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도행전

택한 나의 그릇이라

목자 이창무 2025. 5. 4.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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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사도행전 제 13 강 / 이창무

택한 나의 그릇이라

말씀 / 사도행전 9:1-31
요절 / 사도행전 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주님은 어떤 사람을 쓰실까요? 완벽한 사람일까요? 타고난 자질이 뛰어난 사람일까요? 오늘 본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때로는 가장 뜻밖의 사람을 부르십니다. 사람들 눈에는 전혀 아닌 것처럼 보이고, 어쩌면 위험해 보이기까지 하며, 도리어 손해가 될 것 같은 그 사람을 향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내가 택한 그릇이다.”

‘그릇’이라는 표현이 참 인상적입니다. 그릇은 스스로를 채우는 존재가 아닙니다. 누군가에 의해 빚어지고, 채워지고, 사용되는 존재입니다. 금으로 빚어진 찬란한 그릇이라 해도, 장식장 속 먼지 쌓인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그 진가를 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투박한 흙그릇이라도 주인의 손에 들려 따뜻한 물 한 그릇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귀한 쓰임 아닐까요?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의 손에 붙들릴 때 비로소 그 가치를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어떨까요? 나는 과연 쓰임 받을 수 있는 그릇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어떻게 빚어 가시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손에 붙들린 ‘택한 그릇’이 되어 갈 수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주님은 새로운 그릇으로 빚기 위해 때론 한 사람을 깨트리십니다

지금까지 사울을 들여다보면, 그는 누구보다 단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에 철저했고, 자기 확신에 가득 찬 엘리트였습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엄청난 열심으로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그의 분노는 다메섹까지 이어졌습니다. 그의 질주는 거침없이 나아가며 멈출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한 복판에서, 주님께서는 사울을 갑자기 멈추게 하십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3-4)

사울이 다메섹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강한 빛이 그를 덮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께서는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교회를 향한 사울의 박해가 곧 예수님 자신을 향한 박해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는 교회가 곧 그리스도의 몸이며, 주님께서 교회와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신다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그를 멈추게 하셨을까요? 물론 첫 번째 이유는 사울의 지독한 박해로부터 교회를 보호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계속 이 길로 계속 나아간다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교회를 아끼시는 동시에, 사울 한 사람의 인생도 너무나 아끼셨습니다. 그가 더 이상 자신을 파멸로 몰아가지 않도록, 주님은 일단 그를 붙들어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강권적인 멈춤 이후, 사울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8-9)

사울은 누구보다 똑똑하고, 정확히 본다고 자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스스로 걸을 수도 없습니다. 누군가의 손을 붙잡아야만 길을 갈 수 있는 무기력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예수가 살아계시다니! 지금까지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 확신했었는데, 실은 내가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고 있었다니!” 큰 충격 받은 사울은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었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사울이 쌓아온 모든 것이 다 박살이 나고 너덜너덜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깨어짐이야말로 주님의 큰 은혜였습니다. 그토록 확신에 차 있었던 사울이 참되신 하나님을 만나려면, 그의 자기 확신이 완전히 무너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눈이 멀고, 말이 사라졌던 그 시간은 자기의와 자기 확신으로 포장된 죄악이 하나하나 드러나며 철저한 회개의 시간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깨뜨리십니다. 우리가 의지하던 성공과 자존심을 무너뜨리시며, 스스로 빚어놓은 인생이라는 그릇을 부수십니다. 우리의 참 모습을 드러내시고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는 궁지로 몰아 넣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지 부수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그 부서진 조각들을 다시 들어 올리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새로운 그릇, 아름다운 그릇, 깨끗한 그릇으로 우리를 빚어 가십니다.

물론, 무너지는 시간을 지날 때 우리는 혼란스럽고 두렵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지,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뜨리실 때는, 반드시 다시 빚으시기 위함입니다. 사울에게 그러하셨듯, 우리 각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결코 무의미한 자기 파괴를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목적 없이 우리를 부수지 않으시며, 반드시 그 가운데서 새로운 시작의 문을 열어 가십니다.

