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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사도행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시는 하나님

by 목자 이창무 2025.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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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사도행전 제 15 강 / 이창무

생명 얻는 회개를 주시는 하나님

말씀/ 사도행전 10:24-11:18
요절/ 사도행전 11: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사도행전을 펼쳐 보시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변화시키시고 교회를 세우시며, 날마다 그 수를 더하게 하시는 살아 계신 분이심을 분명하게 보여 주십니다. 성령의 역사와 사도들의 순종을 통해 복음은 전파되었고, 그 복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공동체를 새롭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현실을 천천히 들여다보면, 때때로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지실 때가 있습니다. 여전히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고, 말씀을 듣고 기도도 하지만, 내면에서 뚜렷한 변화의 증거를 찾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단지 저만의 문제라면 좋겠지만, 함께 말씀을 듣는 주변 사람들도 별다른 변화가 없어 보이고, 우리 교회 역시 예전보다 활력이 줄어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전처럼 새로운 분들이 교회를 찾아오는 일도 드물고, 말씀에 대한 열정도 다소 식은 듯 보일 때, 우리는 마치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문득 이런 질문을 품게 됩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언제 일하고 계시는 걸까?”

오늘 함께 나눌 사도행전의 말씀은 이 질문에 대한 중요한 해답을 제시해 줍니다. 본문 속에서 우리는 세 가지 장면을 통해 하나님께서 언제, 그리고 어떻게 일하시기 시작하시는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서 일하고 계심을 믿고, 그 살아 있는 하나님의 역사에 여러분과 제가 함께 동참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1. 복음을 들을 준비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식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으로 일하시며, 그분의 역사는 말씀 선포를 통해 시작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다고 해서, 모든 일이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일지라도, 밭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또한 그러합니다. 그 말씀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밭’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고넬료는 바로 그런 준비된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백부장이었고,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이방인은 구원의 대상에서 배제된 자들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나 출신을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은 자격을 따지지만, 하나님은 마음의 상태를 보십니다.

성경은 고넬료에 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가난한 자를 도왔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보여 주는 이러한 모습들은, 그가 복음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가 베드로를 맞이하며 한 고백은 매우 인상 깊고 감동적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33절). 

고넬료는 지금 설교자인 베드로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사람의 음성 너머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였고, 실제로 그의 귀는 베드로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 열려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주일마다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과연 우리의 삶을 움직이고 변화시키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혹시 우리가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요?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된 사람은 단순히 예배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마음 속으로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오늘 저에게 어떤 말씀을 주시겠습니까?”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된 사람은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내려놓고, 오직 성경 본문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한 구절 한 구절을 자신의 삶에 비추어 보며 묵상합니다. “혹시 이 말씀이 지금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아닐까?” 하는 겸손한 두려움과 기대를 품고 말씀 앞에 서는 자세가 바로 준비된 마음입니다.

최근 러너스 가운데서도 이러한 자세로 말씀을 듣는 한 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바 있습니다. 그는 오전 예배에서 말씀을 들은 후, 오후 예배에도 다시 참석하여 같은 본문의 말씀을 반복해 듣는다고 합니다. 영화에는 ‘N차 관람’이라는 말이 있지만, 말씀을 ‘N차 예배’로 듣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런데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의 삶이 눈에 띄게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말씀은 살아 있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역사하십니다.

오늘날 설교의 권위가 약화되었다는 말이 자주 들립니다. 그러나 복음주의 설교자 존 스토트는 담대히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설교를 믿습니다.” 그는 설교가 하나님의 진리가 사람의 인격을 통과하여 흘러가는 생명의 통로임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변함없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들으려 하지 않는 귀에는 아무런 음성도 들리지 않습니다. 반면,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여는 이에게는 하나님께서 인생의 새로운 문을 열어 주십니다.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계신 독자 여러분께서, 바로 그 말씀 앞에 준비된 마음으로 서 계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 오늘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듣겠습니다.” 이 고백과 함께,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복된 자리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2. 복음이 선포될 때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마침내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들어섭니다. 이것은 단순한 방문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에게 이방인의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금기를 깨뜨리는 일이었으며,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문화적 이해나 전통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우선하였고, 고넬료 앞에 담대히 섰습니다.

