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사도행전 제 12 강 / 이창무
광야의 만남
말씀/ 사도행전 8:26-40
요절/ 사도행전 8: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1988년 5월 초, 어느 날이었습니다. 저는 공강 시간을 이용하여 교양관에 앉아 있던 중, 문득 “어라, 왜 이렇게 쌀쌀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스한 햇볕을 쬐기 위해 밖으로 나와 벤치에 앉았을 때, 양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한 남성이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순간 저는 그가 영어 교재를 판매하려는 시사영어사 직원일 것이라 지레짐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상과 달리 조용히 말을 건넸습니다.
“형제님, 진리를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 만남은 제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만남이 제 믿음의 여정을 여는 시작이 될 것이라 짐작조차 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함께 살펴보고자 하는 본문에도 이와 같은 한 만남이 등장합니다. 그 장소는 황량하고 적막한 광야였습니다. 대중교통은 물론, 커피 한 잔을 파는 가게조차 없는 곳, 내비게이션이라면 아마도 “경로를 벗어났습니다”라고 알렸을 만한 외진 길목에서, 두 사람이 마주하게 됩니다. 그들은 서로를 전혀 알지 못하였고, 출신 배경과 사용하는 언어, 사회적 지위 또한 하늘과 땅처럼 달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이끄시어 그 자리에서 만나게 하셨습니다. 마치 오랜 세월 동안 이 만남을 준비해 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 만남은 한 사람의 변화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복음이 국경을 넘어, 문화와 언어의 장벽을 넘어, 한 나라로 흘러들어가는 위대한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어야 할 것입니다. 이 특별한 만남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왜 하필 광야였는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위해 이 만남을 준비하셨는가? 오늘 우리는 이 이야기를 따라가며, 하나님께서 복음의 길을 여시는 방법을 함께 깊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1. 복음 전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순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마리아 성에서의 빌립은 한창 전도 사역의 절정에 있었습니다. 회심하는 이들이 줄을 이었고, 이제 막 태동한 사마리아 교회는 그의 수고를 통해 아름답게 세워져 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상황만 놓고 본다면, 누구라도 “이제야 자리를 잡았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아주 뜻밖의 명령이 들려왔습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26)
문제는 그 길이 ‘광야’라는 점이었습니다. 인적이 드물고, 데이터조차 터지지 않을 것 같은 뜨거운 사막길이었습니다. 굳이 찾아갈 이유가 없어 보이는 길이었습니다. 더욱이 빌립은 지금, 많은 사람들과 풍성한 열매가 있는 곳에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그 자리에 계속 머무는 것이 하나님의 뜻처럼 보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따지거나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설명도, 확신도 부족한 길이었지만, 그는 지체 없이 그 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곳에서 빌립은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였습니다. 그는 유대인은 아니었으나, 예루살렘까지 예배하러 올 정도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환관이 국고를 책임진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대한민국의 경제부총리에 해당하는 고위 관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인물이 하나님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리고 빌립은 바로 이 한 사람을 위해 광야로 보내졌습니다.
이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친히 주도하신 만남이었습니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29)
성령의 음성에 빌립은 또 한 번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복음은 남쪽 끝 아프리카 대륙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복음 전파는 이처럼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이 세운 멋진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에 대한 조용한 순종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만일 빌립이 “지금은 제가 너무 바쁩니다” 또는 “그 길은 너무 멀고 의미 없어 보입니다”라고 하였다면, 이 놀라운 역사는 시작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 전파의 출발점에서 자신에게 다시 한번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주님의 부르심 앞에 순종하고 있는가?”