저도 제 인생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던 때가 언제였는가 뒤돌아 보니, 그 앞에 허물어지고 낮아지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 휴교 사태, 아버지의 사업 실패, 다니던 회사의 폐업 위기 등등. 앞이 캄캄하고 밥맛을 잃었던 그 때에, 비로소 저는 제 밑바닥을 보았고, 교만과 고집이 꺽이고 마침내 주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지금 이 자리에, 그런 깨어짐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래 붙들고 있던 꿈이 무너지고, 자존심이 상하고,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낙심한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의 은혜가 시작됩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출발입니다. 주님은 깨어지고 부서진 조각을 다시 들어 올리셔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인격을 빚어가기 시작하십니다. 그렇게 빚어진 우리를 그리스도의 향기를 세상에 발하는 그릇으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이 일을 결코 멈추지 않으십니다.

2. 주님은 순종하는 그릇을 통해 한 사람을 회복시키십니다

사울이 주님을 만난 이후의 장면에는 또 한 사람, 매우 중요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다메섹에 거주하던 아나니아입니다. 사울이 시력을 잃고,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지내던 때, 주님께서는 아나니아를 부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11)

그러나 아나니아의 반응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솔직하였습니다. “주님, 그 인간 말종 말씀이십니까?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에게 어떤 해를 입혔는지 제가 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 다메섹에도 우리를 체포하러 왔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말에는 두려움과 당황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현재 아나니아의 마음은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15)

주님은 사울의 과거로만 그를 규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의 회심 이후의 삶과 앞으로 사명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물론 과거 그는 사탄이 사용하던 그릇이었습니다. 심판 받아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용서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그릇으로 사용하시려 합니다. 주님은 그를 복음이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에게로, 평민 계층을 넘어 상류 지식인 계층까지 본격적으로 확장되는 구속사적 대전환을 이룰 사람으로 귀하게 사용하고자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아나니아는 기꺼이 순종합니다. 기꺼이 순종했는지 여부는 그가 사울을 찾아가 부른 호칭에서 알 수 있습니다. “형제 사울아.” 단순히 “사울아”가 아닙니다. “형제 사울아.” 아나니아는 이제 사울을 더 이상 원수로 보지 않았습니다. 주님 안에서 함께하는 형제로, 공동체의 지체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 순종의 손길을 통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다시 보게 되었고,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몸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시력만 회복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영혼이 어둠에서 빛으로, 죄와 정죄 아래에서 은혜와 용서의 세계로 옮겨졌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이, 또 한 사람의 인생을 회복시킨 것입니다.

저 역시 한때 아나니아처럼 망설였던 경험이 있습니다. 군 복무 중, 말년에 지쳐 있던 한 형제 목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급격히 돌변했고, 연락도 끊긴 채 마음을 닫아버렸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또 한 명의 양이 이렇게 떨어져 나가는구나.’ 사실상 그를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모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전역하는 날, 그를 찾아가 봅시다. 무조건 만나서 데려옵시다.” 반신반의했지만, 아나니아처럼 순종하는 마음으로 새벽 KTX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군부대 정문 앞에서 그를 기다렸고, 마침내 만나서 기차 안에서 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다시 성경공부를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날 저는 너무 쉽게 포기해버린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군대에 있으니까’, ‘마음이 완전히 닫혔으니까’라는 이유 뒤에 숨었지만, 결국 문제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회복시키는 능력을, 제가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의 순종을 통해 주님은 그 형제를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지금 그는 선교사로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를 회복시키신 분은 주님이셨습니다. 주님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단지 아나니아처럼 한 번 더 순종했을 뿐이었습니다.

지금, 주변에 ‘그 사람만은 아닌 것 같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있으신가요? 너무 큰 상처를 주었고, 도저히 다시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사람이 떠오르지는 않으신가요? 그렇다면 어쩌면 그 사람이야말로 주님께서 나를 통해 회복시키기를 원하시는 바로 그 사람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중 아닐까요? “그 사람은 내가 택한 나의 그릇이다. 그런데 내가 바로 너를 통해 그를 회복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할 때, 그 사람은 회복되고, 우리 자신도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군가를 회복시키는 그 손길이 되기를, 그 순종의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3. 주님은 변화된 그릇을 통해 공동체 전체를 세우십니다