그 순간부터 베드로 안에 깊이 뿌리박혀 있던 편견과 선입견의 벽이 하나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입을 열어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34–35절). 

이 고백은 단순한 개인의 깨달음이 아니라, 복음이 더 이상 유대인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민족과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초청임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역사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이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에 대해 명확히 증거합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구주이심을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그런데 그가 설교를 끝마치기도 전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44절). 

성령께서 먼저 임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유대인들에게 임하셨던 동일한 방식으로, 이번에는 이방인들에게도 임하신 것입니다. 이는 백 마디 설명보다도 더욱 강력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어떤 특별한 언변이나 탁월한 설득력을 가졌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는 그저 복음의 핵심을 평이하고도 확신 있게 전하였을 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의 화려함이나 논리의 완벽함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임을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얼마 전 안암1부를 방문하셨던 김요한 선교사님의 삶 역시 이를 잘 보여 줍니다. 그는 한때 죄와 정욕에 사로잡혀 방황하던 청년이었습니다. 겉보기에는 자유롭고 즐거운 삶을 사는 듯 보였지만, 내면에는 깊은 공허함과 절망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말씀을 통해 “내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임을 알게 되었고, 수양회에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회개하였고, 복음을 믿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나도 커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고자 결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지도교수로부터 꾸지람을 듣고, 대학원에서 쫓겨나는 일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복음이 자신을 살렸고, 지금도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용하셔서 대학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말씀을 나누게 하셨고, 카이스트 안에 ‘한빛 글로벌 센터’라는 복음의 작은 거점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이후 그는 프랑스로 파송받아 선교사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낯선 언어와 문화, 수많은 두려움과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말씀을 들고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프랑스 현지 대학생들과, 선교사 자녀들과, 온라인으로는 전 세계의 청년들과 함께 말씀을 공부하고, 제자를 세우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김요한 선교사님처럼 살아갈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각자 서 있는 그 자리—캠퍼스, 가정, 연구실, 직장에서—그곳에서 소박하지만 담대하게 복음을 나눌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복음을 말할 때, 일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누군가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며,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하십니다. 그 현장에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어쩌면 당장은 눈에 띄는 열매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주께서 우리를 통하여 복음의 새로운 장을 써 내려가시도록,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 말씀을 들고 담대히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3. 복음을 위해 마음이 열릴 때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복음은 드디어 이방인의 집에 이르렀습니다. 그것도 고넬료의 집, 유대인의 전통과 경계를 넘어선 그 자리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실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 중심의 초대교회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1절에서 3절은 그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 줍니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이 소식은 마치 ‘속보’처럼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졌습니다. 보통 같았으면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며 찬양과 감사가 흘러나와야 마땅했을 터인데, 돌아온 반응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것은 비난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님, 어떻게 그 ‘부정한’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를 하실 수 있습니까?”라는 식의 반응은, 그들의 시선이 여전히 전통과 관습, 민족적 우월감이라는 담장 너머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음을 드러냅니다. 복음을 담는 그릇이 여전히 좁았던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차분하게, 그러나 확신에 찬 태도로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합니다. 욥바에서 보았던 환상, 하늘에서 내려온 큰 보자기와 그 안에 있던 ‘부정한’ 짐승들, 그리고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 모든 경험은 단지 개인적인 환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었음을 그는 증언합니다.

베드로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 곧 성령을 그들에게도 주셨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행 11:17). 이 고백은 단순한 설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일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신학적 확증이었습니다.

