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사도행전 제 11 강 / 이창무
전도자 빌립
말씀 / 사도행전 8:1-25
요절 / 사도행전 8:5,6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혹시 “스트라이샌드 효과”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유명한 가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캘리포니아 해안가에 위치한 자기 집 사진을 인터넷에서 지워달라고 소송을 걸었던 사건에서 유래한 용어입니다. 그런데 이 소송이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켰습니다. 그전까지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사진이 소송 때문에 전 세계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순식간에 수백만 명이 그 사진을 보게 되었던 거죠. 막으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퍼져버리는 현상, 이것이 바로 ‘스트라이샌드 효과’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볼 사도행전 8장의 이야기도 이와 아주 비슷한 현상을 보여줍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터져버린 박해는 성도들을 사방으로 흩어지게 만들었지만, 그 흩어짐은 복음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복음은 마치 강물을 막으려 세운 둑을 넘쳐흐르는 물줄기처럼, 장벽을 무너뜨리고 경계를 넘어 확장되어 갔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복음이 얼마나 끈질기고, 얼마나 거침없고, 얼마나 왜곡되기 쉬운지도 함께 보려고 합니다. 복음이 퍼져가는 길은 언제나 드라마틱합니다. 우리 삶도 그 이야기 속에 있습니다.
1. 복음은 억누를수록 더 넓게 퍼져 나갑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1)
여기서 ‘그’는 바로 스데반을 말하며, 스데반의 순교를 사울은 마땅한 일로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이 순교한 그 날에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3절에 보면 사울이 교회를 '잔멸하려 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잔멸'이라는 단어는 평소 자주 쓰이는 말은 아니죠. 모기나 바퀴벌레를 잡아 없애버릴 때 쓰는 표현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향해 사용할 표현이라고 보기엔 굉장히 거칩니다. 그만큼 사울의 박해는 잔인하고 무자비했습니다. 그는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습니다.
이 박해로 인해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도들을 제외한 모든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땅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흩어졌다"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에서 '흩어지다'는 말은 본래 '씨앗을 뿌리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여러 단어 중 굳이 이 단어를 선택한 저자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4)
단순히 박해로 흩어진 것이 아니라, 복음의 씨앗이 온 땅에 뿌려졌다는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을 기억하시죠?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그런데 지금까지 초대교회는 대부분 예루살렘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주님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박해가 터지면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자발적이기보다는 부득이하게 세계 선교 역사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초대교회를 향한 박해는 아무 소용이 업었습니다. 오히려 복음의 불씨를 더 널리 퍼뜨리는 촉매제가 된 것이죠. 하나님은 이런 핍박조차도 복음을 위한 섭리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놀라운 사실은 숨기도 모자랄 상황인데, 오히려 성도들은 도망치는 중에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이 흩어진 성도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이 있었죠. 바로 스데반의 순교입니다. “스데반은 죽음을 앞에 두고도 담대히 복음을 전했는데, 내가 이 정도 고난 앞에서 물러설 수 있는가?” 그들은 스데반이 죽음을 무릅쓰고 진리의 복음을 담대히 선포하는 모습을 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복음을 어떻게든 전하고 싶어 하는 열정이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이 열정은 억누른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처럼,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복음 전파의 열정이 있습니다. 전하지 않으면 몸이 근질근질하고 답답한 마음, 그것이 바로 은혜받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결국 박해라는 외적인 조건과 은혜의 복음을 전하고자는 내적인 열망이 만나서 이방 선교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런 역사는 사실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었습니다. 한국이 정말 어렵고 가난하던 시절, 복음 전파의 열정은 오히려 더 뜨거웠습니다. 1970~80년대, 그리고 IMF 외환위기를 겪었던 1997년 무렵, 우리 모임은 많은 선교사님들을 세계 곳곳으로 파송했습니다. 특히 중남미 지역에는 이 시기에 파송된 선교사님들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없지만 복음은 있다. 그러니 복음을 들고 세계로 나아가자.” 이것이 그 시대 우리 모임의 정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고, 삶의 여건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렇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선교사 파송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무래도 지금 이 자리가 너무 편하고 좋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와이파이 잘 터지고, 배달 잘 오고, 편의점만 가면 모든 것이 다 준비돼 있는데…’ 선교지의 고생스러운 삶을 감당하기보다는, 안정되고 편리한 환경 속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청년 세대가 처한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한국은 좁고, 사람은 많고, 스펙 경쟁은 치열하고… 그야말로 “인생이 레드오션”입니다. 굳이 이 좁은 곳에서만 경쟁할 필요가 있을까요? 눈을 들어 세계를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새로운 기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시대의 위기조차 복음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복음의 불씨를 들고 다시 세상으로 나아갈 때입니다. 내년에는 한국에서 세계선교보고대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이 대회가 단순한 행사로 끝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청년 세대 가운데 다시 한번 복음 전파의 불씨가 타오르고, 우리 모임과 한국교회가 다시 한번 세계 선교의 일꾼으로 일어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2. 복음은 장벽을 무너뜨립니다