우리 가운데 계신 서바나바 목자님 역시 빌립처럼 ‘광야’로 부르심에 순종하셨던 분이십니다. 대학 시절, 한창 안암 지역에서 훈련을 받고, 교제도 풍성하며 모든 것이 익숙하고 편안할 때였습니다. 그때 느닷없이 “중앙대학교로 개척을 나가라”는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목자님은 속으로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이미 대학교 4학년 2학기, 학업을 마무리해야 할 시점이었고, 무엇보다 안암에서의 삶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목자님은 순종하셨습니다. 비록 마음은 주저하였지만, 발걸음은 순종의 길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개척팀 10명이 중앙대학교에 모였습니다. 준비된 인력도, 경험도 풍성하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고생이 예정된 광야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준비하신 한 영혼, 현재는 멕시코 선교사로 파송된 홍다윗 선교사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단 한 번의 초청으로, 1대1 성경공부도 없이 창조과학 세미나에 참여한 그 양은 “하나님을 믿겠다”고 결단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한 번도 예배를 빠지지 않았으며, 가족의 핍박 속에서도 신실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때 목자님께서 “지금은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라고 하셨더라면, 이 놀라운 복음 역사는 시작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의 한 걸음이 복음을 한 사람에게 전하게 하였고, 그 한 사람이 이제는 또 다른 나라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누군가를 향한 광야의 만남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누군가를 만나기 원하시며, 한 사람의 인생을 여는 열쇠로 우리를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그 만남은 때로 우리의 기대와 다를 수 있으며, 감정적으로는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예비하신 영혼을 만나게 하시고, 단지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공동체와 민족을 향해 복음을 확장해 가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한 걸음을 내딛을 때, 주님께서는 그 순종 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순종의 발걸음이, 누군가의 회심과 구원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 복음 전파는 광야에서 갈망하는 자를 위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왕실 재정을 책임지는 고위 관리로서 부와 명예, 권력을 누리는 인물이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부러울 것이 없는 삶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는 깊은 공허함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진지한 구도자였습니다.
예루살렘까지의 먼 여정을 기꺼이 감수한 것만 보아도 그의 간절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경험한 예배는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내시라는 신분은 율법 앞에서 장벽이 되었고, 흑인의 피부색과 이방인의 신분은 그로 하여금 성전 깊숙이 들어가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성전 앞에 서 있었지만, 여전히 ‘밖’에 있었습니다. 외적으로는 가까이 있었으나, 영적으로는 여전히 멀게 느껴지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그는 돌아가는 길, 수레 위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하필 이사야 53장, 고난받는 종에 관한 예언을 말입니다. 그는 눈으로는 글을 따라가고 있었지만, 마음은 해석되지 않는 이 말씀 앞에 멈춰 서 있었습니다.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31)
내시는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는 고백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요청하는 겸손과 진리를 향한 갈망을 드러냈습니다. 이는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이자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그 갈망이 하늘에 닿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 동시에 이 땅 어딘가에서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한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바로 빌립이었습니다. 말씀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고, “예” 하고 일어설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이 둘은 정확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빌립의 입을 통해 내시는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단지 오래전 한 사람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같은 방식으로 역사하고 계십니다. 어딘가에는 내시처럼 말씀을 읽지만 이해되지 않아 답답해하고, 예배를 드리지만 공허함을 안고 돌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오늘도 준비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일어나 가라. 그 길은 광야라.”
얼마 전, 전국 학생 수양회에서 매우 인상적인 인생 소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동 센터의 정인석 형제, 고려대학교 철학과 학생이었습니다. 흔히 철학과 학생이라 하면 “너무 이성적이고 비판적이어서 복음이 잘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직접 만나본 정인석 형제는 전혀 달랐습니다. 오히려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누구보다 깊고, 영적으로도 참으로 겸손한 형제였습니다.
그는 얼마 전 고려대학교 런치미팅에 초대되어 함께하였는데, 참석한 모든 이들이 입을 모아 감탄하였습니다. “요즘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다니!” 그때 제 마음에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형제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왜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곧 깨달았습니다. 이 형제는 지금까지 광야에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찾지 않던, 그 남쪽 광야 어딘가에 조용히, 그러나 깊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길로 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들을 준비가 된 사람을 예비해 두셨건만, 정작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된 일꾼을 찾지 못해 기다리고 계셨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도 전 세계 곳곳에서는 진리를 갈망하는 이들의 기도가 하늘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내려다보시며 “누구를 보내랴?” 하실 때, 막상 보내실 사람이 없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애타실까요?
정인석 형제처럼 말씀을 향한 갈급함을 품은 이들이, 지금도 광야와 같은 곳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오늘도 누군가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어딘가에서 성경을 펼쳐 들고도 이해하지 못해 눈물 흘리는 그 한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실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의 갈망을 채우기 위해, 그리고 그를 통해 더 많은 이들에게 복음이 흘러가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준비가 되어 있는 빌립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누군가의 “하나님, 도와주십시오”라는 기도에, 우리의 발걸음이 응답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 복음 전파는 장벽을 넘어 예수님께 이르게 합니다
복음 전파의 시작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순종에서 비롯되지만, 그 순종의 종착지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은 철저히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되, 그 목적은 분명합니다. 사람을 예수님께로 이끄는 것입니다.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의 만남은 이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수레 위에서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입을 열지 않는 고난받는 종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질문이 솟아올랐습니다.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34)
참으로 묵직한 질문이었습니다. 성경을 읽고는 있었지만,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답답함을 품고 있었습니다. 진리를 알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하였으나, 그 답은 혼자 힘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지점에 있었습니다.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35)
바로 그때, 빌립은 기다렸다는 듯 이사야의 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고난받는 종,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이 죄인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바로 당신을 위한 희생이었다는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또한 그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라 구원의 문이며,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장벽을 허물어 누구든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사실을 힘있게 증거하였습니다.
