수준에 머무릅니다. 그러나 복음적인 설교는 그 감상을 넘어서, 결단의 자리까지 청중을 인도해야 합니다. 감동은 스쳐 지나가지만, 결단은 인생을 바꿉니다.

오늘 무언가를 바꾸게 하고, 내일을 새롭게 살아가도록 요청하는 메시지, 그것이 참된 복음적인 메시지입니다. 죄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풀어내며, 십자가의 은혜를 선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은혜에 어떻게 응답할지를 직면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골문 앞까지 왔으면 슛을 날려야 하지 않습니까?

물론 그 결단은 메신저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메신저는 그 결단의 길을 밝히고, 그 다리를 놓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단지 감정을 흔드는 연설가가 아니라, 영혼의 결정을 돕는 인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메시지에 굳이 적용이나 결단을 넣지 않아도 돼요. 각자 은혜 받은 대로 알아서 살면 되는 거죠. 은혜가 있으면 자연히 삶이 바뀌게 되어 있어요.” 일견 그럴듯하게 들리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정작 자신의 삶에 ‘적용’하고 ‘결단’하는 것을 피하고 싶은, 그 미묘한 회피의 변명은 아닐까요?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 “이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예수를 믿으라”—이처럼 사도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복음은 늘 청중의 마음을 두드렸습니다. 물론 그런 메시지는 인기가 없을 것 같습니다. 누구나 듣기 불편한 진실에는 본능적으로 등을 돌리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성령으로 마음이 열린 이들은 행동으로 응답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복음의 능력을 믿고, 사람을 결단에 이르게 하는 복음적인 메시지를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이 회당에서 메시지를 마쳤을 때, 사람들은 그 말씀에 깊이 감동하여 다음 안식일에도 같은 말씀을 듣기를 간청했습니다. 그 주간 동안 많은 이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찾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더 듣고자 했고, 마침내 안식일이 되자 거의 온 성이 몰려와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 했습니다. 초대박이 난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고, 그들의 영혼에 목마름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과 반응은 언제나 같은 방향을 향하지는 않습니다. 그 광경을 본 유대인들은 마음에 시기심이 일었고, 결국 바울을 반대하며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바울과 바나바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7)

복음은 유대인의 거절을 넘어, 새로운 땅과 새로운 사람들에게로 뻗어갔고, 영생을 사모하던 많은 이들이 믿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거절과 저항 속에서도 여전히 전해집니다. 우리의 학교, 직장, 가족, 친구들 중에 아직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우리가 비춰야 할 땅끝입니다.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오늘도 생명을 갈망하는 영혼들에게 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으로 살아나고, 복음을 전하는 자로 부름받은 우리 모두가, 복음을 전달하는 ‘이방의 빛’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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