흩어졌던 사람들 중 한 사람, 바로 오늘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 빌립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사실 빌립은 여기서 처음 등장한 인물이 아니죠. 스데반과 함께 세워졌던 일곱 명의 일꾼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5)
이 빌립이 사마리아 성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사마리아였을까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혐오했기 때문에, 사마리아 땅에는 발도 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 출신 빌립은 이런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여기 숨기 딱 좋네.” 하면서 사마리아로 간 것 같습니다. 빌립은 비록 도망치듯 사마리아에 왔지만,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전파했습니다. 그랬을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났을까요?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6-8)
사람들이 빌립의 말을 듣고, 그가 행하는 표적을 보고 한마음으로 그의 말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귀신이 떠나가고, 병자가 낫는 놀라운 기적이 빌립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성 안에는 큰 기쁨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통해 사람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기쁨이 임한 것입니다. 이로서 500년 이상 지속되어 온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장벽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 허물어졌습니다. 콘크리트 벽보다 더 단단한, 오랜 세월 깊게 자리 잡았던 미움과 차별의 벽이, 복음을 통해 와르르 무너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이죠.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상황이 떠오릅니다. 바로 남한과 북한, 한민족이면서도 오랜 세월 분단된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1945년 해방 이후 벌써 8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도 휴전선은 여전히 높고 단단한 장벽처럼 서 있고, 남과 북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세워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치적 대립과 경제적 격차, 서로를 향한 불신과 적대감은 여전히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마리아 땅에서 일어난 복음의 역사는 우리에게 큰 소망을 줍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허물 수 없었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벽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 무너졌습니다. 복음은 장벽을 허무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미움과 차별, 상처와 분열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이렇게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남과 북의 장벽도 무너뜨리게 하소서. 정치적 통일이나 경제적 통일 이전에, 복음으로 마음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남과 북이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며 진정한 평화 통일을 이루는 날이 속히 오게 하소서.” 그날이 오면, 사마리아 성에 큰 기쁨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 민족에게도 하늘의 큰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9)
사마리아 성에 마술을 행하던 ‘시몬’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모자에서 토끼를 꺼내는 최현우 같이 생긴 그런 귀여운 마술사가 아니었습니다. 귀신의 세력을 동원해서 기이한 일을 행하는 주술사나 무당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이 시몬은 스스로 ‘큰 자’라 자칭하며,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자기 영광을 구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단지 말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한 기이한 일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따랐습니다. 이 동네에서는 시몬을 모르면 간첩이었습니다. 이런 배경을 보면, 당시 사마리아 지역은 주술적이고 신비주의적이며, 샤머니즘적인 문화가 팽배했던 지역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12)
이 땅에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았고, 심지어 시몬 본인도 “아, 이건 내가 쓰던 기술과 급이 다르다” 싶었는지 세례를 받았습니다. 영적 세계에도 클래스 차이가 있다는 걸 인정한 거죠.
한국 사회 역시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는 사마리아와 매우 비슷한 모습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의 한국은 겉으로는 유교적 질서가 지배하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깊은 샤머니즘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병이 들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고, 재앙을 피하기 위해 부적을 붙이고, 인생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는 점집을 찾아가 길흉화복을 점쳤습니다.