사울은 회심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회당으로 달려갑니다. 며칠을 금식했고, 시력을 잃었다가 간신히 회복한 상태였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조금은 쉬고 나서…”라고 생각했을 법도 합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답게 곧장 회당으로 나아가 외쳤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전에도 그는 멈출 수 없는 열정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이제는 은혜를 입은 자로서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믿는 이들은 모두 당황했을 것입니다. “어제는 우리를 잡으러 오더니, 오늘은 복음을 전하다니?” 반면, 유대인들은 배신자를 용납할 수 없다며 사울을 죽이려 했습니다. 사울은 결국 성벽을 타고 도망쳐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거기서 사도들과 교제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의 문턱은 그에게 결코 낮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합니다. 스데반이 순교하던 자리에 맨 앞에 있었던 이가 바로 사울이었고, 그의 박해로 고통을 당했던 이들도 예루살렘 교회 안에 있었을 것입니다. “정말 회심한 걸까?” “혹시 일망타진을 위한 위장 전술은 아닐까?” 그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의심과 두려움이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한 사람이 조용히 등장합니다.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27)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믿어주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주님을 만났는지, 다메섹에서 어떻게 담대히 복음을 전했는지를 사도들에게 설명했습니다. ‘위로의 아들’이라는 이름처럼, 바나바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중재자이자 다리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바나바가 있었기에 사울은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고, 예루살렘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흥미로운 장면은 그다음입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헬라파 유대인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습니다. 과거 스테반을 죽이던 자리에 있었던 그가, 이제는 스테반이 서 있었던 자리에 선 것입니다. 말하자면 시즌 1의 악역이 시즌 2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 셈입니다. 드라마에서도 이렇게 반전이 심하면 개연성이 없다며 욕을 먹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다릅니다. 각본을 쓰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만난 예수님이 그를 완전히 새롭게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제는 그를 받아들인 예루살렘 성도들이 사울을 고향 다소로 피신시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안디옥으로 이끄셔서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사울 한 사람의 회심 사건이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31)

변화된 사울 한 사람을 통해, 교회 전체가 위로를 받고 다시 평안해졌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변화시키실 때, 그 영향력이 결코 개인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 회복은 공동체 전체를 새롭게 세우는 열매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변화된 한 사람을 통해 공동체를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는 때로 “겨우 한 사람이 변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변화시키신 한 사람은 그 자체로 복음의 증거이며, 공동체를 살리는 하나님의 도구라고 말입니다.

그 한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섬기고 있는 캠퍼스 어딘가를, 주님께서 예비하신 또 다른 ‘사울’이 걷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오늘도 안암역을 지나고 있을지도, 교대역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이미 우리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지만, 낯설고 어색한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말을 걸고, 손을 내미는 작은 실천을 시작할 때, 하나님은 그 만남을 통해 회복과 변화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열려서 주변에 있는 또 다른 사울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입이 열려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기를, 우리의 손이 먼저 다가가는 바나바의 손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9장에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변화시키시고 그를 통해 공동체 전체를 새롭게 하시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깨어졌고, 새롭게 빚어졌으며, 결국 복음을 전하는 그릇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의 회복은 단지 그의 인생만을 바꾼 것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 움츠러들어 있던 교회 전체를 일으키고 세우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여전히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깨어진 채로 주님의 손에 들려 다시 빚어지기를 원하는 사람, 두려움을 넘어서 순종으로 나아갈 사람, 회복의 손길이 되어 또 한 사람을 일으킬 사람 말입니다. 주님은 그 사람을 통해 공동체를 세우고, 세상을 바꾸십니다.

혹시 지금 깨어짐의 시간을 지나고 계십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그 깨어진 조각을 들고, 더 아름답고 깊은 그릇으로 여러분을 빚고 계십니다. 혹시 누군가를 용납하기 어려우신가요? 그 사람은 주님께서 당신을 통해 회복하길 원하시는, 바로 ‘택한 그릇’일 수 있습니다. 혹시 당신의 삶이 너무 평범하고 작아 보이십니까?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손에 붙들린 그릇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공동체를 다시 세울 그 한 사람. 그가 바로, 오늘 이 말씀 앞에 선 ‘나’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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