내시는 이 말씀을 듣고 감격하였을 것입니다. 율법 아래에서는 결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고 느끼던 그에게, 예수님은 모든 벽을 허물고 길을 열어주신 분이었습니다.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36)
그래서 그는 물을 발견하자마자 기쁨에 차 외칩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아무런 조건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준비된 심령 앞에 복음이 선포될 때, 즉시 결단이 일어나고 생명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이러한 능력이 있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기쁨에 넘쳐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외롭지도, 소외되지도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구원받은 자’로 머무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민족을 향해 복음을 전하는 첫 이방인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에디오피아에 깊은 기독교 전통이 뿌리내리게 된 시작점에는 바로 이 한 사람의 회심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복음이 앞으로 어디까지, 누구에게까지 뻗어갈지를 예고하는 사건이기도 하였습니다.
만일 빌립이 폐쇄적이고 국수주의적인 사고를 가졌더라면, “저 사람은 이방인인데, 하나님의 구원이 저런 이방인에게까지 미칠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단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빌립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였고, 눈앞에 있는 내시를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 있는 존귀한 영혼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작년, 우리 사모님들 중 몇 분이 평소처럼 캠퍼스 전도를 나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그날 한 형제가 벤치에 누워 쉬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의 베데스다 못가의 풍경이 떠오르는 장면이었습니다. 같이 나간 두 사모님은 “그냥 지나치자”고 하셨습니다. 괜히 말을 걸었다가 불쾌한 반응을 살 수도 있고, 쉬고 있는 이에게 불편을 끼치지 말자는 배려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그중 한 분, 유윤희 사모님은 마음에 걸림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한 번 인사를 건네보자”고 하여 조심스레 다가가 말을 건넸습니다. 놀랍게도 그 형제는 매우 호의적으로 반응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원래 성경에 대해 갈급함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을 배우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었고, 진리에 대한 갈증을 오래 품고 있었던 이였습니다.
그날의 짧은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이후 그는 꾸준히 1대1 성경공부를 이어가게 되었고, 현재는 요한복음을 배우며 점점 복음 안으로 깊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만일 그날, 누워 있던 그 형제를 ‘그저 지나칠 사람’으로 여겼더라면, 이 귀한 만남은 시작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사람을 판단합니다. “저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저런 성격, 저런 배경, 저런 삶을 사는 이들은 교회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인간적인 장벽을 깨뜨리시고, 그 너머로 복음을 보내십니다. 우리가 편견 없이 마음을 열고 순종할 때, 빌립이 그러했듯 복음은 또 하나의 장벽을 넘어 세상으로 확장되어 나아갑니다.
우리는 오늘, 한 광야에서 일어난 만남을 통해 복음 전파의 놀라운 원리를 다시금 마주하게 됩니다. 그 시작은 화려한 전략이나 치밀한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반응한 한 사람, 곧 빌립의 순종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종은 진리를 갈망하던 한 사람과의 만남으로 이어졌으며, 그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이 모든 흐름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인도하신 일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단지 오래전 한 장면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역사하고 계십니다. 누군가의 마음속에 심어진 갈망의 기도에 응답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빌립’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빌립이 바로 오늘의 우리일 수 있습니다.
주변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나, 속으로는 진리를 갈망하고 있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성경을 들여다보지만 이해되지 않아 답답해하는 사람, 예배는 드리지만 여전히 소외감을 안고 돌아가는 사람, 겉모습은 평안해 보이지만 마음 깊은 곳은 메말라 있는 누군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보고 계시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 바로 우리를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복음 전파의 통로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다시금 마음에 깊이 새길 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귀 기울이며, 때로는 광야와 같은 길일지라도 그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선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언젠가 누군가의 인생 소감 속에 “그때 누군가가 와서 제게 말을 걸어주었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그 ‘누군가’가 바로 우리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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