그 땅에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초기 선교사들은 병든 자를 고치고, 가난한 자를 섬기며,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귀신이 떠나가고, 병이 나으며, 무엇보다 사람들의 마음과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복음은 삶을 새롭게 하는 생명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과거의 굿판 문화는 많이 사라졌지만, 샤머니즘은 여전히 다른 모습으로 살아 있습니다. 운세 보기, 타로 카드, 사주팔자, 점술 어플이 유행하고 있고,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이런 것들이 유희처럼 소비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척하지만, 여전히 인간 존재의 깊은 곳에는 불안과 두려움, 통제할 수 없는 삶에 대한 무기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모르는 이들은 여전히 어떤 신비한 힘이나 비밀스러운 지식을 통해 삶의 문제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빌립이 사마리아로 내려가 복음을 전파했던 것처럼, 우리도 오늘 한국 사회 속으로 복음을 들고 들어가야 합니다. 사람들의 상처와 불안을 공감하고, 그들의 삶의 자리로 들어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은 여전히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오늘도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귀신을 쫓아내며, 억눌린 자를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빌립처럼 복음의 사람으로 파송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참된 생명과 기쁨을 전하는 사명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 복음은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땅, 사마리아에서 전도자 빌립을 통해 복음이 놀랍게 전파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일이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마술사 시몬의 문제였습니다.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18-19)
시몬은 사도들의 안수를 통해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사도들에게 접근해 돈을 내밀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권능을 나에게도 주십시오. 내가 누구에게든 안수하면 그도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시몬의 태도를 보면, 그가 이 모든 상황을 투자로 생각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10억을 주고 이 능력을 사면, 20억은 벌 수 있겠구나!” 완전히 비즈니스 사고방식이었던 겁니다. 시몬은 빌립을 통해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고, 겉으로는 변화된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내면, 성품, 인격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자기 영광을 추구했고, 여전히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20)
베드로는 성령의 능력이 결코 그런 방식으로 거래될 수 없음을 강하게 선언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값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주시는 것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입니다. 복음과 성령의 능력을 인간의 욕망과 거래 수단으로 삼으려는 태도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입니다.
이어서 베드로는 시몬에게 너의 바르지 못한 마음을 당장 회개하라고 권면합니다. 23절에서는 시몬의 상태를 악독이 가득하고 불의에 매인 바 되었다고 진단합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너 나쁜 사람이다”라는 도덕적 판단을 넘어서, 그의 마음속에 사탄이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만약 이 시몬의 모습이 그냥 용납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령의 능력조차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것처럼 인식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방언 받기 50만원, 치유 기도 100만원, VIP 패키지 할인…” 등등의 ‘가격표’ 붙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아찔한 일입니다. 교회는 세속적인 가치관—돈, 권력, 영향력, 자기 영광—이 지배하는 집단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교회는 결국 이단 집단이 되었을 것이고, 그 중심에는 시몬이 교주처럼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도자 빌립이 피 흘리며 세운 복음의 공동체가, 단 한 사람—시몬 같은 사람—때문에 완전히 망가져 버릴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복음의 역사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귀한 일이었는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만큼 큰 위협과 위험도 있었다는 사실을 경고합니다. 사마리아는 복음이 크게 역사한 곳이었지만, 동시에 시몬 같은 인물이 튀어나올 수 있는 위험한 토양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이런 모습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한국 교회는 아시아 지역에서는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교회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한국 교회 안에는 이미 시몬의 사고방식이 깊숙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예배당 건축은 대규모 투자 프로젝트가 되고, 목회자나 사역자는 유명세와 영향력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이대로 끝까지 간다면 겉으로는 화려하고 성장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영광은 떠나고, 인간의 욕망만 가득한 종교 비즈니스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엄중한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교회는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의 진리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로만 세워지는 공동체,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인 되시는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에 물들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것은, 복음은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모든 장벽을 허무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무엇보다 복음은 세상의 가치로 거래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 복음의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의 작은 헌신과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일터에서, 캠퍼스에서, 또 온 세계 땅 끝까지 — 복음이 필요한 그곳마다 우리가 복음을 들고 가는 빌립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설교 > 사도행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택한 나의 그릇이라 (0) | 2025.05.04 |
---|---|
광야의 만남 (1) | 2025.04.27 |
예수님을 따라 순교한 스데반 (0) | 2025.03.30 |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2) | 2025.03.30 |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 (1) | 2025.0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