그 고백 앞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잠잠해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행 11:18) 

이 짧은 한 문장은 교회 역사상 가장 중대한 전환점을 담고 있습니다. 복음의 문이 모든 민족에게 열렸고, 교회가 그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이 여정은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는 자신들이 평생 붙들고 살아온 전통과 판단을 힘겹게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스러운 순종을 통해 복음은 마침내 민족의 담장을 넘어 전 인류를 향해, 전 세계를 향해 뻗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합니다. “복음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이 질문은 교회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복음을 자기 민족, 자기 계층, 자기 확신의 울타리 안에 가두려 하였습니다. 복음을 선별적으로 전하고, 때로는 누군가를 배제하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보여 주는 복음은 언제나 보편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출발은 창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으며,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보편적인 사명을 모든 인류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특정 민족이나 문화의 전유물이 아니며, 인간됨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 위에 놓인 존재임을 증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또한 이를 분명히 증언합니다. 사마리아 여인, 수로보니게 여인, 로마의 백부장—모두 당대 사회에서 비주류로 여겨졌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누구보다 따뜻하게 맞이하셨고, 그분의 사랑은 담장을 무너뜨리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성령 역시 복음의 보편성을 증언하십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서 각 나라 말로 복음이 전해졌고, 고넬료의 집에도 동일한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그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머리카락의 색깔, 피부의 빛깔, 언어와 문화의 차이는 성령께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않습니다. 성령은 준비된 마음 위에 차별 없이 임하십니다.

복음은 오늘도 편견의 담장을 넘어 사람의 심령 속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 우리가 함께 설 수 있다면,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일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는 지난 수십 년간 “말씀을 중심한 제자 양성”이라는 분명한 사명을 붙들고 걸어왔습니다. 캠퍼스라는 영적 최전선에서 청년들과 함께 성경을 깊이 연구하며, 일대일 말씀 양육을 통해 삶과 말씀을 연결하는 제자훈련의 길을 성실히 걸어왔습니다.

그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지만, 그 여정 속에서 우리는 분명한 하나님의 열매를 목도해 왔습니다. 수많은 청년들이 복음을 처음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으며, 삶의 방향을 새롭게 설정하였습니다. 저 또한 그 은혜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 중 하나입니다. 모든 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다시금 중요한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가 걸어온 이 신앙의 길이 과연 복음의 넓은 품과 함께 열려 있었는가? 혹시 우리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할 하나님의 은혜의 길을 스스로 좁히고 있지는 않았는가?’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이 귀한 사명을 다시 가슴에 새기며, 복음을 더 넓게 품는 자리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특정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에게 익숙한 구조와 언어, 전통과 방식을 돌아보고, 기꺼이 다시 정돈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도 다시금 제자 양성의 불을 밝혀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캠퍼스 선교에 집중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기 원하는 이가 있다면, 대학생이 아니어도 기꺼이 그들을 환영할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말씀 중심의 사역을 이어갈 것입니다. 동시에 찬양과 상담, 구제 등 다양한 사역이 복음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귀하게 여기며 품을 넓혀갈 것입니다.

제자 양성이라는 핵심 가치는 변하지 않지만,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시점과 방식을 겸손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유연함 또한 함께 품고자 합니다. 우리 안암1부의 문은 우리만의 색으로 채색되어 있지만, 그 문은 언제나 열려 있는 문이 될 것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더, 복음을 듣고 생명 얻는 회개에 이르기를 우리는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복음은 담장이 아닙니다. 복음은 길입니다. 우리는 그 길을 함께 닦고, 함께 걸어가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일하심이 시작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 공동체가 이렇게 응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우리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된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둘째, 복음이 담대하게 선포될 때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셋째, 교회가 복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인정하고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예배자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복음을 가로막는 장벽을 걷어내고, 품을 넓히는 열린 공동체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누군가에게 생명 얻는 회개의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그 은혜의 역사 가운데, 우리 공동체가 기꺼이 쓰임받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바로 그 자리에, 우리가 함께 설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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